정희라
그곳은 사라진 것들의 극장.
잊힌 장소의 불빛 아래,
연기는 여전히 피어오르고,
장면은 끝나지 않은 채 새롭게 재구성된다.
박기일의 회화는 오래된 꿈의 아우성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화면에 펼쳐진 장면들은 익숙하면서도 불분명하고, 실제의 장소 같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환상의 공간, 연기와 불, 이중 프레임, 인물 중심의 장면들은 그의 작업이 <기억>과 <장소>, <정동>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조립하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박기일은 사라진 장소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정체성과 맥락을 상실한 <장소 없는 장소>[1]로 변모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비장소"를 정체성, 관계성, 역사성이 결여된 장소로 정의한다. 그것은 공항, 고속도로, 쇼핑몰처럼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누구에게도 고유하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박기일의 회화에서 비장소는 단지 현대 도시의 무정주 공간이 아니다. 그의 회화 속 비장소는 어떤 사건 이후, 기능을 상실하고, 시간과 장소의 맥락이 지워진 공간—기억과 감정만이 남은 장소이다. 침수된 공간,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하늘, 깊고 은밀한 숲, 극적인 상황이 연상되는 건물, 주목받는 자세를 취한 인물은 특정한 사건을 묘사하기보다는 감각과 정서의 밀도를 환기하는 정동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즉, 서사적 설명이나 논리적 재현보다 감각적 반응과 분위기의 전달에 중점을 두는 장면들이다.
특히 그는 주로 에어브러시 기법으로 화면을 매끄럽고 사진처럼 정밀하게 구축하면서도, 그 안의 이미지들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이처럼 또렷하고 살아있는 듯한 질감과 초현실적인 장면의 병치는 그의 회화가 재현(representation)을 넘어선다는 점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