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기억: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난시 Troubled Sighted 이성경 전시 전경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_2020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1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140cm_ 2019
“이성경이 그릴 법한 풍경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는 작가의 심미적 관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발하는 이성경만의 풍경이 갖는 힘이다. 그 힘은 분명 모두에게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까닭은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라는 말에서 음미해 볼 수 있다. 부푼 선은 작가의 기억과 우리 기억의 파편 조각들의 틈일 것이고, 그 틈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감정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감정적인 간극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발화하는 불꽃)일 것이다. 현장도 아닌, 실제 공간도 아닌 이성경의 풍경화는 타자가 바라보는 자아와도 같다. 갑작스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선에 스며든 풍경은 그의 반복 행위를 통한 작업과정이 더해져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 다른 세계에 묶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세계는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어떤 먹먹함을 담아내어 빛의 이면과 같은 ‘그림자’에 천착하고 파고든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림자 기억’이라는 표현을 해본다. 이성경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기억’은 그의 흐릿해진 기억과 실제 일어났던 일의 틈새, 이쪽과 저쪽의 경계 그리고 작업과정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자에만 중점을 둔다면, 이성경의 작품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기에, 보는 이와 작가의 기억 속을 파고드는 어떤 감정이 완벽하게 함께 해야 한다. 이성경은 자신이 가지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두운’ 혹은 ‘부정적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한 감정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힘을 희미하게 잃어버린다.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3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420cm_ 2019
이성경의 작품은 선과 선에 경계가 없다. 경계 그 사이의 아주 작은 틈에는 이성경의 ‘그림자 기억’이 담겨 있다. 이성경의 풍경화에는 그림자에 대한 해석이 뒤따른다.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는 빛에 반사된 창, 어둠에 의한 주변 일상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어두운 경험과 그것에 기대어 보게 되는 풍경. 그리고 그 기억에 동반되어 따라오는 우리의 시선. 이성경은 이것을 그림자 풍경이라 칭한다. 이성경은 나무로 만들어진 한지에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목탄으로 작업한다. 그는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시간에 의해 날아가 버린 목탄의 흔적들도 남겨둔다. 목탄이 날리면서 그의 한지에 내려앉는다. 이성경은 작업 중간중간 정착 과정을 반복해서 선을 쌓아 올린다. 그리하면 목탄의 선은 한지의 특성에 의해 부풀고, 선의 명확한 경계는 사라진다. 목탁의 촉각적인 느낌을 즐기듯 작업하는 그는 그를 담담히 받아내는 한지와 건식재료인 목탄으로 그의 정서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완전한 한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육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기억된 감정을 반복 경험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풍경을 그린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작업으로 이어진다.
안과 밖. 이성경의 작품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자’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찾아 헤매게 한다. 익숙한 주변 풍경을 낯설게 그리는 그의 그림에서 ‘그림자’는 왜 중요한 ‘화두’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점은 안과 밖의 경계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창 혹은 창문은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의 안이 어둠일까, 창의 바깥이 어둠일까? 이것에 대한 의문은 이성경의 초기 작품을 보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작업 초기에 식물에서 모티브를 딴 목탄 작업을 하였다. 선을 위주로 그리는 행위의 흔적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을 분출하듯이 그려진 비정형화 된 선들은 감정적이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집과 작업실 주변을 주로 산책하다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으로 작업이 나아가면서, 그의 내면에서 그의 주변 바깥으로 작업 내용의 방향이 변하게 된다. 안과 밖은 어둠과 빛이자, 그의 내면이고 그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 그의 그림이 서 있다. 일상에서 멀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작품이 그에게 일정 부분 실제로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닿는 부분이 있어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경, 내려앉은달1-1_ 330x390cm _ 장지에 채색, 목탄_ 2020
이성경은 그림자를 다루기 위해서 빛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 빛은 그의 작업 안에서 제빛을 다 잃지 않고 어디선가 발하고 있다. 완전히 빛나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어떤 공간 속에서 타자가 되어 서 있는 그 순간 정신하고 몸이 분리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성경은 그런 순간을 그림자로 표현하며 세상의 경계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순간은 빛을 등지고 있거나 어둠이 내려앉아 모든 색이 한 톤 낮아질 때의 그 순간으로 그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경계로 표현된다. 어떤 한 사람의 삶을 빛과 어둠으로 이분법적인 잣대를 대어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까. 이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극과 극을 나누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모호하듯 삐져나온 틈을 그는 그림자로 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 틈 사이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통해 그는 실체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토해낸다. 이성경의 작업에는 유리막과 방충망의 틈새를 뚫어야만 볼 수 있는 세상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어디와 어디의 경계. 그리고 그사이의 틈이 그의 주 시선이며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그렇기에 구상적으로 보이는 최근의 그의 작업은 추상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드로잉에서 점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선들의 구성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성경의 그림 특히 <그림자가 되었을 때>(2018) 연작들은 구체적인 풍경으로 보이지만,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그 변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성경의 <또 다른 그림자>(2019)와 <맺혀진 풍경>(2020)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성경의 작품을 논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그림의 규모이다. 목탄과 같이 작은 재료로 가로세로 3미터가 넘는 그림들, 예를 들어 2020년 비교적 최근에 그려진 그림인 <내려앉은 달1-1>과 같은 작품을 본다면, 이성경에게 그려내는 것은 전에 언급한 어떤 한계를 넘고자 하는 그의 에너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한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을 시간 동안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풍경 앞에 오롯이 홀로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작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어느 순간의 풍경을 한없이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하는 행위와도 같이. 보고 그 자리에서 그린 풍경이 아니라 본 이후의 흔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수행하듯이 목탄으로 기억 속의 감정과 마주하며 분투했을 것이다. 조용히 가라앉은 듯한 그림을 그리지만, 그 과정은 감히 말하지만, 자칫 작가 자신에게 폭력적이었을 수 있다. 반복적 행위를 하며 보냈을 작업과정들은 그 시간의 흐름만큼 지독히도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풍경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을 것이며 그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그 풍경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계획된 우연이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계획된’ ‘우연’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우연이 계획될 수도 있다는 그의 생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연이 계획되려면 우연을 의도적으로 만들면 된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작업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2020년 작품 <내려앉은 달>은 작가가 자주 가는 산책로에서 우연히 발견한 가로등 갓이 있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6-7개월간 방치되어 있어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에 그가 위치를 바꾸어 작업실로 가져 관찰하며 그린 것이다. 이성경은 그 갓을 깨끗이 씻어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화단에 가져다 놓고, 원래의 기능을 갖게끔 새로운 등을 넣어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달처럼 보여 작품 제목으로 정하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계획된 우연이라는 그의 개념이 나타나는 부분으로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성경이 그릴법한 풍경이라고 느끼는 어떤 순간에 왜 이성경이 생각나는지 그 이유를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저 그가 그릴 법한 풍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모호함을 ‘그림자 기억’에 빗대어 다시 한번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어떤 면이 이성경만의 ‘그림자’를 기억하게 하는지 생각해 볼 만 하다.
(2020-2021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작가 결과보고에 실린 글입니다.)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그림자 기억: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난시 Troubled Sighted 이성경 전시 전경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_2020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1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140cm_ 2019
“이성경이 그릴 법한 풍경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는 작가의 심미적 관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발하는 이성경만의 풍경이 갖는 힘이다. 그 힘은 분명 모두에게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까닭은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라는 말에서 음미해 볼 수 있다. 부푼 선은 작가의 기억과 우리 기억의 파편 조각들의 틈일 것이고, 그 틈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감정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감정적인 간극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발화하는 불꽃)일 것이다. 현장도 아닌, 실제 공간도 아닌 이성경의 풍경화는 타자가 바라보는 자아와도 같다. 갑작스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선에 스며든 풍경은 그의 반복 행위를 통한 작업과정이 더해져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 다른 세계에 묶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세계는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어떤 먹먹함을 담아내어 빛의 이면과 같은 ‘그림자’에 천착하고 파고든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림자 기억’이라는 표현을 해본다. 이성경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기억’은 그의 흐릿해진 기억과 실제 일어났던 일의 틈새, 이쪽과 저쪽의 경계 그리고 작업과정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자에만 중점을 둔다면, 이성경의 작품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기에, 보는 이와 작가의 기억 속을 파고드는 어떤 감정이 완벽하게 함께 해야 한다. 이성경은 자신이 가지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두운’ 혹은 ‘부정적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한 감정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힘을 희미하게 잃어버린다.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3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420cm_ 2019
이성경의 작품은 선과 선에 경계가 없다. 경계 그 사이의 아주 작은 틈에는 이성경의 ‘그림자 기억’이 담겨 있다. 이성경의 풍경화에는 그림자에 대한 해석이 뒤따른다.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는 빛에 반사된 창, 어둠에 의한 주변 일상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어두운 경험과 그것에 기대어 보게 되는 풍경. 그리고 그 기억에 동반되어 따라오는 우리의 시선. 이성경은 이것을 그림자 풍경이라 칭한다. 이성경은 나무로 만들어진 한지에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목탄으로 작업한다. 그는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시간에 의해 날아가 버린 목탄의 흔적들도 남겨둔다. 목탄이 날리면서 그의 한지에 내려앉는다. 이성경은 작업 중간중간 정착 과정을 반복해서 선을 쌓아 올린다. 그리하면 목탄의 선은 한지의 특성에 의해 부풀고, 선의 명확한 경계는 사라진다. 목탁의 촉각적인 느낌을 즐기듯 작업하는 그는 그를 담담히 받아내는 한지와 건식재료인 목탄으로 그의 정서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완전한 한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육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기억된 감정을 반복 경험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풍경을 그린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작업으로 이어진다.
안과 밖. 이성경의 작품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자’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찾아 헤매게 한다. 익숙한 주변 풍경을 낯설게 그리는 그의 그림에서 ‘그림자’는 왜 중요한 ‘화두’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점은 안과 밖의 경계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창 혹은 창문은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의 안이 어둠일까, 창의 바깥이 어둠일까? 이것에 대한 의문은 이성경의 초기 작품을 보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작업 초기에 식물에서 모티브를 딴 목탄 작업을 하였다. 선을 위주로 그리는 행위의 흔적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을 분출하듯이 그려진 비정형화 된 선들은 감정적이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집과 작업실 주변을 주로 산책하다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으로 작업이 나아가면서, 그의 내면에서 그의 주변 바깥으로 작업 내용의 방향이 변하게 된다. 안과 밖은 어둠과 빛이자, 그의 내면이고 그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 그의 그림이 서 있다. 일상에서 멀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작품이 그에게 일정 부분 실제로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닿는 부분이 있어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경, 내려앉은달1-1_ 330x390cm _ 장지에 채색, 목탄_ 2020
이성경은 그림자를 다루기 위해서 빛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 빛은 그의 작업 안에서 제빛을 다 잃지 않고 어디선가 발하고 있다. 완전히 빛나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어떤 공간 속에서 타자가 되어 서 있는 그 순간 정신하고 몸이 분리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성경은 그런 순간을 그림자로 표현하며 세상의 경계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순간은 빛을 등지고 있거나 어둠이 내려앉아 모든 색이 한 톤 낮아질 때의 그 순간으로 그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경계로 표현된다. 어떤 한 사람의 삶을 빛과 어둠으로 이분법적인 잣대를 대어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까. 이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극과 극을 나누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모호하듯 삐져나온 틈을 그는 그림자로 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 틈 사이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통해 그는 실체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토해낸다. 이성경의 작업에는 유리막과 방충망의 틈새를 뚫어야만 볼 수 있는 세상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어디와 어디의 경계. 그리고 그사이의 틈이 그의 주 시선이며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그렇기에 구상적으로 보이는 최근의 그의 작업은 추상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드로잉에서 점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선들의 구성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성경의 그림 특히 <그림자가 되었을 때>(2018) 연작들은 구체적인 풍경으로 보이지만,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그 변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성경의 <또 다른 그림자>(2019)와 <맺혀진 풍경>(2020)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성경의 작품을 논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그림의 규모이다. 목탄과 같이 작은 재료로 가로세로 3미터가 넘는 그림들, 예를 들어 2020년 비교적 최근에 그려진 그림인 <내려앉은 달1-1>과 같은 작품을 본다면, 이성경에게 그려내는 것은 전에 언급한 어떤 한계를 넘고자 하는 그의 에너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한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을 시간 동안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풍경 앞에 오롯이 홀로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작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어느 순간의 풍경을 한없이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하는 행위와도 같이. 보고 그 자리에서 그린 풍경이 아니라 본 이후의 흔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수행하듯이 목탄으로 기억 속의 감정과 마주하며 분투했을 것이다. 조용히 가라앉은 듯한 그림을 그리지만, 그 과정은 감히 말하지만, 자칫 작가 자신에게 폭력적이었을 수 있다. 반복적 행위를 하며 보냈을 작업과정들은 그 시간의 흐름만큼 지독히도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풍경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을 것이며 그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그 풍경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계획된 우연이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계획된’ ‘우연’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우연이 계획될 수도 있다는 그의 생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연이 계획되려면 우연을 의도적으로 만들면 된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작업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2020년 작품 <내려앉은 달>은 작가가 자주 가는 산책로에서 우연히 발견한 가로등 갓이 있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6-7개월간 방치되어 있어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에 그가 위치를 바꾸어 작업실로 가져 관찰하며 그린 것이다. 이성경은 그 갓을 깨끗이 씻어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화단에 가져다 놓고, 원래의 기능을 갖게끔 새로운 등을 넣어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달처럼 보여 작품 제목으로 정하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계획된 우연이라는 그의 개념이 나타나는 부분으로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성경이 그릴법한 풍경이라고 느끼는 어떤 순간에 왜 이성경이 생각나는지 그 이유를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저 그가 그릴 법한 풍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모호함을 ‘그림자 기억’에 빗대어 다시 한번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어떤 면이 이성경만의 ‘그림자’를 기억하게 하는지 생각해 볼 만 하다.
(2020-2021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작가 결과보고에 실린 글입니다.)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