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기한 예삿일
김영기
지희킴의 작업을 마주하면 대개 ‘핫’하고 ‘힙’한데다 ‘팝’스럽다며 들뜨지만, 막상 표정 너머엔 적잖은 위축이 뒤섞여 엿보인다. 드로잉인지 페인팅인지 아리송한 가운데, 조류? 곤충? 포유류? 출연진은 또 왜 이리 다양한지. 서사인 듯 아닌 듯 그럭저럭 얽히고 대강 스치고 적당히 외면하는 이미지의 행렬과 태연자약 예쁘게 범람하는 색상은, 동서남북을 잃고 우왕좌왕, 눈길을 자신 없게 한다. 그럴 땐, 비교적 이전부터 이어온 〈북 드로잉〉 시리즈를 먼저 보라.

영문이 빼곡한 어느 페이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니, 기대는 온데간데없고 벌써 또 당황스럽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내려 애를 쓴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따라 읽어도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아마도 뭐 유명한 작가의 희곡이나 서사시 같은 게 아닐까? 정답이다. 원전은 일기장이었을지라도, 의학 서적이나 점성술 책이었어도, 이번 감상에선 희곡이나 서사시 ‘배역’이다. 책의 두께와 모양새, 거칠게 일어난 종이의 질감과 볼록하게 휜 표면, 여기저기 누르고 푸르게 바랜 자국들, 텍스트의 배열이 주는 리듬,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 전반적인 레이아웃… 내용만 내용이 아니라, 모양새가 곧 또 하나의 내용이다. 형식과 내용은 유리되지 않는다. 내용은 적합한 형식을 이끌며, 형식은 곧 내용 그 자체이다.
이름 모를 이들 책 속 곳곳은 어떤 면에선 이미지를 압도한다. 이를테면 신체 명칭 따위의 알만한-몇 안 되는 반가운- 단어가 드문드문 섞인 레이아웃은 오히려 그림보다 더 강하게 생각을 붙든다. 어느 페이지 중턱에 문득 불거진 “허벅지”라는 문구는 허벅지 그림보다 더 선명할 때가 있다. 작가가 붓으로 휘갈긴 글귀와 견주어, 빛바랜 인쇄체의 활자 “허벅지”는 더 멀고 더 뻣뻣하며 더 아련하다. 오직 지시의 역할뿐인 본문의 ‘허벅지’와 달리, 이들 책 속에선 글도 그림도 죄다 일종의 그림인 셈이다. 표현의 속도가 서로 다른. 텍스트 덩이도 삽화도, 덧그린 그림도 모두 형상이니, 제법 꽉 찬 그림이다.


지희킴_입속의 그림자 5_아르쉬지에 과슈_131x232cm_2021_작가제공
다시 이미지 수해 현장 〈입속의 그림자〉. 또렷한 신체의 이미지, (가끔 손에 쥐는 걸로 보아)만질 수 있는 동그란 색덩이, 동식물과 빛줄기, 휘감고 펄럭이고 흘러내리는 현란한 ‘궤적’이 보인다. 〈북 드로잉〉 곳곳에서 무게 잡던 삽화, 알 수 없는 텍스트, 그 위에 덧그린 그림이 서로 어떤 사이였던가? 이들 요소는 그렇게 시리즈 양자를 평행이동한다. 서로 다른 채널과 속도의 이미지가 마주쳤을 뿐이다. 책의 낱장 대신 흰 도화지에서. 어디서부터 정리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작업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건, 비단 강렬한 색상이나 또렷한 형태, 그럼에도 단박에 모두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다층적이고 현란한 구성 때문만은 아니다. 화면 전반에 솟는 ‘영상성’에 주목하자. 손동작 하나마저 역동적인 형상들,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팔다리, 섬뜩한 금붕어와 그윽한 눈매의 생선 대가리, 대각으로 뻗으며 이들을 한데 꿰는 색색의 광선, 그러든 말든, 다짜고짜 그 위로 흘러내리는 ‘색’들… 모르쇠 얽히고 반갑게 외면하며 엇갈리는 각자의 ‘축’이 그려진다. 개별적인 모양새 이전에, 이 ‘축’이야말로 끝없이 샘솟는 영상성의 최상류 발원지이다. 말하자면, 빈 부분으로 착각하기 쉬운 하얀 ‘색면’은, 수많은 투명한 화살표가 x, y, z 혹은 그 이상의 수십 개의 축으로 어긋나고 마주치느라 왁실덕실한다. 채색한 부분보다 오히려 밀도가 높은 셈이다. 평면에 적을 두면서도 탈 회화적인 이유가 있다.

지희킴, 그 소녀_아르쉬지에 과슈, 스프레이_76x57.4cm_2021_작가제공
하이젠베르크(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확정한 건, ‘정보를 온전히 공유할 방법이 없다’는 아쉬운 사실이다. 적어도 ‘대상을 관찰(혹은 측정)했다’는 정보가 묻는 건 도리가 없으니.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는 관측해야 알 수 있다. 작업이 모양새를 확정하는 건, 붓 놓을 때가 아니라 ‘관람’의 순간이다. ‘의도한 원자 배열’이 아니라 ‘개별적인 관람 경험의 중첩’이 곧 작업의 ‘민낯’인 것. 마찬가지로 기억은 저장-그마저 온전치 않은-이 아니라, ‘인출’의 순간에야 그 외모를 확인한다. ‘온전한 정보’가 아니라 ‘(매 회 변질하는)각각의 인출 사례’가 결국 기억의 전부이다.
뾰족하다-가시-장미-빨간 립스틱-붉다-뜨겁다-화르륵-녹아 내린다-흐르는 눈물...
그럼 지희킴의 이미지들은 ‘기억 더미’에서 캐낸 무언가일까? 혹은 일종의 연상은 아닐까? 기본적으로 저장하지 않은 기억을 인출할 순 없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인출할는지’엔 앞서 인출한 기억이 지분을 행사한다.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부르는 것이다. 다만 식약처 HACCP 인증과 달리 기억의 신선도는 당사자조차 보증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그 형색이 부풀고 틀어진다. 접점이 있는 새 이미지로 능청스레 전이하기도 한다. 그 덕에 외려 맘 놓고 눈앞의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다. 의미에 연연하고 맥락을 꼬집으려 목매지 않아도 된다. 보이는 대로 즐기면 족하다. 기억의 내용은 동기일 뿐, 목적이 아니다. 텍스트의 분위기와 리듬을 끌어온 것이지, 지시하는 바가 목적이 아니었듯.
결국 지희킴의 파노라마는, ‘기억의 인출에 기억이 관여하는 광경’이다. 구체적 사물, 몸동작으로 되짚는 각인, 색 덩어리의 범람 그 어느 형태의 인출이든 말이다. 매우 흔한, 아니 모두가 매일 겪는 사건임에도, 파노라마에 담을 장면으로는 꽤나 진기(珍奇, 드문 데다 예사롭지 않음)하다.
2022.06 artcr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진기한 예삿일
김영기
지희킴의 작업을 마주하면 대개 ‘핫’하고 ‘힙’한데다 ‘팝’스럽다며 들뜨지만, 막상 표정 너머엔 적잖은 위축이 뒤섞여 엿보인다. 드로잉인지 페인팅인지 아리송한 가운데, 조류? 곤충? 포유류? 출연진은 또 왜 이리 다양한지. 서사인 듯 아닌 듯 그럭저럭 얽히고 대강 스치고 적당히 외면하는 이미지의 행렬과 태연자약 예쁘게 범람하는 색상은, 동서남북을 잃고 우왕좌왕, 눈길을 자신 없게 한다. 그럴 땐, 비교적 이전부터 이어온 〈북 드로잉〉 시리즈를 먼저 보라.

영문이 빼곡한 어느 페이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니, 기대는 온데간데없고 벌써 또 당황스럽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내려 애를 쓴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따라 읽어도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아마도 뭐 유명한 작가의 희곡이나 서사시 같은 게 아닐까? 정답이다. 원전은 일기장이었을지라도, 의학 서적이나 점성술 책이었어도, 이번 감상에선 희곡이나 서사시 ‘배역’이다. 책의 두께와 모양새, 거칠게 일어난 종이의 질감과 볼록하게 휜 표면, 여기저기 누르고 푸르게 바랜 자국들, 텍스트의 배열이 주는 리듬,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 전반적인 레이아웃… 내용만 내용이 아니라, 모양새가 곧 또 하나의 내용이다. 형식과 내용은 유리되지 않는다. 내용은 적합한 형식을 이끌며, 형식은 곧 내용 그 자체이다.
이름 모를 이들 책 속 곳곳은 어떤 면에선 이미지를 압도한다. 이를테면 신체 명칭 따위의 알만한-몇 안 되는 반가운- 단어가 드문드문 섞인 레이아웃은 오히려 그림보다 더 강하게 생각을 붙든다. 어느 페이지 중턱에 문득 불거진 “허벅지”라는 문구는 허벅지 그림보다 더 선명할 때가 있다. 작가가 붓으로 휘갈긴 글귀와 견주어, 빛바랜 인쇄체의 활자 “허벅지”는 더 멀고 더 뻣뻣하며 더 아련하다. 오직 지시의 역할뿐인 본문의 ‘허벅지’와 달리, 이들 책 속에선 글도 그림도 죄다 일종의 그림인 셈이다. 표현의 속도가 서로 다른. 텍스트 덩이도 삽화도, 덧그린 그림도 모두 형상이니, 제법 꽉 찬 그림이다.


지희킴_입속의 그림자 5_아르쉬지에 과슈_131x232cm_2021_작가제공
다시 이미지 수해 현장 〈입속의 그림자〉. 또렷한 신체의 이미지, (가끔 손에 쥐는 걸로 보아)만질 수 있는 동그란 색덩이, 동식물과 빛줄기, 휘감고 펄럭이고 흘러내리는 현란한 ‘궤적’이 보인다. 〈북 드로잉〉 곳곳에서 무게 잡던 삽화, 알 수 없는 텍스트, 그 위에 덧그린 그림이 서로 어떤 사이였던가? 이들 요소는 그렇게 시리즈 양자를 평행이동한다. 서로 다른 채널과 속도의 이미지가 마주쳤을 뿐이다. 책의 낱장 대신 흰 도화지에서. 어디서부터 정리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작업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건, 비단 강렬한 색상이나 또렷한 형태, 그럼에도 단박에 모두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다층적이고 현란한 구성 때문만은 아니다. 화면 전반에 솟는 ‘영상성’에 주목하자. 손동작 하나마저 역동적인 형상들,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팔다리, 섬뜩한 금붕어와 그윽한 눈매의 생선 대가리, 대각으로 뻗으며 이들을 한데 꿰는 색색의 광선, 그러든 말든, 다짜고짜 그 위로 흘러내리는 ‘색’들… 모르쇠 얽히고 반갑게 외면하며 엇갈리는 각자의 ‘축’이 그려진다. 개별적인 모양새 이전에, 이 ‘축’이야말로 끝없이 샘솟는 영상성의 최상류 발원지이다. 말하자면, 빈 부분으로 착각하기 쉬운 하얀 ‘색면’은, 수많은 투명한 화살표가 x, y, z 혹은 그 이상의 수십 개의 축으로 어긋나고 마주치느라 왁실덕실한다. 채색한 부분보다 오히려 밀도가 높은 셈이다. 평면에 적을 두면서도 탈 회화적인 이유가 있다.

지희킴, 그 소녀_아르쉬지에 과슈, 스프레이_76x57.4cm_2021_작가제공
하이젠베르크(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확정한 건, ‘정보를 온전히 공유할 방법이 없다’는 아쉬운 사실이다. 적어도 ‘대상을 관찰(혹은 측정)했다’는 정보가 묻는 건 도리가 없으니.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는 관측해야 알 수 있다. 작업이 모양새를 확정하는 건, 붓 놓을 때가 아니라 ‘관람’의 순간이다. ‘의도한 원자 배열’이 아니라 ‘개별적인 관람 경험의 중첩’이 곧 작업의 ‘민낯’인 것. 마찬가지로 기억은 저장-그마저 온전치 않은-이 아니라, ‘인출’의 순간에야 그 외모를 확인한다. ‘온전한 정보’가 아니라 ‘(매 회 변질하는)각각의 인출 사례’가 결국 기억의 전부이다.
뾰족하다-가시-장미-빨간 립스틱-붉다-뜨겁다-화르륵-녹아 내린다-흐르는 눈물...
그럼 지희킴의 이미지들은 ‘기억 더미’에서 캐낸 무언가일까? 혹은 일종의 연상은 아닐까? 기본적으로 저장하지 않은 기억을 인출할 순 없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인출할는지’엔 앞서 인출한 기억이 지분을 행사한다.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부르는 것이다. 다만 식약처 HACCP 인증과 달리 기억의 신선도는 당사자조차 보증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그 형색이 부풀고 틀어진다. 접점이 있는 새 이미지로 능청스레 전이하기도 한다. 그 덕에 외려 맘 놓고 눈앞의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다. 의미에 연연하고 맥락을 꼬집으려 목매지 않아도 된다. 보이는 대로 즐기면 족하다. 기억의 내용은 동기일 뿐, 목적이 아니다. 텍스트의 분위기와 리듬을 끌어온 것이지, 지시하는 바가 목적이 아니었듯.
결국 지희킴의 파노라마는, ‘기억의 인출에 기억이 관여하는 광경’이다. 구체적 사물, 몸동작으로 되짚는 각인, 색 덩어리의 범람 그 어느 형태의 인출이든 말이다. 매우 흔한, 아니 모두가 매일 겪는 사건임에도, 파노라마에 담을 장면으로는 꽤나 진기(珍奇, 드문 데다 예사롭지 않음)하다.
2022.06 artcr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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