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구의 사심과 붓놀림의 뉘앙스
정희라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The Painters En Plein Air 전시 Images ⓒThe artists, Courtesy of A-Lounge, Seoul
사심이 뭐길래
지난 달에 사생寫生을 주제로 한 전시가 있었다. 기나긴 사생의 역사를, 회화의 당연한 영역을 기획전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생은 사물의 상태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뜻과 함께 그리는 이의 감각에 필터링된 풍경을 그린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사생이라기보다 사심寫心에 가깝다는 표현이 맞다. A-Lounge의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 전시[1]에서 가장 사심寫心의 개념에 가까워 보이는 작가는 전병구였다. 전병구 작가는 풍경 앞에서 느낀 감정과 분위기의 표현에 초점을 두어 다른 참여 작가들과는 사뭇 결이 달라 보였다. 그것은 세밀한 붓 자국들이 뭉쳐 덩어리로 보이고 그 덩어리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당시의 공기 질을 나타내는 듯하여 도통 카메라로는 표현의 섬세함이 담기지 않았다.[2]
자연과 풍경화
자연을 가두고 감상하려는 원초적 시도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미적 순간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성질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연을 그려낸 풍경화는 그 성질이 자연과 달라진다. 이 경우, 예술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으며, 때로는 다른 세계를 제시하기 위해, 때로는 그저 자연이 제공하는 단순한 희망을 확대하고,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은 창조를 모방한다고도 해석한다.[3] 우리 앞에 제시된 풍경화가 자연의 모습인지 문화의 모습인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감추어져 있는 것에 몰두하게 되는데, 피상적인 외양보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눈앞에 놓인 그림을 보고도 뭘 그린 건지 어떻게 그린 건지 듣고 싶어 한다. 자연을 보고는 자연스레 감탄하다가도 그림을 보고는 감탄만으로 끝내기엔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다. 작가가 그려낸 풍경은 우리가 본 풍경과는 다른 세계임을 인지하고 있다.

전병구 Images ⓒThe artists, Courtesy of A-Lounge, Seoul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_작가제공
동시대 감성
분명 다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풍경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그 광경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전병구의 풍경화는 우리가 본 듯한 익숙한 광경에서 따라오는 감정이 몰입의 이유가 된다. 보는 이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긴 그의 풍경화는 강한 몰입을 일으킨다. 그림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우리가 이미 체험한 삶이 전제조건이 된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경험은 풍경의 정서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하지만 공통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느끼게 하는 이 그림들은 무엇이 특별한 걸까. 전병구의 그림을 보고 우리가 쓸쓸함을 느꼈다면 그건 우리의 감정이고 감흥이다. 작가가 풍경을 보고 당시에 쓸쓸함을 느끼고 그렸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고작 작가에게 이 그림[4]을 그릴 때 쓸쓸한 감정을 느꼈는지 물어볼 뿐인데, 이런 질문이 무의미한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증거를 찾기 위해 전병구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격인 소재의 개수가 하나인 것에 외로움이라는 의미를 두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보는 풍경이 갖는 정서의 동시대성이다. 작가는 풍경을 ‘보고’ 그리고, 우리는 그려진 풍경을 ‘본’다. 우리가 그려진 풍경을 보는 방식과 전병구 작가가 풍경을 보는 방식이 일치할 때, 우리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전병구, <진눈깨비Sleeting>, 53 x 40.9cm,oil on canvas, 2020_작가제공
붓놀림의 스타일,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전병구의 뉘앙스
전병구가 풍경화를 그리는 방식을 살펴보자니, 분위기의 돛 역할을 하는 공기(대기)의 표현방식이 눈에 띈다. 풍경화에서 공기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풍경을 대하며 경험한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을 화면 안에서 재체험하며 몰입감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전병구는 이런 공기의 표현에 있어서 확실한 스타일을 구축해 왔는데, 그 스타일은 그림 속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채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 시도는 지나간 붓자국을 고스란히 남게 했다.[5] 붓자국이 비교적 뚜렷하고 명확하게 보여서 거기서 불러일으키는 감흥이 전병구의 그림에서 중요해져 갔다.[6] 2021년 즈음을 기점으로 붓놀림이 보이던 면면이 작품에 따라 사라지게 되는데, 그 스타일이 변화한다.[7] 대학원 시절의 무의식적으로 그려졌던 스타일리쉬한 붓자국은 작품활동이 이어지며 의식적으로 신경이 쓰이게 되고 자연스럽지 않은(그러나 여전히 감각적으로 보이는) 붓자국에서 벗어나고자 기법의 방향을 틀었다. 변화하는 과정 속 뚜렷한 붓자국이든 드러나지 않는 붓자국이든 전병구의 그림의 분위기에는 그다지 큰 영향은 없어 보인다.

전병구, <남과 여1>, 27.3 x 40.9cm, oil on canvas, 2016._작가제공
전병구, <소금창고>, 45.5x45.5cm, Oil on Canvas, 2019_작가제공
전병구, <회상>, 40.9 x 31.8cm, Oil on Canvas, 2020_작가제공
공기의 흐름에서 공기의 밀도로
공기의 질감은 달라졌을지언정 그가 보았던 풍경의 분위기와 우리 앞에 제시된 풍경의 느낌은 여전하다. 전병구의 그림에서 공기가 어떻게 흘렀는지 상상하게 했던 붓자국은 크기가 미세해져서 더 이상 흐름으로 보이지 않고 겹겹이 쌓인 덩어리가 되어 공기의 밀도처럼 느끼게 한다.[8] 굳이 그의 작업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10호 상당의 작품을 그리는 데에 약 한 달간 걸린다. 면 표현에 있어 가벼운 세필로 레이어처럼 쌓아 올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명도, 채도, 그리고 색의 온도를 조절하고 실험하듯이 그리는 과정이 전병구에게는 매우 중요해 보이는데, 동일한 시간 안에 그려내는 작품의 수를 늘리고 싶어도 그 과정이 그에게 필수적인 작업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조형 감각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식적인 조형 실험을 하게 되었다. 삼원색에 비하는 색들을 정해놓고 색들의 비율을 변화시키며 시리즈로 작품들을 그리기도 하고, 작업 중간중간 흑백사진으로 찍어 그린 부분의 명도를 비교해 맞추어 나간다. 그렇게 세심하고 치밀하게 그려진 물감의 농도는 차곡차곡 쌓인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듯 짙어져 간다. 이렇게 표현된 공기는 전병구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핵심요소가 된다.
변화하는 감각
이번 전시에 출품된 전병구의 작품들이 2021년 개인전에서 보았던 그림에서 변화하였다는 점이 어쩌면 더 눈길을 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작품들은 그의 풍경화가 동시대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이유와 그 이유가 되는 표현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생과 풍경화의 조건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흔한 사생대회를 떠올려보아도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을 사생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가 보았고, 본 것을 그리는 단계를 거치는 사이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다. 전병구의 풍경화가 사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사심이래도 상관이 없다. 전병구는 그림을 보는 이가 얼마나 감흥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풍경화와의 싸움에서 그만의 기법으로 효과적으로 승리하고 있고,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작품으로 승부를 보는 듯하다. 만약 그에게 색다른 변화가 생긴다면 작품의 크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법도 작품의 크기에 맞게 계속해서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기법상으로 변화가 지속된다면 그 풍경의 분위기는 또 어떻게 만들어질지 그리고 그 풍경들은 또 어떻게 해석될지 기대해 보자.
[1]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The Painters En Plein Air 전시는 에이라운지(A-Lounge) 기획으로 안경수·유근택·이우성·전병구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 전시이며, 2022년 4월 15일부터 2022년 5월 13일까지 개최되었다.
[2]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
[3] 존 버거의 예술론 <풍경들> 참조.
[4] 예를 들어, 전병구, <진눈깨비Sleeting>, 53 x 40.9cm,oil on canvas, 2020.
[5]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병구, <남과 여1A Man and A Women 1>, 27.3 x 40.9cm, oil on canvas, 2016.
[6] 전병구, <소금창고Salt Warehouse>, 45.5x45.5cm, Oil on Canvas, 2019,
전병구, <회상Reminise>, 40.9 x 31.8cm, Oil on Canvas, 2020.
[7] 전병구, <미술관The Art Museum>, 24.2X33.3cm, oil on canvas, 2021.
[8]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
2022.06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전병구의 사심과 붓놀림의 뉘앙스
정희라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The Painters En Plein Air 전시 Images ⓒThe artists, Courtesy of A-Lounge, Seoul
사심이 뭐길래
지난 달에 사생寫生을 주제로 한 전시가 있었다. 기나긴 사생의 역사를, 회화의 당연한 영역을 기획전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생은 사물의 상태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뜻과 함께 그리는 이의 감각에 필터링된 풍경을 그린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사생이라기보다 사심寫心에 가깝다는 표현이 맞다. A-Lounge의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 전시[1]에서 가장 사심寫心의 개념에 가까워 보이는 작가는 전병구였다. 전병구 작가는 풍경 앞에서 느낀 감정과 분위기의 표현에 초점을 두어 다른 참여 작가들과는 사뭇 결이 달라 보였다. 그것은 세밀한 붓 자국들이 뭉쳐 덩어리로 보이고 그 덩어리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당시의 공기 질을 나타내는 듯하여 도통 카메라로는 표현의 섬세함이 담기지 않았다.[2]
자연과 풍경화
자연을 가두고 감상하려는 원초적 시도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미적 순간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성질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연을 그려낸 풍경화는 그 성질이 자연과 달라진다. 이 경우, 예술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으며, 때로는 다른 세계를 제시하기 위해, 때로는 그저 자연이 제공하는 단순한 희망을 확대하고,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은 창조를 모방한다고도 해석한다.[3] 우리 앞에 제시된 풍경화가 자연의 모습인지 문화의 모습인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감추어져 있는 것에 몰두하게 되는데, 피상적인 외양보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눈앞에 놓인 그림을 보고도 뭘 그린 건지 어떻게 그린 건지 듣고 싶어 한다. 자연을 보고는 자연스레 감탄하다가도 그림을 보고는 감탄만으로 끝내기엔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다. 작가가 그려낸 풍경은 우리가 본 풍경과는 다른 세계임을 인지하고 있다.

전병구 Images ⓒThe artists, Courtesy of A-Lounge, Seoul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_작가제공
동시대 감성
분명 다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풍경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그 광경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전병구의 풍경화는 우리가 본 듯한 익숙한 광경에서 따라오는 감정이 몰입의 이유가 된다. 보는 이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긴 그의 풍경화는 강한 몰입을 일으킨다. 그림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우리가 이미 체험한 삶이 전제조건이 된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경험은 풍경의 정서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하지만 공통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느끼게 하는 이 그림들은 무엇이 특별한 걸까. 전병구의 그림을 보고 우리가 쓸쓸함을 느꼈다면 그건 우리의 감정이고 감흥이다. 작가가 풍경을 보고 당시에 쓸쓸함을 느끼고 그렸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고작 작가에게 이 그림[4]을 그릴 때 쓸쓸한 감정을 느꼈는지 물어볼 뿐인데, 이런 질문이 무의미한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증거를 찾기 위해 전병구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격인 소재의 개수가 하나인 것에 외로움이라는 의미를 두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보는 풍경이 갖는 정서의 동시대성이다. 작가는 풍경을 ‘보고’ 그리고, 우리는 그려진 풍경을 ‘본’다. 우리가 그려진 풍경을 보는 방식과 전병구 작가가 풍경을 보는 방식이 일치할 때, 우리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전병구, <진눈깨비Sleeting>, 53 x 40.9cm,oil on canvas, 2020_작가제공
붓놀림의 스타일,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전병구의 뉘앙스
전병구가 풍경화를 그리는 방식을 살펴보자니, 분위기의 돛 역할을 하는 공기(대기)의 표현방식이 눈에 띈다. 풍경화에서 공기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풍경을 대하며 경험한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을 화면 안에서 재체험하며 몰입감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전병구는 이런 공기의 표현에 있어서 확실한 스타일을 구축해 왔는데, 그 스타일은 그림 속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채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 시도는 지나간 붓자국을 고스란히 남게 했다.[5] 붓자국이 비교적 뚜렷하고 명확하게 보여서 거기서 불러일으키는 감흥이 전병구의 그림에서 중요해져 갔다.[6] 2021년 즈음을 기점으로 붓놀림이 보이던 면면이 작품에 따라 사라지게 되는데, 그 스타일이 변화한다.[7] 대학원 시절의 무의식적으로 그려졌던 스타일리쉬한 붓자국은 작품활동이 이어지며 의식적으로 신경이 쓰이게 되고 자연스럽지 않은(그러나 여전히 감각적으로 보이는) 붓자국에서 벗어나고자 기법의 방향을 틀었다. 변화하는 과정 속 뚜렷한 붓자국이든 드러나지 않는 붓자국이든 전병구의 그림의 분위기에는 그다지 큰 영향은 없어 보인다.

전병구, <남과 여1>, 27.3 x 40.9cm, oil on canvas, 2016._작가제공
전병구, <소금창고>, 45.5x45.5cm, Oil on Canvas, 2019_작가제공
전병구, <회상>, 40.9 x 31.8cm, Oil on Canvas, 2020_작가제공
공기의 흐름에서 공기의 밀도로
공기의 질감은 달라졌을지언정 그가 보았던 풍경의 분위기와 우리 앞에 제시된 풍경의 느낌은 여전하다. 전병구의 그림에서 공기가 어떻게 흘렀는지 상상하게 했던 붓자국은 크기가 미세해져서 더 이상 흐름으로 보이지 않고 겹겹이 쌓인 덩어리가 되어 공기의 밀도처럼 느끼게 한다.[8] 굳이 그의 작업 시간을 계산해보자면, 10호 상당의 작품을 그리는 데에 약 한 달간 걸린다. 면 표현에 있어 가벼운 세필로 레이어처럼 쌓아 올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명도, 채도, 그리고 색의 온도를 조절하고 실험하듯이 그리는 과정이 전병구에게는 매우 중요해 보이는데, 동일한 시간 안에 그려내는 작품의 수를 늘리고 싶어도 그 과정이 그에게 필수적인 작업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조형 감각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식적인 조형 실험을 하게 되었다. 삼원색에 비하는 색들을 정해놓고 색들의 비율을 변화시키며 시리즈로 작품들을 그리기도 하고, 작업 중간중간 흑백사진으로 찍어 그린 부분의 명도를 비교해 맞추어 나간다. 그렇게 세심하고 치밀하게 그려진 물감의 농도는 차곡차곡 쌓인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듯 짙어져 간다. 이렇게 표현된 공기는 전병구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핵심요소가 된다.
변화하는 감각
이번 전시에 출품된 전병구의 작품들이 2021년 개인전에서 보았던 그림에서 변화하였다는 점이 어쩌면 더 눈길을 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작품들은 그의 풍경화가 동시대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이유와 그 이유가 되는 표현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생과 풍경화의 조건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흔한 사생대회를 떠올려보아도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을 사생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가 보았고, 본 것을 그리는 단계를 거치는 사이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다. 전병구의 풍경화가 사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사심이래도 상관이 없다. 전병구는 그림을 보는 이가 얼마나 감흥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풍경화와의 싸움에서 그만의 기법으로 효과적으로 승리하고 있고,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작품으로 승부를 보는 듯하다. 만약 그에게 색다른 변화가 생긴다면 작품의 크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법도 작품의 크기에 맞게 계속해서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기법상으로 변화가 지속된다면 그 풍경의 분위기는 또 어떻게 만들어질지 그리고 그 풍경들은 또 어떻게 해석될지 기대해 보자.
[1] 사생(寫生): 그곳에 내가 있었다The Painters En Plein Air 전시는 에이라운지(A-Lounge) 기획으로 안경수·유근택·이우성·전병구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 전시이며, 2022년 4월 15일부터 2022년 5월 13일까지 개최되었다.
[2]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
[3] 존 버거의 예술론 <풍경들> 참조.
[4] 예를 들어, 전병구, <진눈깨비Sleeting>, 53 x 40.9cm,oil on canvas, 2020.
[5]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병구, <남과 여1A Man and A Women 1>, 27.3 x 40.9cm, oil on canvas, 2016.
[6] 전병구, <소금창고Salt Warehouse>, 45.5x45.5cm, Oil on Canvas, 2019,
전병구, <회상Reminise>, 40.9 x 31.8cm, Oil on Canvas, 2020.
[7] 전병구, <미술관The Art Museum>, 24.2X33.3cm, oil on canvas, 2021.
[8] 전병구, <무제Untitled>, 31.8ⅹ40.9cm, oil on canvas, 2022.
2022.06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