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으로 침입하는 행위에 대한 메모
젤라씨
1. 무단으로 침입하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르지 말라고 써 있으면 눌러보거나, 들어가지 말라고 되어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가 많았다. 만지지 말라고 하는데 만져서 감전되거나,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들어가서 신발이 시멘트로 뒤덮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충동들은 내가 외부를 봤을 때 재밌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감각과도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봤을 때도 물고기가 가방을 메고 있거나 (코시마 본 보닌, ), 샤머니즘과 기술을 엮는다든지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수묵화를 그려놓고 ‘그냥 풀’이라고 써놓는다든지(박이소, <그냥 풀>), 수영장이 핑크색 액체로 담겨있다든지(파멜라 로젠크란츠, ), 시간이 뒤죽박죽된 시계들을 매달아 놓고 국제적인 조직을 표방한다든지(로르 프루보, <심층 여행사>) 하는 것들 말이다. 무섭지도, 억지적이지도, 않은 이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순간이 만들어지는 상황과 순간을 좀 더 자주 마주하고 싶은 것 같다.
이 순간들이 재미있는 것은 무언가 혼종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새어 나올 수 있는 틈을 벌려 놓는다는 것인데, 이 틈은 이상한 것이 존재하게 하는 순간으로 미끌리게 한다.
2. 틈새를 유영하기
우리는 여행을 하면 그 나라의 언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말하고자 종종 노력한다. 하지만 절대로 한 언어나 문화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하며, 동일한 언어와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의 틈이 생긴다. 이 틈 사이를 엿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서로 완벽히 이해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웃으며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는 상황, 이해하지 못하기에 각자만의 생각으로 해석하는 상황, 이해가 안 돼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포기하지 않고 입장을 설명하는 상황 등 말이다.
이 틈새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즐기며 유영할 방법은 나 자신을 슬라임처럼 말랑하고 끈적이게 만드는 것인데 그럼 틈 사이에 낑기지 않고 그 반대편을 엿볼 수 있게 된다.
3. 무단으로 침입해서 걸리지 않기
무단으로 침입했을 때 걸리면 여러모로 당황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때 슬라임인 상태라면 얼른 빠져나오거나, 멋쩍게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나와야 한다. 빠져나오기 싫어서 계속 그곳에 있으면 무단으로 점거하는 것이 되는데, 이건 가시적으로 시위를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는 방법이긴 하다. 실제로 점거했을 때 그 장소가 내 것이 되는 것도 있으니. 하지만 들키는 걸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이건 미술이나 전시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무단으로 침입하는 언어를 사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전위나 자극 요소들을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불쾌하거나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침입했다가 걸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 목격한 상대방은 바짝 약이 올라 침입자의 잘못을 고발해버리고 싶어할 때가 있는데, 동시대 미술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무단으로 침입할 때는 실제의 상황을 전유하기보다는 가상의 인물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방법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리고 당장은 걸리지 않더라도 수년 또는 수십년 뒤에 재발견되어 그 책임을 추궁당할 때도 있는데, 이 경우 미술사에서 외면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어쨌든 아무도 책임져 줄 수 없으니 무단으로 침입하는 상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사전에 각오를 하는 것이 좋겠다.
4. 침입한 자들의 최후
아무튼 이 무단으로 침입한다는 것은 이것을 행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언어, 문화 등 해석과 이해의 범주에 있는 영역까지도 확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단으로 침입한 침입자들, 또는 침입을 해봤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이들 모두 침입하기 전과는 다른 기억과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건 규범을 따라온 이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된다. 누가 어디를 어떻게 침입했을까, 침입한 적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침입해 본 적이 있겠지? 이런 상상을 해보면 재미있는데, 이런 생각에 가끔은 답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은 것이 바로 미술에서이다. 미술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 때, 침입한 것을 웃고 넘기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단으로 침입하는 행위가 일부 허락이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영역에 침입한다는 것은 규범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들과 룰, 정상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이 뒤죽박죽되어 ‘오류’라고 인식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러한 상황 속에 위치되어 있고,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은폐하는 이들과 관계 맺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순혈적이라고 여기는, 규범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단일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혼종적일 수 있다.
무단으로 침입한다는 행위는 ‘이해’와 ‘오해’ 사이의 틈에 비상구를 만들고 소통과 해석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출하기를 꿈꾸는, 이 틈새 사이로 하이브리드한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살짝 추천해본다.
2022.06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침입하는 행위에 대한 메모
젤라씨
1. 무단으로 침입하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르지 말라고 써 있으면 눌러보거나, 들어가지 말라고 되어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가 많았다. 만지지 말라고 하는데 만져서 감전되거나,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들어가서 신발이 시멘트로 뒤덮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충동들은 내가 외부를 봤을 때 재밌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감각과도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봤을 때도 물고기가 가방을 메고 있거나 (코시마 본 보닌, ), 샤머니즘과 기술을 엮는다든지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수묵화를 그려놓고 ‘그냥 풀’이라고 써놓는다든지(박이소, <그냥 풀>), 수영장이 핑크색 액체로 담겨있다든지(파멜라 로젠크란츠, ), 시간이 뒤죽박죽된 시계들을 매달아 놓고 국제적인 조직을 표방한다든지(로르 프루보, <심층 여행사>) 하는 것들 말이다. 무섭지도, 억지적이지도, 않은 이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순간이 만들어지는 상황과 순간을 좀 더 자주 마주하고 싶은 것 같다.
이 순간들이 재미있는 것은 무언가 혼종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새어 나올 수 있는 틈을 벌려 놓는다는 것인데, 이 틈은 이상한 것이 존재하게 하는 순간으로 미끌리게 한다.
2. 틈새를 유영하기
우리는 여행을 하면 그 나라의 언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말하고자 종종 노력한다. 하지만 절대로 한 언어나 문화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하며, 동일한 언어와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의 틈이 생긴다. 이 틈 사이를 엿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서로 완벽히 이해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웃으며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는 상황, 이해하지 못하기에 각자만의 생각으로 해석하는 상황, 이해가 안 돼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포기하지 않고 입장을 설명하는 상황 등 말이다.
이 틈새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즐기며 유영할 방법은 나 자신을 슬라임처럼 말랑하고 끈적이게 만드는 것인데 그럼 틈 사이에 낑기지 않고 그 반대편을 엿볼 수 있게 된다.
3. 무단으로 침입해서 걸리지 않기
무단으로 침입했을 때 걸리면 여러모로 당황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때 슬라임인 상태라면 얼른 빠져나오거나, 멋쩍게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나와야 한다. 빠져나오기 싫어서 계속 그곳에 있으면 무단으로 점거하는 것이 되는데, 이건 가시적으로 시위를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는 방법이긴 하다. 실제로 점거했을 때 그 장소가 내 것이 되는 것도 있으니. 하지만 들키는 걸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이건 미술이나 전시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무단으로 침입하는 언어를 사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전위나 자극 요소들을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불쾌하거나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침입했다가 걸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 목격한 상대방은 바짝 약이 올라 침입자의 잘못을 고발해버리고 싶어할 때가 있는데, 동시대 미술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무단으로 침입할 때는 실제의 상황을 전유하기보다는 가상의 인물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방법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리고 당장은 걸리지 않더라도 수년 또는 수십년 뒤에 재발견되어 그 책임을 추궁당할 때도 있는데, 이 경우 미술사에서 외면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어쨌든 아무도 책임져 줄 수 없으니 무단으로 침입하는 상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사전에 각오를 하는 것이 좋겠다.
4. 침입한 자들의 최후
아무튼 이 무단으로 침입한다는 것은 이것을 행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언어, 문화 등 해석과 이해의 범주에 있는 영역까지도 확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단으로 침입한 침입자들, 또는 침입을 해봤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이들 모두 침입하기 전과는 다른 기억과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건 규범을 따라온 이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된다. 누가 어디를 어떻게 침입했을까, 침입한 적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침입해 본 적이 있겠지? 이런 상상을 해보면 재미있는데, 이런 생각에 가끔은 답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은 것이 바로 미술에서이다. 미술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 때, 침입한 것을 웃고 넘기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단으로 침입하는 행위가 일부 허락이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영역에 침입한다는 것은 규범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들과 룰, 정상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이 뒤죽박죽되어 ‘오류’라고 인식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러한 상황 속에 위치되어 있고,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은폐하는 이들과 관계 맺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순혈적이라고 여기는, 규범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단일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혼종적일 수 있다.
무단으로 침입한다는 행위는 ‘이해’와 ‘오해’ 사이의 틈에 비상구를 만들고 소통과 해석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출하기를 꿈꾸는, 이 틈새 사이로 하이브리드한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살짝 추천해본다.
2022.06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