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진 돌과 사라진 땅, 그리고 지워진 퍼포먼스
정희라
어느 돌의 이야기
박형렬의 2018년도 사진 작업인 <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에서 돌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 깨진 돌의 형태가 어떻게 이런 모양일 수 있는지, 작가가 작업을 위해 인위적으로 깨트린 것은 아닌지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이 돌은 간척지 옆의 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간척지를 메우기 위한 흙을 주변의 산에서 가져오게 되는데 그 산에는 이렇게 기이하게 깨진 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간척지 사업을 위해 동원한 장비들의 엄청난 압력에 의해 쩍하고 쪼개졌던 모양이다. 돌에 생긴 이 틈새의 모습을 땅 위에서 퍼포머들이 재현한 작품이 <형상연구_땅#75-2(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의 균열으로부터)>이다. 흰색 옷과 검은 옷을 입은 퍼포머(인간)들이 누워 머리가 다리 끝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그 모습은 아주 높은 하늘에서 촬영되어 조그마하게 표현하였다. 돌을 찍은 사진과 퍼포머를 찍은 사진을 비교하자면 돌은 프레임 가득 커다랗고, 광활한 땅 위의 인간은 인간인지도 잘 알 수 없게 작다. 사진 속 주인공의 크기만 보아도 작가가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돌과 땅
우리는 대지미술까지 가지 않아도 돌과 땅이 어느 문화에서나 다양한 상징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상징의 의미는 기운과 행운, 번식과 죽음, 치유와 마법 외 찾아볼수록 셀 수도 없이 많다. 흙과 돌은 세상의 원천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생명으로 여기기도 한다. 광물, 운석. 돌기둥, 환상 열석(stone circles),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많은 석묘와 석실처럼 말이다. 돌은 흙 그 자체로 만들어진 커다란 기념비의 골조이자 표지물로, 채굴은 정화 의식과 함께 거행된 행위[1]로 해석된다. 박형렬이 간척지 근처에서 채굴한 것에 이런 의미까지 부여하는 것은 그 범위를 너무 많이 확장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업 소재인 땅, 돌, 흙에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음각으로 조각한 땅 안에서 첼로를 켜는 박형렬의 영상 작업 <땅과 땅 Earth and Land>은 퍼포먼스에 장엄한 소리가 더해져 의식(ceremony)행위 같기도 하다.

성곡미술관_박형렬개인전_땅, 사람, 관계탐구_전시전경
흔적 지우기
박형렬은 미술계에서 대지를 사진으로 다루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자연을 상대로 퍼포먼스를 하고 기록하는 작가. 성곡미술관에서의 <땅, 사람, 관계탐구 Reflecting on Relationship: Earth & People> 전시에서 박형렬의 10년이 넘는 지난 작업을 소개했다. 필자는 이에 대한 크리틱 원고를 계기로 그의 작업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원고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룰은 자연 공간에 개입했던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규격화되고 기하학적인 도시 구조와 산업적인 이해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했던 최소한의 변형이었다. 그 물리적인 조건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을 억압된 조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한편,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에 ‘헛된’ 혹은 ‘덧없는’과 같은 표현이 따라붙기도 한다. 작가의 개입을 그대로 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부 대지미술과는 다르다. 박형렬의 작업은 서로 어울려 작업하고 본래의 모습을 존중하여 되돌리는 모습이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비추어진다.[2]
여기서 언급한 이 룰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대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 로버트 스미스슨, 리처드 롱은 대자연 위에 설치미술을 행했다. 전시공간의 이동, 반물질, 반문명, 반자본주의와 같은 여러 담론을 만들어 냈던 대지미술은 그 규모와 대상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을 훼손하거나 생태계가 우려된다는 비판 또한 낳았다. 필자는 박형렬의 작업이 대지미술의 성격에서 출발한 것 같지는 않다. 대자연보다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땅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았다. 물론 소재와 형식은 대지미술의 담론을 끌어와 이야기할 만하다. 그러나 그 작업의 출발과 목적은 사뭇 결이 다르다. 박형렬은 자신에 대해 도시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도시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소개한다.
“어떻게 보면 내 작업은 단순하다. 땅을 파내고, 촬영하고,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 자체를 일시적으로 기록해서 보여주는데, 이 행위는 도시가 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도시는 그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땅을 파내고 건물을 짓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를 보수한다고 덮어놓는다. 이 과정이 반복되는데, 이런 행위를 내 작업에서는 상징적으로 단순화해서 보여준다.[3] 박형렬은 자연 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하여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도시와 자연의 관계와 구조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그 개입을 지우는 데 최선을 다한다. 대지미술이 인간이 변형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여 적어도 자연이 본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지점까지는 만들어줘야 자신의 작업이 진정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박형렬은 도시에서 땅이 가지는 속성과 인간과 땅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데,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을 통해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된 땅을 발견하게 하고 그 땅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의도와 목적이 이렇게 작용하는 이유는 작가로서 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논의할 만한 것들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이 갖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이 모두를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대자연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땅에서 그의 작업이 출발하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 본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땅과 돌, 자연을 다루는 작업이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울림을 주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 루시 리파드의 <오버레이> 참조.
[2] 월간미술 2022년 7월호 p.139.
[3] 박형렬 공식 홈페이지에서 매거진 카테고리, 이정배 작가와의 대화 중 박형렬 작가의 말.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없어진 돌과 사라진 땅, 그리고 지워진 퍼포먼스
정희라
어느 돌의 이야기
박형렬의 2018년도 사진 작업인 <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에서 돌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 깨진 돌의 형태가 어떻게 이런 모양일 수 있는지, 작가가 작업을 위해 인위적으로 깨트린 것은 아닌지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이 돌은 간척지 옆의 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간척지를 메우기 위한 흙을 주변의 산에서 가져오게 되는데 그 산에는 이렇게 기이하게 깨진 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간척지 사업을 위해 동원한 장비들의 엄청난 압력에 의해 쩍하고 쪼개졌던 모양이다. 돌에 생긴 이 틈새의 모습을 땅 위에서 퍼포머들이 재현한 작품이 <형상연구_땅#75-2(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의 균열으로부터)>이다. 흰색 옷과 검은 옷을 입은 퍼포머(인간)들이 누워 머리가 다리 끝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그 모습은 아주 높은 하늘에서 촬영되어 조그마하게 표현하였다. 돌을 찍은 사진과 퍼포머를 찍은 사진을 비교하자면 돌은 프레임 가득 커다랗고, 광활한 땅 위의 인간은 인간인지도 잘 알 수 없게 작다. 사진 속 주인공의 크기만 보아도 작가가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돌과 땅
우리는 대지미술까지 가지 않아도 돌과 땅이 어느 문화에서나 다양한 상징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상징의 의미는 기운과 행운, 번식과 죽음, 치유와 마법 외 찾아볼수록 셀 수도 없이 많다. 흙과 돌은 세상의 원천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생명으로 여기기도 한다. 광물, 운석. 돌기둥, 환상 열석(stone circles),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많은 석묘와 석실처럼 말이다. 돌은 흙 그 자체로 만들어진 커다란 기념비의 골조이자 표지물로, 채굴은 정화 의식과 함께 거행된 행위[1]로 해석된다. 박형렬이 간척지 근처에서 채굴한 것에 이런 의미까지 부여하는 것은 그 범위를 너무 많이 확장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업 소재인 땅, 돌, 흙에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음각으로 조각한 땅 안에서 첼로를 켜는 박형렬의 영상 작업 <땅과 땅 Earth and Land>은 퍼포먼스에 장엄한 소리가 더해져 의식(ceremony)행위 같기도 하다.

성곡미술관_박형렬개인전_땅, 사람, 관계탐구_전시전경
흔적 지우기
박형렬은 미술계에서 대지를 사진으로 다루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자연을 상대로 퍼포먼스를 하고 기록하는 작가. 성곡미술관에서의 <땅, 사람, 관계탐구 Reflecting on Relationship: Earth & People> 전시에서 박형렬의 10년이 넘는 지난 작업을 소개했다. 필자는 이에 대한 크리틱 원고를 계기로 그의 작업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원고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룰은 자연 공간에 개입했던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규격화되고 기하학적인 도시 구조와 산업적인 이해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했던 최소한의 변형이었다. 그 물리적인 조건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을 억압된 조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한편,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에 ‘헛된’ 혹은 ‘덧없는’과 같은 표현이 따라붙기도 한다. 작가의 개입을 그대로 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부 대지미술과는 다르다. 박형렬의 작업은 서로 어울려 작업하고 본래의 모습을 존중하여 되돌리는 모습이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비추어진다.[2]
여기서 언급한 이 룰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대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 로버트 스미스슨, 리처드 롱은 대자연 위에 설치미술을 행했다. 전시공간의 이동, 반물질, 반문명, 반자본주의와 같은 여러 담론을 만들어 냈던 대지미술은 그 규모와 대상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을 훼손하거나 생태계가 우려된다는 비판 또한 낳았다. 필자는 박형렬의 작업이 대지미술의 성격에서 출발한 것 같지는 않다. 대자연보다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땅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았다. 물론 소재와 형식은 대지미술의 담론을 끌어와 이야기할 만하다. 그러나 그 작업의 출발과 목적은 사뭇 결이 다르다. 박형렬은 자신에 대해 도시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도시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소개한다.
“어떻게 보면 내 작업은 단순하다. 땅을 파내고, 촬영하고,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 자체를 일시적으로 기록해서 보여주는데, 이 행위는 도시가 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도시는 그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땅을 파내고 건물을 짓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를 보수한다고 덮어놓는다. 이 과정이 반복되는데, 이런 행위를 내 작업에서는 상징적으로 단순화해서 보여준다.[3] 박형렬은 자연 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하여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도시와 자연의 관계와 구조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그 개입을 지우는 데 최선을 다한다. 대지미술이 인간이 변형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여 적어도 자연이 본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지점까지는 만들어줘야 자신의 작업이 진정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박형렬은 도시에서 땅이 가지는 속성과 인간과 땅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데,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을 통해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된 땅을 발견하게 하고 그 땅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의도와 목적이 이렇게 작용하는 이유는 작가로서 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논의할 만한 것들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이 갖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이 모두를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대자연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땅에서 그의 작업이 출발하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 본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땅과 돌, 자연을 다루는 작업이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울림을 주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 루시 리파드의 <오버레이> 참조.
[2] 월간미술 2022년 7월호 p.139.
[3] 박형렬 공식 홈페이지에서 매거진 카테고리, 이정배 작가와의 대화 중 박형렬 작가의 말.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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