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후 남는 것 - 폐기물의 스펙터클
한승주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은 고도의 개별화된 예술의 통찰을 얻는 대신, 예술에 앞서 먼저 공간에 도취된다.[1]
미국의 미술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 중 일부이다. 크라우스는 이 글에서 오늘날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동시대 미술관의 현재를 서술했다. 미술관이 소장품 수집, 연구 활동에 매진하기보다 미술시장의 압력을 받아 전시를 하나의 생산품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의 서술처럼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건너오며 미술관은 일종의 스펙터클 과시에 중독되었다. 오늘날 미술관의 넓고 트인 공간에는 관람객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내용보다 시각을 자극하는 새롭고, 아름답고, 사진 찍기 좋은 요소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과연 그 요소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필자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꾸리며 고민했던 것과 전시 이후에 남는 또 다른 것에 대해 서술하며 미술 전시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근무하던 미술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준비할 때면 매번 공간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강박과 이를 실현하자면 엄청나게 쏟아질 것이 뻔한 폐기물에 대한 죄책감 사이의 고민이 이어졌다. 운영하던 전시실의 규모는 약 200평이었고 무빙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 전시 구성을 하다 보면 이 작품은 사운드가 중요해서, 저 작품은 조명이 중요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로 자잘한 구획이 추가로 필요했고, 무빙월 이외에도 새로운 벽체를 세우곤 했다. 이 벽체는 해당 전시 기간 동안만을 위한 가벽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신규로 조성할 때마다 벽의 골조를 제대로 짠 후 합판과 석고보드 같은 마감재를 일정 두께 이상 시공해야 했다. 그리고 전시 작품이 돋보이도록 매끈한 공간을 조성해야 했으므로 자재 위에 퍼티를 입히고 갈아낸 후 페인트 마감을 했다. 이렇게 페인트를 칠하고 나면 추후에도 전혀 재활용이 불가능하게 된다.
전시를 꾸리는데 필요한 요소가 전시장의 가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의 기획의도와 작품 설명을 위해 벽면에는 PVC 재질의 시트지로 월 텍스트, 캡션 시공이 들어가며, 전시 홍보를 위해 현수막, 배너, 초청장, 리플릿, 도록 등 각종 인쇄물을 제작하게 된다. 현수막과 배너는 물론 재활용이 어렵지만 종이 인쇄물의 경우에도 전시를 최대한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금박을 입히는 등 후가공을 넣는 경우가 많으므로 재활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전시 작품을 운송해오는 과정에서 작품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포장재가 소모된다. 이렇게 운송해 온 작품들을 설치하는 과정 중에도 좌대 등 기물을 별도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고, 간편한 플라스틱 재료들로 작품을 고정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데 사용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로 케이블 타이나 전선 정리용 몰딩, 작품 보고용 아크릴 케이스, 거치대 등이 있다. 이 재료들은 대부분 전시가 끝나고 작품이 빠져나가고 나면 폐기되는 재료들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게 되면 전시 주제에 맞는 기획과 구성을 새로 할 때마다 직전 전시의 폐기물이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몇 톤씩 쏟아진다. 전시 후 철거되어 쌓여있는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애써 준비한 전시가 마감되어 폐기되어 버리고 마는구나 하는 묘한 아쉬움과 함께 전시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전시 주제나 작품이 아니라 전시 종료 이후에 폐기되어 버리고 마는 쓰레기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한 번 전시를 할 때마다 발생하는 이 어마어마한 쓰레기는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절대 알지 못하도록 밤 시간 동안 비밀리에 처리되고 낮 동안엔 깔끔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광경만 남는다.
전시 폐기물에 대한 고민은 곧 지속 가능한 미술관 운영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으로써 해야 마땅한 고민이기도 하다. 과잉 생산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의 시대는 저물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미술관 제도를 비판하며 탈주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산업화된 미술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주장해왔지만 미술을 수용하는 미술관 공간과 기획 전시의 물리적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기후 위기와 함께 근래 몇 년 사이에 도래하였다.
2021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2] 전시는 이 고민을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전시였다. 재활용 가능한 모듈 벽을 사용했으며 전시를 개최하기까지 배출되는 탄소량을 계산하여 전시하고, 일부 해외 작품은 운송해오지 않고 외국에서 전시된 현장을 생중계하는 방법으로 대체하는 등 지속 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실천 방안들을 실험했다. 전시에서 특기할 만한 장면은 전시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처리하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전시장 한 쪽에 마치 전시물처럼 전시해놓은 광경이었다. 이는 쓰레기도 오브제로 전시하는 현대미술이 사실은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이외에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같은 해 개최된 《기후 위기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3]를 통해 기후 위기 속 지속 가능한 미술관 전시에 대한 실험을 하였으며, 며칠 전 삼성문화재단은 ESG 경영을 선포하며 특히 탄소 감축을 위해 리움미술관 전시 개최 시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고 모듈 벽을 재활용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해나갈 것이라고 알렸다.[4] 이처럼 전시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시 방법론의 실행은 점차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공립 기관이나 기업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 외에 자본이 넉넉하지 못한 기관의 경우 지속 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방법들을 실행할 여유가 없을 수 있다. 친환경적으로 전시를 꾸리는 방법보다 폐기물 처리하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저렴한 비용으로 얼마든지 갈음 가능한 산업구조가 공고히 자리 잡은 바로 지금,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전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전시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자 역시 전시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공익의 이유로 낯선 결과물과 전시 관람의 불편함을 모두에게 곧바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미술 전시를 찾는 관람객들도 이미 익숙해진 기존의 전시 스펙터클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한 번 더 인지하고, 그 대안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두기를 바란다. 미술관 전시에서 주가 되어야 할 것은 아름다운 것, 쿨한 것, 사진 찍기 좋은 것보다 개별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미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작은 미술관 하나에서 폐기물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한들, 그 노력은 다른 산업에 비해 미미할 수 있다. 하지만 무용론을 제기하기 전에 지금까지 있어왔던 미술의 새로운 시도들을 돌아보고, 대전환의 시대에 미술이 폐기물을 배출하는 대신 어떤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1] 로잘린드 크라우스, 「후기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 《옥토버》 54호 (1990년 가을) 14쪽, 클레어 비숍, 《래디컬 뮤지엄-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9쪽 재인용.
[2] https://www.busan.go.kr/moca/exhibition03/1505298
[3]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
[4]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627_0001920990&cID=10701&pID=10700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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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후 남는 것 - 폐기물의 스펙터클
한승주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은 고도의 개별화된 예술의 통찰을 얻는 대신, 예술에 앞서 먼저 공간에 도취된다.[1]
미국의 미술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 중 일부이다. 크라우스는 이 글에서 오늘날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동시대 미술관의 현재를 서술했다. 미술관이 소장품 수집, 연구 활동에 매진하기보다 미술시장의 압력을 받아 전시를 하나의 생산품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의 서술처럼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건너오며 미술관은 일종의 스펙터클 과시에 중독되었다. 오늘날 미술관의 넓고 트인 공간에는 관람객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내용보다 시각을 자극하는 새롭고, 아름답고, 사진 찍기 좋은 요소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과연 그 요소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필자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꾸리며 고민했던 것과 전시 이후에 남는 또 다른 것에 대해 서술하며 미술 전시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근무하던 미술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준비할 때면 매번 공간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강박과 이를 실현하자면 엄청나게 쏟아질 것이 뻔한 폐기물에 대한 죄책감 사이의 고민이 이어졌다. 운영하던 전시실의 규모는 약 200평이었고 무빙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 전시 구성을 하다 보면 이 작품은 사운드가 중요해서, 저 작품은 조명이 중요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로 자잘한 구획이 추가로 필요했고, 무빙월 이외에도 새로운 벽체를 세우곤 했다. 이 벽체는 해당 전시 기간 동안만을 위한 가벽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신규로 조성할 때마다 벽의 골조를 제대로 짠 후 합판과 석고보드 같은 마감재를 일정 두께 이상 시공해야 했다. 그리고 전시 작품이 돋보이도록 매끈한 공간을 조성해야 했으므로 자재 위에 퍼티를 입히고 갈아낸 후 페인트 마감을 했다. 이렇게 페인트를 칠하고 나면 추후에도 전혀 재활용이 불가능하게 된다.
전시를 꾸리는데 필요한 요소가 전시장의 가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의 기획의도와 작품 설명을 위해 벽면에는 PVC 재질의 시트지로 월 텍스트, 캡션 시공이 들어가며, 전시 홍보를 위해 현수막, 배너, 초청장, 리플릿, 도록 등 각종 인쇄물을 제작하게 된다. 현수막과 배너는 물론 재활용이 어렵지만 종이 인쇄물의 경우에도 전시를 최대한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금박을 입히는 등 후가공을 넣는 경우가 많으므로 재활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전시 작품을 운송해오는 과정에서 작품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포장재가 소모된다. 이렇게 운송해 온 작품들을 설치하는 과정 중에도 좌대 등 기물을 별도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고, 간편한 플라스틱 재료들로 작품을 고정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데 사용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로 케이블 타이나 전선 정리용 몰딩, 작품 보고용 아크릴 케이스, 거치대 등이 있다. 이 재료들은 대부분 전시가 끝나고 작품이 빠져나가고 나면 폐기되는 재료들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게 되면 전시 주제에 맞는 기획과 구성을 새로 할 때마다 직전 전시의 폐기물이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몇 톤씩 쏟아진다. 전시 후 철거되어 쌓여있는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애써 준비한 전시가 마감되어 폐기되어 버리고 마는구나 하는 묘한 아쉬움과 함께 전시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전시 주제나 작품이 아니라 전시 종료 이후에 폐기되어 버리고 마는 쓰레기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한 번 전시를 할 때마다 발생하는 이 어마어마한 쓰레기는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절대 알지 못하도록 밤 시간 동안 비밀리에 처리되고 낮 동안엔 깔끔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광경만 남는다.
전시 폐기물에 대한 고민은 곧 지속 가능한 미술관 운영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으로써 해야 마땅한 고민이기도 하다. 과잉 생산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의 시대는 저물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미술관 제도를 비판하며 탈주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산업화된 미술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주장해왔지만 미술을 수용하는 미술관 공간과 기획 전시의 물리적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기후 위기와 함께 근래 몇 년 사이에 도래하였다.
2021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2] 전시는 이 고민을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전시였다. 재활용 가능한 모듈 벽을 사용했으며 전시를 개최하기까지 배출되는 탄소량을 계산하여 전시하고, 일부 해외 작품은 운송해오지 않고 외국에서 전시된 현장을 생중계하는 방법으로 대체하는 등 지속 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실천 방안들을 실험했다. 전시에서 특기할 만한 장면은 전시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처리하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전시장 한 쪽에 마치 전시물처럼 전시해놓은 광경이었다. 이는 쓰레기도 오브제로 전시하는 현대미술이 사실은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이외에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같은 해 개최된 《기후 위기 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3]를 통해 기후 위기 속 지속 가능한 미술관 전시에 대한 실험을 하였으며, 며칠 전 삼성문화재단은 ESG 경영을 선포하며 특히 탄소 감축을 위해 리움미술관 전시 개최 시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고 모듈 벽을 재활용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해나갈 것이라고 알렸다.[4] 이처럼 전시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시 방법론의 실행은 점차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공립 기관이나 기업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 외에 자본이 넉넉하지 못한 기관의 경우 지속 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방법들을 실행할 여유가 없을 수 있다. 친환경적으로 전시를 꾸리는 방법보다 폐기물 처리하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저렴한 비용으로 얼마든지 갈음 가능한 산업구조가 공고히 자리 잡은 바로 지금,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전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전시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자 역시 전시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공익의 이유로 낯선 결과물과 전시 관람의 불편함을 모두에게 곧바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미술 전시를 찾는 관람객들도 이미 익숙해진 기존의 전시 스펙터클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한 번 더 인지하고, 그 대안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두기를 바란다. 미술관 전시에서 주가 되어야 할 것은 아름다운 것, 쿨한 것, 사진 찍기 좋은 것보다 개별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미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작은 미술관 하나에서 폐기물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한들, 그 노력은 다른 산업에 비해 미미할 수 있다. 하지만 무용론을 제기하기 전에 지금까지 있어왔던 미술의 새로운 시도들을 돌아보고, 대전환의 시대에 미술이 폐기물을 배출하는 대신 어떤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1] 로잘린드 크라우스, 「후기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 논리」, 《옥토버》 54호 (1990년 가을) 14쪽, 클레어 비숍, 《래디컬 뮤지엄-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9쪽 재인용.
[2] https://www.busan.go.kr/moca/exhibition03/1505298
[3]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
[4]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627_0001920990&cID=10701&pID=10700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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