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선_Fade Out_oil on canvas_130.3x162.2cm_2021
곰방과 누드
이규선 개인전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자재 옮기는 걸 ‘곰방’이라 해요. 벽돌이랑 시멘트 지고 계단 오르고, 타일 나르는 거. 몸 갈아 넣는 노가다인데, 나중엔 아예 팀을 짜서 본격적으로 했어요. 돈이 되니까. 작업 하려면 다 돈이죠.”
“팀을 이끌려니, 몸으로 땡이 아니라 머리까지 써야 돼요. 현장 특성 생각 못 하고 엉뚱하게 뿌려 놨다 공사 꼬이면 여러 사람 피 보죠.”
“규모 좀 되는 현장은 일당으로 안 해요. 몰아서 수금하죠. 분배는 나갔는데 감감무소식, 돈이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쉼 없이 사연을 푸는 이규선 작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회를 엿보다 가까스로 끊고, 약간의 미안함을 억누르며 그의 어깨너머로 그림 한 점을 응시한다. 미처 말로 다하지 못한 꿉꿉 찝찝 답답한 행간은 〈수금도 안되고〉(2019)에 마저 담았다. 꺼먼 추리닝을 대충 걸치고 컴컴한 골방에 홀로 찌그러진 남자. 반쯤 누워 담배 석 대를 연빵(?)으로 태운다. 스멀거리는 연기 너머 구석빼기엔 몇 줄 읽다 내던진 신문 쪼가리가 나뒹군다. 더부룩한 머리 잔뜩 찌푸린 미간과 긴장 풀린 입가의 대비는, 고뇌를 넘어 숫제 해탈할 처지를 휑하니 들춘다. 약간의 마티에르를 머금고 사방으로 밀도 있게 엮인 붓자국에 제법 텁텁한 표면은 제목과 더불어, 요란을 잃고 침잠하는 심정을 고조한다. 수금 안 되는 게 확실하다.

이규선_수금도 안되고_oil on canvas_91x116.8cm_2019
더딘 수금에도 붓을 놓지 않은 건 왜일까? 그새 그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인다.
“얼마에 파실 건가요?”
사상 처음 듣는 대사에 학생들은 물론 교수의 시선까지 집중되었다. 그가 재학 중이던 어느 날의 실기 크리틱. 부전공으로 수업에 낀 타과생의 그림을 본 그는 주머니를 털어 그 자리에서 구입한다. 기억하기론 10만 원 남짓이었다고. 윤리교육과 어느 여학생의 솜씨였다. 나중에 돈을 돌려주며 그림은 가져도 좋다는 그녀에게, 그는 대신 밥을 세 번 사겠다 했다. 제법 친해질 무렵, 휴학을 낸 건지 그녀의 발길은 뜸해졌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시간이 가고, 5학년이 되도록 학교를 맴돌던 중, 둘은 우연히 재회한다. 일을 해 약간의 돈을 만지던 그는 모델을 제안했고, 마침 용돈이 필요했던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매일 한두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씩 모델을 섰다. 시급 만 원이라는 벌이도 꽤 맘에 든 건지, 남자친구에게 둘러대면서까지 꾸준히도.
그러던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작업실을 찾은 그는, 문득 야심 차게 그리던 전신 좌상 속 그녀의 상의를 지워 누드로 만든다. 무슨 바람에 그랬는지 한낮에 눈을 비비며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곧 올 시각이란 사실.
뛰어나가 우선 막아섰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술 한 병을 다 들이키도록 쭈뼛거리는 그에게 다그치는 그녀. 어려운 실토 뒤에야 그림을 마주한 그녀는 깔깔 웃었다. 가슴이 너무 크다나. 무슨 용기에선지 그는 불쑥 말했다. 아예 누드로 설 수 있겠냐고. 하나의 후회와 두 개의 적막이 흐르고, 한참의 고민 끝에 그녀가 물었다.
“하나만 약속하면 할게.”
“……”
“평생 그림 그리겠다고, 나랑 약속해.”
그렇게 탄생한 〈쟌〉(2016). 원래 코스튬이었던 원작은, 상의와 하의가 차례로 사라지고, 대신 그의 셔츠 한 장만을 얻어 걸치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누드 좌상이 되었다. 마치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 내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눈빛이 박제된 이 작품은, 작가 이규선에 동봉한 일종의 각서나 보증서와 같다.
그러한 각오로 살며 작가를 비롯한 미술 관계자들과 오랜만에 동석한 자리를, 이규선은 〈고귀한 일탈〉(2021)이라 칭한다. 빈 불판과 우뚝 솟은 맥주병. 교묘하게 얼굴을 자른 인물들. 크고 작게 흐리고 잘리고 엇나가고 일그러지는 인물과 기물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이 자리를 최대한 밀도 있게 맛보려는 결의가 담긴 시선이 번뜩인다.

이규선_고귀한 일탈_oil on canvas_90.9x65.1cm_2021
기법과 화법이 서로의 역할을 위임하며 뒤섞여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은 이규선의 주요한 회화적 특성이다. 최근작은 대개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의미의 전달이나 상황 소환에 초점을 두진 않는다. 일종의 화법이나 전개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 말하자면 목적의식을 갖고 상황을 묘사하기보다, 그 경험의 실체적 부산물에 더 가깝다. 그래서 터치나 마티에르, 색채와 흐름과 같은 기법을 따로 추릴 것 없이, 내용이나 화법과 한 다발로 움켜쥐면 된다. 구상의 끈을 풀어, 상황을 한정하지 않을 시동을 늘 걸고 있다. 사인곡선처럼 출렁이는 화법의 정돈에서, 마침 형태가 더 남아있는 시점인 셈이다. 〈농수산물시장알바〉(2021)에서 이규선의 시야를 잠시 빌려다 하늘을 본다. 착잡함과 차분함이 뒤섞여 조밀한 터치. 무언가 작은 일이 곧 일어날 전조인 듯, 푸르죽죽한 구름을 끼고 일그러진 복잡한 하늘. 그 사이로 새어 드는 새벽 먼동의 은근히 들뜬 주황빛. 먹먹한 구름 다발과 얽혀 스멀거리는 동녘의 밝은 끝자락. 오늘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고 고단하겠지만, 회의적이지 않다. 아니, 회의적이지 않으려면 좀 고단해야 할는지 모른다.

이규선_농수산물시장알바_oil on canvas_91x116.8cm_2021

이규선_뜨밤_oil on canvas_90.3x54.2cm_2021

이규선_누구나 갈 길은 있다_oil on canvas_486.6x130.3cm_2021
이번 개인전의 뼈대로 〈페이드 인〉(2016)과 〈페이드 아웃〉(2021)을 특히 주목한다. 5년의 시간차를 두고 마주한 이 그림은 단연 이규선식 자화상의 정점이다. 멍한 눈빛, 뚱한 표정, 퀭한 얼굴, 허한 몸가짐으로 관객을 우두커니 응시하며 낡은 나무 의자에 홀로 앉은 인물. 오른쪽 구석배기에 슬그머니 선 (거의)빈 캔버스와 시각적 균형을 이루면서도 '덩그러니 남겨진’ 분위기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휘갈기듯 일렁이고 바스러지는 검고 흰 터치는 벽면이면서 또 다른 캔버스처럼 인물 주변을 뒤덮는다.
5년 후 그는 좀 더 자신 있게 걸터앉았다. 캔버스는 좀 더 가까워지고 당당해졌다. 크고 작은 수많은 그림이 주변을 가득 채우며, 자신의 실루엣을 만든다. 시커먼 빈 칸 같은,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실루엣. 그리며 살아온 날들이 쌓이고, ‘작가로서의 그’라는 결과물을 갈수록 선명히 빚는다. 어깨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인물은 광기에 사로잡힌 어느 폭군의 표상이다. 실루엣 속으로, 적어도 그림에서는 광기어린 폭군 한 번 돼 봄 직 한 거 아니냐는 표정이 슬몃 비친다.
그에게 그림은 성상도, 진리도, 이상향도 아니다. 받들지도, 추구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차라리 굴비 같은 것이다. 어두컴컴한 골방 한가운데 너울너울 짚으로 동여 내건 굴비. 실컷 바라보고 킁킁대는 것만으로도, 맨밥을 껴안고 기쁘게 수저를 놀릴 수 있다. 근사한 목표로 삼거나 특정한 소비 효용이 없어도 충분하다.
그의 작업은 현실과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결부한다. 그럼에도 투영에 집착하지 않음에 주목한다. 삶을 담거나 실존을 다룬다기보단, 숫제 실존 그 자체이다. 여느 그림처럼 삶의 자취나 행위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 자체로 생존 수단이다. 그림을 그리면 ‘작가 이규선’으로 살아낼 수 있다. 멈추면 인간 이규선은 몰라도 작가 이규선은 죽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목숨줄이다. 생계를 능히 이을 밥줄이 되든 못 되든, 이 삶을 살기 위한 생명줄이다. 삶을 유지하는 이 원동력을 그는 ‘붓부심’이라 부르곤 한다. 스스로 결심한 것이다. 굴비 걸고 살기로. 작가로 살기로. 삶을 그린 게 아니다. 그리며 살 뿐.
‘그리는 삶’을 살아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양아치’라 낮잡지 않으니까. 크고 질기고 아주 푹신한 짚더미-막 해도, 포기해도, 내던져도, 울부짖어도, 구는 대로 다 받아주는 관대한 것, 포용하는 것, 게다가 유일한 것- 그에게 그림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이규선_Fade Out_oil on canvas_130.3x162.2cm_2021
곰방과 누드
이규선 개인전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자재 옮기는 걸 ‘곰방’이라 해요. 벽돌이랑 시멘트 지고 계단 오르고, 타일 나르는 거. 몸 갈아 넣는 노가다인데, 나중엔 아예 팀을 짜서 본격적으로 했어요. 돈이 되니까. 작업 하려면 다 돈이죠.”
“팀을 이끌려니, 몸으로 땡이 아니라 머리까지 써야 돼요. 현장 특성 생각 못 하고 엉뚱하게 뿌려 놨다 공사 꼬이면 여러 사람 피 보죠.”
“규모 좀 되는 현장은 일당으로 안 해요. 몰아서 수금하죠. 분배는 나갔는데 감감무소식, 돈이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쉼 없이 사연을 푸는 이규선 작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회를 엿보다 가까스로 끊고, 약간의 미안함을 억누르며 그의 어깨너머로 그림 한 점을 응시한다. 미처 말로 다하지 못한 꿉꿉 찝찝 답답한 행간은 〈수금도 안되고〉(2019)에 마저 담았다. 꺼먼 추리닝을 대충 걸치고 컴컴한 골방에 홀로 찌그러진 남자. 반쯤 누워 담배 석 대를 연빵(?)으로 태운다. 스멀거리는 연기 너머 구석빼기엔 몇 줄 읽다 내던진 신문 쪼가리가 나뒹군다. 더부룩한 머리 잔뜩 찌푸린 미간과 긴장 풀린 입가의 대비는, 고뇌를 넘어 숫제 해탈할 처지를 휑하니 들춘다. 약간의 마티에르를 머금고 사방으로 밀도 있게 엮인 붓자국에 제법 텁텁한 표면은 제목과 더불어, 요란을 잃고 침잠하는 심정을 고조한다. 수금 안 되는 게 확실하다.

이규선_수금도 안되고_oil on canvas_91x116.8cm_2019
더딘 수금에도 붓을 놓지 않은 건 왜일까? 그새 그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인다.
“얼마에 파실 건가요?”
사상 처음 듣는 대사에 학생들은 물론 교수의 시선까지 집중되었다. 그가 재학 중이던 어느 날의 실기 크리틱. 부전공으로 수업에 낀 타과생의 그림을 본 그는 주머니를 털어 그 자리에서 구입한다. 기억하기론 10만 원 남짓이었다고. 윤리교육과 어느 여학생의 솜씨였다. 나중에 돈을 돌려주며 그림은 가져도 좋다는 그녀에게, 그는 대신 밥을 세 번 사겠다 했다. 제법 친해질 무렵, 휴학을 낸 건지 그녀의 발길은 뜸해졌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시간이 가고, 5학년이 되도록 학교를 맴돌던 중, 둘은 우연히 재회한다. 일을 해 약간의 돈을 만지던 그는 모델을 제안했고, 마침 용돈이 필요했던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매일 한두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씩 모델을 섰다. 시급 만 원이라는 벌이도 꽤 맘에 든 건지, 남자친구에게 둘러대면서까지 꾸준히도.
그러던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작업실을 찾은 그는, 문득 야심 차게 그리던 전신 좌상 속 그녀의 상의를 지워 누드로 만든다. 무슨 바람에 그랬는지 한낮에 눈을 비비며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곧 올 시각이란 사실.
뛰어나가 우선 막아섰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술 한 병을 다 들이키도록 쭈뼛거리는 그에게 다그치는 그녀. 어려운 실토 뒤에야 그림을 마주한 그녀는 깔깔 웃었다. 가슴이 너무 크다나. 무슨 용기에선지 그는 불쑥 말했다. 아예 누드로 설 수 있겠냐고. 하나의 후회와 두 개의 적막이 흐르고, 한참의 고민 끝에 그녀가 물었다.
“하나만 약속하면 할게.”
“……”
“평생 그림 그리겠다고, 나랑 약속해.”
그렇게 탄생한 〈쟌〉(2016). 원래 코스튬이었던 원작은, 상의와 하의가 차례로 사라지고, 대신 그의 셔츠 한 장만을 얻어 걸치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누드 좌상이 되었다. 마치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 내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눈빛이 박제된 이 작품은, 작가 이규선에 동봉한 일종의 각서나 보증서와 같다.
그러한 각오로 살며 작가를 비롯한 미술 관계자들과 오랜만에 동석한 자리를, 이규선은 〈고귀한 일탈〉(2021)이라 칭한다. 빈 불판과 우뚝 솟은 맥주병. 교묘하게 얼굴을 자른 인물들. 크고 작게 흐리고 잘리고 엇나가고 일그러지는 인물과 기물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이 자리를 최대한 밀도 있게 맛보려는 결의가 담긴 시선이 번뜩인다.

이규선_고귀한 일탈_oil on canvas_90.9x65.1cm_2021
기법과 화법이 서로의 역할을 위임하며 뒤섞여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은 이규선의 주요한 회화적 특성이다. 최근작은 대개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의미의 전달이나 상황 소환에 초점을 두진 않는다. 일종의 화법이나 전개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 말하자면 목적의식을 갖고 상황을 묘사하기보다, 그 경험의 실체적 부산물에 더 가깝다. 그래서 터치나 마티에르, 색채와 흐름과 같은 기법을 따로 추릴 것 없이, 내용이나 화법과 한 다발로 움켜쥐면 된다. 구상의 끈을 풀어, 상황을 한정하지 않을 시동을 늘 걸고 있다. 사인곡선처럼 출렁이는 화법의 정돈에서, 마침 형태가 더 남아있는 시점인 셈이다. 〈농수산물시장알바〉(2021)에서 이규선의 시야를 잠시 빌려다 하늘을 본다. 착잡함과 차분함이 뒤섞여 조밀한 터치. 무언가 작은 일이 곧 일어날 전조인 듯, 푸르죽죽한 구름을 끼고 일그러진 복잡한 하늘. 그 사이로 새어 드는 새벽 먼동의 은근히 들뜬 주황빛. 먹먹한 구름 다발과 얽혀 스멀거리는 동녘의 밝은 끝자락. 오늘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고 고단하겠지만, 회의적이지 않다. 아니, 회의적이지 않으려면 좀 고단해야 할는지 모른다.

이규선_농수산물시장알바_oil on canvas_91x116.8cm_2021

이규선_뜨밤_oil on canvas_90.3x54.2cm_2021

이규선_누구나 갈 길은 있다_oil on canvas_486.6x130.3cm_2021
이번 개인전의 뼈대로 〈페이드 인〉(2016)과 〈페이드 아웃〉(2021)을 특히 주목한다. 5년의 시간차를 두고 마주한 이 그림은 단연 이규선식 자화상의 정점이다. 멍한 눈빛, 뚱한 표정, 퀭한 얼굴, 허한 몸가짐으로 관객을 우두커니 응시하며 낡은 나무 의자에 홀로 앉은 인물. 오른쪽 구석배기에 슬그머니 선 (거의)빈 캔버스와 시각적 균형을 이루면서도 '덩그러니 남겨진’ 분위기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휘갈기듯 일렁이고 바스러지는 검고 흰 터치는 벽면이면서 또 다른 캔버스처럼 인물 주변을 뒤덮는다.
5년 후 그는 좀 더 자신 있게 걸터앉았다. 캔버스는 좀 더 가까워지고 당당해졌다. 크고 작은 수많은 그림이 주변을 가득 채우며, 자신의 실루엣을 만든다. 시커먼 빈 칸 같은,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실루엣. 그리며 살아온 날들이 쌓이고, ‘작가로서의 그’라는 결과물을 갈수록 선명히 빚는다. 어깨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인물은 광기에 사로잡힌 어느 폭군의 표상이다. 실루엣 속으로, 적어도 그림에서는 광기어린 폭군 한 번 돼 봄 직 한 거 아니냐는 표정이 슬몃 비친다.
그에게 그림은 성상도, 진리도, 이상향도 아니다. 받들지도, 추구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차라리 굴비 같은 것이다. 어두컴컴한 골방 한가운데 너울너울 짚으로 동여 내건 굴비. 실컷 바라보고 킁킁대는 것만으로도, 맨밥을 껴안고 기쁘게 수저를 놀릴 수 있다. 근사한 목표로 삼거나 특정한 소비 효용이 없어도 충분하다.
그의 작업은 현실과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결부한다. 그럼에도 투영에 집착하지 않음에 주목한다. 삶을 담거나 실존을 다룬다기보단, 숫제 실존 그 자체이다. 여느 그림처럼 삶의 자취나 행위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 자체로 생존 수단이다. 그림을 그리면 ‘작가 이규선’으로 살아낼 수 있다. 멈추면 인간 이규선은 몰라도 작가 이규선은 죽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목숨줄이다. 생계를 능히 이을 밥줄이 되든 못 되든, 이 삶을 살기 위한 생명줄이다. 삶을 유지하는 이 원동력을 그는 ‘붓부심’이라 부르곤 한다. 스스로 결심한 것이다. 굴비 걸고 살기로. 작가로 살기로. 삶을 그린 게 아니다. 그리며 살 뿐.
‘그리는 삶’을 살아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양아치’라 낮잡지 않으니까. 크고 질기고 아주 푹신한 짚더미-막 해도, 포기해도, 내던져도, 울부짖어도, 구는 대로 다 받아주는 관대한 것, 포용하는 것, 게다가 유일한 것- 그에게 그림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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