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한 소고
젤라씨
영화 <헤어질 결심>은 형사와 피의자로 만나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관계는 쫓고 쫓기는 사랑이라는 관계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 스토리’의 노선을 따라간다. 이 등장인물들은 감독, 작가가 설정해 놓은 역할, 즉 롤플레잉을 통해 만들어지는 ‘관계’에 근간하고 있다. 이 롤플레이어들의 역할 설정이 미장센을 만들고, 관계 간의 중력을 그려낸다.
이 관계항은 영화의 유한한 시간, 책의 한정된 페이지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던 결말을 맺는다. 특히 이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 스토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안개와 같은 잔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 관계의 결말이 ‘미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담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각자에게 흐르는 시간이 달라 영원히 마주보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관계. 우리는 이 롤플레잉을 감상하며 일시적이지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극 중 등장인물의 관계가 한정된 러닝타임과 페이지를 넘어 관객과 독자의 마음속에서 오래 남는 각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는 미술에 있어서 꽤 중점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1990년대 말, 2000년대의 중요한 미술 담론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 미학’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작가가 그려내고 배치하는 레퍼런스들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작품과 관객이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 이론은 순수한 형식에 머물러야 하는 예술의 환상에서 관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더니즘을 거쳐 아방가르드로 이어지는 헤게모니와 계보를 받아 치는 예술의 관계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도 구별되는 방법론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신사회, 핸드폰의 무한한 이미지 속에서, 이 관계성 또한 무시간의 바다에 표류되었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부리오의 관계 미학 안에서 작동하는 여러 공동체적, 소통의 예술 작품들이 ‘이벤트로 전락한 예술’이라고 말하며 오늘날 관계 미학은 시효를 다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 또한 이러저러한 관계를 설정하고 수행하기를 강요당하는 작품을 보며 이 관계 또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소비되어 버리는 피곤한 경험이 있다. 맛집에 가서 줄을 서고, 트렌드를 느끼며 인싸가 되는 롤플레잉을 경험하는 모습과 같이 이러한 미술 작품 또한 휴머니즘을 느껴 보길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이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아주 짧게나마 작품의 휴먼 터치를 느끼는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소비적인 관계일지언정,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리얼리티일지언정, 이러한 순간적인 관계의 감각 또한 유의미한 것일까.
앞서 말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관계로 되돌아가 보자. 이 관계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한시성에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 작품들을 단순히 소비해 버리기 위해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랑의 이야기가 일시적인 유행으로 소비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인데, 미술도 마찬가지로 이 한시적으로 느껴지는 공동체의 연결된 감각이라도, 이런 유사-감각을 줄 수 있는 작업이라도 계속 이 관계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가치가 시간성을 잃고 표류하게 된 오늘날의 한시성과 모순성이 조금은 슬프지만, 그래도 물화된 우리네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소박한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관계성이 텅 빈 기표에 대항하는 행동주의의 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관계에 대한 소고
젤라씨
영화 <헤어질 결심>은 형사와 피의자로 만나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관계는 쫓고 쫓기는 사랑이라는 관계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 스토리’의 노선을 따라간다. 이 등장인물들은 감독, 작가가 설정해 놓은 역할, 즉 롤플레잉을 통해 만들어지는 ‘관계’에 근간하고 있다. 이 롤플레이어들의 역할 설정이 미장센을 만들고, 관계 간의 중력을 그려낸다.
이 관계항은 영화의 유한한 시간, 책의 한정된 페이지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던 결말을 맺는다. 특히 이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 스토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안개와 같은 잔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 관계의 결말이 ‘미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담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각자에게 흐르는 시간이 달라 영원히 마주보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관계. 우리는 이 롤플레잉을 감상하며 일시적이지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극 중 등장인물의 관계가 한정된 러닝타임과 페이지를 넘어 관객과 독자의 마음속에서 오래 남는 각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는 미술에 있어서 꽤 중점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1990년대 말, 2000년대의 중요한 미술 담론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 미학’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작가가 그려내고 배치하는 레퍼런스들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작품과 관객이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 이론은 순수한 형식에 머물러야 하는 예술의 환상에서 관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더니즘을 거쳐 아방가르드로 이어지는 헤게모니와 계보를 받아 치는 예술의 관계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도 구별되는 방법론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신사회, 핸드폰의 무한한 이미지 속에서, 이 관계성 또한 무시간의 바다에 표류되었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부리오의 관계 미학 안에서 작동하는 여러 공동체적, 소통의 예술 작품들이 ‘이벤트로 전락한 예술’이라고 말하며 오늘날 관계 미학은 시효를 다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 또한 이러저러한 관계를 설정하고 수행하기를 강요당하는 작품을 보며 이 관계 또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소비되어 버리는 피곤한 경험이 있다. 맛집에 가서 줄을 서고, 트렌드를 느끼며 인싸가 되는 롤플레잉을 경험하는 모습과 같이 이러한 미술 작품 또한 휴머니즘을 느껴 보길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이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아주 짧게나마 작품의 휴먼 터치를 느끼는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소비적인 관계일지언정,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리얼리티일지언정, 이러한 순간적인 관계의 감각 또한 유의미한 것일까.
앞서 말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관계로 되돌아가 보자. 이 관계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한시성에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 작품들을 단순히 소비해 버리기 위해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랑의 이야기가 일시적인 유행으로 소비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인데, 미술도 마찬가지로 이 한시적으로 느껴지는 공동체의 연결된 감각이라도, 이런 유사-감각을 줄 수 있는 작업이라도 계속 이 관계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가치가 시간성을 잃고 표류하게 된 오늘날의 한시성과 모순성이 조금은 슬프지만, 그래도 물화된 우리네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소박한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관계성이 텅 빈 기표에 대항하는 행동주의의 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2.07 artcritickorea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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