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이 떡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박경종_만수만복_캔버스에 아크릴_222x282cm_2022
Sep. 1. 2022. 신월동박여사
주말에 인천에 약속이 있었다.
처음 가는 카페였다. 거대한 공장을 개조한 공간은 누가 봐도 특이했다.
더 특이한 건, 거기 걸린 그림들. 공장에서 쓰는 갈고리(?)에 그림을 걸었다. 캔버스 아홉 개를 바둑판처럼 엮은 숲 그림이다. 자세히 보니 내가 좋아하는 아기사슴 밤비가 숨어 있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 그런데 제목도 〈보물찾기〉. 오호라? 주변을 살피니 이벤트 가격이란 문구가 보인다. 작가 소개를 만지작대며 쭈뼛거리다, “낱개 구입 가능”을 보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가격에 느낌이 왔다. ‘운명이다.’ 마침 이사해서 집구석이 허전했는데 잘 됐지 뭐야. 그렇게 나도 진짜 작품 하나 걸었다. 보기 좋고, 기분도 좋다. 공간이 확 산다.
며칠 후 근처를 지나는데 내가 못 본 그림이 있다. 복을 비는 전통 그림 백수백복을 최신 감성으로 재해석한 〈만수만복〉 이란다. 북 치는 대신, ‘福’ 치는 토끼가 웃겼다. 안되겠다. 하나 선물해야겠다. 옜다 복받아라.
선물 받은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자랑글을 포스팅했다. ‘좋아요’를 세며 댓글을 체크하다, 문득 전시 초대 메시지를 받았다. 엥? 내 그림 그린 작가님이 참여하는 기획전이다. 다음날 연락이 왔다. 내가 산 그림, 전시에 출품하고 싶은데 빌려줄 수 있겠냐고. Special Thanks에 컬렉터로서 내 이름이 올라간단다. 남편이 어깨를 두드린다. “보는 눈 좀 있네?” 괜히 어깨가 으쓱하다. “알면 됐어.”
오프닝 파티에서 다른 그림 조각 소장자들과 인사했다. 초대받아 함께 간 친구가, 의외의 수준에 놀랐다는 눈빛으로 껌벅껌벅 나를 바라본다. 그날 걔는 그 작가 소품을 세 개나 샀다. 따라 하기는. 그림은 눈이 아니라 귀로 사는 거라더니 영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작가님이 친구에게 간단한 인터뷰를 부탁했다. 작품에 쓰일 소스라고. 아니 작가님, 나는요??
전시회를 간다. 끌리는 그림 한두 점은 꼭 있다. 우리 집에 걸면 어떨까. 아직 가격을 못 봤지만 무섭다. 그림은 화중지병, 사십 평생 그림의 떡이었는데, 봄나물도 깎으며 살았는데, 뒤늦게 한번 질러도 괜찮을까? 언감생심 그림은 무슨, 정신 차리란 소리나 듣진 않을까? 예술성 확실하면서, ‘예술 1도 모르는’ 내가 봐도 어렵지 않고, 모양새 예쁘고, 걸어 두면 어디든 잘 어울리면 좋겠는데. 가끔 큰맘 먹고 어디 선물 한번 해 봄직한, 그런 좋은 내용까지 꼭꼭 눌러 담은 그림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주고 욕먹을 일 없는, 각광받는 유망한 작가의 그림, 안목에 금칠 좀 하는 그림이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그래서 준비했다. 박경종의 이번 개인전 《소장락》은 그 소원을 들어줄 램프의 요정 지니, 드래곤 볼,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자처한다.
가지고 싶은 그림? 익숙한 구석이 있어야 심리적 장벽이 낮다. 세대와 성향을 아우르는 탄성이 중요하다. 교감 접점을, 친근함을 곳곳에 심었다. 마리오, 밤비, 뽀빠이, 마징가… 문학,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만화책을 비롯, 현대 한국을 스친 각종 대중매체의 대표적 모티프를 〈보물찾기〉 카메오로 섭외했다. 추억에 겨워 괜히 부각하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회화스러운 화면 곳곳 절묘히 섞고 은근히 녹이고 살포시 숨겼다.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이미지, 현대인에게 완상玩賞의 잠재성이 큰 이미지를 제안한다.
만남과 인연으로 새 이야기가 피어나는 건, 사람이나 이미지나 매한가지이다. 복돼지, 주렁주렁 박이 열린 초가, ‘우뢰매’를 비롯한 공상과학 로봇물,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유명한 시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참 쉽죠?”로 인기를 끈 밥 로스(1942-1995)의 스피드 페인팅 풍경화, 학창 시절 상장의 장식 패턴을 〈이발소 그림〉에 한데 기웠다. 제각기 출신이 다른, 그럼에도 다들 한번쯤 본 듯 낯설지 않은 복고적 이미지가 한 시공에 얽혀 유례없는 화면을 낳는다.
그의 이미지 변용은 ‘복붙’과는 다른 재치와 유연이 있다. 88세까지 팔팔(‘쌍길 철喆’이 떠오른다)하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 민속놀이 고누가 떠오르는 꾸밈 글씨 ‘福’, 사랑방 캔디가 든 福주머니 등 온갖 수복壽福이 두루 박힌 〈만수만복〉, 한글 도안을 전서체 인장문으로 꼴바꿈해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복’자를 담은 소품 〈무제〉로 전통 도상의 현대화, 지역화, 상품화를 실현한다. 고전의 틀에 동시대 미술의 반응성을 따끈한 쇳물처럼 부어내는, 박경종식 이미지 생산법이다. 그에게 고물은 곧 보물이다.
주기도 받기도 걸기도 좋은 그림은 무엇일까? 누구나 좋아하는 것? 세상에 돈 싫은 사람이 없다. 복福 싫은 사람도. 돈은 아마 복의 한 형태(=돈복)일 거고. 그래, 복! 내가 걸어도 남에게 선물해도 그럴듯한 내용으로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지구촌에서 으뜸가는 도상은 기복祈福일 것이다. 지역과 시대를 그야말로 막론하니. 당장 종교부터, 복을 팔아 신념을 갈취하는 크고 작은 기복 다단계 메커니즘이 있다. 기복은 참 실용적이다. 따지고 보면,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대사 한 줄도 행복 이야기이다. 막상 복이 오고 말고, 효용은 둘째 문제이다. 비는 행위, 기원의 모양새 자체가 보탬과 사려를 전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걸 유형화, 형상화해 증거까지 남기는 ‘복 그림’은 고여금 방방곡곡 사랑받을 수밖에.
이렇게 틀이 선명한 도안을 의도적으로 차용했음에도, 결과물은 의외로 자유분방하고 말랑말랑하다. 생각을 꾸준히 먹여 키우는 그림, 성장하는 그림인 덕. 어지간히 마무리되었다 싶은 작업도, 어울릴 법한 무언가 떠오르면, 언제든 도로 꺼내어 색을 얹고 모양을 덧댄다. 〈보물찾기〉 회화 작업 과정 전반을 병치한 영상 〈보는 나를 본다〉는 모종처럼 성장하는 이미지 생산 체계를 불과 몇십 초 안에 생생히 간추린다. 빈 캔버스에 던진 ‘신토불이’, ‘가치 있는 고민인가’ 등의 형상은 글씨이면서 텍스트이고 또한 그림의 씨앗이 된다. 내용에 색이 붙고 모양에 터치가 찍히며 이미지로 자라는 적나라한 육아기이다.

박경종_보물찾기_캔버스에 아크릴_222x186cm_2022
참, 그러고 보니 추석이 코앞이다. 작가들의 일가친척은 명절마다 궁금해한다. “작가? 도대체 뭐 하는데?”
냉큼 대신 답한다. “뭐 만드는 사람이에요. 비슷하죠. 농부는 쌀 만들고, 생산직은 공산품 만들고, 연구원은 논문 만들고, 점원은 체험을 만들고, 예술가는 이미지 만들고.” 박경종은 이미지를 만든다.
약간의 끄트머리를 제외한, 인류 역사 전반에서 이미지는 마술의 영역이었다. 사진기 없는 사람들에게 파란 하늘이 아닌데 파란 것, 붉은 장미가 아닌데 붉은 것, 사람이 아닌데 누가 봐도 사람의 형상인 것만큼 신기한 게 있을까? 사진술과 기기 보급, 정보화를 따라 동네 배불뚝이 아저씨도 발 닿는 곳마다 얼큰한 셀카를 손바닥 뒤집듯 찍어대고 더불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옛사람의 눈엔 누구나 마술사인 세상이다. 이제 예술가의 역할은 ‘마술사들의 마술사’이다. 이미지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시각이, 리듬이, 발상이 피사체이다. 사물 말고.
시각예술가 대다수가 이러한 마술사, 이미지 생산자의 면모를 지니거나 추구한다. 미술가의 발버둥은 크게 두 가지 라임이 있다. 실험실 연구자와 현업 생산자. 전자가 미술 내적 몸부림이라면, 후자는 미술계를 넘어 내가 사는 사회 전체가 멍석이다. 족적이 곧 삶의 생생한 단면인 것이다. ‘동시대성’은 동시대의 가치를 단지 조형적으로 치환한 미술 내적 고민일까? 만일, 작가의 실업 활동, 즉 이미지 생산, 유통, 운용 행위의 현실화, 현장화, 체험화가 바로 작업의 내용이라면? 길이 달랑 하나뿐인 게 아니다. 전후 가릴 것 없이 일련의 활동 모두가, 동시대성 탐구 그 자체이다.
그림 태그를 주렁주렁 달고 직접 거리로 나선 〈#Tagman〉 시리즈, 작가 협업과 관객 컬렉터 경험을 결합한 소장형 벽화 〈Sharing Painting〉, 관객 참여형 모둠 회화 〈이름 없는 섬〉, 이발소 그림을 이발소에 거는 영업형 전시 《Mobalize》를 거쳐 이번 《소장락》으로 다년간 이어지는 박경종의 행보. 울타리를 넘어 관객에게 선뜻 다가가는 예술 실험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모두가 결국 이미지의 갖은 생산 방법이다. 말하자면 ‘생산 방식으로의 이미지 소비’. 생산과 소비는, 뱀의 머리와 꼬리처럼 눈금 없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이미지는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미지 생산의 동력이 된다. 모든 것은 이를 위한 빌드업이다. 관객에게도 작가에게도 실용적인 전시. 이제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2022 박경종 개인전 《소장락》 전시 서문
2022.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그림의이 떡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박경종_만수만복_캔버스에 아크릴_222x282cm_2022
Sep. 1. 2022. 신월동박여사
주말에 인천에 약속이 있었다.
처음 가는 카페였다. 거대한 공장을 개조한 공간은 누가 봐도 특이했다.
더 특이한 건, 거기 걸린 그림들. 공장에서 쓰는 갈고리(?)에 그림을 걸었다. 캔버스 아홉 개를 바둑판처럼 엮은 숲 그림이다. 자세히 보니 내가 좋아하는 아기사슴 밤비가 숨어 있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 그런데 제목도 〈보물찾기〉. 오호라? 주변을 살피니 이벤트 가격이란 문구가 보인다. 작가 소개를 만지작대며 쭈뼛거리다, “낱개 구입 가능”을 보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가격에 느낌이 왔다. ‘운명이다.’ 마침 이사해서 집구석이 허전했는데 잘 됐지 뭐야. 그렇게 나도 진짜 작품 하나 걸었다. 보기 좋고, 기분도 좋다. 공간이 확 산다.
며칠 후 근처를 지나는데 내가 못 본 그림이 있다. 복을 비는 전통 그림 백수백복을 최신 감성으로 재해석한 〈만수만복〉 이란다. 북 치는 대신, ‘福’ 치는 토끼가 웃겼다. 안되겠다. 하나 선물해야겠다. 옜다 복받아라.
선물 받은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자랑글을 포스팅했다. ‘좋아요’를 세며 댓글을 체크하다, 문득 전시 초대 메시지를 받았다. 엥? 내 그림 그린 작가님이 참여하는 기획전이다. 다음날 연락이 왔다. 내가 산 그림, 전시에 출품하고 싶은데 빌려줄 수 있겠냐고. Special Thanks에 컬렉터로서 내 이름이 올라간단다. 남편이 어깨를 두드린다. “보는 눈 좀 있네?” 괜히 어깨가 으쓱하다. “알면 됐어.”
오프닝 파티에서 다른 그림 조각 소장자들과 인사했다. 초대받아 함께 간 친구가, 의외의 수준에 놀랐다는 눈빛으로 껌벅껌벅 나를 바라본다. 그날 걔는 그 작가 소품을 세 개나 샀다. 따라 하기는. 그림은 눈이 아니라 귀로 사는 거라더니 영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작가님이 친구에게 간단한 인터뷰를 부탁했다. 작품에 쓰일 소스라고. 아니 작가님, 나는요??
전시회를 간다. 끌리는 그림 한두 점은 꼭 있다. 우리 집에 걸면 어떨까. 아직 가격을 못 봤지만 무섭다. 그림은 화중지병, 사십 평생 그림의 떡이었는데, 봄나물도 깎으며 살았는데, 뒤늦게 한번 질러도 괜찮을까? 언감생심 그림은 무슨, 정신 차리란 소리나 듣진 않을까? 예술성 확실하면서, ‘예술 1도 모르는’ 내가 봐도 어렵지 않고, 모양새 예쁘고, 걸어 두면 어디든 잘 어울리면 좋겠는데. 가끔 큰맘 먹고 어디 선물 한번 해 봄직한, 그런 좋은 내용까지 꼭꼭 눌러 담은 그림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주고 욕먹을 일 없는, 각광받는 유망한 작가의 그림, 안목에 금칠 좀 하는 그림이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그래서 준비했다. 박경종의 이번 개인전 《소장락》은 그 소원을 들어줄 램프의 요정 지니, 드래곤 볼,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자처한다.
가지고 싶은 그림? 익숙한 구석이 있어야 심리적 장벽이 낮다. 세대와 성향을 아우르는 탄성이 중요하다. 교감 접점을, 친근함을 곳곳에 심었다. 마리오, 밤비, 뽀빠이, 마징가… 문학,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만화책을 비롯, 현대 한국을 스친 각종 대중매체의 대표적 모티프를 〈보물찾기〉 카메오로 섭외했다. 추억에 겨워 괜히 부각하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회화스러운 화면 곳곳 절묘히 섞고 은근히 녹이고 살포시 숨겼다.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이미지, 현대인에게 완상玩賞의 잠재성이 큰 이미지를 제안한다.
만남과 인연으로 새 이야기가 피어나는 건, 사람이나 이미지나 매한가지이다. 복돼지, 주렁주렁 박이 열린 초가, ‘우뢰매’를 비롯한 공상과학 로봇물,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유명한 시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참 쉽죠?”로 인기를 끈 밥 로스(1942-1995)의 스피드 페인팅 풍경화, 학창 시절 상장의 장식 패턴을 〈이발소 그림〉에 한데 기웠다. 제각기 출신이 다른, 그럼에도 다들 한번쯤 본 듯 낯설지 않은 복고적 이미지가 한 시공에 얽혀 유례없는 화면을 낳는다.
그의 이미지 변용은 ‘복붙’과는 다른 재치와 유연이 있다. 88세까지 팔팔(‘쌍길 철喆’이 떠오른다)하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 민속놀이 고누가 떠오르는 꾸밈 글씨 ‘福’, 사랑방 캔디가 든 福주머니 등 온갖 수복壽福이 두루 박힌 〈만수만복〉, 한글 도안을 전서체 인장문으로 꼴바꿈해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복’자를 담은 소품 〈무제〉로 전통 도상의 현대화, 지역화, 상품화를 실현한다. 고전의 틀에 동시대 미술의 반응성을 따끈한 쇳물처럼 부어내는, 박경종식 이미지 생산법이다. 그에게 고물은 곧 보물이다.
주기도 받기도 걸기도 좋은 그림은 무엇일까? 누구나 좋아하는 것? 세상에 돈 싫은 사람이 없다. 복福 싫은 사람도. 돈은 아마 복의 한 형태(=돈복)일 거고. 그래, 복! 내가 걸어도 남에게 선물해도 그럴듯한 내용으로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지구촌에서 으뜸가는 도상은 기복祈福일 것이다. 지역과 시대를 그야말로 막론하니. 당장 종교부터, 복을 팔아 신념을 갈취하는 크고 작은 기복 다단계 메커니즘이 있다. 기복은 참 실용적이다. 따지고 보면,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대사 한 줄도 행복 이야기이다. 막상 복이 오고 말고, 효용은 둘째 문제이다. 비는 행위, 기원의 모양새 자체가 보탬과 사려를 전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걸 유형화, 형상화해 증거까지 남기는 ‘복 그림’은 고여금 방방곡곡 사랑받을 수밖에.
이렇게 틀이 선명한 도안을 의도적으로 차용했음에도, 결과물은 의외로 자유분방하고 말랑말랑하다. 생각을 꾸준히 먹여 키우는 그림, 성장하는 그림인 덕. 어지간히 마무리되었다 싶은 작업도, 어울릴 법한 무언가 떠오르면, 언제든 도로 꺼내어 색을 얹고 모양을 덧댄다. 〈보물찾기〉 회화 작업 과정 전반을 병치한 영상 〈보는 나를 본다〉는 모종처럼 성장하는 이미지 생산 체계를 불과 몇십 초 안에 생생히 간추린다. 빈 캔버스에 던진 ‘신토불이’, ‘가치 있는 고민인가’ 등의 형상은 글씨이면서 텍스트이고 또한 그림의 씨앗이 된다. 내용에 색이 붙고 모양에 터치가 찍히며 이미지로 자라는 적나라한 육아기이다.

박경종_보물찾기_캔버스에 아크릴_222x186cm_2022
참, 그러고 보니 추석이 코앞이다. 작가들의 일가친척은 명절마다 궁금해한다. “작가? 도대체 뭐 하는데?”
냉큼 대신 답한다. “뭐 만드는 사람이에요. 비슷하죠. 농부는 쌀 만들고, 생산직은 공산품 만들고, 연구원은 논문 만들고, 점원은 체험을 만들고, 예술가는 이미지 만들고.” 박경종은 이미지를 만든다.
약간의 끄트머리를 제외한, 인류 역사 전반에서 이미지는 마술의 영역이었다. 사진기 없는 사람들에게 파란 하늘이 아닌데 파란 것, 붉은 장미가 아닌데 붉은 것, 사람이 아닌데 누가 봐도 사람의 형상인 것만큼 신기한 게 있을까? 사진술과 기기 보급, 정보화를 따라 동네 배불뚝이 아저씨도 발 닿는 곳마다 얼큰한 셀카를 손바닥 뒤집듯 찍어대고 더불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옛사람의 눈엔 누구나 마술사인 세상이다. 이제 예술가의 역할은 ‘마술사들의 마술사’이다. 이미지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시각이, 리듬이, 발상이 피사체이다. 사물 말고.
시각예술가 대다수가 이러한 마술사, 이미지 생산자의 면모를 지니거나 추구한다. 미술가의 발버둥은 크게 두 가지 라임이 있다. 실험실 연구자와 현업 생산자. 전자가 미술 내적 몸부림이라면, 후자는 미술계를 넘어 내가 사는 사회 전체가 멍석이다. 족적이 곧 삶의 생생한 단면인 것이다. ‘동시대성’은 동시대의 가치를 단지 조형적으로 치환한 미술 내적 고민일까? 만일, 작가의 실업 활동, 즉 이미지 생산, 유통, 운용 행위의 현실화, 현장화, 체험화가 바로 작업의 내용이라면? 길이 달랑 하나뿐인 게 아니다. 전후 가릴 것 없이 일련의 활동 모두가, 동시대성 탐구 그 자체이다.
그림 태그를 주렁주렁 달고 직접 거리로 나선 〈#Tagman〉 시리즈, 작가 협업과 관객 컬렉터 경험을 결합한 소장형 벽화 〈Sharing Painting〉, 관객 참여형 모둠 회화 〈이름 없는 섬〉, 이발소 그림을 이발소에 거는 영업형 전시 《Mobalize》를 거쳐 이번 《소장락》으로 다년간 이어지는 박경종의 행보. 울타리를 넘어 관객에게 선뜻 다가가는 예술 실험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모두가 결국 이미지의 갖은 생산 방법이다. 말하자면 ‘생산 방식으로의 이미지 소비’. 생산과 소비는, 뱀의 머리와 꼬리처럼 눈금 없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이미지는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미지 생산의 동력이 된다. 모든 것은 이를 위한 빌드업이다. 관객에게도 작가에게도 실용적인 전시. 이제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2022 박경종 개인전 《소장락》 전시 서문
2022.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