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빈, 장윤희, 하수현 전 《이불 밑은 원래 시끄러워요》
알아서 모인다
물은 바다에, 인생의 뒤끝은 이불 밑에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대마도의 어느 산장에서 새해를 났다. 살을 에는 혹한은 아니나 은근히 시린 뼈마디와 닥닥 부딪는 어금니, 부실한 난방과 단열에도 그 산장은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데, 다름 아닌 ‘이불’ 덕분이다. 깔고 덮기 괜히 미안할 정도로, 눈이 시리게 새하얀 이불과 요. 족히 한 뼘은 될 듯, 말도 안 되게 두툼했다. 나는 바닥에서 잘 자지 못하지만 거기선 자신 있다. 이불이 아니라 구름 위니까. 몸에 감기는 게 질색인 나는 소매가 넓고 뻣뻣한 옷을 좋아한다. 그 이불이 딱 그랬다. 빵빵히 들어찬 거위털에 떠밀린 빳빳한 하얀 면 커버가 투정하듯 살짝 밀치며 살에 부딪는, 그래서 이리저리 튄 핀볼 구슬처럼 내가 공중에 뜬 기분. 그리 두꺼운데, 이고 덮고 안고 굴러도 도무지 무겁지 않았다.

안선빈_자국이 사라지지 않아_캔버스에 유채_72.5×53cm_2025
그런데 한편으론 마냥 맑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먹구름이 늘 섞여 끼는 게 또 이불 밑. 포근한 와중에 조그맣게 몰래 걱정한다. 체크아웃과 함께 닥칠 이불 세탁의 시련. 내가 빨 것도 아니면서 근처 코인 세탁소는 왜 찾아봤을까? 고백하건대 사실 난 밤에도 낮잠을 잔다. 세 작가의 말처럼, 낮잠은 깊게 자는 잠과 다르다. 언제든 깰 수 있다. 평소에 힘주어 생각하지 않던 장면이 떠나질 않는다. 어수선한 기분이 들끓는다. 난 몇 년째 그래 왔다. 깨면 피로만 남는 하루의 뒤끝. 공상과 미련에 이불 밑은 그저 알코올 없는 숙취이다.

하수현_창문 너머_장지에 채색_145.5×112.1cm_2023
세 작가의 조합은 그저 이불이라기보다, 집집마다 각양각색 이부자리를 꾸민, 시끌벅적 아파트를 닮았다. 나를 가로세로 겹겹이 둘러싼 우리 집과 옆집, 그리고 그 주변 세대처럼. 안선빈의 속옷 자국은 집에 돌아와도 하루의 뒤끝처럼 몸에 박힌 흔적, 장윤희의 숟가락은 만나도 헤어져도 옆집처럼 늘 이어진, 나와 너를 마주 비추는 거울, 하수현의 흰 눈발과 발자국은 내 눈길 내 걸음 가는 대로 시야에 기웃기웃 늘 따라오는, 미련퉁이 주변 아파트 같은 풍경이다. 무미건조 흔해 빠진, ‘일상’이란 아파트에 숨은 미세한 층간 소음을 감지하는, 작가라는 섬세한 검출기가 층층이 집집마다 차례로 들춘다. 소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생의 뒤끝’. 이를 끄집어내어 다시 낯설게, 새삼 매만지는 그런 조합이다.

장윤희_7942_광목에 채색_20×20cm_2025
그들의 이미지는 하나같이, 내러티브를 강하게 시사함에도 그에 앞서 물성이 또렷하다. 재료 말고 감정적 물성이. 각자의 감각 필터의 독특한 패턴이나 성분, 질감이 직접적으로 안구 표면에 간질간질 전해진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딱히 그럴 필요도 없다. 자국이 난 등짝처럼 희멀겋고, 현타 맞은 내 머릿속처럼 이지러지고, 뺨에 닿아 녹은 눈발처럼 반짝이니까. 덕분에 그들이 고심한 전시 제목을 접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불 밑? 일상의 뒤끝, 층간 소음의 진원지!’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현대 격언이 있다. 겨울 아랫목의 이부자리만치 헤어 나오기 힘든 게 있을까? 그런데 시끄러운 이불 밑, 밤낮없는 낮잠은 또 그만 헤어나고 싶다. 덮고 싶고 차고 싶은 애증의 이불. 저마다의 인생 뒤끝에 시끌벅적 바람 잘 날 없는, 세 작가의 이불 밑 층간 소음을 눈으로 들어 본다.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안선빈, 장윤희, 하수현 전 《이불 밑은 원래 시끄러워요》
알아서 모인다
물은 바다에, 인생의 뒤끝은 이불 밑에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대마도의 어느 산장에서 새해를 났다. 살을 에는 혹한은 아니나 은근히 시린 뼈마디와 닥닥 부딪는 어금니, 부실한 난방과 단열에도 그 산장은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데, 다름 아닌 ‘이불’ 덕분이다. 깔고 덮기 괜히 미안할 정도로, 눈이 시리게 새하얀 이불과 요. 족히 한 뼘은 될 듯, 말도 안 되게 두툼했다. 나는 바닥에서 잘 자지 못하지만 거기선 자신 있다. 이불이 아니라 구름 위니까. 몸에 감기는 게 질색인 나는 소매가 넓고 뻣뻣한 옷을 좋아한다. 그 이불이 딱 그랬다. 빵빵히 들어찬 거위털에 떠밀린 빳빳한 하얀 면 커버가 투정하듯 살짝 밀치며 살에 부딪는, 그래서 이리저리 튄 핀볼 구슬처럼 내가 공중에 뜬 기분. 그리 두꺼운데, 이고 덮고 안고 굴러도 도무지 무겁지 않았다.

안선빈_자국이 사라지지 않아_캔버스에 유채_72.5×53cm_2025
그런데 한편으론 마냥 맑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먹구름이 늘 섞여 끼는 게 또 이불 밑. 포근한 와중에 조그맣게 몰래 걱정한다. 체크아웃과 함께 닥칠 이불 세탁의 시련. 내가 빨 것도 아니면서 근처 코인 세탁소는 왜 찾아봤을까? 고백하건대 사실 난 밤에도 낮잠을 잔다. 세 작가의 말처럼, 낮잠은 깊게 자는 잠과 다르다. 언제든 깰 수 있다. 평소에 힘주어 생각하지 않던 장면이 떠나질 않는다. 어수선한 기분이 들끓는다. 난 몇 년째 그래 왔다. 깨면 피로만 남는 하루의 뒤끝. 공상과 미련에 이불 밑은 그저 알코올 없는 숙취이다.

하수현_창문 너머_장지에 채색_145.5×112.1cm_2023
세 작가의 조합은 그저 이불이라기보다, 집집마다 각양각색 이부자리를 꾸민, 시끌벅적 아파트를 닮았다. 나를 가로세로 겹겹이 둘러싼 우리 집과 옆집, 그리고 그 주변 세대처럼. 안선빈의 속옷 자국은 집에 돌아와도 하루의 뒤끝처럼 몸에 박힌 흔적, 장윤희의 숟가락은 만나도 헤어져도 옆집처럼 늘 이어진, 나와 너를 마주 비추는 거울, 하수현의 흰 눈발과 발자국은 내 눈길 내 걸음 가는 대로 시야에 기웃기웃 늘 따라오는, 미련퉁이 주변 아파트 같은 풍경이다. 무미건조 흔해 빠진, ‘일상’이란 아파트에 숨은 미세한 층간 소음을 감지하는, 작가라는 섬세한 검출기가 층층이 집집마다 차례로 들춘다. 소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생의 뒤끝’. 이를 끄집어내어 다시 낯설게, 새삼 매만지는 그런 조합이다.

장윤희_7942_광목에 채색_20×20cm_2025
그들의 이미지는 하나같이, 내러티브를 강하게 시사함에도 그에 앞서 물성이 또렷하다. 재료 말고 감정적 물성이. 각자의 감각 필터의 독특한 패턴이나 성분, 질감이 직접적으로 안구 표면에 간질간질 전해진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딱히 그럴 필요도 없다. 자국이 난 등짝처럼 희멀겋고, 현타 맞은 내 머릿속처럼 이지러지고, 뺨에 닿아 녹은 눈발처럼 반짝이니까. 덕분에 그들이 고심한 전시 제목을 접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불 밑? 일상의 뒤끝, 층간 소음의 진원지!’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현대 격언이 있다. 겨울 아랫목의 이부자리만치 헤어 나오기 힘든 게 있을까? 그런데 시끄러운 이불 밑, 밤낮없는 낮잠은 또 그만 헤어나고 싶다. 덮고 싶고 차고 싶은 애증의 이불. 저마다의 인생 뒤끝에 시끌벅적 바람 잘 날 없는, 세 작가의 이불 밑 층간 소음을 눈으로 들어 본다.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