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서기 위하여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박준수

I'm strong 비수가 내리던 날 72.7x60.6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중소기업의 도산, 실직과 파산, 거리로 내몰린 가장들. 그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속에서 우리의 일상도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대를 ‘고난 속의 낭만’으로 기억하곤 한다. 박세리는 맨발 투혼으로 LPGA 우승을 차지했고, 양희은의 ‘상록수’가 흐르던 공익광고 속에서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희망의 공을 던졌고, 전국적으로 시행된 금모으기 운동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회복시켰다. 우리는 그런 힘든 시간을 함께 단단히 뭉쳐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함께 이겨낸 시대’의 이면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들이 있었다. 사회의 붕괴와 함께 무력하게 무너져버린 우리의 아버지들, 그리고 너무 일찍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들이다.
IMF를 극복하고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던 2000년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덕담처럼 자리 잡았다. 2001년 말, 한 광고에서 당시 가장 인기가 많던 여배우 김정은이 붉은 스웨터를 입고 설원 위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며 국민적 공감을 얻었고, 그해 새해 인사말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 광고가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을 던졌다면, 금융·보험사들은 그보다 한발 앞서 무거운 메시지를 내놓았다. 삼성생명의 “부자 아빠”라는 슬로건은 가장의 책임과 경제력이라는 이상을 묵직하게 제시했고, ‘가난은 되물림된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 많은 아버지들이 좌절했다. '부자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도식은 거대한 사회적 명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부자 아빠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아빠는 아니다. ‘좋은 아빠’라는 말은 여전히 다양한 방향성과 가치관을 품고 있는 말이다. 한충석 작가에게도 그랬다. 그는 불안정한 작가라는 직업 안에서도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로 가족을 돌보고, 책임을 다하는 길을 선택했다.

The Girl 27.3x27.3cm(5S)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그는 주말이면 작업실로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작업과 가족의 삶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스스로도 좋은 아빠가 되고자 애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아빠’란 자식에게 풍요를 보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기꺼이 감정을 나누며, 정서적 안전망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 속 가족들은 긴 눈매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에는 불안 대신 따뜻함이 묻어난다. 아이들은 천천히 그 안에서 건강한 자아를 갖춘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The Boy _ The sound of mind 마음의 소리 90.9x72.7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한충석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 외에도 유독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그는 교과서 속 철학자들의 아포리즘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려 했다. 그 시절의 공부는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신적 무장이었다. 그렇게 체화된 사상들은 그의 내면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이후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적 신념으로 발전했다.
그에게 도덕은 단지 규범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였다. 많은 한국의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우리는 모두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왔다. 자아 실현보다는 집단과 관계를 우선시하며, 희생을 미덕으로 여겨온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한충석 작가 역시 그런 사회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족들에게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윤리적 의무는 그의 예술 속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작업에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써온 흔적이 담겨 있다. 눈치를 보며 거리를 재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따뜻함을 나누고자 애쓰는 존재들. 그것이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품고 있는 정서다.
이제 그는 서서히 ‘좋은 아빠’, ‘타의 모범이 되는 바른 사람’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다.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고 있다. 그의 이번 작업은 그 여정을 담은 자화상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시간’을 조용히 꺼내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Relationship Practice 관계연습 145.5x112.1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서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놓았다.
한충석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그 시간 중 2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나머지 시간은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관계의 미묘한 결, 감정의 거리, 눈치라는 감각에 대한 깊은 탐구로 채워져 있다.
그는 눈치를 보되 결코 휘둘리지 않는다. 조용하고 단단하게,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그려나간다. 한 개인이자 작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그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회화를 넘어선 그의 자화상이다.
오랜 시간 ‘관계’라는 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왔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도 같은 관계 속에서도 비록 흔들릴지언정 잘 서 있는 법에 대한 고민의 답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한충석은, 이 땅에 서기 위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To stand on this land 이땅에 서기 위하여 193.9x130.3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이 땅에 서기 위하여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박준수

I'm strong 비수가 내리던 날 72.7x60.6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중소기업의 도산, 실직과 파산, 거리로 내몰린 가장들. 그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속에서 우리의 일상도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대를 ‘고난 속의 낭만’으로 기억하곤 한다. 박세리는 맨발 투혼으로 LPGA 우승을 차지했고, 양희은의 ‘상록수’가 흐르던 공익광고 속에서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희망의 공을 던졌고, 전국적으로 시행된 금모으기 운동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회복시켰다. 우리는 그런 힘든 시간을 함께 단단히 뭉쳐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함께 이겨낸 시대’의 이면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들이 있었다. 사회의 붕괴와 함께 무력하게 무너져버린 우리의 아버지들, 그리고 너무 일찍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들이다.
IMF를 극복하고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던 2000년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덕담처럼 자리 잡았다. 2001년 말, 한 광고에서 당시 가장 인기가 많던 여배우 김정은이 붉은 스웨터를 입고 설원 위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며 국민적 공감을 얻었고, 그해 새해 인사말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 광고가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을 던졌다면, 금융·보험사들은 그보다 한발 앞서 무거운 메시지를 내놓았다. 삼성생명의 “부자 아빠”라는 슬로건은 가장의 책임과 경제력이라는 이상을 묵직하게 제시했고, ‘가난은 되물림된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 많은 아버지들이 좌절했다. '부자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도식은 거대한 사회적 명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부자 아빠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아빠는 아니다. ‘좋은 아빠’라는 말은 여전히 다양한 방향성과 가치관을 품고 있는 말이다. 한충석 작가에게도 그랬다. 그는 불안정한 작가라는 직업 안에서도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로 가족을 돌보고, 책임을 다하는 길을 선택했다.

The Girl 27.3x27.3cm(5S)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그는 주말이면 작업실로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작업과 가족의 삶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스스로도 좋은 아빠가 되고자 애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아빠’란 자식에게 풍요를 보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기꺼이 감정을 나누며, 정서적 안전망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 속 가족들은 긴 눈매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에는 불안 대신 따뜻함이 묻어난다. 아이들은 천천히 그 안에서 건강한 자아를 갖춘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The Boy _ The sound of mind 마음의 소리 90.9x72.7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한충석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 외에도 유독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그는 교과서 속 철학자들의 아포리즘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려 했다. 그 시절의 공부는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신적 무장이었다. 그렇게 체화된 사상들은 그의 내면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이후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적 신념으로 발전했다.
그에게 도덕은 단지 규범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였다. 많은 한국의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우리는 모두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왔다. 자아 실현보다는 집단과 관계를 우선시하며, 희생을 미덕으로 여겨온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한충석 작가 역시 그런 사회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족들에게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윤리적 의무는 그의 예술 속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작업에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써온 흔적이 담겨 있다. 눈치를 보며 거리를 재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따뜻함을 나누고자 애쓰는 존재들. 그것이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품고 있는 정서다.
이제 그는 서서히 ‘좋은 아빠’, ‘타의 모범이 되는 바른 사람’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다.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고 있다. 그의 이번 작업은 그 여정을 담은 자화상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시간’을 조용히 꺼내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Relationship Practice 관계연습 145.5x112.1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서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놓았다.
한충석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그 시간 중 2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나머지 시간은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관계의 미묘한 결, 감정의 거리, 눈치라는 감각에 대한 깊은 탐구로 채워져 있다.
그는 눈치를 보되 결코 휘둘리지 않는다. 조용하고 단단하게,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그려나간다. 한 개인이자 작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그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회화를 넘어선 그의 자화상이다.
오랜 시간 ‘관계’라는 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왔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도 같은 관계 속에서도 비록 흔들릴지언정 잘 서 있는 법에 대한 고민의 답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한충석은, 이 땅에 서기 위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To stand on this land 이땅에 서기 위하여 193.9x130.3cm acrylic on korean cotton 2025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