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Canvas Ep. 4 - 전시에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좋은 전시를 보게 되면 드는 생각이 있다. ‘우와! 엄청 고생했겠다’라는 생각이다.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사람들 간의 조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획을 맡고 누군가는 창작에 전념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실현 가능한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이 과정이 결코 쉽게 어우러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전시의 이면을 들여다 봤을 때, 과연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서 이러한 결과물이 만들어졌을까? 그랬는지 어땠는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지만(당사자 간에도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완성된 전시의 표면 아래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구조적 비대칭이 자리하고 있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구조가 좋은 전시에 대해 고생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은 단일하지 않다. 주제를 설정하는 기획자,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정책과 제도를 다루는 기관의 입장은 각기 다르고 그 안에서의 실천과 태도도 제각각이다. 이 실천 주체들의 협업이 일견 이상적인 협력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발화가 정당화되는 방식, 결정권이 행사되는 절차, 실패의 책임이 남는 자리에 따라 그 구조가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비대칭이 ‘누가 더 강한가’라는 권력(위계)의 논리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데에 있다. 권력은 단지 권한의 다툼이나 책임의 전가가 아니라 위치와 조건, 제도와 해석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장치이다. 어떤 전시에서는 기획자의 언어가 절대적인 해석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전시에서는 작가의 발화가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기관의 방향성이 모든 실천의 경계를 결정짓기도 한다.
이와 같이 어느 하나 정해진 바 없는데다가 때마다 달라지는 구조 속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누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며 그 결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동시대 미술 생태계 안에서 권력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간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이렇게 변해버린 예술 생태계에 우리는 놓여져 버렸다. 이 주옥같은 생태계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예쁜 문장으로 포장하자면, 미술 생태계가 더욱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그리고 더 건강한 필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장과 위치, 역할에 따른 구조를 가감 없이 진단하고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2.
권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행위나 위계의 폭력성을 암시하는 단어로 인식되기 쉬운데다가 예술처럼 창의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매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전시라는 결과가 하나의 서사로 구성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유통되는 과정에는 애덤 스미스도 고개 끄덕일만한 ‘보이지 않는’ 작동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는 어떻게 포장해보려 해도 ‘권력’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조건들을 내포한다.
이러한 권력은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에 귀속된 단일한 힘이 아니다. 전시를 구성하는 주체들, 즉 작가와 기획자 그리고 기관은 각각 고유한 위치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상호 조정되며, 그 역할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기획자는 전시의 개념을 제안하고 서사를 구조화하지만 기관의 승인이나 방향성에 의해 수정되거나 제한되기도 하며 작가는 자율적 창작의 주체로 여겨지지만 기획의 틀 속에서 표현의 방향을 조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기관은 전시가 사회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물적·제도적 조건을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권력은 한 주체에 집중되지 않고 관계와 위치, 조건이 교차할 때 작동한다.
이때 우리는 ‘누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가’보다 ‘어디서 권력이 발생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보다 그것이 발생하고 축적되는 지점을 추적해야만 실제 구조의 비대칭을 가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구성하는 내적 조건을 더 세분화해 보아야 한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여러 복합적인 작동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권위’는 말할 수 있는 입장과 언어를 정당화하는 기준이고 ‘권리’는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닐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 여기에 ‘권한’은 무엇을 해석하고 어떻게 언어화할지를 결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누구의 말이 공적 언어로 승인되는지, 누가 의미를 정의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곧 이 권위와 권리 그리고 권한이 어디서 교차하고 있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한다.
3.
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쫓아가보자면, 그 처음 시작은 기획자의 판단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의 개념을 제안하고 서사를 구상하며 작가에게 참여를 제안하고 전체 흐름을 설계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 과정을 수행하는 기획자를 명확한 ‘설계자’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현실의 전시 과정 속에서 기획자는 일련한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다수의 판단과 조건 사이에서 그 균형을 조율하는 ‘중재자’에 가깝다. 예산의 규모와 항목 구조, 기관의 운영 기조, 작가의 위상과 작업의 실행 가능성, 공간적 제약과 행정적 절차 같은 현실의 제약들이 겹쳐지면서 기획자의 과업은 끝도 없이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선택자’로서 권위를 부여받으면서도 실제로는 협상과 조정이라는 마법 같은 실무를 수행한다. 작가의 선정은 권력의 행사처럼 보이지만 그 선정에는 기관의 기대, 예산의 조정 가능성, 지역성과 담론성, 행정 절차 등의 제약이 뒤엉켜 있다. 또한 전시의 핵심 구조와 메시지를 기획자가 제시하더라도 그 실현 방식은 작가의 작업 특성과 기관의 운영 방식, 설치 조건 등에 의해 끊임없이 조율된다. 기획자는 결정권자처럼 보이지만 그 결정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고 최악의 경우에는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만을 떠안게 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정리하면 기획자의 손에는 권력이란 칼이 쥐어져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칼을 뽑기 위해서는 기관의 결재가 필요하다. 결재를 받고 칼을 뽑았다 하더라도 휘두를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기획자의 권력은 잠정적이며 조건부로 존재한다. 어쨌거나 이 권력은 발화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권위, 조건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실패를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위치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획자는 스스로도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명히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각자의 필요와 입장을 교차시켜야 하는 실무의 구조 안에서 기획자는 권력을 구성하는 연결점이자 중간지점으로 기능한다.
4.
작가의 위치를 묘사하는 문장들을 정리해보면 ‘창작의 자유를 가진 존재’, ‘기획자의 요청을 수용하는 수동적 위치’, 혹은 ‘제도의 바깥에서 발화하는 자율적 주체’ 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이 반드시 권위적 언행이나 결정권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제도 안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받지 않더라도 실제 작동하는 권력은 관계와 구조 안에 은밀히 침투해 있다. 예컨대 전시의 서사에서 작가의 작업은 실질적으로 의미의 축을 구성한다. 작가가 제시한 언어와 이미지, 태도와 형식은 기획의 흐름과 제도의 틀 안에서 중심축으로 작용하며 이는 곧 전시 서사의 주요한 의미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방식은 평론가나 기획자의 언어로 제시되곤 하지만 그 해석이 뜬금없진 않다. 어느 정도의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작업 자체가 이미 부여한 구조에서 비롯된다. 작품은 하나의 오브제이자 콘텐츠이며 담론의 원천이 된다. 관객은 작가의 이름으로 전시를 기억하고 기관은 작가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설계하며 미술계는 작가를 중심으로 담론을 구성한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프로젝트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힘을 가진다. 작품 제작의 진척, 작업의 수용 범위, 수정 가능성 등은 작가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이는 곧 프로젝트 전체의 일정과 디테일을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권한의 경계를 사실상 재설정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전시 외부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권력을 구성한다. 예술계 내 위상, 비평적 담론의 참여 정도, 공모 및 수상 이력, 기존의 협력 관계 등은 전시 현장과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시 구성의 초반부터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곧 작가가 특정 전시의 정체성과 외부적 평가를 좌우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주체라는 점을 방증한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권리와 위치는 기획자나 기관이 손댈 수 없는 ‘바깥의 권력’인 셈이다.
그렇게 작가는 제도적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지만 결과를 구성하는 데 있어 결코 주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권력은 ‘공식화되지 않은 힘’, ‘바뀔 수 없는 중심의 위치’, 그리고 ‘서사 생산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비권력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의 작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방증하는 예가 기획의 초기 단계에서 작가의 이름은 기획안을 통과시키는 명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작가의 부재는 사업의 승인 자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 사례들일 것이다. 작가의 태도, 요구, 대응 방식은 기획의 전체 구조를 수정하게 만들 수 있고 때로는 프로젝트의 일정과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작가의 권력은 제도 밖에서 작동하는 영향력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이름의 무게, 위치의 위상, 담론의 기반으로 기능하며 현실적으로도 기획자의 판단과 기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작가가 스스로의 권력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무의식적이거나 관계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작동한다. 그러나 그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시의 권력 구조가 특정 주체에만 고정되지 않고 구성원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를 다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5.
작가와 기획자의 실천을 담는 ‘공간’이자 창작을 지원하는 ‘운영체계’로 기능하는 기관은 중립적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기관은 단지 현장을 제공할 뿐 전시의 내용이나 구성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전제되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중립성은 어디까지나 수사적 표현에 가까운데, 실제로 전시의 향방을 결정짓는 운영회의, 기획안의 승인 절차, 예산의 조정과 분배, 작가 섭외 기준과 같은 설정 등은 모두 기관의 권한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관은 외형상 작가와 기획자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위치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종 결정권을 보유한 운영자에 가깝다. 특히 공공예산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경우, 기획안의 방향성과 예산 규모는 기관 내부의 운영 기조와 전략적 목적에 따라 조율되며 이는 전시의 주제 선정이나 작가 섭외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시에서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내용이 다뤄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는 기획자 개인의 판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몇몇 기관은 사회적 위상이나 대외적 브랜드를 유지하려는 관성 또한 작동하기에 기획자는 이를 사전에 고려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기관에 제안되는 기획안들은 이미 자기 검열을 몇 번이나 마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공모사업은 이러한 제도적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공모사업은 예산의 흐름뿐 아니라 평가 기준, 수행 조건, 결과물의 형식까지도 어느 정도 규정짓는다. 사업명과 목적, 평가 기준과 지원 항목은 곧 기획과 실현 사이의 여지를 제한하고 재단하는 ‘형식’이 된다. 사실상 기획자든 작가든 공모사업에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형식(form)’을 고민하기보다 ‘형식(template)’을 더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 형식이(form이든 template이든) 오늘날 전시가 조직되는 가장 보편적인 틀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관례에도 불구하고 사업계획서의 목적과 예산 항목은 전시의 주제와 구성, 실현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핵심 변수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제도적 권력은 무겁고, 무엇보다 가시적이다. 기관이 제공하는 지원의 조건은 그 자체로 발언의 방향과 형식을 한정하며 전시가 가능해지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 안에서 기획자와 작가는 기관이 설정한 조건을 실현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야 하고, 때로는 그 방식이 기관의 위상이나 평판과 충돌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정되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시는 예술적 사건이기 이전에 제도적 승인과 행정적 구조 위에서 작동하는 결과물이 된다. 다시 말해 전시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결정과 조율은 각각의 이해관계와 조건을 반영한 복합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성과의 책임 또한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6.
살펴본 것과 같이 전시의 구조를 설계하는 기획자는 그 이면의 권한 구조에는 완전히 접근하지 못한다. 주요한 결정은 기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며 작가의 섭외나 주제 설정마저도 기관의 선호나 방향성에 영향을 받는다. 기획자는 이 프레임 안에서만큼은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 봤을 때는 조건과 한계 내에서 조율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일개미일 뿐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이 구조를 봤다면 자기 이론이 물리학을 넘어 제도 설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을지도 모르겠다. 결정의 지점은 명확하지 않고 책임의 선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기관이 전지적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는 볼 수는 없다. 행정 절차와 평가 제도의 간극에서 기관은 자유보다는 조심을 택할 수밖에 없고 책임보다는 판단 유예를 선호한다. 결정은 늘 존재하지만 그 결정의 주체는 늘 사라진다. 권력은 명확히 말해지기보다 그저 작동하는 방식으로 가시성보다는 익명성 속에서 기능한다. 권력은 늘 작동 중이지만 결코 중심에 존재하지 않는 이 상황은 미셸 푸코가 또 한 번 승리했음을 방증한다.
주지하듯이 작가는 그 자체로 가장 자율적이지만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자신의 작품이 의도한 방식으로 맥락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 해석이 지나치게 정돈되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는 전시의 실현 조건이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평론가나 기획자가 제시하는 문맥은 작업의 개방성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작가의 언어는 그 과정에서 무력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전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시는 누구의 것인지 묻기 어려운 결과물이다. 좋은 전시가 구성되면 작가는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되고 기관은 운영의 성과로 위상을 높이게 된다. 그러나 기획자는 관객들이 대개는 읽지 않고 지나치는 서문을 그렇게 정성껏 써두고는 전시의 뒷켠으로 물러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전시가 실패하면 가장 중앙에서 조율한 역할로서 책임의 중심에 놓인다. 권한은 흩어져 있지만 책임은 모인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과업을 수행했고 그 누구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기획자는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를 형식(template)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권력은 더 많이 쥐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전시에서 권력의 구조가 피라미드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각자의 주체적 위치에서 역할과 책임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넘나든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총량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결정권을 행사하고 어떤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권력을 나누자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분포되어 있는 권력의 형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감각이다.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있고 누구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를 명확히 이해할 때 전시는 공정하게 조율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제도적 장치를 넘어 우리가 서 있는 미술씬이 건강해질 수 있는 실천이자 방식이다. 전시의 권력 구조를 ‘재분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권력의 구성 상태에 대한 집단적 인식의 전환이다. 권력은 누군가만 가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고, 명명하고, 조율하는 과정이야말로 건강한 전시 구조가 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Off the Canvas Ep. 4 - 전시에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좋은 전시를 보게 되면 드는 생각이 있다. ‘우와! 엄청 고생했겠다’라는 생각이다.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사람들 간의 조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획을 맡고 누군가는 창작에 전념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실현 가능한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이 과정이 결코 쉽게 어우러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전시의 이면을 들여다 봤을 때, 과연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서 이러한 결과물이 만들어졌을까? 그랬는지 어땠는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지만(당사자 간에도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완성된 전시의 표면 아래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구조적 비대칭이 자리하고 있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구조가 좋은 전시에 대해 고생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은 단일하지 않다. 주제를 설정하는 기획자,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정책과 제도를 다루는 기관의 입장은 각기 다르고 그 안에서의 실천과 태도도 제각각이다. 이 실천 주체들의 협업이 일견 이상적인 협력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발화가 정당화되는 방식, 결정권이 행사되는 절차, 실패의 책임이 남는 자리에 따라 그 구조가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비대칭이 ‘누가 더 강한가’라는 권력(위계)의 논리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데에 있다. 권력은 단지 권한의 다툼이나 책임의 전가가 아니라 위치와 조건, 제도와 해석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장치이다. 어떤 전시에서는 기획자의 언어가 절대적인 해석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전시에서는 작가의 발화가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기관의 방향성이 모든 실천의 경계를 결정짓기도 한다.
이와 같이 어느 하나 정해진 바 없는데다가 때마다 달라지는 구조 속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누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며 그 결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동시대 미술 생태계 안에서 권력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간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이렇게 변해버린 예술 생태계에 우리는 놓여져 버렸다. 이 주옥같은 생태계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예쁜 문장으로 포장하자면, 미술 생태계가 더욱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그리고 더 건강한 필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장과 위치, 역할에 따른 구조를 가감 없이 진단하고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2.
권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행위나 위계의 폭력성을 암시하는 단어로 인식되기 쉬운데다가 예술처럼 창의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매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전시라는 결과가 하나의 서사로 구성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유통되는 과정에는 애덤 스미스도 고개 끄덕일만한 ‘보이지 않는’ 작동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는 어떻게 포장해보려 해도 ‘권력’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조건들을 내포한다.
이러한 권력은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에 귀속된 단일한 힘이 아니다. 전시를 구성하는 주체들, 즉 작가와 기획자 그리고 기관은 각각 고유한 위치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상호 조정되며, 그 역할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기획자는 전시의 개념을 제안하고 서사를 구조화하지만 기관의 승인이나 방향성에 의해 수정되거나 제한되기도 하며 작가는 자율적 창작의 주체로 여겨지지만 기획의 틀 속에서 표현의 방향을 조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기관은 전시가 사회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물적·제도적 조건을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권력은 한 주체에 집중되지 않고 관계와 위치, 조건이 교차할 때 작동한다.
이때 우리는 ‘누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가’보다 ‘어디서 권력이 발생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보다 그것이 발생하고 축적되는 지점을 추적해야만 실제 구조의 비대칭을 가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구성하는 내적 조건을 더 세분화해 보아야 한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여러 복합적인 작동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권위’는 말할 수 있는 입장과 언어를 정당화하는 기준이고 ‘권리’는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닐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 여기에 ‘권한’은 무엇을 해석하고 어떻게 언어화할지를 결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누구의 말이 공적 언어로 승인되는지, 누가 의미를 정의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곧 이 권위와 권리 그리고 권한이 어디서 교차하고 있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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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쫓아가보자면, 그 처음 시작은 기획자의 판단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의 개념을 제안하고 서사를 구상하며 작가에게 참여를 제안하고 전체 흐름을 설계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 과정을 수행하는 기획자를 명확한 ‘설계자’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현실의 전시 과정 속에서 기획자는 일련한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다수의 판단과 조건 사이에서 그 균형을 조율하는 ‘중재자’에 가깝다. 예산의 규모와 항목 구조, 기관의 운영 기조, 작가의 위상과 작업의 실행 가능성, 공간적 제약과 행정적 절차 같은 현실의 제약들이 겹쳐지면서 기획자의 과업은 끝도 없이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선택자’로서 권위를 부여받으면서도 실제로는 협상과 조정이라는 마법 같은 실무를 수행한다. 작가의 선정은 권력의 행사처럼 보이지만 그 선정에는 기관의 기대, 예산의 조정 가능성, 지역성과 담론성, 행정 절차 등의 제약이 뒤엉켜 있다. 또한 전시의 핵심 구조와 메시지를 기획자가 제시하더라도 그 실현 방식은 작가의 작업 특성과 기관의 운영 방식, 설치 조건 등에 의해 끊임없이 조율된다. 기획자는 결정권자처럼 보이지만 그 결정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고 최악의 경우에는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만을 떠안게 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정리하면 기획자의 손에는 권력이란 칼이 쥐어져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칼을 뽑기 위해서는 기관의 결재가 필요하다. 결재를 받고 칼을 뽑았다 하더라도 휘두를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기획자의 권력은 잠정적이며 조건부로 존재한다. 어쨌거나 이 권력은 발화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권위, 조건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실패를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위치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획자는 스스로도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명히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각자의 필요와 입장을 교차시켜야 하는 실무의 구조 안에서 기획자는 권력을 구성하는 연결점이자 중간지점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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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위치를 묘사하는 문장들을 정리해보면 ‘창작의 자유를 가진 존재’, ‘기획자의 요청을 수용하는 수동적 위치’, 혹은 ‘제도의 바깥에서 발화하는 자율적 주체’ 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이 반드시 권위적 언행이나 결정권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제도 안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받지 않더라도 실제 작동하는 권력은 관계와 구조 안에 은밀히 침투해 있다. 예컨대 전시의 서사에서 작가의 작업은 실질적으로 의미의 축을 구성한다. 작가가 제시한 언어와 이미지, 태도와 형식은 기획의 흐름과 제도의 틀 안에서 중심축으로 작용하며 이는 곧 전시 서사의 주요한 의미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방식은 평론가나 기획자의 언어로 제시되곤 하지만 그 해석이 뜬금없진 않다. 어느 정도의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작업 자체가 이미 부여한 구조에서 비롯된다. 작품은 하나의 오브제이자 콘텐츠이며 담론의 원천이 된다. 관객은 작가의 이름으로 전시를 기억하고 기관은 작가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설계하며 미술계는 작가를 중심으로 담론을 구성한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프로젝트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힘을 가진다. 작품 제작의 진척, 작업의 수용 범위, 수정 가능성 등은 작가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이는 곧 프로젝트 전체의 일정과 디테일을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권한의 경계를 사실상 재설정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전시 외부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권력을 구성한다. 예술계 내 위상, 비평적 담론의 참여 정도, 공모 및 수상 이력, 기존의 협력 관계 등은 전시 현장과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시 구성의 초반부터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곧 작가가 특정 전시의 정체성과 외부적 평가를 좌우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주체라는 점을 방증한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권리와 위치는 기획자나 기관이 손댈 수 없는 ‘바깥의 권력’인 셈이다.
그렇게 작가는 제도적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지만 결과를 구성하는 데 있어 결코 주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권력은 ‘공식화되지 않은 힘’, ‘바뀔 수 없는 중심의 위치’, 그리고 ‘서사 생산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비권력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의 작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방증하는 예가 기획의 초기 단계에서 작가의 이름은 기획안을 통과시키는 명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작가의 부재는 사업의 승인 자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 사례들일 것이다. 작가의 태도, 요구, 대응 방식은 기획의 전체 구조를 수정하게 만들 수 있고 때로는 프로젝트의 일정과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작가의 권력은 제도 밖에서 작동하는 영향력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이름의 무게, 위치의 위상, 담론의 기반으로 기능하며 현실적으로도 기획자의 판단과 기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작가가 스스로의 권력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무의식적이거나 관계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작동한다. 그러나 그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시의 권력 구조가 특정 주체에만 고정되지 않고 구성원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를 다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5.
작가와 기획자의 실천을 담는 ‘공간’이자 창작을 지원하는 ‘운영체계’로 기능하는 기관은 중립적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기관은 단지 현장을 제공할 뿐 전시의 내용이나 구성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전제되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중립성은 어디까지나 수사적 표현에 가까운데, 실제로 전시의 향방을 결정짓는 운영회의, 기획안의 승인 절차, 예산의 조정과 분배, 작가 섭외 기준과 같은 설정 등은 모두 기관의 권한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관은 외형상 작가와 기획자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위치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종 결정권을 보유한 운영자에 가깝다. 특히 공공예산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경우, 기획안의 방향성과 예산 규모는 기관 내부의 운영 기조와 전략적 목적에 따라 조율되며 이는 전시의 주제 선정이나 작가 섭외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시에서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내용이 다뤄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는 기획자 개인의 판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몇몇 기관은 사회적 위상이나 대외적 브랜드를 유지하려는 관성 또한 작동하기에 기획자는 이를 사전에 고려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기관에 제안되는 기획안들은 이미 자기 검열을 몇 번이나 마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공모사업은 이러한 제도적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공모사업은 예산의 흐름뿐 아니라 평가 기준, 수행 조건, 결과물의 형식까지도 어느 정도 규정짓는다. 사업명과 목적, 평가 기준과 지원 항목은 곧 기획과 실현 사이의 여지를 제한하고 재단하는 ‘형식’이 된다. 사실상 기획자든 작가든 공모사업에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형식(form)’을 고민하기보다 ‘형식(template)’을 더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 형식이(form이든 template이든) 오늘날 전시가 조직되는 가장 보편적인 틀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관례에도 불구하고 사업계획서의 목적과 예산 항목은 전시의 주제와 구성, 실현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핵심 변수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제도적 권력은 무겁고, 무엇보다 가시적이다. 기관이 제공하는 지원의 조건은 그 자체로 발언의 방향과 형식을 한정하며 전시가 가능해지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 안에서 기획자와 작가는 기관이 설정한 조건을 실현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야 하고, 때로는 그 방식이 기관의 위상이나 평판과 충돌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정되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시는 예술적 사건이기 이전에 제도적 승인과 행정적 구조 위에서 작동하는 결과물이 된다. 다시 말해 전시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결정과 조율은 각각의 이해관계와 조건을 반영한 복합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성과의 책임 또한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6.
살펴본 것과 같이 전시의 구조를 설계하는 기획자는 그 이면의 권한 구조에는 완전히 접근하지 못한다. 주요한 결정은 기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며 작가의 섭외나 주제 설정마저도 기관의 선호나 방향성에 영향을 받는다. 기획자는 이 프레임 안에서만큼은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 봤을 때는 조건과 한계 내에서 조율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일개미일 뿐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이 구조를 봤다면 자기 이론이 물리학을 넘어 제도 설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을지도 모르겠다. 결정의 지점은 명확하지 않고 책임의 선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기관이 전지적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는 볼 수는 없다. 행정 절차와 평가 제도의 간극에서 기관은 자유보다는 조심을 택할 수밖에 없고 책임보다는 판단 유예를 선호한다. 결정은 늘 존재하지만 그 결정의 주체는 늘 사라진다. 권력은 명확히 말해지기보다 그저 작동하는 방식으로 가시성보다는 익명성 속에서 기능한다. 권력은 늘 작동 중이지만 결코 중심에 존재하지 않는 이 상황은 미셸 푸코가 또 한 번 승리했음을 방증한다.
주지하듯이 작가는 그 자체로 가장 자율적이지만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자신의 작품이 의도한 방식으로 맥락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 해석이 지나치게 정돈되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는 전시의 실현 조건이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평론가나 기획자가 제시하는 문맥은 작업의 개방성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작가의 언어는 그 과정에서 무력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전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시는 누구의 것인지 묻기 어려운 결과물이다. 좋은 전시가 구성되면 작가는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되고 기관은 운영의 성과로 위상을 높이게 된다. 그러나 기획자는 관객들이 대개는 읽지 않고 지나치는 서문을 그렇게 정성껏 써두고는 전시의 뒷켠으로 물러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전시가 실패하면 가장 중앙에서 조율한 역할로서 책임의 중심에 놓인다. 권한은 흩어져 있지만 책임은 모인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과업을 수행했고 그 누구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기획자는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를 형식(template)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권력은 더 많이 쥐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전시에서 권력의 구조가 피라미드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각자의 주체적 위치에서 역할과 책임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넘나든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총량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결정권을 행사하고 어떤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권력을 나누자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분포되어 있는 권력의 형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감각이다.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있고 누구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를 명확히 이해할 때 전시는 공정하게 조율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제도적 장치를 넘어 우리가 서 있는 미술씬이 건강해질 수 있는 실천이자 방식이다. 전시의 권력 구조를 ‘재분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권력의 구성 상태에 대한 집단적 인식의 전환이다. 권력은 누군가만 가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고, 명명하고, 조율하는 과정이야말로 건강한 전시 구조가 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2025.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