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비친 증언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이 문장은 언어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을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이나 폭력, 삶의 의미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해지고 그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말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회적 폭력의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혹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충분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공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최선은 이러한 침묵의 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회적 사건과 정치적 폭력이 남긴 상처, 그로 인해 신체로부터 흘러나온 흔적,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상실의 잔여를 불러낸다. 또한 이 기호들은 결국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혹은 조건)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제도적 언어가 삭제하거나 외면한 것들이지만 작품에서는 증언이 되어 드러난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예술이 개입하며 증언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아 두는 시도로써 말이다.
2.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는 국가 혹은 제도가 남긴 불완전한 기록 속에서 구체화된다. 사건의 흔적은 통계나 행정적 언어로 환원되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은 삭제되고 추상적 기호만이 남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故 백남기 농민 사건, 구제역 살처분, 구미 불산 누출 사건은 모두 이러한 삭제의 방식 속에서 처리된 비극이었다. 그러나 최선은 그 지워진 자리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아내어 작품으로 옮겨왔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는 사고 해역 앞에서 캔버스를 바닷물에 담갔다. 시간이 지나며 표면에 맺힌 소금 결정은 침몰한 배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응축한 증언의 표면이 되었고, 2015년 故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는 흰 캔버스를 들고 시위 현장에 서서 그 표면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받아내려 하였다. 실제 물 대포를 맞지는 못했지만 대신 직접 구한 캡사이신을 캔버스 표면에 칠하며 제도의 기록에서 사라진 폭력을 다시 각인시켰다. 구제역 사태 때는 돼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돼지의 죽음을 캔버스 표면에 되살리는가 하면,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의 공기를 천에 흡수시켜 붙잡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제도의 언어가 축소하거나 은폐한 사건의 진실을 다시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쩌면 최선이 붙잡으려 한 것은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파편과 잔여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진실이 아닐까. 소금, 캡사이신, 돼지기름, 불산 등에 물든 캔버스는 바로 그 증언의 형식으로 고정시키는 장치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물질이 증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2014. Sun Choi_소금회화_팽목항, 80x100cm, 천 위에 진도팽목항에서 말린 천, 2014

ⓒ2016. Sun Choi_흰그림 White Painting, capsicine on canvas, 116.8 x 80.3 cm, 2016
3.
그 증언 위 놓여진 신체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사회적 폭력이 제도의 기록 속에서 숫자와 행정 언어로 환원될 때, 그 고통은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태로 신체에 각인된다. 각인된 상처는 몸을 다친 부위라든지 피해를 입은 흔적과 같은 사전적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제도가 얼버무린 사건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반증이자 시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호이다.
최선은 바로 이 신체적 흔적을 작품의 언어로 끌어들인다. 인천의 거리에 흩뿌려진 침은 사회에서 배제된 노숙인들의 위치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기호였고, 문제아로 낙인찍힌 학생들과 함께 씹은 껌은 제도 밖에서 형성된 또 다른 창작의 언어였다. 침은 분비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처가 몸을 통해 배출된 흔적으로 읽혔기에 '멍든 침'이 되어 고통의 집적이 시각화되었다. 반면 껌은 제도적 교육의 경계 바깥을 상징하는 사물로 인식되지만, 신체가 직접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점에서 억압된 목소리를 대체하는 언어가 되어 '공용어'가 아닌 '모국어'로 명명되었다. 모국어가 태어나면서부터 체득되는 가장 근원적 언어이듯 껌은 신체로부터 배출된 가장 직접적인 회화적 언어가 된 것이다. 침과 껌은 모두 사회가 외면한 자리에서 흘러나온 흔적이다. 타자가 남긴 이 자취는 지워질 수 없는 목소리이자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요청이 된다.
ⓒ2016. Sun Choi_멍든침 Bruised Saliva, acrylic on canvas, 320 x 914 cm, 2016

ⓒ2022. everyart_모국어회화 Mother Tongue Painting, acrylic on canvas, 194x130cm, 2022
4.
그러나 타자가 남긴 자취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상처나 사건의 흔적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고, 잔여와 흔적의 형태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 겹쳐 들어온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고정된 채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의 끝에 여전히 존재하며 오늘의 삶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한다. 그렇기에 시간은 직선적으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현재에, 또 미래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최선은 소멸되지 않고 남은 개인의 흔적을 예술적 기호로 불러낸다. <실바람>은 작가가 무연고 유골 가루를 캔버스에 뿌려 구성한 작품이다. 유골 가루는 먼지처럼 가벼워 흩날렸다가 다시 달라붙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소멸이라 믿었던 '죽음'이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부재가 외출처럼 느껴져 슬픔이 시작되지도 못하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 개인적 경험은 시간성을 반영하는 기호로 전환된다.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경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간성을 드러낸다. 서울 독산동의 방직 제조공장을 비롯해 한때 독산동을 밝히던 공단의 조명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소등되었다. 그러나 최선은 버려진 조명을 다시 점등하여 설치하는 방식으로, 노동과 삶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와 겹쳐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 구성하였다. <독산 회화>는 특정 공간의 역사와 기억이 우리 곁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최선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시간을 다루면서도, 시간이 소멸을 유예하는 또 다른 형식을 제안한다. <별똥 떨어지던 날>은 항암제를 물감 대신 사용하여 화면을 탈색시킨 작품이다. 약품이 발린 직후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하루 혹은 며칠이 지나면 탈색의 흔적이 나타난다. 항암제는 암세포만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죽음'과 '치료', '파괴'와 '회복'의 이중성을 함께 띠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에 보이는 탈색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의 기호이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의 흔적이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별똥'에서 제목을 가지고 오게 된 것은 작가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 하늘에서 스쳐 사라지는 별의 죽음(소멸)이 소원을 비는 기호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파괴와 희망, 소멸과 염원이 교차하는 이미지는 우리 삶 속에서 시간이 유예된 채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사라진 것이 여전히 남아 우리 곁에서 관계 맺는 양가적 장면이 담겨 있는 것이다.

ⓒ2005. Sun Choi_흰그림 White Painting, human bone powder on cloth, 53 × 45cm, 2005

ⓒ2012. Sun Choi_실바람 Silbaram

ⓒSun Choi_독산 회화

ⓒ2025. Sun Choi_별똥 떨어지던 날 The Night the Rained Stars, gemtan and bleach diluted in saline solution on cloth, 116.8 × 91 cm, 2025

ⓒ2025. Sun Choi_별똥 떨어지던 날 The Night the Rained Stars, gemtan and bleach diluted in saline solution on cloth, 116.8 × 91 cm, 2025
5.
타자가 남긴 상처와 시간이 남긴 잔여는 결국 관계, 곧 공동체의 문제로 귀결된다. 존재는 홀로 서 있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폭력이든, 신체에 각인된 흔적이든, 시간의 잔여이든 그것들이 다시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 주체와 객체 간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며, 최선의 작업은 지워진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조건은 타자와 더불어 이어지는 호흡 속에서 비로소 형상화된다.
호흡은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면서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호흡은 개인적 행위이자 타자와 연결되는 매개이며 공존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타자의 숨이 전제되어야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타자의 존재 앞에 서야만 책임을 지고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은 이러한 호흡, 다시 말해 날숨을 캔버스 위에 불어 넣는 행위를 통해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형상은 작가의 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이주민 등 타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숨이 함께 겹쳐져 있다. 각자의 호흡은 생존의 행위이지만, 한 캔버스 위에 겹쳐진 숨결은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드러내는 기호가 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시각화된 숨결은 사회가 주변부로 밀어낸 존재를 다시 중심으로 불러내는 요청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적 관계는 같은 공간에서 호흡한다고 해서 그것이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웃되지는 않는다. 타자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위치로 규정되고 낙인찍히는 불안정 속에 놓이는 일의 연속이기에,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성과 긴장을 동반한다. 사회는 개인의 목소리를 공존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분류하고 배제하려는 습성이 있다. 최선은 이 불안정한 관계의 긴장을 시각화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정체성을 〈멀미〉라는 작품으로 풀어내었다. 외국에서 스스로를 한국에서 온 작가라 소개할 때면 그 시선은 남북 분단과 핵전쟁으로 환원되었고, 국내에서의 비판적 목소리는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되돌아왔다. 최선은 이러한 시선을 군복의 카모플라주(camouflage) 패턴을 차용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긋나게 겹쳐진 이미지를 그렸다. 그리고 이 두 색이 겹쳐지며 드러나는 보라색을 부재 속에서만 성립하는 가상의 위치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면 위에는 보라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붉은색과 푸른색만이 병치되어 있을 뿐, 보라색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작용에서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보라색은 존재하지 않는 실체이면서, 관계의 간극에서만 발생하는 인식의 산물로 읽힌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정한 위치와 관계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질문한다.

ⓒ2019. Sun Choi_멀미_Sickness, acrylic on canvas, 204x560cm, 2019
6.
이 질문은 다시 돌아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라는 문제로 수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리를 침묵이라고 불렀지만, 최선은 그 침묵을 흔적과 기호의 형식으로 전환하려 한다. 사회적 사건에서 삭제된 폭력의 흔적, 신체에 각인된 상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잔여, 그리고 타자와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의 조건은 모두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부재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대신 잔여로 고정시키며, 결코 완전하지 않은 증언의 형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술은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결여와 균열을 감당하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소금, 침, 껌, 유골 가루, 버려진 조명처럼 사라지거나 배제된 것들이 다시 떠오르지만, 그것은 온전히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로 머문다. 이 미완성과 불안정성은 곧 예술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작업은 완결된 정답이 아니라 지속되는 질문으로 남는다. 최선에게 침묵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남겨진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와 잔여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틈이다. 언어로 닿을 수 없는 것을 끝내 붙잡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유의 실천인 것이다.
2025.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침묵에 비친 증언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이 문장은 언어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을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이나 폭력, 삶의 의미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해지고 그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말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회적 폭력의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혹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충분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공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최선은 이러한 침묵의 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회적 사건과 정치적 폭력이 남긴 상처, 그로 인해 신체로부터 흘러나온 흔적,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상실의 잔여를 불러낸다. 또한 이 기호들은 결국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혹은 조건)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제도적 언어가 삭제하거나 외면한 것들이지만 작품에서는 증언이 되어 드러난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예술이 개입하며 증언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아 두는 시도로써 말이다.
2.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는 국가 혹은 제도가 남긴 불완전한 기록 속에서 구체화된다. 사건의 흔적은 통계나 행정적 언어로 환원되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은 삭제되고 추상적 기호만이 남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故 백남기 농민 사건, 구제역 살처분, 구미 불산 누출 사건은 모두 이러한 삭제의 방식 속에서 처리된 비극이었다. 그러나 최선은 그 지워진 자리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아내어 작품으로 옮겨왔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는 사고 해역 앞에서 캔버스를 바닷물에 담갔다. 시간이 지나며 표면에 맺힌 소금 결정은 침몰한 배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응축한 증언의 표면이 되었고, 2015년 故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는 흰 캔버스를 들고 시위 현장에 서서 그 표면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받아내려 하였다. 실제 물 대포를 맞지는 못했지만 대신 직접 구한 캡사이신을 캔버스 표면에 칠하며 제도의 기록에서 사라진 폭력을 다시 각인시켰다. 구제역 사태 때는 돼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돼지의 죽음을 캔버스 표면에 되살리는가 하면,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의 공기를 천에 흡수시켜 붙잡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제도의 언어가 축소하거나 은폐한 사건의 진실을 다시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쩌면 최선이 붙잡으려 한 것은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파편과 잔여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진실이 아닐까. 소금, 캡사이신, 돼지기름, 불산 등에 물든 캔버스는 바로 그 증언의 형식으로 고정시키는 장치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물질이 증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2014. Sun Choi_소금회화_팽목항, 80x100cm, 천 위에 진도팽목항에서 말린 천, 2014

ⓒ2016. Sun Choi_흰그림 White Painting, capsicine on canvas, 116.8 x 80.3 cm, 2016
3.
그 증언 위 놓여진 신체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사회적 폭력이 제도의 기록 속에서 숫자와 행정 언어로 환원될 때, 그 고통은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태로 신체에 각인된다. 각인된 상처는 몸을 다친 부위라든지 피해를 입은 흔적과 같은 사전적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제도가 얼버무린 사건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반증이자 시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호이다.
최선은 바로 이 신체적 흔적을 작품의 언어로 끌어들인다. 인천의 거리에 흩뿌려진 침은 사회에서 배제된 노숙인들의 위치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기호였고, 문제아로 낙인찍힌 학생들과 함께 씹은 껌은 제도 밖에서 형성된 또 다른 창작의 언어였다. 침은 분비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처가 몸을 통해 배출된 흔적으로 읽혔기에 '멍든 침'이 되어 고통의 집적이 시각화되었다. 반면 껌은 제도적 교육의 경계 바깥을 상징하는 사물로 인식되지만, 신체가 직접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점에서 억압된 목소리를 대체하는 언어가 되어 '공용어'가 아닌 '모국어'로 명명되었다. 모국어가 태어나면서부터 체득되는 가장 근원적 언어이듯 껌은 신체로부터 배출된 가장 직접적인 회화적 언어가 된 것이다. 침과 껌은 모두 사회가 외면한 자리에서 흘러나온 흔적이다. 타자가 남긴 이 자취는 지워질 수 없는 목소리이자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요청이 된다.
ⓒ2016. Sun Choi_멍든침 Bruised Saliva, acrylic on canvas, 320 x 914 cm, 2016

ⓒ2022. everyart_모국어회화 Mother Tongue Painting, acrylic on canvas, 194x130cm, 2022
4.
그러나 타자가 남긴 자취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상처나 사건의 흔적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고, 잔여와 흔적의 형태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 겹쳐 들어온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고정된 채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의 끝에 여전히 존재하며 오늘의 삶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한다. 그렇기에 시간은 직선적으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현재에, 또 미래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최선은 소멸되지 않고 남은 개인의 흔적을 예술적 기호로 불러낸다. <실바람>은 작가가 무연고 유골 가루를 캔버스에 뿌려 구성한 작품이다. 유골 가루는 먼지처럼 가벼워 흩날렸다가 다시 달라붙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소멸이라 믿었던 '죽음'이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부재가 외출처럼 느껴져 슬픔이 시작되지도 못하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 개인적 경험은 시간성을 반영하는 기호로 전환된다.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경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간성을 드러낸다. 서울 독산동의 방직 제조공장을 비롯해 한때 독산동을 밝히던 공단의 조명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소등되었다. 그러나 최선은 버려진 조명을 다시 점등하여 설치하는 방식으로, 노동과 삶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와 겹쳐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 구성하였다. <독산 회화>는 특정 공간의 역사와 기억이 우리 곁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최선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시간을 다루면서도, 시간이 소멸을 유예하는 또 다른 형식을 제안한다. <별똥 떨어지던 날>은 항암제를 물감 대신 사용하여 화면을 탈색시킨 작품이다. 약품이 발린 직후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하루 혹은 며칠이 지나면 탈색의 흔적이 나타난다. 항암제는 암세포만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죽음'과 '치료', '파괴'와 '회복'의 이중성을 함께 띠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에 보이는 탈색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의 기호이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의 흔적이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별똥'에서 제목을 가지고 오게 된 것은 작가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 하늘에서 스쳐 사라지는 별의 죽음(소멸)이 소원을 비는 기호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파괴와 희망, 소멸과 염원이 교차하는 이미지는 우리 삶 속에서 시간이 유예된 채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사라진 것이 여전히 남아 우리 곁에서 관계 맺는 양가적 장면이 담겨 있는 것이다.

ⓒ2005. Sun Choi_흰그림 White Painting, human bone powder on cloth, 53 × 45cm, 2005

ⓒ2012. Sun Choi_실바람 Silbaram

ⓒSun Choi_독산 회화

ⓒ2025. Sun Choi_별똥 떨어지던 날 The Night the Rained Stars, gemtan and bleach diluted in saline solution on cloth, 116.8 × 91 cm, 2025

ⓒ2025. Sun Choi_별똥 떨어지던 날 The Night the Rained Stars, gemtan and bleach diluted in saline solution on cloth, 116.8 × 91 cm, 2025
5.
타자가 남긴 상처와 시간이 남긴 잔여는 결국 관계, 곧 공동체의 문제로 귀결된다. 존재는 홀로 서 있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폭력이든, 신체에 각인된 흔적이든, 시간의 잔여이든 그것들이 다시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 주체와 객체 간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며, 최선의 작업은 지워진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조건은 타자와 더불어 이어지는 호흡 속에서 비로소 형상화된다.
호흡은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면서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호흡은 개인적 행위이자 타자와 연결되는 매개이며 공존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타자의 숨이 전제되어야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타자의 존재 앞에 서야만 책임을 지고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은 이러한 호흡, 다시 말해 날숨을 캔버스 위에 불어 넣는 행위를 통해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형상은 작가의 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이주민 등 타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숨이 함께 겹쳐져 있다. 각자의 호흡은 생존의 행위이지만, 한 캔버스 위에 겹쳐진 숨결은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드러내는 기호가 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시각화된 숨결은 사회가 주변부로 밀어낸 존재를 다시 중심으로 불러내는 요청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적 관계는 같은 공간에서 호흡한다고 해서 그것이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웃되지는 않는다. 타자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위치로 규정되고 낙인찍히는 불안정 속에 놓이는 일의 연속이기에,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성과 긴장을 동반한다. 사회는 개인의 목소리를 공존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분류하고 배제하려는 습성이 있다. 최선은 이 불안정한 관계의 긴장을 시각화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정체성을 〈멀미〉라는 작품으로 풀어내었다. 외국에서 스스로를 한국에서 온 작가라 소개할 때면 그 시선은 남북 분단과 핵전쟁으로 환원되었고, 국내에서의 비판적 목소리는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되돌아왔다. 최선은 이러한 시선을 군복의 카모플라주(camouflage) 패턴을 차용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긋나게 겹쳐진 이미지를 그렸다. 그리고 이 두 색이 겹쳐지며 드러나는 보라색을 부재 속에서만 성립하는 가상의 위치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면 위에는 보라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붉은색과 푸른색만이 병치되어 있을 뿐, 보라색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작용에서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보라색은 존재하지 않는 실체이면서, 관계의 간극에서만 발생하는 인식의 산물로 읽힌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정한 위치와 관계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질문한다.

ⓒ2019. Sun Choi_멀미_Sickness, acrylic on canvas, 204x560cm, 2019
6.
이 질문은 다시 돌아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라는 문제로 수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리를 침묵이라고 불렀지만, 최선은 그 침묵을 흔적과 기호의 형식으로 전환하려 한다. 사회적 사건에서 삭제된 폭력의 흔적, 신체에 각인된 상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잔여, 그리고 타자와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의 조건은 모두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부재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대신 잔여로 고정시키며, 결코 완전하지 않은 증언의 형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술은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결여와 균열을 감당하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소금, 침, 껌, 유골 가루, 버려진 조명처럼 사라지거나 배제된 것들이 다시 떠오르지만, 그것은 온전히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로 머문다. 이 미완성과 불안정성은 곧 예술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작업은 완결된 정답이 아니라 지속되는 질문으로 남는다. 최선에게 침묵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남겨진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와 잔여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틈이다. 언어로 닿을 수 없는 것을 끝내 붙잡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유의 실천인 것이다.
2025.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