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밤 헤는 별》 장용선 작업론
소나 나나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1990년 어느 봄날, 집 앞 계단에서 점프 시합하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꼼짝없이 깁스 신세로, 엄마가 우린 뽀얀 곰탕을 쪽파도 없이 홀짝이며, 백과사전 몇 권을 끌어안고 넝마가 되도록 보고 또 봤다. 태블릿도 인터넷도 언감생심이던 그 시절, 정보의 창구는 단연 독서였고, 이고 지며 동네방네 책 팔던 영업사원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사은품에 눈이 먼 엄마가 큰맘 먹고 지른 백과사전은 그렇게 반강제로 나의 애독서가 되었다.
한 질 스무 권 중 제12권을 나는 유독 좋아했다. 'ㅅ-ㅇ'으로 시작하는 낱말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펼치면 딱 나오는 게 매번 '소'였다. 마주 보는 두 페이지 한가운데 가득, 놀란 표정의 소 그림 둘레로 방사형으로 뻗은 지시선을 따라 용도가 덕지덕지 붙었다. 소는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였다. 뿔은 만년필, 젖은 우유, 기름은 비누, 털은 붓, 가죽은 신발, 꼬리는 구둣솔 그림이 달려 있었다. 눈알과 발굽조차 쓰임새가 있었다. ‘심지어 뼈를 우린 국물마저 이렇게 구수한 데다 골절에도 특효라니, 참나’ 그나마 성한 반대쪽 무르팍을 탁 치며 혼자 감탄했다. 그리고 머리부터 꼬리 끝, 아니 발끝까지 소처럼 쓸모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다. 그렇게 한때나마 소는 내 롤 모델이었다.
소의 진가는, 그저 유용한 재료가 아니다. 사람은 소를 부리고, 소에게 배운다. 소는 교감을 주고 깨달음을 낳는 동물이다. 가까이서 소를 보고 만진 적이 있는가? 그 깊고 순수한 눈망울을 길게 마주한 적이 있는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따지면 동물계의 소지섭이다. 차이점이라면 소지섭은 연기이고, 소는 오직 진심이란 것. 또한 소는 묵묵, 꿋꿋, 꾸준, 우직의 상징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줄기찬 소의 헌신은 그 나열만으로도 숭고할 지경이다. 소와 엮인 수많은 가치. 어디서 온 걸까, 이 교감은? 이 깨달음은?

A Night for Counting Stars, 별 헤는 밤
cow bones and cow bone powder discarded by restaurants (fired in a gas kiln at 110-1250°C), iron bearing structure, canvas, dimensions varible_2024
장용선은 그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인류의 정착을 부른 농경 시대의 가장 큰 일꾼이자 재산이자 가족이었던 소. 만 년 전, 사람과 한 지붕 아래 비를 피하기 시작한 외양간의 안주인, 즉 조강지처, 아니 조강지우이다. 그 조강지우를 푹 곤 엄마표 설렁탕에 수저를 담그며 작가는 갸웃거린다. ‘작업에 쓸 순 없을까, 이 뼈를?’ 락스에 한 달을 재워도 썩고 마는 통에 단념하던 차,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 “태워~” 도자를 담아 굽는 갑발에 뼈를 넣고 흙으로 틈새를 메워 굽는다. 가마에 들어앉혀, 한이라도 사르듯 원 없이 지피고 때면, 콜라겐을 비롯, 뼈를 채운 성분들이 갇힌 채 새까맣게 타 마치 석탄 같은 잔해가 남는다. 말하자면 조강지우를 화장한 유해이다.
쓰고 남은 페인트가 오래 묵으면 말라비틀어지며 엉긴다. 이 끈끈한 폐 페인트 덩어리를 으깨어 원판에 턱턱 내던지면 합격엿도 아닌 게 신통하게 척척 잘도 붙는다. 잘 말린 표면에 흰 페인트를 얹고 오버쿠킹한 소 뼛조각을 새까맣게 토핑한다. 비좁은 우리에 들어찬 가축들이 좌충우돌 되는 대로 밟아 비비고 짓뭉갠, 오물과 흙이 뒤엉겨 떡진 축사 바닥처럼 꾸덕꾸덕하게 굳는다.
다시 시간은 흘러 기원 전후 해 질 녘 어느 들판, 무거운 쟁기를 이고 밭이랑을 엎다 지친 소의 그림자가 괜히 서글프다. 달래듯 잠시 그 멍에를 빌려다 지고, 연자방아 굴리는 마소가 되어 보는 관객. 우사를 두른 철제 울타리를 뜯어다 짠 듯한, 회전문과 닮은 은색 구조물을 연자 맷돌삼아 힘껏 밀어 돌린다. 그 아래로 삐죽빼죽 무수히 이빨 돋은 철판이 빗질하듯 바닥을 할퀸다. 원판 중심을 축 삼아 빙글빙글, 연거푸 들이치는 무정한 톱니 앞에, 검게 타 널브러진 소뼈는 속수무책이다. 고막을 긁는 굉음, 소의 신음 같은 쇳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한 바퀴 긁고 두 바퀴 부수고 세 바퀴 으깬다. 뼛조각에 뒤덮인 검은 바닥 표면에, 쟁기질하듯 희뿌연 생채기가 겹겹이 동심원 궤적을 그린다. 마치 반경 몇 걸음짜리 초라한 자유라도 알뜰히 누리려는, 묶인 개의 목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시각, 청각, 촉각을 부여잡고 처절히 뒤흔든다. 관객 스스로 바퀴를 굴려 소의 걸음에 몰입하고 체화하는 수행적 관조적인 작업이다. 이윽고 퍼포먼스가 끝나는 대로 바닥 철판째 평면 작업으로 내걸린다. 그 형상은 마치 북극성을 축으로 천구를 도는 별 무리의 장노출 사진이 떠오른다. 그래서 ‘밤 헤는 별’이다. 윤동주는 아니니까.
그래. 별 헤는 이가 어디 윤동주뿐일까. 그보다 훨씬 옛날, 소가 먼저일 것이다. 고된 하루를 대충 추스르며 남루한 외양간 구석에 쇠한 몸을 간신히 묻으면, 밤하늘만치 깜깜한 앞날에 소 아니라 부처님도 절로 센치해질 것이다. 부처님 이마의 백호처럼 하늘 한복판에 박힌 북극성, 그 북극성을 정수리에 이고 시곗바늘처럼 밭고랑 둘레를 무릎이 닳고 발굽이 빠지도록 돌고 돈다. 자식 낳아 일손 잇고, 흙밭 가를 기운 부치면 늙은 고기와 삭은 뼈라도 내어 영양을 바치며 산화한다. 하늘을 우러르는 제사엔 요긴한 제물로 오른다. 일 시키고 배 채우는 든든한 희생양, 아니 희생우라니, 이보다 숭고한 동물이 있을까?

Unto Dust, 지평분체(地平分體)
cow bones and cow bone powder discarded by restaurants (fired in a gas kiln at 1250°C), mixed materials, 300x400x400cm(variable installation)_2024
그 곁엔, 새까만 외양간과 사뭇 대조적인 흰 기둥, 문명을 상징하는 도리아 양식의 기둥이 우뚝 섰다. 퍼티와 접착제를 반죽한 일종의 수성 레진 약제로 스티로폼 표면을 씌우고, 설렁탕을 우리고 남은 소뼈를 섭씨 1,200도에서 소성한 흰 뼛가루를 접착제와 섞어 덧발랐다. 날이 갈수록 표면 군데군데 거칠게 아스러지고, 둘레는 그 파편으로 뒤덮인다. “우두둑!” 누군가의 발길에 짓뭉개어 점차 평탄해진다. 그렇게 세월이 묻어 마침내 잔잔하고 고운 가루와 셀 수 없는 발자국만 덩그러니 남는다. 자연에 거슬러 맞서고 극복해 이기려 드는, 기둥의 수직적 이미지가, 시간에 침식당해 마치 우주가 식어가듯 균일해지는 결말. 소와 우린 너나없이 결국 편평한 바닥에서 만난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 나머지는 그저 수단. 선민주의적 발상에 젖어 근본 없는 위엄을 홀로 뽐내고, 분수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오만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다른가. 그 오만으로 매번 다치는 건 큰 코요, 확인하는 사실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 우주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앞만 겨누어 내딛고 위만 목매어 오르는 게 그리 급할까. 더 높아 봐야 더 험하고 사납게 무너질 뿐이다. 삭아 내리는 저 흰 기둥처럼.
반면 ‘내가 뭐 하는지 모르겠다’ 때로 자조하는 이는 인간적이다. 자기가 뭐 하는지 모른다? 그게 사람이다. 본디 사람은 어리석고 나약해, 위치도 방향도 다짐도 금방 잊는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 스스로 못 보니 서로 봐 주고 끝없이 가다듬어야 한다. 그 사실을 앞장서 일깨우는 게 작가. 인간의 위치를 비추고 눈 뒤집힌 사람들을 다독이고 잘못 든 길에 경종을 울리는 첨병이 바로 작가이다. 장용선은 말한다. “나서서 요란 떨 필요도 없어요. 작업이 관객 붙들고 이리저리 알아서 떠들어대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전시전경 - 밤 헤는 별
살아서는 온 힘을, 죽어서는 온몸이 인간의 필요에 맞춰 쓰이고, 그마저도 다하면 폐기물로 전락하는 소뼈. 장용선은 인간 위주의 소비 시스템 끝자락에서 건진 이 증거물을 긁어다, 압도적인 미적 형상의 기념비로 강제 복권한다. 전시장의 수천만 원짜리 조명을 덮어쓴 검고 흰 미술 작품을 마주하는 숭고와 장엄, 그러나 이어지는 사실은 관객을 공범으로 전락시킨다. 점심으로 해치운 설렁탕과 눈앞의 작품이 한 몸이라니. 내가 한몫 거든 소비 시스템의 폭력적 결과물이었다니. 자신을 고발하고, 자원과 폐기물로 양단하는 인간 중심 세계관을 허물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비인간적인 면모의 직시와 성찰로 인간성 회복을 도모하는 전복과 경외의 현장인 셈이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소가 나보다 나음을 깨달았다. 크면서, 용도가 없어서, 그게 나쁜 게 아니어서, 그래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소만도 못해서 사람이라니. 그런데 소보다 나은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이 알게 됐다. 소를 따라잡을 유일한 방법은 소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소나 나나’면 감지덕지함을 뒤늦게 깨닫는 것. 소에 한참 모자란 나를 감히 소와 동급으로 만들어 준 장용선의 의전에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야말로 ‘개이득’ 작품, 인간을 향한 예우와 격상이 넘치는 작품, 칸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 같은 작품이다.
2025.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4 《밤 헤는 별》 장용선 작업론
소나 나나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1990년 어느 봄날, 집 앞 계단에서 점프 시합하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꼼짝없이 깁스 신세로, 엄마가 우린 뽀얀 곰탕을 쪽파도 없이 홀짝이며, 백과사전 몇 권을 끌어안고 넝마가 되도록 보고 또 봤다. 태블릿도 인터넷도 언감생심이던 그 시절, 정보의 창구는 단연 독서였고, 이고 지며 동네방네 책 팔던 영업사원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사은품에 눈이 먼 엄마가 큰맘 먹고 지른 백과사전은 그렇게 반강제로 나의 애독서가 되었다.
한 질 스무 권 중 제12권을 나는 유독 좋아했다. 'ㅅ-ㅇ'으로 시작하는 낱말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펼치면 딱 나오는 게 매번 '소'였다. 마주 보는 두 페이지 한가운데 가득, 놀란 표정의 소 그림 둘레로 방사형으로 뻗은 지시선을 따라 용도가 덕지덕지 붙었다. 소는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였다. 뿔은 만년필, 젖은 우유, 기름은 비누, 털은 붓, 가죽은 신발, 꼬리는 구둣솔 그림이 달려 있었다. 눈알과 발굽조차 쓰임새가 있었다. ‘심지어 뼈를 우린 국물마저 이렇게 구수한 데다 골절에도 특효라니, 참나’ 그나마 성한 반대쪽 무르팍을 탁 치며 혼자 감탄했다. 그리고 머리부터 꼬리 끝, 아니 발끝까지 소처럼 쓸모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다. 그렇게 한때나마 소는 내 롤 모델이었다.
소의 진가는, 그저 유용한 재료가 아니다. 사람은 소를 부리고, 소에게 배운다. 소는 교감을 주고 깨달음을 낳는 동물이다. 가까이서 소를 보고 만진 적이 있는가? 그 깊고 순수한 눈망울을 길게 마주한 적이 있는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따지면 동물계의 소지섭이다. 차이점이라면 소지섭은 연기이고, 소는 오직 진심이란 것. 또한 소는 묵묵, 꿋꿋, 꾸준, 우직의 상징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줄기찬 소의 헌신은 그 나열만으로도 숭고할 지경이다. 소와 엮인 수많은 가치. 어디서 온 걸까, 이 교감은? 이 깨달음은?

A Night for Counting Stars, 별 헤는 밤
cow bones and cow bone powder discarded by restaurants (fired in a gas kiln at 110-1250°C), iron bearing structure, canvas, dimensions varible_2024
장용선은 그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인류의 정착을 부른 농경 시대의 가장 큰 일꾼이자 재산이자 가족이었던 소. 만 년 전, 사람과 한 지붕 아래 비를 피하기 시작한 외양간의 안주인, 즉 조강지처, 아니 조강지우이다. 그 조강지우를 푹 곤 엄마표 설렁탕에 수저를 담그며 작가는 갸웃거린다. ‘작업에 쓸 순 없을까, 이 뼈를?’ 락스에 한 달을 재워도 썩고 마는 통에 단념하던 차,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 “태워~” 도자를 담아 굽는 갑발에 뼈를 넣고 흙으로 틈새를 메워 굽는다. 가마에 들어앉혀, 한이라도 사르듯 원 없이 지피고 때면, 콜라겐을 비롯, 뼈를 채운 성분들이 갇힌 채 새까맣게 타 마치 석탄 같은 잔해가 남는다. 말하자면 조강지우를 화장한 유해이다.
쓰고 남은 페인트가 오래 묵으면 말라비틀어지며 엉긴다. 이 끈끈한 폐 페인트 덩어리를 으깨어 원판에 턱턱 내던지면 합격엿도 아닌 게 신통하게 척척 잘도 붙는다. 잘 말린 표면에 흰 페인트를 얹고 오버쿠킹한 소 뼛조각을 새까맣게 토핑한다. 비좁은 우리에 들어찬 가축들이 좌충우돌 되는 대로 밟아 비비고 짓뭉갠, 오물과 흙이 뒤엉겨 떡진 축사 바닥처럼 꾸덕꾸덕하게 굳는다.
다시 시간은 흘러 기원 전후 해 질 녘 어느 들판, 무거운 쟁기를 이고 밭이랑을 엎다 지친 소의 그림자가 괜히 서글프다. 달래듯 잠시 그 멍에를 빌려다 지고, 연자방아 굴리는 마소가 되어 보는 관객. 우사를 두른 철제 울타리를 뜯어다 짠 듯한, 회전문과 닮은 은색 구조물을 연자 맷돌삼아 힘껏 밀어 돌린다. 그 아래로 삐죽빼죽 무수히 이빨 돋은 철판이 빗질하듯 바닥을 할퀸다. 원판 중심을 축 삼아 빙글빙글, 연거푸 들이치는 무정한 톱니 앞에, 검게 타 널브러진 소뼈는 속수무책이다. 고막을 긁는 굉음, 소의 신음 같은 쇳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한 바퀴 긁고 두 바퀴 부수고 세 바퀴 으깬다. 뼛조각에 뒤덮인 검은 바닥 표면에, 쟁기질하듯 희뿌연 생채기가 겹겹이 동심원 궤적을 그린다. 마치 반경 몇 걸음짜리 초라한 자유라도 알뜰히 누리려는, 묶인 개의 목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시각, 청각, 촉각을 부여잡고 처절히 뒤흔든다. 관객 스스로 바퀴를 굴려 소의 걸음에 몰입하고 체화하는 수행적 관조적인 작업이다. 이윽고 퍼포먼스가 끝나는 대로 바닥 철판째 평면 작업으로 내걸린다. 그 형상은 마치 북극성을 축으로 천구를 도는 별 무리의 장노출 사진이 떠오른다. 그래서 ‘밤 헤는 별’이다. 윤동주는 아니니까.
그래. 별 헤는 이가 어디 윤동주뿐일까. 그보다 훨씬 옛날, 소가 먼저일 것이다. 고된 하루를 대충 추스르며 남루한 외양간 구석에 쇠한 몸을 간신히 묻으면, 밤하늘만치 깜깜한 앞날에 소 아니라 부처님도 절로 센치해질 것이다. 부처님 이마의 백호처럼 하늘 한복판에 박힌 북극성, 그 북극성을 정수리에 이고 시곗바늘처럼 밭고랑 둘레를 무릎이 닳고 발굽이 빠지도록 돌고 돈다. 자식 낳아 일손 잇고, 흙밭 가를 기운 부치면 늙은 고기와 삭은 뼈라도 내어 영양을 바치며 산화한다. 하늘을 우러르는 제사엔 요긴한 제물로 오른다. 일 시키고 배 채우는 든든한 희생양, 아니 희생우라니, 이보다 숭고한 동물이 있을까?

Unto Dust, 지평분체(地平分體)
cow bones and cow bone powder discarded by restaurants (fired in a gas kiln at 1250°C), mixed materials, 300x400x400cm(variable installation)_2024
그 곁엔, 새까만 외양간과 사뭇 대조적인 흰 기둥, 문명을 상징하는 도리아 양식의 기둥이 우뚝 섰다. 퍼티와 접착제를 반죽한 일종의 수성 레진 약제로 스티로폼 표면을 씌우고, 설렁탕을 우리고 남은 소뼈를 섭씨 1,200도에서 소성한 흰 뼛가루를 접착제와 섞어 덧발랐다. 날이 갈수록 표면 군데군데 거칠게 아스러지고, 둘레는 그 파편으로 뒤덮인다. “우두둑!” 누군가의 발길에 짓뭉개어 점차 평탄해진다. 그렇게 세월이 묻어 마침내 잔잔하고 고운 가루와 셀 수 없는 발자국만 덩그러니 남는다. 자연에 거슬러 맞서고 극복해 이기려 드는, 기둥의 수직적 이미지가, 시간에 침식당해 마치 우주가 식어가듯 균일해지는 결말. 소와 우린 너나없이 결국 편평한 바닥에서 만난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 나머지는 그저 수단. 선민주의적 발상에 젖어 근본 없는 위엄을 홀로 뽐내고, 분수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오만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다른가. 그 오만으로 매번 다치는 건 큰 코요, 확인하는 사실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 우주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앞만 겨누어 내딛고 위만 목매어 오르는 게 그리 급할까. 더 높아 봐야 더 험하고 사납게 무너질 뿐이다. 삭아 내리는 저 흰 기둥처럼.
반면 ‘내가 뭐 하는지 모르겠다’ 때로 자조하는 이는 인간적이다. 자기가 뭐 하는지 모른다? 그게 사람이다. 본디 사람은 어리석고 나약해, 위치도 방향도 다짐도 금방 잊는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 스스로 못 보니 서로 봐 주고 끝없이 가다듬어야 한다. 그 사실을 앞장서 일깨우는 게 작가. 인간의 위치를 비추고 눈 뒤집힌 사람들을 다독이고 잘못 든 길에 경종을 울리는 첨병이 바로 작가이다. 장용선은 말한다. “나서서 요란 떨 필요도 없어요. 작업이 관객 붙들고 이리저리 알아서 떠들어대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전시전경 - 밤 헤는 별
살아서는 온 힘을, 죽어서는 온몸이 인간의 필요에 맞춰 쓰이고, 그마저도 다하면 폐기물로 전락하는 소뼈. 장용선은 인간 위주의 소비 시스템 끝자락에서 건진 이 증거물을 긁어다, 압도적인 미적 형상의 기념비로 강제 복권한다. 전시장의 수천만 원짜리 조명을 덮어쓴 검고 흰 미술 작품을 마주하는 숭고와 장엄, 그러나 이어지는 사실은 관객을 공범으로 전락시킨다. 점심으로 해치운 설렁탕과 눈앞의 작품이 한 몸이라니. 내가 한몫 거든 소비 시스템의 폭력적 결과물이었다니. 자신을 고발하고, 자원과 폐기물로 양단하는 인간 중심 세계관을 허물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비인간적인 면모의 직시와 성찰로 인간성 회복을 도모하는 전복과 경외의 현장인 셈이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소가 나보다 나음을 깨달았다. 크면서, 용도가 없어서, 그게 나쁜 게 아니어서, 그래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소만도 못해서 사람이라니. 그런데 소보다 나은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이 알게 됐다. 소를 따라잡을 유일한 방법은 소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소나 나나’면 감지덕지함을 뒤늦게 깨닫는 것. 소에 한참 모자란 나를 감히 소와 동급으로 만들어 준 장용선의 의전에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야말로 ‘개이득’ 작품, 인간을 향한 예우와 격상이 넘치는 작품, 칸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 같은 작품이다.
2025.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