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닿지 않을 진심에 대하여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외부로 꺼내 증명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이를테면 머릿속을 떠도는 사유와 기억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과 같이 '내면'이라고 밖에 총칭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증명 불가능한 경험들이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욱 실소를 부르는 것은 이 불확실한 내면의 정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내면의 정보가 타인에게 100%의 순도로 전달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보편적인 단어인 '엄마'를 발화하는 순간조차, 그 단어에 담긴 기억의 온도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어가 과연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인류의 오래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류은미는 바로 이 필연적인 실패, 즉 '전달의 불완전성' 이라는 조건을 작업의 전제로 삼는다.
2.
류은미가 '전달의 불완전성'이라는 개념을 작업의 전제로 삼기 전, 그 출발점은 소녀처럼 순수했다. "왜 내 감정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까?"라는 다소 감성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도였든 우연이었든, 작가가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거대 담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정보 단위인 신호(Signal)를 먼저 살핀 점은 이후 전개될 연구를 위한 아주 단단한 초석을 놓은 셈이 되었다. 그렇게 작가가 스스로의 감성 가득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가져온 것은 내면의 복잡한 감정이나 맥락을 모두 덜어낸 채, 오직 전달이라는 기능만 남긴 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신호였다. 신호란 약속된 두 개의 상태(이를테면 켜짐과 꺼짐)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기초적인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명료한 시스템은 사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공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예컨대 빛이 꺼지고 다시 켜지는 사이의 공백이 없다면 신호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류은미의 [Seek Our Signal-searcher(2019)] 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칠흑 같이 어두운 숲 속에서 작은 빛이 모스부호의 리듬으로 깜빡이는 영상의 형태로 말이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빛 그 자체라기보다, 빛이 꺼진 후 남는 잔상과 빛과 빛 사이를 채우는 어둠과 시간이다. 작가는 바로 그 빛이 없는 여백의 시간, 즉 공백 속에서 의미가 완성된다는 역설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만약 완벽한 소통이 정보의 온전한 현존(presence)을 의미한다면, 그것의 부재(absence)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 신호 체계는 출발부터 실패를 안고 태어난 셈이다. 의미란 결코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으며,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인 '없음'에 기대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Seek Our Signal-searcher> 2019, single channel video, 1min23sec
3.
가장 원초적인 단위의 신호마저 온전할 수 없다면, 수많은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뒤엉킨 '집단적 경험'은 과연 하나의 의미로 공유될 수 있을까? 류은미는 2020년, 팬데믹의 시발점에 있었던 도시, 대구의 풍경을 통해 이 거대한 질문을 파고들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팬데믹을 의도적으로 설계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도 코로나의 진원지가 된 대구는 '공유 불가능한 집단적 경험'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대구에 거주하던 작가는 그 실험실의 가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모두가 똑같은 '텅 빈 도시'를 보았지만, 그 풍경은 각자의 의식 위에서 서로 다르게 각인되어 졌다. 어떤 이에게는 언론이 연일 증폭시키던 감염의 공포로, 다른 이에게는 당장 멈춰버린 생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또 다른 편에서는 멈춰버린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기묘한 해방감으로 말이다. 공유된 것은 재난이라는 사건뿐, 그 경험의 내용은 지독히도 사적이었다. 류은미의 [Seesaw] 연작은 이 집단적 경험의 신기루를 렌티큘러(Lenticular)라는 매체로 폭로한다. 관객이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텅 빈 도시의 풍경은 돌연 모든 정보의 송출이 끊겼음을 알리는 차가운 조정 화면으로 뒤바뀐다. 방금 전까지 각종 공포를 전파하던 미디어의 스피커가 꺼진 순간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함께 겪었다고 믿는 기억조차, 사실은 각자의 시점에서 재생되는 서로 다른 영상의 총합에 불과하다는 차가운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공동체의 서사마저 파편화된다면, 개인의 가장 작은 발화 단위는 어떻게 전달될까?

<Seesaw_101> 2020, lenticular, 100x75cm
4.
류은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인간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타자인 '엄마'를 실험대 위에 올린다. '엄마'는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 내뱉는 단어이자,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하나의 기호 안에는 한 인간의 시작과 관계, 그리고 기억의 원형이 그 어떤 단어보다도 겹겹이 쌓여있다. 작가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발화한 '엄마'의 목소리를 수집해 음성 파형이라는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과정에서 목소리에 담긴 수많은 기억과 감정은 사라지고 모니터 위에 그려진 진폭의 굴곡만이 데이터로 남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 데이터를 다시 3차원의 조각으로 굳힌 뒤 [The Mothers]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엄마'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각기 다른 높이와 모양을 한 물리적인 형상으로 전시장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이 작업이 '우리 엄마'와 '너희 엄마'는 다르다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사용하는 '엄마'라는 기표(signifier)가 각자의 내면에서는 전혀 다른 기억과 감정의 총체, 즉 기의(signified)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 [Sentimental Waves] 연작은 이 음성 데이터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어떻게 또 다른 변주를 겪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목소리에서 감정이 제거된 차가운 데이터 위에 또 다른 불완전한 기호 체계인 '색'을 덧입힌다. 예컨대 빨간색이 누군가에게는 열정을, 또 누군가에게는 위험을 상징하듯, 색 또한 고정된 의미 없이 맥락에 따라 떠다니는 기호일 뿐이다. 목소리의 물리적 흔적인 파형과 문화적 기호인 색의 만남은, 하나의 정보가 얼마나 무한한 해석의 파편으로 흩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가 된다. 정리하자면, [Frequency(주파수)] 시리즈는 발화된 정보가 데이터로 환원되고(The Mothers), 다시 기호로 해석되는(Sentimental Waves)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잃고 파편화되는지를 해부한다.

<The mothers> 2022, Wood, Variable Installation

<sentimental wave#sl> 2022,lenticular and wood, 75x40.3cm
5.
개인의 발화가 그토록 쉽게 파편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기대고 있는 언어라는 시스템 자체가 처음부터 불완전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류은미의 작업 이전에, 20세기에 살았던 옛날 사람들이 이미 던져둔 거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그들은 언어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그 자체의 규칙으로만 작동하는 불안정한 시스템이라고 선언했는데, 즉 언어에 있어 '오류'는 버그(bug)가 아니라 디폴트(default) 값이라는 것이다. 류은미의 [Error] 시리즈는 바로 이 언어 시스템의 구조적 균열을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한다. 작품은 우리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미지인 컴퓨터 시스템의 오류 화면, 즉 블루스크린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통해 교묘한 함정을 설계한다. 그 화면에는 '정의'라는 단어의 두 가지 번역어, 'justice(공정)'와 'definition(규정)'이 렌티큘러로 겹쳐져 있어 관객의 위치에 따라 둘 중 하나만 읽힌다. 그러나 겨우 이정도로 함정이 끝나지 않는다. 'justice'라는 단어 뒤에는 'definition'의 사전적 의미를, 'definition'의 뒤에는 'justice'의 사전적 의미를 뒤바꿔 배치해 둔 것이 진짜 함정이다. 별로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배치가 함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매체의 이론적 간극을 이용한 것에 있다. 렌티큘러라는 매체를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을 바탕으로 두 단어가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이론적 특성 이면에 실제로는 거의 동시에 망막에 맺힌다는 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뇌는 이렇게 불확실한 신호를 견디지 못하고 둘 중 더 익숙하거나 먼저 인지된 하나의 단어로 서둘러 의미를 봉합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잠시 멈춰 서서 유심히 들여다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 이중의 함정은 발견되기조차 어렵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좁은 시야 안에서 성립된 불완전한 정보를, 감히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 시리즈가 저격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성 자체라기보다, 그 불완전함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지적 오만함이다.

6.
정리하자면, 류은미의 작업은 내면의 정보가 외부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원본이 아닌 가공된 데이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조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아가 그 데이터가 전달되는 시스템 자체도 공백이라는 부재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구조적 문제, 또 동일한 외부 세계마저도 각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다른 각인으로 새겨지는 수용의 차이, 그렇게 축적된 각자의 내면세계가 동일한 기호를 통해 발화되더라도 결국 다른 기의로 흩어지고 마는 표현의 한계, 그리고 이 모든 오류를 망각하고 서둘러 의미를 봉합해버리는 인지적 맹점에 이르기까지, '전달의 불완전성'이라는 명제를 여러 작업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류은미의 작업이 오래된 사람들의 논의를 교과서처럼 검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필연적 실패에서 뜻밖의 가능성을 반증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전달되지 못한 것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의 공백이 신호를 완성했듯이, 팬데믹의 정전된 도시가 각기 다른 기억으로 재구성되었듯이, ‘엄마’라는 단어가 제각기 다른 조각으로 서게 되었듯이, 정보는 늘 어떤 간극에서 새롭게 읽혔다. 그 간극이 없었다면 '소통'이라는 행위는 여타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하나의 고정된 의미 안에 박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화에는 과거만이 남아 있을 뿐, 현재와 미래는 발화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류은미의 작업은 실패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탐색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완벽하게 닿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이 발생하고, 더 다양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가닿을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영원히 서로를 향한 상상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25.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어차피 닿지 않을 진심에 대하여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외부로 꺼내 증명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이를테면 머릿속을 떠도는 사유와 기억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과 같이 '내면'이라고 밖에 총칭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증명 불가능한 경험들이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욱 실소를 부르는 것은 이 불확실한 내면의 정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내면의 정보가 타인에게 100%의 순도로 전달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보편적인 단어인 '엄마'를 발화하는 순간조차, 그 단어에 담긴 기억의 온도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어가 과연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인류의 오래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류은미는 바로 이 필연적인 실패, 즉 '전달의 불완전성' 이라는 조건을 작업의 전제로 삼는다.
2.
류은미가 '전달의 불완전성'이라는 개념을 작업의 전제로 삼기 전, 그 출발점은 소녀처럼 순수했다. "왜 내 감정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까?"라는 다소 감성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도였든 우연이었든, 작가가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거대 담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정보 단위인 신호(Signal)를 먼저 살핀 점은 이후 전개될 연구를 위한 아주 단단한 초석을 놓은 셈이 되었다. 그렇게 작가가 스스로의 감성 가득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가져온 것은 내면의 복잡한 감정이나 맥락을 모두 덜어낸 채, 오직 전달이라는 기능만 남긴 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신호였다. 신호란 약속된 두 개의 상태(이를테면 켜짐과 꺼짐)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기초적인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명료한 시스템은 사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공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예컨대 빛이 꺼지고 다시 켜지는 사이의 공백이 없다면 신호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류은미의 [Seek Our Signal-searcher(2019)] 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칠흑 같이 어두운 숲 속에서 작은 빛이 모스부호의 리듬으로 깜빡이는 영상의 형태로 말이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빛 그 자체라기보다, 빛이 꺼진 후 남는 잔상과 빛과 빛 사이를 채우는 어둠과 시간이다. 작가는 바로 그 빛이 없는 여백의 시간, 즉 공백 속에서 의미가 완성된다는 역설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만약 완벽한 소통이 정보의 온전한 현존(presence)을 의미한다면, 그것의 부재(absence)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 신호 체계는 출발부터 실패를 안고 태어난 셈이다. 의미란 결코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으며,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인 '없음'에 기대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Seek Our Signal-searcher> 2019, single channel video, 1min23sec
3.
가장 원초적인 단위의 신호마저 온전할 수 없다면, 수많은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뒤엉킨 '집단적 경험'은 과연 하나의 의미로 공유될 수 있을까? 류은미는 2020년, 팬데믹의 시발점에 있었던 도시, 대구의 풍경을 통해 이 거대한 질문을 파고들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팬데믹을 의도적으로 설계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도 코로나의 진원지가 된 대구는 '공유 불가능한 집단적 경험'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대구에 거주하던 작가는 그 실험실의 가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모두가 똑같은 '텅 빈 도시'를 보았지만, 그 풍경은 각자의 의식 위에서 서로 다르게 각인되어 졌다. 어떤 이에게는 언론이 연일 증폭시키던 감염의 공포로, 다른 이에게는 당장 멈춰버린 생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또 다른 편에서는 멈춰버린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기묘한 해방감으로 말이다. 공유된 것은 재난이라는 사건뿐, 그 경험의 내용은 지독히도 사적이었다. 류은미의 [Seesaw] 연작은 이 집단적 경험의 신기루를 렌티큘러(Lenticular)라는 매체로 폭로한다. 관객이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텅 빈 도시의 풍경은 돌연 모든 정보의 송출이 끊겼음을 알리는 차가운 조정 화면으로 뒤바뀐다. 방금 전까지 각종 공포를 전파하던 미디어의 스피커가 꺼진 순간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함께 겪었다고 믿는 기억조차, 사실은 각자의 시점에서 재생되는 서로 다른 영상의 총합에 불과하다는 차가운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공동체의 서사마저 파편화된다면, 개인의 가장 작은 발화 단위는 어떻게 전달될까?

<Seesaw_101> 2020, lenticular, 100x75cm
4.
류은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인간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타자인 '엄마'를 실험대 위에 올린다. '엄마'는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 내뱉는 단어이자,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하나의 기호 안에는 한 인간의 시작과 관계, 그리고 기억의 원형이 그 어떤 단어보다도 겹겹이 쌓여있다. 작가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발화한 '엄마'의 목소리를 수집해 음성 파형이라는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과정에서 목소리에 담긴 수많은 기억과 감정은 사라지고 모니터 위에 그려진 진폭의 굴곡만이 데이터로 남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 데이터를 다시 3차원의 조각으로 굳힌 뒤 [The Mothers]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엄마'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각기 다른 높이와 모양을 한 물리적인 형상으로 전시장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이 작업이 '우리 엄마'와 '너희 엄마'는 다르다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사용하는 '엄마'라는 기표(signifier)가 각자의 내면에서는 전혀 다른 기억과 감정의 총체, 즉 기의(signified)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 [Sentimental Waves] 연작은 이 음성 데이터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어떻게 또 다른 변주를 겪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목소리에서 감정이 제거된 차가운 데이터 위에 또 다른 불완전한 기호 체계인 '색'을 덧입힌다. 예컨대 빨간색이 누군가에게는 열정을, 또 누군가에게는 위험을 상징하듯, 색 또한 고정된 의미 없이 맥락에 따라 떠다니는 기호일 뿐이다. 목소리의 물리적 흔적인 파형과 문화적 기호인 색의 만남은, 하나의 정보가 얼마나 무한한 해석의 파편으로 흩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가 된다. 정리하자면, [Frequency(주파수)] 시리즈는 발화된 정보가 데이터로 환원되고(The Mothers), 다시 기호로 해석되는(Sentimental Waves)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잃고 파편화되는지를 해부한다.

<The mothers> 2022, Wood, Variable Installation

<sentimental wave#sl> 2022,lenticular and wood, 75x40.3cm
5.
개인의 발화가 그토록 쉽게 파편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기대고 있는 언어라는 시스템 자체가 처음부터 불완전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류은미의 작업 이전에, 20세기에 살았던 옛날 사람들이 이미 던져둔 거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그들은 언어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그 자체의 규칙으로만 작동하는 불안정한 시스템이라고 선언했는데, 즉 언어에 있어 '오류'는 버그(bug)가 아니라 디폴트(default) 값이라는 것이다. 류은미의 [Error] 시리즈는 바로 이 언어 시스템의 구조적 균열을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한다. 작품은 우리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미지인 컴퓨터 시스템의 오류 화면, 즉 블루스크린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통해 교묘한 함정을 설계한다. 그 화면에는 '정의'라는 단어의 두 가지 번역어, 'justice(공정)'와 'definition(규정)'이 렌티큘러로 겹쳐져 있어 관객의 위치에 따라 둘 중 하나만 읽힌다. 그러나 겨우 이정도로 함정이 끝나지 않는다. 'justice'라는 단어 뒤에는 'definition'의 사전적 의미를, 'definition'의 뒤에는 'justice'의 사전적 의미를 뒤바꿔 배치해 둔 것이 진짜 함정이다. 별로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배치가 함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매체의 이론적 간극을 이용한 것에 있다. 렌티큘러라는 매체를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을 바탕으로 두 단어가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이론적 특성 이면에 실제로는 거의 동시에 망막에 맺힌다는 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뇌는 이렇게 불확실한 신호를 견디지 못하고 둘 중 더 익숙하거나 먼저 인지된 하나의 단어로 서둘러 의미를 봉합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잠시 멈춰 서서 유심히 들여다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 이중의 함정은 발견되기조차 어렵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좁은 시야 안에서 성립된 불완전한 정보를, 감히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 시리즈가 저격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성 자체라기보다, 그 불완전함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지적 오만함이다.

6.
정리하자면, 류은미의 작업은 내면의 정보가 외부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원본이 아닌 가공된 데이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조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아가 그 데이터가 전달되는 시스템 자체도 공백이라는 부재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구조적 문제, 또 동일한 외부 세계마저도 각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다른 각인으로 새겨지는 수용의 차이, 그렇게 축적된 각자의 내면세계가 동일한 기호를 통해 발화되더라도 결국 다른 기의로 흩어지고 마는 표현의 한계, 그리고 이 모든 오류를 망각하고 서둘러 의미를 봉합해버리는 인지적 맹점에 이르기까지, '전달의 불완전성'이라는 명제를 여러 작업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류은미의 작업이 오래된 사람들의 논의를 교과서처럼 검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필연적 실패에서 뜻밖의 가능성을 반증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전달되지 못한 것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의 공백이 신호를 완성했듯이, 팬데믹의 정전된 도시가 각기 다른 기억으로 재구성되었듯이, ‘엄마’라는 단어가 제각기 다른 조각으로 서게 되었듯이, 정보는 늘 어떤 간극에서 새롭게 읽혔다. 그 간극이 없었다면 '소통'이라는 행위는 여타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하나의 고정된 의미 안에 박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화에는 과거만이 남아 있을 뿐, 현재와 미래는 발화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류은미의 작업은 실패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탐색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완벽하게 닿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이 발생하고, 더 다양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가닿을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영원히 서로를 향한 상상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25.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