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적 동시: 서민정의 《새벽의 왕》에 대하여1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평론가)
내 은은함도 빛나기 위해
태양과 네 목소리는
잠시나마, 잊지는 않을 테니, 여행을 떠나주렴.
밤하늘의 별들이 그 특유의 미학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일까. 상식적인 것들을 먼저 떠올려 본다. 우선 말 그대로 여러 천체 가운데 ‘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엄청나게 강한 빛을 발산할 수 있기에 우리와 상당히 멀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채가 가시적인 존재여야 한다. 또한 우리와 너무 멀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태양처럼 가까우면 강렬한 햇빛만 줄 수 있을 뿐, 은은한 별빛은 주지 못하니. 그리고 밤하늘이 충분히 어둡고 맑아야 할 것이다: 대낮에 은하수를 본 적이 있는가.
멀지만 너무 멀지 않은 것들. 햇빛 없는 새벽처럼 우리 일상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힘이 잠시 그 자리를 비울 때, 그들은 그 존재를 알릴 때가 있다. 당신과 내가 각자 품고 사는 반딧불들이다. 어느 날의 퇴근길, 저절로 찾게 되는 그 노래. 힘들었던 한 주의 주말, 오랜만에 책장을 떠나는 그 시집. 어느 특별한 날이 떠오르는 순간, 그날의 더욱 또렷한 기억을 위해 펼쳐보는 일기. 자신을 평소에 지배하는 힘들의 폭정은 잠시 물러나고, 부드러운 온정의 통치에 잠시나마 자신을 맡겨본다.
서민정의 예술은 그런 지배-피지배 관계의 미학일까.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서민정은 눈을 하루 가운데 가장 크게 뜨는 듯하고, 가장 열정적인 사유를 행하는 것만 같다. 그 눈은 햇빛도, 타인의 시선도 없는 시간의 세상을 응시하고, 정신은 그 시간의 세상과 활발하게 교감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새벽의 세상과 그 시간 속 자신에 대한 예술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시간은 예술을 지배하고, 예술은 그 지배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맡긴다. 서민정의 새벽은 자유의 억압이 아닌 햇빛, 시선, 그리고 소음의 부재라는, 즉 낮이 줄 수 없는 자유의 부여를 그 정치적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새벽의 왕-금난초(2025, 장지에 주묵, 분채, 콘테, 45.5 × 37.9 cm)
그래서일까, 이 ‘왕정의 자유’가 모순적인 것처럼 서민정의 어둠과 빛 또한 모순적인 관계를 지닌다. 서민정의 회화는 대체적으로 어둡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적당한 강도의 달빛에 비춰진 것과 같이, 아니면 화폭 밖에 몇 개의 촛불이 타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화폭 안은 은은하게 반사된 빛이 충만하다. 강한 빛이 아닌 은은한 빛, 그 약한 빛의 힘찬 가르침들에 경청해본다. 그중 하나: 새벽은 완전한 무광이 아니라 햇빛의 부재라는 점, 그러니까 아무런 빛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햇빛이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약한 빛들이 가시성을 회복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들만 가시적일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때만의 세상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황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 상대적으로 약한 빛들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약한 빛들이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낮의 통치는 강한 것들에 대한 집중, 관심, 그리고 피지배의 시간이라면, 이처럼 서민정의 예술을 통해 응시하는 새벽의 통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해도 빛과 힘이 없지는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 집중, 애정, 존중, 그리고 성찰의 시간인 셈이다.
또 하나의 가르침은,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건 필히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볼 때,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보지 않음을 동시에 수행한다. 다른 모든 것들과 우리 시선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시간은 다른 책들을 읽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며, 16쪽을 읽는 시간은 17쪽을 읽지 않는 시간과 같고, 16쪽의 첫 문장을 읽는 시간과 둘째 문장을 읽지 않는 시간 또한 동일하다. 서민정의 이 은은한 가르침, 정오의 태양만큼 얼마나 강렬한가. 화폭 내 새벽의 모습이 어두워도 가시적일 수 있는 것은 화폭 밖에 어느 광원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즉 우리가 화폭을 보며 동시에 볼 수 없는 게 있음을,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화폭 내 그림이 가시적일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이처럼 빛과 어둠, 강렬한 빛과 은은한 빛, 가시성과 비가시성, 눈을 뜨는 것과 눈을 감는 것, 그리고 응시가 가능한 삶과 불가능한 죽음 등 세상의 여러 양가성에 대한 서민정의 통찰은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세상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숙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 순간 다른 모든 곳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우리가 지닌 한계의 주요 속성이고, 이를 진정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역시 인식론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우리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예술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기에, 나와 여러 다양한, 즉 이질적인 타자의 공존이야말로 세상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임을 깨닫는 과정이고, 따라서 우리의 사회학적이자 생태학적 성숙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서 《새벽의 왕》을 관람할 때, 앞서 논한 회화와 공존하는 입체 작업에 대한 감상은 서민정의 사유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유발시킨다. 우선 《감추어둔 한 줌의 땅》 연작은 서민정이 아버지의 자연 수목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죽음에 대한 여러 인류 보편적 이해 가운데 하나인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는 종교적 이해를 연결하여 작업한 결과물인데, 구겨진 회화를, 즉 죽은 회화에 부조 작업을 더한 뒤 오동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 살아있는 감상자의 추모 대상으로 환생시킨 것이다. 즉 죽음인 동시에 삶이며, 양가성의 모순과 인간의 철학적 한계를 초월하여 세상의 이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감상자의 통찰로 그 생장의 가지가 뻗고 꽃이 핀다.

감추어둔 한 줌의 땅 01(2025, 장지에 주묵, 분채, 호분, 금분, 금박, 오동나무, 27 × 27 × 25 cm)
《혼불》 연작도 마찬가지이다. 물레 위에서 완벽에 가까운 둥근 형태의 도예 작품으로 수렴해 나가던 흙덩이가 외력으로 인해 그 형태가 무너지게 되고, 오히려 그 무너진 모습을 완성의 형태로 삼음으로서 삶이라는 회전의 역사와 죽음이라는 무너짐의 역사가 공존하는, 따라서 삶과 죽음을 필연적으로 동시에 응시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인 것이다. 삶은 죽음의 부재이기에 삶을 볼 때 죽음을 볼 수 없고, 죽음은 삶의 부재이기에 죽음을 볼 때 삶을 볼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생명과학은 생명과학이고 예술은 예술임을 서민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새벽의 예술도 빛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죽음의 예술도 삶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서민정의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혼불 part 1(2025, 세라믹, 좌대, 가변크기)
이런 감상의 끝에 이 글의 시작인 삼행시를 수줍고 숙연하게 일기에 써본다. 내가 낮의 비둘기를 보는 시간은 새벽의 부엉이를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당신이 아닌 수많은 것들을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거울을 보는 시간은 당신을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이를 성찰하며 고개를 숙여본다, 새벽의 왕 앞에서. 그러자 왕이 선물을 주신다. 시간이 일치하여 불가능했던 인지의 극복을, 그러니까 ‘동시적 동시,’ 같은 시각의 같은 시선을.
1. 《새벽의 왕》은 서민정의 1부와 2부로 나뉜 2025년 개인전이다. 1부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9월에 개최했으며 2부는 ‘공간불모지’에서 11월에 개최될 예정이다. 작품 구성은 1부와 2부 모두 동일하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동시적 동시: 서민정의 《새벽의 왕》에 대하여1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평론가)
내 은은함도 빛나기 위해
태양과 네 목소리는
잠시나마, 잊지는 않을 테니, 여행을 떠나주렴.
밤하늘의 별들이 그 특유의 미학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일까. 상식적인 것들을 먼저 떠올려 본다. 우선 말 그대로 여러 천체 가운데 ‘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엄청나게 강한 빛을 발산할 수 있기에 우리와 상당히 멀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채가 가시적인 존재여야 한다. 또한 우리와 너무 멀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태양처럼 가까우면 강렬한 햇빛만 줄 수 있을 뿐, 은은한 별빛은 주지 못하니. 그리고 밤하늘이 충분히 어둡고 맑아야 할 것이다: 대낮에 은하수를 본 적이 있는가.
멀지만 너무 멀지 않은 것들. 햇빛 없는 새벽처럼 우리 일상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힘이 잠시 그 자리를 비울 때, 그들은 그 존재를 알릴 때가 있다. 당신과 내가 각자 품고 사는 반딧불들이다. 어느 날의 퇴근길, 저절로 찾게 되는 그 노래. 힘들었던 한 주의 주말, 오랜만에 책장을 떠나는 그 시집. 어느 특별한 날이 떠오르는 순간, 그날의 더욱 또렷한 기억을 위해 펼쳐보는 일기. 자신을 평소에 지배하는 힘들의 폭정은 잠시 물러나고, 부드러운 온정의 통치에 잠시나마 자신을 맡겨본다.
서민정의 예술은 그런 지배-피지배 관계의 미학일까.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서민정은 눈을 하루 가운데 가장 크게 뜨는 듯하고, 가장 열정적인 사유를 행하는 것만 같다. 그 눈은 햇빛도, 타인의 시선도 없는 시간의 세상을 응시하고, 정신은 그 시간의 세상과 활발하게 교감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새벽의 세상과 그 시간 속 자신에 대한 예술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시간은 예술을 지배하고, 예술은 그 지배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맡긴다. 서민정의 새벽은 자유의 억압이 아닌 햇빛, 시선, 그리고 소음의 부재라는, 즉 낮이 줄 수 없는 자유의 부여를 그 정치적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새벽의 왕-금난초(2025, 장지에 주묵, 분채, 콘테, 45.5 × 37.9 cm)
그래서일까, 이 ‘왕정의 자유’가 모순적인 것처럼 서민정의 어둠과 빛 또한 모순적인 관계를 지닌다. 서민정의 회화는 대체적으로 어둡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적당한 강도의 달빛에 비춰진 것과 같이, 아니면 화폭 밖에 몇 개의 촛불이 타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화폭 안은 은은하게 반사된 빛이 충만하다. 강한 빛이 아닌 은은한 빛, 그 약한 빛의 힘찬 가르침들에 경청해본다. 그중 하나: 새벽은 완전한 무광이 아니라 햇빛의 부재라는 점, 그러니까 아무런 빛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햇빛이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약한 빛들이 가시성을 회복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들만 가시적일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때만의 세상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황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 상대적으로 약한 빛들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약한 빛들이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낮의 통치는 강한 것들에 대한 집중, 관심, 그리고 피지배의 시간이라면, 이처럼 서민정의 예술을 통해 응시하는 새벽의 통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해도 빛과 힘이 없지는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 집중, 애정, 존중, 그리고 성찰의 시간인 셈이다.
또 하나의 가르침은,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건 필히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볼 때,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보지 않음을 동시에 수행한다. 다른 모든 것들과 우리 시선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시간은 다른 책들을 읽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며, 16쪽을 읽는 시간은 17쪽을 읽지 않는 시간과 같고, 16쪽의 첫 문장을 읽는 시간과 둘째 문장을 읽지 않는 시간 또한 동일하다. 서민정의 이 은은한 가르침, 정오의 태양만큼 얼마나 강렬한가. 화폭 내 새벽의 모습이 어두워도 가시적일 수 있는 것은 화폭 밖에 어느 광원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즉 우리가 화폭을 보며 동시에 볼 수 없는 게 있음을,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화폭 내 그림이 가시적일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이처럼 빛과 어둠, 강렬한 빛과 은은한 빛, 가시성과 비가시성, 눈을 뜨는 것과 눈을 감는 것, 그리고 응시가 가능한 삶과 불가능한 죽음 등 세상의 여러 양가성에 대한 서민정의 통찰은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세상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숙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 순간 다른 모든 곳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우리가 지닌 한계의 주요 속성이고, 이를 진정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역시 인식론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우리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예술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기에, 나와 여러 다양한, 즉 이질적인 타자의 공존이야말로 세상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임을 깨닫는 과정이고, 따라서 우리의 사회학적이자 생태학적 성숙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서 《새벽의 왕》을 관람할 때, 앞서 논한 회화와 공존하는 입체 작업에 대한 감상은 서민정의 사유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유발시킨다. 우선 《감추어둔 한 줌의 땅》 연작은 서민정이 아버지의 자연 수목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죽음에 대한 여러 인류 보편적 이해 가운데 하나인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는 종교적 이해를 연결하여 작업한 결과물인데, 구겨진 회화를, 즉 죽은 회화에 부조 작업을 더한 뒤 오동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 살아있는 감상자의 추모 대상으로 환생시킨 것이다. 즉 죽음인 동시에 삶이며, 양가성의 모순과 인간의 철학적 한계를 초월하여 세상의 이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감상자의 통찰로 그 생장의 가지가 뻗고 꽃이 핀다.

감추어둔 한 줌의 땅 01(2025, 장지에 주묵, 분채, 호분, 금분, 금박, 오동나무, 27 × 27 × 25 cm)
《혼불》 연작도 마찬가지이다. 물레 위에서 완벽에 가까운 둥근 형태의 도예 작품으로 수렴해 나가던 흙덩이가 외력으로 인해 그 형태가 무너지게 되고, 오히려 그 무너진 모습을 완성의 형태로 삼음으로서 삶이라는 회전의 역사와 죽음이라는 무너짐의 역사가 공존하는, 따라서 삶과 죽음을 필연적으로 동시에 응시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인 것이다. 삶은 죽음의 부재이기에 삶을 볼 때 죽음을 볼 수 없고, 죽음은 삶의 부재이기에 죽음을 볼 때 삶을 볼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생명과학은 생명과학이고 예술은 예술임을 서민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새벽의 예술도 빛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죽음의 예술도 삶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서민정의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혼불 part 1(2025, 세라믹, 좌대, 가변크기)
이런 감상의 끝에 이 글의 시작인 삼행시를 수줍고 숙연하게 일기에 써본다. 내가 낮의 비둘기를 보는 시간은 새벽의 부엉이를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당신이 아닌 수많은 것들을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거울을 보는 시간은 당신을 보지 않는 시간임을 인정하는 것: 이를 성찰하며 고개를 숙여본다, 새벽의 왕 앞에서. 그러자 왕이 선물을 주신다. 시간이 일치하여 불가능했던 인지의 극복을, 그러니까 ‘동시적 동시,’ 같은 시각의 같은 시선을.
1. 《새벽의 왕》은 서민정의 1부와 2부로 나뉜 2025년 개인전이다. 1부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9월에 개최했으며 2부는 ‘공간불모지’에서 11월에 개최될 예정이다. 작품 구성은 1부와 2부 모두 동일하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