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군비 전쟁 - 아트바젤 파리 VS 프리즈 런던
박준수

영화 <관상>의 한 장면, 관상가 송강호는 파도만 보고 바람을 보지 못했다며 회한을 늘어놓는다.
아트페어 일을 10여 년 넘게 해오며 시장의 흐름을 읽는 감은 어느 정도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세계 미술 시장의 전체적 흐름을 온전히 꿰뚫기란 여전히 어렵다. 영화 <관상>의 대사처럼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종종 떠오른다. 매번 미술계의 핫한 이슈에는 반응하지만, 그 바람의 방향, 즉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흐름을 어렴풋이나마 읽기 위해서는 현재 ‘컨템포러리 아트’와 그 시장이 어떤 역사를 거쳐 형성되어 왔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의 기원은 흔히 제2차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 사고의 붕괴 시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가 인간 중심의 합리와 과학적 사고를 열어젖혔다면,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낙관의 종말을 고했다. 과학 문명에 대한 절대적 신뢰, 인간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쟁의 비극과 대량 살상 앞에서 산산이 무너졌다.
세상은 더 이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해한 복잡성으로 가득 찼고, 작가들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재현 방식을 버리고 추상과 실험의 언어를 택했다.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바넷 뉴먼의 회화 등은 이 불가해한 세계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1940–50년대의 뉴욕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 바우하우스 출신의 유럽 작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며, 유럽의 전통적 미학과 미국식 실험정신이 결합했다. 뉴욕은 유럽의 예술적 권위를 흡수하고 새로운 미술 언어를 만들어내며 곧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앤디워홀, 키스헤링, 바스키아 세 사람은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명실상부 미국 뉴욕을 전세계 미술의 허브로 만든다.
1980년대 팝아트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의 중심은 명실상부 뉴욕이었다. 앤디 워홀, 바스키아, 키스 해링이 상업 자본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미술은 순수미학이 아닌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1990년대 미·소 냉전 종식과 함께 ‘국제화의 물결’이 일며 시장의 권력지도는 요동쳤다.

한 때는 그들도 젊었단다. 그들의 리즈 시절 사진.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제니 사빌 사진 출처 : THE COLLECTOR
런던은 이를 가장 먼저 감지했다.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제니 사빌로 대표되는 YBA(Young British Artists) 세대가 등장하며 런던은 공격적인 실험의 도시로 변모했다. 찰스 사치의 전략적 컬렉션은 이들의 작품을 전 세계에 노출시켰고, 런던을 세계 미술 시장의 새로운 허브로 끌어올렸다.
2003년 탄생한 프리즈 런던(Frieze London) 은 이러한 에너지를 제도적으로 수렴한 결과였다. 단순한 상업 페어가 아니라 ‘담론과 시장 교차의 무대’를 표방하며 학예적 기획, 공간 디자인, 영국 자본의 네트워크를 결합했다. 프리즈의 전략은 “페어가 곧 전시이자 담론의 장”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이는 이후 전 세계 아트페어 운영 방식의 기준이 되었다.
프랑스는 오랜 예술 전통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 이후 글로벌 시장의 변방에 머물렀다. 그러나 2022년 스위스 바젤 기반의 아트바젤(Art Basel) 이 FIAC을 대체하며 파리에 진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첫 회는 ‘Paris+ par Art Basel’이라는 이름으로 열렸고, 2024년부터는 Art Basel Paris로 공식 명칭이 바뀌며 그랑 팔레에 복귀했다.
이 진입은 단순한 시장 확장이 아니라 ‘유럽 본토의 중심 복권’을 노린 상징적 행보였다. 런던이 금융과 민간 자본의 도시라면, 파리는 제도와 문화 자존심의 도시다. 프리즈가 트렌드를 ‘창출’한다면, 아트바젤은 미술사의 맥락을 ‘정립’한다.

자연광이 이렇게 안 거슬리다니! 좁은 복도가 이렇게 안 거슬리다니! 그랑팔레의 멋진 건축물이 사람을 홀린다. 사진 제공 : 박준수
그랑 팔레의 아트바젤 파리는 고전적 품격과 초국적 자본이 교차하는 장이었다. 전시 동선의 우아함, 명확한 큐레이션, 유럽 대형 갤러리들의 물량은 프리즈와 전혀 다른 리듬을 보여준다. 런던이 속도의 시장이라면, 파리는 예술 역사성과 정통성을 무기로 한 ‘무거운 전장’이다.
이 두 페어의 경쟁은 이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북미에서는 이미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Art Basel Miami Beach), 프리즈 뉴욕, 프리즈 LA, 그리고 프리즈가 인수한 아모리 쇼(Armory Show)와 시카고 엑스포가 주도권을 다투고 있다. 북미는 ‘총성 없는 군비경쟁’ 그 자체다.
아시아에서도 전선은 격화되고 있다. 아트바젤 홍콩이 아시아 시장의 관문으로 굳자, 프리즈는 2022년 서울에 상륙해 새로운 균형을 만들었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KIAF)가 동시 개최되는 ‘서울 아트위크’는 아시아 미술 시장 허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경쟁의 다음 무대는 명확하다. 바로 중동이다.
카타르와 아부다비는 이제 ‘확장대상’이 아닌 미술 시장 재편의 핵심 플레이어다. 두 국가 모두 에너지 이후의 정체성을 ‘문화’에서 찾고 있으며, 대규모 미술관 건립과 글로벌 페어 유치, 공공미술 투자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

2015년 아트바젤 홍콩에서 처음 보았을 때 세 개였던 시계가 어느덧 10년이 지나 다섯개가 되었다. 사진 제공 : 박준수
Art Basel Qatar 는 2026년 2월 도하(Doha)에서 첫 개최될 예정으로, 유럽 기반 아트바젤이 처음으로 중동 영토에 내딛는 프로젝트다. 이는 Art Basel Paris 이후 ‘유럽 확장 판’을 넘어 새로운 문화 벨트 형성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반면 Frieze Abu Dhabi 는 보다 공격적이다. 프리즈는 2026년 11월을 기점으로 기존 Abu Dhabi Art 를 인수하여 ‘Frieze Abu Dhabi’로 전환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Frieze NY, LA, Seoul로 확장된 프리즈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이제 중동으로 직접 연결된다. 아트바젤이 ‘문화 제국’으로서의 확장을 지속하는 동안, 프리즈는 ‘운영 네트워크 혁신’ 을 무기로 대응하는 셈이다.
사막의 도시들이 미술 시장의 다음 전선으로 부상하는 것은 이제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다. 2026년은 두 거대 브랜드가 유럽 밖에서 정면 충돌하는 첫 해가 될 것이다.
결국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의 경쟁은 단순한 유럽 내 세력 다툼이 아니다. ‘포스트 유럽’ 시대의 미술 시장 질서가 새롭게 쓰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현대미술이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 세계관의 붕괴에서 태어났듯, 오늘의 시장 또한 권력과 자본의 축이 이동하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21세기 컨템포러리의 다음 장은 더 이상 뉴욕이나 런던이 아닌, 사막 위의 새로운 도시에서 열릴 지도 모른다. 거기가 서울이었으면 하는 기대는 이제 조금 많이 내려놓았지만, 그 ‘바람’을 읽고 젊은 세대를 위한 작은 아포리즘이나마 남겨 놓는 것이 이 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이의 작은 소명인가보다 생각한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총성 없는 군비 전쟁 - 아트바젤 파리 VS 프리즈 런던
박준수

영화 <관상>의 한 장면, 관상가 송강호는 파도만 보고 바람을 보지 못했다며 회한을 늘어놓는다.
아트페어 일을 10여 년 넘게 해오며 시장의 흐름을 읽는 감은 어느 정도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세계 미술 시장의 전체적 흐름을 온전히 꿰뚫기란 여전히 어렵다. 영화 <관상>의 대사처럼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종종 떠오른다. 매번 미술계의 핫한 이슈에는 반응하지만, 그 바람의 방향, 즉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흐름을 어렴풋이나마 읽기 위해서는 현재 ‘컨템포러리 아트’와 그 시장이 어떤 역사를 거쳐 형성되어 왔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의 기원은 흔히 제2차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 사고의 붕괴 시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가 인간 중심의 합리와 과학적 사고를 열어젖혔다면,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낙관의 종말을 고했다. 과학 문명에 대한 절대적 신뢰, 인간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쟁의 비극과 대량 살상 앞에서 산산이 무너졌다.
세상은 더 이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해한 복잡성으로 가득 찼고, 작가들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재현 방식을 버리고 추상과 실험의 언어를 택했다.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바넷 뉴먼의 회화 등은 이 불가해한 세계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1940–50년대의 뉴욕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 바우하우스 출신의 유럽 작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며, 유럽의 전통적 미학과 미국식 실험정신이 결합했다. 뉴욕은 유럽의 예술적 권위를 흡수하고 새로운 미술 언어를 만들어내며 곧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앤디워홀, 키스헤링, 바스키아 세 사람은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명실상부 미국 뉴욕을 전세계 미술의 허브로 만든다.
1980년대 팝아트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의 중심은 명실상부 뉴욕이었다. 앤디 워홀, 바스키아, 키스 해링이 상업 자본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미술은 순수미학이 아닌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1990년대 미·소 냉전 종식과 함께 ‘국제화의 물결’이 일며 시장의 권력지도는 요동쳤다.

한 때는 그들도 젊었단다. 그들의 리즈 시절 사진.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제니 사빌 사진 출처 : THE COLLECTOR
런던은 이를 가장 먼저 감지했다.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제니 사빌로 대표되는 YBA(Young British Artists) 세대가 등장하며 런던은 공격적인 실험의 도시로 변모했다. 찰스 사치의 전략적 컬렉션은 이들의 작품을 전 세계에 노출시켰고, 런던을 세계 미술 시장의 새로운 허브로 끌어올렸다.
2003년 탄생한 프리즈 런던(Frieze London) 은 이러한 에너지를 제도적으로 수렴한 결과였다. 단순한 상업 페어가 아니라 ‘담론과 시장 교차의 무대’를 표방하며 학예적 기획, 공간 디자인, 영국 자본의 네트워크를 결합했다. 프리즈의 전략은 “페어가 곧 전시이자 담론의 장”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이는 이후 전 세계 아트페어 운영 방식의 기준이 되었다.
프랑스는 오랜 예술 전통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 이후 글로벌 시장의 변방에 머물렀다. 그러나 2022년 스위스 바젤 기반의 아트바젤(Art Basel) 이 FIAC을 대체하며 파리에 진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첫 회는 ‘Paris+ par Art Basel’이라는 이름으로 열렸고, 2024년부터는 Art Basel Paris로 공식 명칭이 바뀌며 그랑 팔레에 복귀했다.
이 진입은 단순한 시장 확장이 아니라 ‘유럽 본토의 중심 복권’을 노린 상징적 행보였다. 런던이 금융과 민간 자본의 도시라면, 파리는 제도와 문화 자존심의 도시다. 프리즈가 트렌드를 ‘창출’한다면, 아트바젤은 미술사의 맥락을 ‘정립’한다.

자연광이 이렇게 안 거슬리다니! 좁은 복도가 이렇게 안 거슬리다니! 그랑팔레의 멋진 건축물이 사람을 홀린다. 사진 제공 : 박준수
그랑 팔레의 아트바젤 파리는 고전적 품격과 초국적 자본이 교차하는 장이었다. 전시 동선의 우아함, 명확한 큐레이션, 유럽 대형 갤러리들의 물량은 프리즈와 전혀 다른 리듬을 보여준다. 런던이 속도의 시장이라면, 파리는 예술 역사성과 정통성을 무기로 한 ‘무거운 전장’이다.
이 두 페어의 경쟁은 이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북미에서는 이미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Art Basel Miami Beach), 프리즈 뉴욕, 프리즈 LA, 그리고 프리즈가 인수한 아모리 쇼(Armory Show)와 시카고 엑스포가 주도권을 다투고 있다. 북미는 ‘총성 없는 군비경쟁’ 그 자체다.
아시아에서도 전선은 격화되고 있다. 아트바젤 홍콩이 아시아 시장의 관문으로 굳자, 프리즈는 2022년 서울에 상륙해 새로운 균형을 만들었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KIAF)가 동시 개최되는 ‘서울 아트위크’는 아시아 미술 시장 허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경쟁의 다음 무대는 명확하다. 바로 중동이다.
카타르와 아부다비는 이제 ‘확장대상’이 아닌 미술 시장 재편의 핵심 플레이어다. 두 국가 모두 에너지 이후의 정체성을 ‘문화’에서 찾고 있으며, 대규모 미술관 건립과 글로벌 페어 유치, 공공미술 투자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

2015년 아트바젤 홍콩에서 처음 보았을 때 세 개였던 시계가 어느덧 10년이 지나 다섯개가 되었다. 사진 제공 : 박준수
Art Basel Qatar 는 2026년 2월 도하(Doha)에서 첫 개최될 예정으로, 유럽 기반 아트바젤이 처음으로 중동 영토에 내딛는 프로젝트다. 이는 Art Basel Paris 이후 ‘유럽 확장 판’을 넘어 새로운 문화 벨트 형성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반면 Frieze Abu Dhabi 는 보다 공격적이다. 프리즈는 2026년 11월을 기점으로 기존 Abu Dhabi Art 를 인수하여 ‘Frieze Abu Dhabi’로 전환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Frieze NY, LA, Seoul로 확장된 프리즈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이제 중동으로 직접 연결된다. 아트바젤이 ‘문화 제국’으로서의 확장을 지속하는 동안, 프리즈는 ‘운영 네트워크 혁신’ 을 무기로 대응하는 셈이다.
사막의 도시들이 미술 시장의 다음 전선으로 부상하는 것은 이제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다. 2026년은 두 거대 브랜드가 유럽 밖에서 정면 충돌하는 첫 해가 될 것이다.
결국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의 경쟁은 단순한 유럽 내 세력 다툼이 아니다. ‘포스트 유럽’ 시대의 미술 시장 질서가 새롭게 쓰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현대미술이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 세계관의 붕괴에서 태어났듯, 오늘의 시장 또한 권력과 자본의 축이 이동하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21세기 컨템포러리의 다음 장은 더 이상 뉴욕이나 런던이 아닌, 사막 위의 새로운 도시에서 열릴 지도 모른다. 거기가 서울이었으면 하는 기대는 이제 조금 많이 내려놓았지만, 그 ‘바람’을 읽고 젊은 세대를 위한 작은 아포리즘이나마 남겨 놓는 것이 이 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이의 작은 소명인가보다 생각한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