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교차, '있어야 할' 자리
정희라(미술평론/미술사)
우리가 손모아의 작업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있었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어쩌면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 그러나 늘 어긋난 채 남아 있는 ‘있어야 할 세계’다. 그림 속에서 분절되어 나타나는 휴양지의 풍경 조각 조각들은 실제의 모습 이전에 매체 속에서 살아난 환상에 가깝다. 여행을 가야 한다고 속삭이는 광고와 잡지, 브로슈어와 포스터, 그리고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SNS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관습적 풍경을 미리 완성하곤 한다. 손모아가 매년 여행을 통해 수집하는 장면들은 이러한 관습적인 기억을 토대로 재조합된 유토피아적인 풍경의 한 단면이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기록’이라기보다 ‘회상’이고, ‘실재’라기보다 이미지의 습성이 드러나는 ‘환상’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환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포착한다.







한눈에 평평함이 먼저 들어오는 단색의 면, 소위 ‘면치기’라 불리는 기법에 의해 잘려 나간 표면이 화면을 과감하게 가른다. 이 면은 벽처럼 돌연히 나타나 시야를 차단하고, 깊이를 압착하여 풍경의 연속을 절단한다. 이러한 공간은 잘린 공백이라기보다 기호들이 떠오르는 스크린이다. 이 단색의 스크린 곁에는 표상들이 스치듯 지나가고, 어떤 것은 오래 정지해 있다. 풍경과 색 면 사이에 작은 물결과 같은 움직임이 유쾌하게 가로지르기도 한다. 이 동적인 장식이 색 면과 풍경-두 세계를 하나로 묶어, 동떨어진 세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그의 색 면은 구체적인 현실을 지우는 동시에 환상의 배경을 만든다. 이 양가적 작동이 손모아 회화에 감각적인 리듬을 형성한다. 일부 작품에는 추상과 구상이 혼합되어 있다. 작은 이미지를 확대해 그리면서 윤곽이 미세하게 희미해졌다. 아주 작은 인물의 뚜렷한 형상과 커다랗고 흐릿한 광경이 한 평면에 공존한다. 적층 된 표면의 가장자리가 흐려지고, 윤곽은 현실적인 소실점을 잃는다. 이러한 표현은 <Breath of nature>와 같은 작품 연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팝아트 같은 색면 추상 사이 인물들의 묘사는 구체적이다. 서로 다른 표현 기법들의 충돌은 한 화면 안에서 감각의 박자를 틈틈이 달라지게 한다. 더불어 뒤섞인 소재들이 풍경의 시간과 장소를 통합한다. 이 풍경의 혼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대한 묘사가 아닐까. 이때 회화는 재현의 장르라기보다 기억과 욕망을 재배열하는 장치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손모아의 그림 속에서 현실은 실재가 기호로 바뀌는 순간에 열리는 또 다른 장(場)이 된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 장식과 자연의 경계, 삭제와 혼입의 경계가 교차하는 손모아의 회화적 문법은 어디에서 왔을까. 손모아의 학부 전공인 판화에서 이 문법의 근원을 들여다보자. 판화는 뚜렷하게 레이어의 예술이다. 판을 갈고, 색을 분리하고, 인쇄하는 사이 중첩된 이미지들의 합은 때로 미세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이는 이미지에 깊이를, 표면에 시간을 부여한다. 한 번 찍은 흔적 위로 또 다른 색이 포개지고, 결과적으로는 단 한 장의 종이 위에 여러 시간의 층이 살게 된다. 손모아의 회화에서 색 면은 바탕 판처럼, 그 밖의 도상과 구체적인 풍경은 별도의 판처럼 비추어진다. 아니,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순서를 오가며 다음 레이어를 기대하게 한다. 이러한 판화의 사고가 회화의 구조를 바꾸어 나간다. 붓질의 시간은 인쇄의 시간처럼 나뉘고, 인쇄의 평면성은 회화의 평면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전개를 얻는다. 판의 순서가 바뀌면, 최종 이미지는 같은 듯 달라진다. 동일한 아이콘이 다른 면 위에 얹히면, 해석이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표면의 깊이에 따라 응시의 순서 또한 교란된다. 이때, 우리의 시선은 면 앞에서, 면 뒤에서 다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이 속도의 차이가 해석하는 데에 의미의 차이를 낳고, 관람의 방식에 리듬의 변주로 나타난다.






리드미컬한 레이어/층위의 사유는 설치 작업인 거울 작업으로 확장된다. 거울은 최종의 표면인 동시에, 끝나지 않는 레이어다. 하나의 이미지가 거울을 통해 복수로 증식하고,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프레이밍이 바뀐다. 거울은 면치기보다 더 과감하게 화면을 잘라낸다. 잘라냄은 배제라기보다 개입의 요청이다. 관람자의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풍경은 갱신된다. 그 갱신은 우발적이되 임의적이지 않다. 전시는 예측 불가능성과 구조적 필연성 사이의 균형을 설계한다. 작가에 의해 제시된 거울 앞에 선 관람자는 관찰자이자 이미지의 공급자로 위치한다. 그림은 더 이상 고정된 프레임의 광경이 아니다. 은경(銀鏡) 작업은 복수의 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겹치고 흔들리는 체험의 장이 된다. 반사된 풍경이 반사를 다시 반사할 때, 레이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과잉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반영(reflection)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지금’인가.
손모아의 회화 기법은 ‘지금-여기’의 기술이 아니라 ‘지금-어디’를 만드는 기술이 된다. 여행하듯 유영하는 복수의 면과 일상에 머무는 듯한 단면이 공존하는 틈새에 거울이 끼어든 형식을 상기하자. 면은 시간을 정지시켜 ‘지금’을 고정하고, 거울은 시간을 늘려 ‘여기’를 지연시킨다. 면치기와 같은 패턴은 단절과 분절을 통해 장소의 충돌을 생성하고, 거울은 장소의 경계를 허물며 스민다. 관람자는 두 시간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한다. 이 머묾의 불가능이야말로 손모아의 회화가 제시하는 가장 정확한 현실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현실은 한곳에 정박하지 않는다. 늘 뒤늦게 도착하고, 늘 앞서 사라진다.
충돌과 반영이 만드는 미세한 화합, 흐릿한 환상을 앞으로 끌어내는 면의 용기,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한 시선의 인내. 이것들이 중첩된 자리에서 손모아의 풍경은 매번 새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있어야 할 세계’는 어디인가. 아직 오지 않은 세계, 도래의 시간으로 열려 있는 풍경으로 봐도 될까. 여행은 일상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고, 전시는 일상과 다른 시간의 법칙을 부여한다. 관람자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본다. 자신이 풍경 속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각한다. 자각의 순간, 손모아의 ‘여유’라는 기호는 화면 밖으로 나와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는 유토피아의 파편이 된다. 그 반사 속에서 자신이 기대어 살 세계의 모양을 잠시 본다. 완전하지 않기에 더 선명한, 닿을 수 없기에 더 가까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세계의 교차, '있어야 할' 자리
정희라(미술평론/미술사)
우리가 손모아의 작업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있었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어쩌면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 그러나 늘 어긋난 채 남아 있는 ‘있어야 할 세계’다. 그림 속에서 분절되어 나타나는 휴양지의 풍경 조각 조각들은 실제의 모습 이전에 매체 속에서 살아난 환상에 가깝다. 여행을 가야 한다고 속삭이는 광고와 잡지, 브로슈어와 포스터, 그리고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SNS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관습적 풍경을 미리 완성하곤 한다. 손모아가 매년 여행을 통해 수집하는 장면들은 이러한 관습적인 기억을 토대로 재조합된 유토피아적인 풍경의 한 단면이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기록’이라기보다 ‘회상’이고, ‘실재’라기보다 이미지의 습성이 드러나는 ‘환상’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환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포착한다.







한눈에 평평함이 먼저 들어오는 단색의 면, 소위 ‘면치기’라 불리는 기법에 의해 잘려 나간 표면이 화면을 과감하게 가른다. 이 면은 벽처럼 돌연히 나타나 시야를 차단하고, 깊이를 압착하여 풍경의 연속을 절단한다. 이러한 공간은 잘린 공백이라기보다 기호들이 떠오르는 스크린이다. 이 단색의 스크린 곁에는 표상들이 스치듯 지나가고, 어떤 것은 오래 정지해 있다. 풍경과 색 면 사이에 작은 물결과 같은 움직임이 유쾌하게 가로지르기도 한다. 이 동적인 장식이 색 면과 풍경-두 세계를 하나로 묶어, 동떨어진 세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그의 색 면은 구체적인 현실을 지우는 동시에 환상의 배경을 만든다. 이 양가적 작동이 손모아 회화에 감각적인 리듬을 형성한다. 일부 작품에는 추상과 구상이 혼합되어 있다. 작은 이미지를 확대해 그리면서 윤곽이 미세하게 희미해졌다. 아주 작은 인물의 뚜렷한 형상과 커다랗고 흐릿한 광경이 한 평면에 공존한다. 적층 된 표면의 가장자리가 흐려지고, 윤곽은 현실적인 소실점을 잃는다. 이러한 표현은 <Breath of nature>와 같은 작품 연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팝아트 같은 색면 추상 사이 인물들의 묘사는 구체적이다. 서로 다른 표현 기법들의 충돌은 한 화면 안에서 감각의 박자를 틈틈이 달라지게 한다. 더불어 뒤섞인 소재들이 풍경의 시간과 장소를 통합한다. 이 풍경의 혼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대한 묘사가 아닐까. 이때 회화는 재현의 장르라기보다 기억과 욕망을 재배열하는 장치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손모아의 그림 속에서 현실은 실재가 기호로 바뀌는 순간에 열리는 또 다른 장(場)이 된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 장식과 자연의 경계, 삭제와 혼입의 경계가 교차하는 손모아의 회화적 문법은 어디에서 왔을까. 손모아의 학부 전공인 판화에서 이 문법의 근원을 들여다보자. 판화는 뚜렷하게 레이어의 예술이다. 판을 갈고, 색을 분리하고, 인쇄하는 사이 중첩된 이미지들의 합은 때로 미세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이는 이미지에 깊이를, 표면에 시간을 부여한다. 한 번 찍은 흔적 위로 또 다른 색이 포개지고, 결과적으로는 단 한 장의 종이 위에 여러 시간의 층이 살게 된다. 손모아의 회화에서 색 면은 바탕 판처럼, 그 밖의 도상과 구체적인 풍경은 별도의 판처럼 비추어진다. 아니,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순서를 오가며 다음 레이어를 기대하게 한다. 이러한 판화의 사고가 회화의 구조를 바꾸어 나간다. 붓질의 시간은 인쇄의 시간처럼 나뉘고, 인쇄의 평면성은 회화의 평면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전개를 얻는다. 판의 순서가 바뀌면, 최종 이미지는 같은 듯 달라진다. 동일한 아이콘이 다른 면 위에 얹히면, 해석이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표면의 깊이에 따라 응시의 순서 또한 교란된다. 이때, 우리의 시선은 면 앞에서, 면 뒤에서 다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이 속도의 차이가 해석하는 데에 의미의 차이를 낳고, 관람의 방식에 리듬의 변주로 나타난다.






리드미컬한 레이어/층위의 사유는 설치 작업인 거울 작업으로 확장된다. 거울은 최종의 표면인 동시에, 끝나지 않는 레이어다. 하나의 이미지가 거울을 통해 복수로 증식하고,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프레이밍이 바뀐다. 거울은 면치기보다 더 과감하게 화면을 잘라낸다. 잘라냄은 배제라기보다 개입의 요청이다. 관람자의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풍경은 갱신된다. 그 갱신은 우발적이되 임의적이지 않다. 전시는 예측 불가능성과 구조적 필연성 사이의 균형을 설계한다. 작가에 의해 제시된 거울 앞에 선 관람자는 관찰자이자 이미지의 공급자로 위치한다. 그림은 더 이상 고정된 프레임의 광경이 아니다. 은경(銀鏡) 작업은 복수의 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겹치고 흔들리는 체험의 장이 된다. 반사된 풍경이 반사를 다시 반사할 때, 레이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과잉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반영(reflection)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지금’인가.
손모아의 회화 기법은 ‘지금-여기’의 기술이 아니라 ‘지금-어디’를 만드는 기술이 된다. 여행하듯 유영하는 복수의 면과 일상에 머무는 듯한 단면이 공존하는 틈새에 거울이 끼어든 형식을 상기하자. 면은 시간을 정지시켜 ‘지금’을 고정하고, 거울은 시간을 늘려 ‘여기’를 지연시킨다. 면치기와 같은 패턴은 단절과 분절을 통해 장소의 충돌을 생성하고, 거울은 장소의 경계를 허물며 스민다. 관람자는 두 시간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한다. 이 머묾의 불가능이야말로 손모아의 회화가 제시하는 가장 정확한 현실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현실은 한곳에 정박하지 않는다. 늘 뒤늦게 도착하고, 늘 앞서 사라진다.
충돌과 반영이 만드는 미세한 화합, 흐릿한 환상을 앞으로 끌어내는 면의 용기,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한 시선의 인내. 이것들이 중첩된 자리에서 손모아의 풍경은 매번 새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있어야 할 세계’는 어디인가. 아직 오지 않은 세계, 도래의 시간으로 열려 있는 풍경으로 봐도 될까. 여행은 일상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고, 전시는 일상과 다른 시간의 법칙을 부여한다. 관람자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본다. 자신이 풍경 속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각한다. 자각의 순간, 손모아의 ‘여유’라는 기호는 화면 밖으로 나와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는 유토피아의 파편이 된다. 그 반사 속에서 자신이 기대어 살 세계의 모양을 잠시 본다. 완전하지 않기에 더 선명한, 닿을 수 없기에 더 가까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