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지 않은 유쾌함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요량에 『즐거운 학문』을 펼쳤으나, 내용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이 명랑한 제목의 뒷면에는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인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가는지를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유쾌하지도, 상쾌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빛이 있으라"라는 선언으로 태어난 빛이 자신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던 것처럼 웃음은 기쁨만이 아닌 허무와 같은 네거티브한 감정을 견디기 위한 경련에 가까운 부분도 존재한다. 이 역설적인 명랑함은 오늘의 세계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웃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안을 은폐하기 위해 그 웃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불안은 언제나 활기라는 외피를 입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포를 잊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웃고 노래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공포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과장된 에너지를 동원하게 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은 희망이나 기쁨과 같은 요소보다도 절망과 공포가 더 앞서있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생은 곧 피로의 다른 이름이며 쾌활함은 절망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은 '유쾌하지 않은 유쾌함'은 불안한 인간의 생존방식이다.
이러한 불안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있다. 지난 일은 현재 속에서 반복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은 예감의 형태로 이미 도착해 있다. 불안은 그 '아직'과 '이미' 사이의 간극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지금'을 괴롭힌다. 그렇기에 언어는 이 시간의 왜곡을 따라가지 못한다.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불안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안은 정의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정의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라지는 감정은 아닐까.
불안이 말보다 앞선다면, 욕망은 그보다 더 본능적이다. 욕망은 언제나 이유보다 먼저 움직이며, 이성의 언어를 기다리지 않는다. 삶의 대부분은 먹는 일과 자는 일,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의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이론을 쌓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술자리에서 『향연』을 펼치던 사람들은 결핍을 욕망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술잔을 비우며 완전한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그들의 말은 비워진 잔 아래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채워질수록 다시 비어버리는 잔처럼,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움직인다.
불안은 이 욕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곧 불안의 형태를 띠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며 또 불안을 소비한다. 이 모순적인 구조는 멈추지 않는다. 가령 욕망이 사라지면 불안도 사라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생도 함께 멈출 것이다. 그렇게 불안은 생을 견디게 하는 고통이자, 욕망을 작동시키는 연료로써 작동한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욕망은 다른 형태로 위장된다. 화면 위의 색과 선, 혹은 반복되는 행위들은 모두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찌거기로 남는다. 그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반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 반복의 충동 위에 김상덕의 태도와 실천이 놓여 있다. 작가의 이미지는 너무도 충만한, 아니 과잉된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캔버스는 작가의 억눌린 불안이 색채와 형태로 변주되는 공간이다. 인물들은 웃고 떠들지만, 그 웃음은 유희가 아니라 불안의 증상에 가깝다. 어딘가 과장된 표정, 충돌하는 색면, 한꺼번에 터지듯 아우성치는 이미지들은 평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절망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고조된 흥분 상태, 즉 불안을 잠시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그리기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진정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불안을 증폭시켜 캔버스 전체로 확산시킨다.

김상덕_2025_깨끗한 별루 데려가줘요_Acrylic&guashu on canvas, 91x73cm
이 불안의 과잉은 축제의 현장과도 닮아 있다. 삶이 지나치게 진지해질 때, 인간은 그것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소란 속에 던져 넣는다. 축제, 즉 카니발은 그러한 본능의 형식적 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위계가 해체되고, 질서의 언어가 웃음과 과장의 언어로 대체되는 순간, 불안은 일시적으로 무력화된다. 그러나 그 명랑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축제는 끝이 있어야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상덕의 작품이 끝나지 않는 축제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물(?)과 사물(?)이 얽히며 생성과 소멸의 경계가 모호해진 공간, 이는 현실의 무게를 유희의 언어로 치환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은 불안을 덮는 명랑함이 아니라, 불안이 만들어낸 명랑함으로 존재한다.

김상덕_2025_덜 익은 음식 전문점_Acrylic&guashu on canvas, 260.4x192cm
김상덕_2025_새로운 소동_Acrylic&guashu on canvas, 390x175cm
그렇게 불안은 그리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작가는 쉬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장의 드로잉이 쏟아진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지, 아니면 문득 떠오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신체적 반응에 가까운지 필사적으로 그려댄다. 언젠가 "똥 쌀 때도 그림을 그리느냐"라는 질문에 "아니다"에 단호함을 곁들인 답변을 받긴 했지만, 그런 질문을 할 만큼 그려댄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그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정작 본인도 명확하게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호한 대답 너머에는 몇 가지 맥락이 비쳐 보인다.
김상덕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회화과의 마지막 세대였고, 작가로서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던 조건 속에 있었다. 제도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손의 움직임뿐이었다. 그렇게 ‘그리기’는 생존을 위한 습관이자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불안은 김상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보편적인 단면이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 매 순간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피로 속에서 그리기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자 자기 확인의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또 김상덕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스스로를 이끌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속박한다. 쉬지 않는 손은 불안을 덮지 못한 채, 오히려 불안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렇기에 그 끝없는 반복이 자신의 생을 구성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상덕은 여전히 그리고 있는 사람, 지금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리기'라는 행위는 그에게 ‘살아 있음’의 현재진행형이다.

site -A_코가네쵸 레지던시, 요코하마, 일본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불안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더 이상 불안은 작가를 망설이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움직이게 하며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 자리한다. 그렇게 김상덕의 작업은 하나의 자화상처럼 읽히게 된다.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조건 자체를 그려낸 초상이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유쾌하지 않은 유쾌함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요량에 『즐거운 학문』을 펼쳤으나, 내용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이 명랑한 제목의 뒷면에는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인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가는지를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유쾌하지도, 상쾌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빛이 있으라"라는 선언으로 태어난 빛이 자신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던 것처럼 웃음은 기쁨만이 아닌 허무와 같은 네거티브한 감정을 견디기 위한 경련에 가까운 부분도 존재한다. 이 역설적인 명랑함은 오늘의 세계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웃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안을 은폐하기 위해 그 웃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불안은 언제나 활기라는 외피를 입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포를 잊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웃고 노래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공포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과장된 에너지를 동원하게 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은 희망이나 기쁨과 같은 요소보다도 절망과 공포가 더 앞서있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생은 곧 피로의 다른 이름이며 쾌활함은 절망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은 '유쾌하지 않은 유쾌함'은 불안한 인간의 생존방식이다.
이러한 불안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있다. 지난 일은 현재 속에서 반복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은 예감의 형태로 이미 도착해 있다. 불안은 그 '아직'과 '이미' 사이의 간극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지금'을 괴롭힌다. 그렇기에 언어는 이 시간의 왜곡을 따라가지 못한다.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불안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안은 정의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정의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라지는 감정은 아닐까.
불안이 말보다 앞선다면, 욕망은 그보다 더 본능적이다. 욕망은 언제나 이유보다 먼저 움직이며, 이성의 언어를 기다리지 않는다. 삶의 대부분은 먹는 일과 자는 일,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의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이론을 쌓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술자리에서 『향연』을 펼치던 사람들은 결핍을 욕망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술잔을 비우며 완전한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그들의 말은 비워진 잔 아래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채워질수록 다시 비어버리는 잔처럼,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움직인다.
불안은 이 욕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곧 불안의 형태를 띠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며 또 불안을 소비한다. 이 모순적인 구조는 멈추지 않는다. 가령 욕망이 사라지면 불안도 사라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생도 함께 멈출 것이다. 그렇게 불안은 생을 견디게 하는 고통이자, 욕망을 작동시키는 연료로써 작동한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욕망은 다른 형태로 위장된다. 화면 위의 색과 선, 혹은 반복되는 행위들은 모두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찌거기로 남는다. 그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반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 반복의 충동 위에 김상덕의 태도와 실천이 놓여 있다. 작가의 이미지는 너무도 충만한, 아니 과잉된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캔버스는 작가의 억눌린 불안이 색채와 형태로 변주되는 공간이다. 인물들은 웃고 떠들지만, 그 웃음은 유희가 아니라 불안의 증상에 가깝다. 어딘가 과장된 표정, 충돌하는 색면, 한꺼번에 터지듯 아우성치는 이미지들은 평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절망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고조된 흥분 상태, 즉 불안을 잠시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그리기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진정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불안을 증폭시켜 캔버스 전체로 확산시킨다.

김상덕_2025_깨끗한 별루 데려가줘요_Acrylic&guashu on canvas, 91x73cm
이 불안의 과잉은 축제의 현장과도 닮아 있다. 삶이 지나치게 진지해질 때, 인간은 그것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소란 속에 던져 넣는다. 축제, 즉 카니발은 그러한 본능의 형식적 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위계가 해체되고, 질서의 언어가 웃음과 과장의 언어로 대체되는 순간, 불안은 일시적으로 무력화된다. 그러나 그 명랑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축제는 끝이 있어야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상덕의 작품이 끝나지 않는 축제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물(?)과 사물(?)이 얽히며 생성과 소멸의 경계가 모호해진 공간, 이는 현실의 무게를 유희의 언어로 치환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은 불안을 덮는 명랑함이 아니라, 불안이 만들어낸 명랑함으로 존재한다.

김상덕_2025_덜 익은 음식 전문점_Acrylic&guashu on canvas, 260.4x192cm
김상덕_2025_새로운 소동_Acrylic&guashu on canvas, 390x175cm
그렇게 불안은 그리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작가는 쉬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장의 드로잉이 쏟아진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지, 아니면 문득 떠오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신체적 반응에 가까운지 필사적으로 그려댄다. 언젠가 "똥 쌀 때도 그림을 그리느냐"라는 질문에 "아니다"에 단호함을 곁들인 답변을 받긴 했지만, 그런 질문을 할 만큼 그려댄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그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정작 본인도 명확하게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호한 대답 너머에는 몇 가지 맥락이 비쳐 보인다.
김상덕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회화과의 마지막 세대였고, 작가로서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던 조건 속에 있었다. 제도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손의 움직임뿐이었다. 그렇게 ‘그리기’는 생존을 위한 습관이자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불안은 김상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보편적인 단면이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 매 순간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피로 속에서 그리기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자 자기 확인의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또 김상덕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스스로를 이끌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속박한다. 쉬지 않는 손은 불안을 덮지 못한 채, 오히려 불안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렇기에 그 끝없는 반복이 자신의 생을 구성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상덕은 여전히 그리고 있는 사람, 지금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리기'라는 행위는 그에게 ‘살아 있음’의 현재진행형이다.

site -A_코가네쵸 레지던시, 요코하마, 일본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불안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더 이상 불안은 작가를 망설이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움직이게 하며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 자리한다. 그렇게 김상덕의 작업은 하나의 자화상처럼 읽히게 된다.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조건 자체를 그려낸 초상이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