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OCI미술관 김지원 개인전 《한 발짝 더 가까이》 전시 서문
방사능 파티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가로로 길게 네모지고, 넙데데한 표면 곳곳이 험하며 꾸덕한 ‘물건’이 벽에 걸렸다. 색색들이 박힌 물감 덩어리는, 곳곳 푸른 방수 도막이 벗겨진 어느 건물 옥상을 무척 닮았다. 왕년의 옥탑방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딱 그림 속 시선 높이로 쭈그려 앉아 별을 세곤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면, 그림은 다시 네모난 ‘물건’이다.
저 글씨는 아버지의 글씨이고 저 옥상은 아버지가 세월을 잡숫던 옥상인지 외우지 않아도 좋다. 그건 그림보단 수사보고서로 쓰면 더욱 자세하고 정확하다. 그림이라 부르는 그의 ‘물건’을 마주하면 이미지, 내러티브, 상상, 메시지 등의 ‘작용’이 알아서 들어와 박힌다. 해독의 노동에서 해방하는, 독립선언문 같은 그림. 글이든 그림이든 몰입에 노력이 들지 않는 걸 으뜸으로 치는 나에게 김지원은 복덩이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그림은 방사성 물질을 닮았다. 가까이서 쬐면 끝. 헤치고 캘 것 없이 알아서 온다. 차이라면 방사선은 많이 쬐면 사나운 몰골로 죽겠지만, 그의 그림은 쬘수록 눈과 속이 살찌는 것.

사적인 공간과 3개의 공공건물 Private Space and 3 Public Buliding_oil on linen_97×356㎝_2024
아련한 기억 저편에서부터, 우리가 사는 현실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선 작가의 머릿속까지 줌인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번 전시가 바로 그러하다. 전시장을 오르며 잇달아 돋보기 버튼을 클릭하듯 ‘기억→현실→내면’의 흐름으로 점차 작가에게 다가간다. 기억 속 아버지의 공간, 주변에서 문득 들어오는 사회적 풍경, 마음껏 발산하고 이완하는 작가 머릿속.
본 전시는 회고(回顧=뒤돌아보는)전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전시장에 발 딛자마자 마주치는 작업이 바로 〈뒤돌아보지 말기(1995)〉. 그 안쪽 홀 한복판에, 어디 촌구석 구멍가게에 굴러다닐 법한 평상이 떡하니 놓였다. 엉덩이를 지그시 깔고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는 찰나, 관객은 작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안경 쓰듯 빌려 쓴다. 담 너머로 멀찍이 떨어져 선 건물 몇 개와 낡은 화분, 장독대 사이 곳곳에 고즈넉함과 회한이 뒤얽힌 아버지의 옥상. 이젠 에어컨 실외기만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의 평상을 관객에 내주고, 허락 맡듯 생전의 필체를 봉헌한다.
벽은 풍경일까 정물일까? 김지원은 가장 한국적인 비주얼을 찾아냈다. 김밥이라도 쌀 듯 아파트 단지 둘레를 꽁꽁 에워싼 철제 울타리는 어김없이 회백색 콘크리트 옹벽에 심겼다. 공공시설이나 주차장을 동여맨, 혹은 도로 절개면을 따라 좌우로 뻗은 옹벽 또한 너나없이 익숙한 그 생김새이다. 표면의 알 수 없는 직소 퍼즐 같은 반복 패턴마저 괜히 친숙하다. 멀리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가지런해 삭막함이 풀풀 풍기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거칠고 메마르기 이를 데 없어 그 단단함에 눈이 아릴 지경인, 참 멋없는 그놈. 무슨 그림자라도 되는 양, 가도 가도 늘 따라다니는, 벗어날 수 없는 ‘사물(figure)’이자 ‘배경(ground)’. ‘매일 보고, 별 볼 일 없는 것’이 주연을 꿰차, 온 전시장을 뒤덮은 앞에서 관객은, 대상과 방식 양면에서 이목의 전복을 경험한다.
나는 오이를 몹시 혐오한다. 마침 전시장 3층은 오이 그림으로 도배했다.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중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민트. 마침 3층 벽면을 민트로 도색했다. 그런데 미술관 사무실이 3층이라 이들을 가장 자주 마주친다. 일반적으로 오이 팩 마사지의 진정 효과와 민트의 상쾌함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한다. 사뭇 다른 기분이지만 어쨌든 나도 강제로 환기가 된다. 지지고 볶는 미술판의 긴장과 과열을 식히고, 날것 그대로의 발상을 고명처럼 톡톡 올리며 전시를 마무리한다. 마음을 까뒤집어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어, 이완의 장을 맺고 교감의 여운을 아로새긴다.

무제 Untitled_oil on linen_194×259㎝_2024
아버지의 옥상을 넘어 도시의 옹벽을 따라 작가의 상큼한 오이 마사지까지, 기억-현실-내면 이 세 무대를 한데 꿰는 힘은 무엇인가? 전시 준비의 팔 할은 사실 그 실마리를 찾는 일이었다. 가장 일관된 건, 작가로서 김지원이 매우 담백하고 당당하며 중용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진실됨’의 한 유형일 것이다.
담백하다는 건 메커니즘에 집착하지도, 층위를 과시하지도 않음이다. 어느 그림 속 에어컨에 쓰인 그의 글씨는, 그 느낌을 단번에 이해시켜 주는 큰 힌트이다. 그는 마치 메모하듯 그림을 그린다. 말도 그리 한다. 그는 마치 자기 이외엔 볼 사람도 없는 무언가를 끄적이듯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메모를 한 획 한 획 힘주어 눌러쓰지 않는 것처럼. 멋들어진 척도 없다. 그래서 때론, 그의 그림은 대상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필담용 종이처럼 보인다.
한편 김지원의 당당함은 바로 자연스러움과 상냥함이다. 순수와 당돌이 돋보이는 작가들은 아이러니하게 대개 스스로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이용한다. 그런데 김지원은 망설일 게 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과 자세가 참으로 천진난만하다. 일례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이 아님에도, 신작과 함께 대규모의 구작이 어우러진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20년 동안 꿈꿔왔다. 이 아이들을 제대로 내보일 기회를. 그게 지금이라 너무나 기쁘다.’며 전시실 가장 목 좋고 번듯한 명당에 당연하다는 듯 ‘툭툭’ 구작을 건다. 30년 전에 그린, 자신의 다짐과 같은, 자화상 아닌 자화상은 전시장의 메인을 차지했다. 한술 더 떠, 어서 다가오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전시 제목은 《한 걸음 더 가까이》로 하자고. 그렇게 그가 입으로 떠드는 화법과 그림 위에 손으로 떠드는 화법 둘 다 맑디맑은 상냥함이 넘친다. 당당함은 그런 이미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끌벅적 나대고 굽히지 않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더 가까이 One Step Forward Please – Study of OCI Museum of Art_pen, watercolor, collage on paper_43×51㎝_2025
중용은 진지함과 꾸준함으로 나타난다. 그의 〈뇌해도(2025)〉는, 마치 머릿속 세계지도의 대륙인 양 드로잉 형상이 너른 종이 곳곳에 떠다니고, 그 주변을 치수나 명칭 따위의 온갖 작은 메모가 포위한 형국이다. 그리고 빈 곳을 찾아 몇 줄을 읊조린 아래엔 어김없이 굵은 가로선 하나가 쭉 뻗어 화면을 일도양단하고, 도식화한 연표처럼 시간을 따라 온갖 작업과 참고 자료가 사열한다. 그의 이런저런 메모 드로잉(?)은 대개 이런 모양새이다. 그리고 난 이 직선에서 꾸준함을 보았다. 가로축을 제법 차지할 만치 작업을 누적하면, 나열해 점검하고 이리저리 묶어 본다. 시기에 따라, 주제에 따라, 경향에 따라. 묶이면 그대로 시리즈가 된다. 이번엔 시리즈를 조합한다. 그럼 기본적인 전시 구성이 나온다. 전시가 쌓이면 비로소 화법이 된다. 실험의 조합마저 또 다른 실험인 셈. 이것이 바로 김지원의 창작 메커니즘이다.

뒤돌아보지 말기 No Looking Back_oil on canvas_194×130㎝_1995
그렇게 그는 틈날 때마다 꾸준히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추진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앞서 본 전시의 메인 벽을 차지한 작품이 바로 〈뒤돌아보지 말기(1995)〉. 철갑을 두르고 캔버스와 조명을 챙겨 단기필마로 설원을 질주하는, 젊은 시절의 비장함과 치기가 뒤섞여 눈보라처럼 휘날린다. 작업이란 생업과 줄 타며 수명을 태우는 것이라는 그의 각오가, 녹은 눈처럼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이 작업 하나와, 메모 곳곳에 박힌 살짝 낯간지러운 독백과 자기 철학이 결국 지금의 김지원을 만들었다 본다. 지난 것도 끝없이 새롭게 바라보는 꾸준함과, 붓 쥔 손에 힘 빼고 담백하게 쏟아내는 진지함, 이것이 작가 생활의 줄타기의 두 무게추였고, 근 반세기째 줄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균형감의 비결이기도 하다. 전시장 2층을 가득 채운 〈비슷한 벽, 똑같은 벽(1998-2025)〉 시리즈는 그 무던한 줄타기의 리듬을 똑 닮았다. 김지원의 메모를 차지한 연대기적 수직선이 전시장으로 뛰쳐나온 담백하고 징그러운 그 모양새. 점차 물러나고 서서히 넓어지는, 비슷하고 똑같은 시야에서, 반복 확인하며 차근차근 쌓는 김지원식 관성을 체감한다.

비슷한 벽, 똑같은 벽 Similar Wall, Same Wall_oil on linen_228×182㎝_2004_리움미술관 소장
이 같은 작업 철학의 이해는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그림의 신화를 깨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쉽다. 그는 회화적 층위나 순수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동시대의 사건이나 장면을 메모하듯 담백한 시선으로 훑는다. 그럼에도 그 결과물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성물이 아닌 ‘물감 바른 천’임을 동네방네 당당히 내보인다. 그렇게 회화는 물질과 이미지를 매번 다른 기분으로 넘나드는 ‘중용의 줄타기’와 같은 것임을 증명해 왔다. 즉 그림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가 주고받고 지지고 볶는 전쟁과 평화’임에서 출발한다.
수긍하듯 가까이 찬찬히 자세히 바라본 김지원의 그림은 ‘말 그대로 그림’이다. 오톨도톨 꾸덕꾸덕 바삭바삭 얼룩덜룩 쩍쩍, 눈으로 만지는 그림이다. 회화란 하늘이 점지한 특정한 논리로 굳게 닫힌 완결된 형식이 결코 아니다. 직사각형은커녕 엄밀히는 사각형도 아닌 엉성한 틀 위에 천을 걸어 매고, 한정된 시간과 체력, 붓질 횟수의 족쇄를 차고, 같은 브랜드에서 산 같은 색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불안정한 물감 덩어리를 그마저 불균일하게 바른, 정체불명의 혼합물 덩어리이다. 만질 수 있는 실재이자 물건이 확실하다. 우두커니 과묵히 전시장을 지키는 이 그림은 누군가와 마주하면 그저 수다쟁이이다. 온갖 이야기가 액자 너머로 방사능처럼 사정없이 뻗친다. 그제야 그림과 이미지를 각기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림과 이미지를 따로 떼면 각자 뭘 얻을까? 그림은 객관화하고 완결한다. 덩그러니 그 자리에 둔 물건 같은 것이다. 아무런 개입이나 작용 없이도 스스로 오롯이 존재하는, 그래서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 반면 이미지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친구이다. 누군가가 늘 필요하다. 인지와 의지를 지닌 주체와 만나는 순간, 일회용 폭죽처럼 번뜩이며 그림 바깥세상을 비추고 사그라진다. 창작 과정이나 정황을 되짚으면 ‘행동의 흔적’, 형과 색이 주는 자극은 ‘생각의 증거’, 일루전을 목격하면 ‘지시와 소환’이 반짝인다. 더구나 같은 반짝임이 없다. 초록색 물감 덩어리가 이 사람에 싱그러움, 저 사람에 해로움을 종횡무진 풍긴다.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도 매번 새롭다. ‘그림은 볼 때마다 전개가 바뀌는 애니메이션’이란 데이빗 살레(David Salle, 1952-)의 말처럼. 그래서 이미지는 완결되지 않고 모든 연산(=작용)에 열린집합이며, 어떤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일순간 있고,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번갯불, 그러나 실체가 없는 게 아니라 흘러갈 뿐이다’라는 김지원의 메모처럼 말이다. 달리 말해 늘 변신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이다. 결국 그림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 사이를, 거울에 난반사한 빛처럼 제멋대로 오가는 놀이이다. 한계를 인정하면 이렇게 오히려 특징이 된다.

추사슈퍼 Chusa Supermarket_ballpoint pen, collage, gouache on paper_33×40㎝_2004
설명을 앞질러 풍기는 맛과 향. 비 음성언어적인 것들, 즉 흔적, 시선, 태도, 집념과 그 결과로서의 회화적 즐거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가 변화무쌍 주고받는 활기 넘치는 고품격 랠리 현장 직관. 김지원은 어째서 시, 소설, 웅변, 노래가 아니라 회화여야 하는지 체감하는 대표적 작가이다. 음성언어로의 변환이 필요 없는 작가와 그런 작업. 사실상 대부분의 작가가 꿈꾸는 모델 아닐까 싶다.
이건용(Kunyong Lee, 1942-)은 말했다. “광화문 한복판에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 이건용 저건용 해 봐야,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있는지. 예술은 교감하고 기능해야 해. 쓸모가 있어야지. ‘쓸모없음’의 극한이 바로 그거야.” 그는 그림의 물리적 실체를 직시하면서도, 결코 캔버스 바깥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김지원은 다분히 ‘쓸모 있는 그림’으로 답한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전시 제목으로 말한다. 《한 발짝 더 가까이》. ‘통하러들 오시라’ 광화문 한복판에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뿌리는, 상냥 다정함과 은근한 자신감이 깃든 초대장이다. 작가가 대상과 교감했듯, 그 교감의 증거, 즉 그림이 관객과 교감하려 든다. ‘가까이, 찬찬히, 자세히’ 영향권으로 꾀는 유혹의 손짓이, 출입구를 지나 전시장 곳곳, 이 그림 저 그림 표면에 하늘댄다. 아니 대놓고 마수(?)를 드리운다. 방사능처럼.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5 OCI미술관 김지원 개인전 《한 발짝 더 가까이》 전시 서문
방사능 파티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가로로 길게 네모지고, 넙데데한 표면 곳곳이 험하며 꾸덕한 ‘물건’이 벽에 걸렸다. 색색들이 박힌 물감 덩어리는, 곳곳 푸른 방수 도막이 벗겨진 어느 건물 옥상을 무척 닮았다. 왕년의 옥탑방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딱 그림 속 시선 높이로 쭈그려 앉아 별을 세곤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면, 그림은 다시 네모난 ‘물건’이다.
저 글씨는 아버지의 글씨이고 저 옥상은 아버지가 세월을 잡숫던 옥상인지 외우지 않아도 좋다. 그건 그림보단 수사보고서로 쓰면 더욱 자세하고 정확하다. 그림이라 부르는 그의 ‘물건’을 마주하면 이미지, 내러티브, 상상, 메시지 등의 ‘작용’이 알아서 들어와 박힌다. 해독의 노동에서 해방하는, 독립선언문 같은 그림. 글이든 그림이든 몰입에 노력이 들지 않는 걸 으뜸으로 치는 나에게 김지원은 복덩이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그림은 방사성 물질을 닮았다. 가까이서 쬐면 끝. 헤치고 캘 것 없이 알아서 온다. 차이라면 방사선은 많이 쬐면 사나운 몰골로 죽겠지만, 그의 그림은 쬘수록 눈과 속이 살찌는 것.

사적인 공간과 3개의 공공건물 Private Space and 3 Public Buliding_oil on linen_97×356㎝_2024
아련한 기억 저편에서부터, 우리가 사는 현실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선 작가의 머릿속까지 줌인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번 전시가 바로 그러하다. 전시장을 오르며 잇달아 돋보기 버튼을 클릭하듯 ‘기억→현실→내면’의 흐름으로 점차 작가에게 다가간다. 기억 속 아버지의 공간, 주변에서 문득 들어오는 사회적 풍경, 마음껏 발산하고 이완하는 작가 머릿속.
본 전시는 회고(回顧=뒤돌아보는)전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전시장에 발 딛자마자 마주치는 작업이 바로 〈뒤돌아보지 말기(1995)〉. 그 안쪽 홀 한복판에, 어디 촌구석 구멍가게에 굴러다닐 법한 평상이 떡하니 놓였다. 엉덩이를 지그시 깔고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는 찰나, 관객은 작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안경 쓰듯 빌려 쓴다. 담 너머로 멀찍이 떨어져 선 건물 몇 개와 낡은 화분, 장독대 사이 곳곳에 고즈넉함과 회한이 뒤얽힌 아버지의 옥상. 이젠 에어컨 실외기만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의 평상을 관객에 내주고, 허락 맡듯 생전의 필체를 봉헌한다.
벽은 풍경일까 정물일까? 김지원은 가장 한국적인 비주얼을 찾아냈다. 김밥이라도 쌀 듯 아파트 단지 둘레를 꽁꽁 에워싼 철제 울타리는 어김없이 회백색 콘크리트 옹벽에 심겼다. 공공시설이나 주차장을 동여맨, 혹은 도로 절개면을 따라 좌우로 뻗은 옹벽 또한 너나없이 익숙한 그 생김새이다. 표면의 알 수 없는 직소 퍼즐 같은 반복 패턴마저 괜히 친숙하다. 멀리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가지런해 삭막함이 풀풀 풍기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거칠고 메마르기 이를 데 없어 그 단단함에 눈이 아릴 지경인, 참 멋없는 그놈. 무슨 그림자라도 되는 양, 가도 가도 늘 따라다니는, 벗어날 수 없는 ‘사물(figure)’이자 ‘배경(ground)’. ‘매일 보고, 별 볼 일 없는 것’이 주연을 꿰차, 온 전시장을 뒤덮은 앞에서 관객은, 대상과 방식 양면에서 이목의 전복을 경험한다.
나는 오이를 몹시 혐오한다. 마침 전시장 3층은 오이 그림으로 도배했다.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중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민트. 마침 3층 벽면을 민트로 도색했다. 그런데 미술관 사무실이 3층이라 이들을 가장 자주 마주친다. 일반적으로 오이 팩 마사지의 진정 효과와 민트의 상쾌함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한다. 사뭇 다른 기분이지만 어쨌든 나도 강제로 환기가 된다. 지지고 볶는 미술판의 긴장과 과열을 식히고, 날것 그대로의 발상을 고명처럼 톡톡 올리며 전시를 마무리한다. 마음을 까뒤집어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어, 이완의 장을 맺고 교감의 여운을 아로새긴다.

무제 Untitled_oil on linen_194×259㎝_2024
아버지의 옥상을 넘어 도시의 옹벽을 따라 작가의 상큼한 오이 마사지까지, 기억-현실-내면 이 세 무대를 한데 꿰는 힘은 무엇인가? 전시 준비의 팔 할은 사실 그 실마리를 찾는 일이었다. 가장 일관된 건, 작가로서 김지원이 매우 담백하고 당당하며 중용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진실됨’의 한 유형일 것이다.
담백하다는 건 메커니즘에 집착하지도, 층위를 과시하지도 않음이다. 어느 그림 속 에어컨에 쓰인 그의 글씨는, 그 느낌을 단번에 이해시켜 주는 큰 힌트이다. 그는 마치 메모하듯 그림을 그린다. 말도 그리 한다. 그는 마치 자기 이외엔 볼 사람도 없는 무언가를 끄적이듯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메모를 한 획 한 획 힘주어 눌러쓰지 않는 것처럼. 멋들어진 척도 없다. 그래서 때론, 그의 그림은 대상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필담용 종이처럼 보인다.
한편 김지원의 당당함은 바로 자연스러움과 상냥함이다. 순수와 당돌이 돋보이는 작가들은 아이러니하게 대개 스스로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이용한다. 그런데 김지원은 망설일 게 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과 자세가 참으로 천진난만하다. 일례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이 아님에도, 신작과 함께 대규모의 구작이 어우러진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20년 동안 꿈꿔왔다. 이 아이들을 제대로 내보일 기회를. 그게 지금이라 너무나 기쁘다.’며 전시실 가장 목 좋고 번듯한 명당에 당연하다는 듯 ‘툭툭’ 구작을 건다. 30년 전에 그린, 자신의 다짐과 같은, 자화상 아닌 자화상은 전시장의 메인을 차지했다. 한술 더 떠, 어서 다가오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전시 제목은 《한 걸음 더 가까이》로 하자고. 그렇게 그가 입으로 떠드는 화법과 그림 위에 손으로 떠드는 화법 둘 다 맑디맑은 상냥함이 넘친다. 당당함은 그런 이미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끌벅적 나대고 굽히지 않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더 가까이 One Step Forward Please – Study of OCI Museum of Art_pen, watercolor, collage on paper_43×51㎝_2025
중용은 진지함과 꾸준함으로 나타난다. 그의 〈뇌해도(2025)〉는, 마치 머릿속 세계지도의 대륙인 양 드로잉 형상이 너른 종이 곳곳에 떠다니고, 그 주변을 치수나 명칭 따위의 온갖 작은 메모가 포위한 형국이다. 그리고 빈 곳을 찾아 몇 줄을 읊조린 아래엔 어김없이 굵은 가로선 하나가 쭉 뻗어 화면을 일도양단하고, 도식화한 연표처럼 시간을 따라 온갖 작업과 참고 자료가 사열한다. 그의 이런저런 메모 드로잉(?)은 대개 이런 모양새이다. 그리고 난 이 직선에서 꾸준함을 보았다. 가로축을 제법 차지할 만치 작업을 누적하면, 나열해 점검하고 이리저리 묶어 본다. 시기에 따라, 주제에 따라, 경향에 따라. 묶이면 그대로 시리즈가 된다. 이번엔 시리즈를 조합한다. 그럼 기본적인 전시 구성이 나온다. 전시가 쌓이면 비로소 화법이 된다. 실험의 조합마저 또 다른 실험인 셈. 이것이 바로 김지원의 창작 메커니즘이다.

뒤돌아보지 말기 No Looking Back_oil on canvas_194×130㎝_1995
그렇게 그는 틈날 때마다 꾸준히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추진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앞서 본 전시의 메인 벽을 차지한 작품이 바로 〈뒤돌아보지 말기(1995)〉. 철갑을 두르고 캔버스와 조명을 챙겨 단기필마로 설원을 질주하는, 젊은 시절의 비장함과 치기가 뒤섞여 눈보라처럼 휘날린다. 작업이란 생업과 줄 타며 수명을 태우는 것이라는 그의 각오가, 녹은 눈처럼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이 작업 하나와, 메모 곳곳에 박힌 살짝 낯간지러운 독백과 자기 철학이 결국 지금의 김지원을 만들었다 본다. 지난 것도 끝없이 새롭게 바라보는 꾸준함과, 붓 쥔 손에 힘 빼고 담백하게 쏟아내는 진지함, 이것이 작가 생활의 줄타기의 두 무게추였고, 근 반세기째 줄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균형감의 비결이기도 하다. 전시장 2층을 가득 채운 〈비슷한 벽, 똑같은 벽(1998-2025)〉 시리즈는 그 무던한 줄타기의 리듬을 똑 닮았다. 김지원의 메모를 차지한 연대기적 수직선이 전시장으로 뛰쳐나온 담백하고 징그러운 그 모양새. 점차 물러나고 서서히 넓어지는, 비슷하고 똑같은 시야에서, 반복 확인하며 차근차근 쌓는 김지원식 관성을 체감한다.

비슷한 벽, 똑같은 벽 Similar Wall, Same Wall_oil on linen_228×182㎝_2004_리움미술관 소장
이 같은 작업 철학의 이해는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그림의 신화를 깨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쉽다. 그는 회화적 층위나 순수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동시대의 사건이나 장면을 메모하듯 담백한 시선으로 훑는다. 그럼에도 그 결과물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성물이 아닌 ‘물감 바른 천’임을 동네방네 당당히 내보인다. 그렇게 회화는 물질과 이미지를 매번 다른 기분으로 넘나드는 ‘중용의 줄타기’와 같은 것임을 증명해 왔다. 즉 그림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가 주고받고 지지고 볶는 전쟁과 평화’임에서 출발한다.
수긍하듯 가까이 찬찬히 자세히 바라본 김지원의 그림은 ‘말 그대로 그림’이다. 오톨도톨 꾸덕꾸덕 바삭바삭 얼룩덜룩 쩍쩍, 눈으로 만지는 그림이다. 회화란 하늘이 점지한 특정한 논리로 굳게 닫힌 완결된 형식이 결코 아니다. 직사각형은커녕 엄밀히는 사각형도 아닌 엉성한 틀 위에 천을 걸어 매고, 한정된 시간과 체력, 붓질 횟수의 족쇄를 차고, 같은 브랜드에서 산 같은 색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불안정한 물감 덩어리를 그마저 불균일하게 바른, 정체불명의 혼합물 덩어리이다. 만질 수 있는 실재이자 물건이 확실하다. 우두커니 과묵히 전시장을 지키는 이 그림은 누군가와 마주하면 그저 수다쟁이이다. 온갖 이야기가 액자 너머로 방사능처럼 사정없이 뻗친다. 그제야 그림과 이미지를 각기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림과 이미지를 따로 떼면 각자 뭘 얻을까? 그림은 객관화하고 완결한다. 덩그러니 그 자리에 둔 물건 같은 것이다. 아무런 개입이나 작용 없이도 스스로 오롯이 존재하는, 그래서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 반면 이미지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친구이다. 누군가가 늘 필요하다. 인지와 의지를 지닌 주체와 만나는 순간, 일회용 폭죽처럼 번뜩이며 그림 바깥세상을 비추고 사그라진다. 창작 과정이나 정황을 되짚으면 ‘행동의 흔적’, 형과 색이 주는 자극은 ‘생각의 증거’, 일루전을 목격하면 ‘지시와 소환’이 반짝인다. 더구나 같은 반짝임이 없다. 초록색 물감 덩어리가 이 사람에 싱그러움, 저 사람에 해로움을 종횡무진 풍긴다.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도 매번 새롭다. ‘그림은 볼 때마다 전개가 바뀌는 애니메이션’이란 데이빗 살레(David Salle, 1952-)의 말처럼. 그래서 이미지는 완결되지 않고 모든 연산(=작용)에 열린집합이며, 어떤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일순간 있고,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번갯불, 그러나 실체가 없는 게 아니라 흘러갈 뿐이다’라는 김지원의 메모처럼 말이다. 달리 말해 늘 변신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이다. 결국 그림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 사이를, 거울에 난반사한 빛처럼 제멋대로 오가는 놀이이다. 한계를 인정하면 이렇게 오히려 특징이 된다.

추사슈퍼 Chusa Supermarket_ballpoint pen, collage, gouache on paper_33×40㎝_2004
설명을 앞질러 풍기는 맛과 향. 비 음성언어적인 것들, 즉 흔적, 시선, 태도, 집념과 그 결과로서의 회화적 즐거움. 물리적 실체와 이미지가 변화무쌍 주고받는 활기 넘치는 고품격 랠리 현장 직관. 김지원은 어째서 시, 소설, 웅변, 노래가 아니라 회화여야 하는지 체감하는 대표적 작가이다. 음성언어로의 변환이 필요 없는 작가와 그런 작업. 사실상 대부분의 작가가 꿈꾸는 모델 아닐까 싶다.
이건용(Kunyong Lee, 1942-)은 말했다. “광화문 한복판에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 이건용 저건용 해 봐야,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있는지. 예술은 교감하고 기능해야 해. 쓸모가 있어야지. ‘쓸모없음’의 극한이 바로 그거야.” 그는 그림의 물리적 실체를 직시하면서도, 결코 캔버스 바깥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김지원은 다분히 ‘쓸모 있는 그림’으로 답한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전시 제목으로 말한다. 《한 발짝 더 가까이》. ‘통하러들 오시라’ 광화문 한복판에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뿌리는, 상냥 다정함과 은근한 자신감이 깃든 초대장이다. 작가가 대상과 교감했듯, 그 교감의 증거, 즉 그림이 관객과 교감하려 든다. ‘가까이, 찬찬히, 자세히’ 영향권으로 꾀는 유혹의 손짓이, 출입구를 지나 전시장 곳곳, 이 그림 저 그림 표면에 하늘댄다. 아니 대놓고 마수(?)를 드리운다. 방사능처럼.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