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현 작업론
웃지 마, 니 얘기니까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씰룩씰룩! 신나게 흔든다. 클럽이 아니다. 훤한 대낮에 선인장 인형이 LED를 반짝반짝, 좌우로 방정맞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춘다. 바닷가에 늘어선 마도로스처럼 수평선을 나란히 바라보며, 정원과 수목원과 식물원의 각양각색 이름 모를 큰 나무 밑동을 강강술래 둘러싸고, 우뚝 선 안내판 은색 철제 기둥 아래 옹기종기 모여, 소원을 비는 돌탑 곳곳에 돌인 척 눌러앉아, 혹은 흙 땅에 선인장 대신 능청스레 몸을 심어 묻은 채로.
경박하고 잔망스러운 몸놀림이 처음엔 그저 우스꽝스러웠지만, 볼수록 문득 토테미즘적 제의처럼 다가온다. 다채널로 병치한 옆 화면에선, (나름 눈에 익어, 벌써 살짝 정든) 그 선인장 인형을 자비 없이 해체한다. 손도 잘 안 들어가는, 앙증맞고 무딘 어린이용 공작 가위로 안간힘을 쓰며 인형 가죽을 찢고, 까뒤집어 솜을 낸다. 종내엔 불판에 올린 먹장어처럼 어딘가 징그럽게 꿈틀대는 길쭉한 구동부와 회로만 남는다. 마치 생체를 해부하는 광경처럼 몸서리가 쳤다. 예리한 수술 도구 대신 알록달록 뭉툭한 가위로 썰어대니 외려 잔혹한 기분이다. 그렇게 가짜 자연이 살짝 덜 가짜인 동안에도, 옆 화면에선 ‘가짜’의 줄기찬 몸놀림이 부쩍 신들린 듯하다. 다시 해부 장면으로 눈을 돌리니, 심장처럼 드러난 그 회로조차 매정히 잘라 숨통을 끊는다. 그럼 개량해 접붙이고 옮겨 심어 가지 치고 주사 박은 꺾꽂이 식물은 ‘자연’인가?

해당 작업 〈Messenger Between Worlds〉는 ‘김용현스러움’을 잘 보여 준다. 호기심에 눈길이 가고, 무슨 상황인지 몰라 10초간 어리둥절, 이후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하다, 반복, 점층, 변화를 거듭하며 관객이 서서히 몰입한다. 저마다 생각을 정리할 만치 어지간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우스꽝스럽지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여운을 남기며 찝찝하게 맺는다. 1인용 화물 카트를 타고 바닷가의 경사로를 달려 끝내 물에 빠지길 반복하는 〈내려가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계단과 도로, 벤치 등 낮은 곳에서 굴러떨어지길 반복하는 〈추락 없는 낙하〉 또한 마찬가지이다. 웃기고 불편하다. 끝이 뭉툭한 막대기로 살살 건든다. 어설프고, 엉뚱하며, 희극적인 이들 행위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비합리적 규율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계, 같잖은 위선에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삽질이다. 세상의 균열과 삐걱대는 이음새를 찾아 일부러 비비고 헛디뎌 보는 실험자, 일단 그를 ‘세상 감리사’로 임명한다.
김용현은 ‘사회 탐험가’이자 ‘연구자’형 작가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문화인류학/언어인류학을 연구하는 미술 전공자라니, 내 기준으로 동시대 미술인의 최적화 모델이다. 기대에 걸맞은 유난한 스캔 방식, 우직한 연구 방식이 있다. 체화와 타자화를 반복하며 그 차이에 주목하는, 소위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실천한다. 대부도 경기창작센터와 장도 창작스튜디오를 돌며, 준 현지인의 처지가 되어 현장 사람들과 접점을 늘려 나가는 탐사법을 확립했다. 그는 ‘계획하에 집을 나서지만 뭘 만날지 모른다, 그리고 길바닥에서의 만남은 늘 계획을 뛰어넘는다’라고 한다. ‘관점은 명확히, 소통은 대중없이’. 당장 연구를 위한 소통이 아닌(듯한) 것들부터 시작해 나선형으로 점차 핵심에 접근한다. 의미는 점이나 덩어리보단 안개나 구름과 비슷한 모양새이기에, 낚시나 작살 대신 동서남북 촘촘한 어망을 두르고 뜰채를 펄럭이며 좁혀 가는 셈이다. 그의 영상을 수놓는 재미있는 우연은 행운이 아니라, 당첨될 때까지 긁은 것이다.

로봇청소기는 보조 브러시와 카메라, 적외선 센서, 그리고 최후엔 본체의 물리적 충돌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온 집구석을 더듬는다. 김용현은 마치 브러시와 카메라, 센서를 다 뜯어낸 로봇청소기가 떠오른다. 그는 말이나 눈길 대신 온몸으로 부딪혀 더듬는다. 〈추락 없는 낙하〉를 비롯한 몇몇 작업은 아스팔트 길바닥을 기고, 의자에서 넘어지고, 데굴데굴 계단을 구른다. 우습고 엉성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저 ‘관종’으로 치부하기엔, 의식을 치르는 듯한 진지함이 오도독뼈처럼 곳곳 씹힌다. 실패가 반복, 점층할수록 개그에서 자조와 허망으로 넘어가고, 일견 숭고할 때가 있다. 될 때까지 반복하는 꼴을 방관하자니 보는 사람이 괜히 머쓱한 게, 뭐라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의미를 더듬게 부추긴다.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끝끝내 극복하는 우리 주변의 ‘높이’에서, 물리적 단차, 심리적 장벽, 사회적 격차, 논리적 괴리 그 모든 것을 포괄함”을 깨달아야 마땅하다.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게 만들다니, 기발한 아이템보다 더 빛나는 전략 아닌가? 이게 바로 ‘몰입’이다. 퍼포먼스의 과정성을 활용하는 그만의 방법론인 것. ‘엉성하며 진지한 슬랩스틱’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관객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그만의 비결이다. ‘슬랩스틱 리서처’답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정밀 스캔하는 멍투성이 몸과 문제의식보다 앞서 강조할 건 화법에서 엿보이는 그만의 섬세함, 치밀함이다. 화법은 내용 구성이든, 재료 활용이든, 형식 면이든 비중과 배분의 차이가 있을 뿐, 매한가지로 결국 ‘보여주기’의 문제이다. 애석하지만, 작가 대다수는 보는 데 능숙하고 보여주는 데 미숙하다. 보석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 진실과 사명이 넘치는 문제의식은 지난한 창작 과정을 오가다 ‘전시장에 단순 나열’로 귀결하며 대개 빛이 바랜다. 취재나 인터뷰 등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작업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는 유독 더 서툴고 투박하다. 섬세한 ‘보여주기’가, 다른 유형의 작가들보다 더욱 절실한데도 말이다.
숲속 동굴에서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와 야트막한 언덕에서 해를 등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 건너 초원이 펼쳐지는 풍경. 선사시대부터 현대인까지 두루 취향 저격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조망’을 안전하고 포근하고 여유롭고 아름답게 느낀다. 갑작스러운 사건에도 직접적 피해가 없을 적절한 안전거리(언덕), 쉬운 접근을 막는 울타리(강), 적보다 먼저 상황을 감지하고 대비할 수 있는 비대칭적인 넓은 시야(내려다보기), 쉴 수 있는 은신처(동굴), 곁에 두고 쓸 충분한 자원(숲)을 꼽는다. 많은 회화 작품에서 이미 숱하게 활용되어 온 좋은 그림의 요건을 그는 영상 포맷과 전개 전반에 접목한다. 자막과 내레이션의 의도적 배제, 반복과 점층의 리듬이 묻어나는 차근차근 전개, 아치형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듯 위쪽 모서리를 라운딩한 화면 판형,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운 엉거주춤한 호흡의 슬랩스틱 퍼포먼스는 미술 작품을 감상 대신 마치 버스킹처럼 ‘구경’하게끔 한다. 거리감과 여유, 안전장치를 곳곳에 두어, 관객이 몰입하고 동화할 ‘짬’을 충분히 주는 셈. 그렇게 관객은 각자의 의미망을 만들 시간을 선물 받는다. 사실 각 잡고 엉뚱한 미술 작품은 적나라하고 진지한 것보다 무섭다. 바보가 봐도 무언가 뼈 있는 이야기니까. 종합하면 진입 장벽은 낮고 여운은 길다. 참으로 치밀한 엉거주춤이다.
미술 작가의 화법은 그저 선언하면 바로 인정/수용되는 건 아니다. 작업군을 형성하고, 전시로 내보이고, 그 작가의 특성으로 자리잡아야 비로소 화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미술씬이 고도화하고 제도의 입김과 자원의 공유가 창작에 이바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갈수록, 고전적인 관념과 달리 예술 창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작업을 했다’라는 사실보다는 관객 저마다 다른 상황과 성향에서 전시 현장의 작품과 실제로 마주할 때 작품은 비로소 그 완결성과 의미를 더한다. 말하자면 개별 관람 경험의 중첩이 곧 창작이란 행위를 매듭짓는 셈. 창작에 활용할 자원이 풍부해지고, 창작 과정에 동원하는 정보나 기술이 고도화하고, 창작물의 범위와 규모와 형태가 방대해지고, 소비하는 계층이 넓어지고 그 방식이 다양해진다. 이러한 창작의 홍수 속에서 ‘보여주기’는 경쟁력과 몰입도, 심지어 작업물의 고민에 대한 진실성까지도 결부한 척도가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했던 꿈 이야기를 반복하곤 한다. 〈뚫린 이름〉에 나오는 동네 주민의 태몽 자랑이 바로 그것. 그런데 태몽은 경계도 대중도 줏대도 없다. 계속 바뀐다. 혼자 살아 있다. 아마도 기대와 희망이 은연중에 꿈속을 비집고 스며든 탓일지로 모른다. 주거니 받거니 태몽과 해몽의, ‘원전 없는 각색’이 대를 이어 난무할 뿐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워크샵의 참가자들 또한 작가의 예상을 벗어나는 언행을 보인다. 지렁이를 존경한다면서, 정작 지렁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곁다리만 짚다 때론 말문이 막힌다. 고도로 훈련된 연구자가 존경하는 인물은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져서’ 이다. 실컷 공부해 비논리 비이성적인 회로로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의 흔한 삶이고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의 참모습은, 번듯한 겉모습과 딴판으로, 단순 명쾌 또박또박 확언이나 결론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우왕좌왕 횡설수설이다. 군데군데 애매하고 흐리고 허술하다. 좌충우돌 다층적인 부정교합으로 가득하다. 이 괴리와 모순, 부조리와 표리부동을 그는 냉소하고 혐오하고 뜯어고치려 들진 않는다. 오히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풍경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슬랩스틱은 자못 사실적이다. 단순히 작가의 미감에서 비롯한 독특한 표현, 화법에 불과한 게 아니다. 검열 없는 적나라한 표현인 셈이다. 그에게 세계는 '거대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현장이다. 결국 그의 작업에서 풍기는 진지함 속 허무와 우스꽝스러움은 사실 그가 다루는, ‘세상의 본래 속성’이다. 작업을 통틀어 그가 되짚는 인간 세상의 연극성과 불완전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기꾼이 만든 성물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을 기다리는 이 거대한 코미디. 우리가 사는 현장을 겨냥한 고발장으로 오해하지 말길. 그건 그만의 웃픈 애정 표현이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김용현 작업론
웃지 마, 니 얘기니까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씰룩씰룩! 신나게 흔든다. 클럽이 아니다. 훤한 대낮에 선인장 인형이 LED를 반짝반짝, 좌우로 방정맞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춘다. 바닷가에 늘어선 마도로스처럼 수평선을 나란히 바라보며, 정원과 수목원과 식물원의 각양각색 이름 모를 큰 나무 밑동을 강강술래 둘러싸고, 우뚝 선 안내판 은색 철제 기둥 아래 옹기종기 모여, 소원을 비는 돌탑 곳곳에 돌인 척 눌러앉아, 혹은 흙 땅에 선인장 대신 능청스레 몸을 심어 묻은 채로.
경박하고 잔망스러운 몸놀림이 처음엔 그저 우스꽝스러웠지만, 볼수록 문득 토테미즘적 제의처럼 다가온다. 다채널로 병치한 옆 화면에선, (나름 눈에 익어, 벌써 살짝 정든) 그 선인장 인형을 자비 없이 해체한다. 손도 잘 안 들어가는, 앙증맞고 무딘 어린이용 공작 가위로 안간힘을 쓰며 인형 가죽을 찢고, 까뒤집어 솜을 낸다. 종내엔 불판에 올린 먹장어처럼 어딘가 징그럽게 꿈틀대는 길쭉한 구동부와 회로만 남는다. 마치 생체를 해부하는 광경처럼 몸서리가 쳤다. 예리한 수술 도구 대신 알록달록 뭉툭한 가위로 썰어대니 외려 잔혹한 기분이다. 그렇게 가짜 자연이 살짝 덜 가짜인 동안에도, 옆 화면에선 ‘가짜’의 줄기찬 몸놀림이 부쩍 신들린 듯하다. 다시 해부 장면으로 눈을 돌리니, 심장처럼 드러난 그 회로조차 매정히 잘라 숨통을 끊는다. 그럼 개량해 접붙이고 옮겨 심어 가지 치고 주사 박은 꺾꽂이 식물은 ‘자연’인가?

해당 작업 〈Messenger Between Worlds〉는 ‘김용현스러움’을 잘 보여 준다. 호기심에 눈길이 가고, 무슨 상황인지 몰라 10초간 어리둥절, 이후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하다, 반복, 점층, 변화를 거듭하며 관객이 서서히 몰입한다. 저마다 생각을 정리할 만치 어지간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우스꽝스럽지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여운을 남기며 찝찝하게 맺는다. 1인용 화물 카트를 타고 바닷가의 경사로를 달려 끝내 물에 빠지길 반복하는 〈내려가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계단과 도로, 벤치 등 낮은 곳에서 굴러떨어지길 반복하는 〈추락 없는 낙하〉 또한 마찬가지이다. 웃기고 불편하다. 끝이 뭉툭한 막대기로 살살 건든다. 어설프고, 엉뚱하며, 희극적인 이들 행위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비합리적 규율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계, 같잖은 위선에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삽질이다. 세상의 균열과 삐걱대는 이음새를 찾아 일부러 비비고 헛디뎌 보는 실험자, 일단 그를 ‘세상 감리사’로 임명한다.
김용현은 ‘사회 탐험가’이자 ‘연구자’형 작가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문화인류학/언어인류학을 연구하는 미술 전공자라니, 내 기준으로 동시대 미술인의 최적화 모델이다. 기대에 걸맞은 유난한 스캔 방식, 우직한 연구 방식이 있다. 체화와 타자화를 반복하며 그 차이에 주목하는, 소위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실천한다. 대부도 경기창작센터와 장도 창작스튜디오를 돌며, 준 현지인의 처지가 되어 현장 사람들과 접점을 늘려 나가는 탐사법을 확립했다. 그는 ‘계획하에 집을 나서지만 뭘 만날지 모른다, 그리고 길바닥에서의 만남은 늘 계획을 뛰어넘는다’라고 한다. ‘관점은 명확히, 소통은 대중없이’. 당장 연구를 위한 소통이 아닌(듯한) 것들부터 시작해 나선형으로 점차 핵심에 접근한다. 의미는 점이나 덩어리보단 안개나 구름과 비슷한 모양새이기에, 낚시나 작살 대신 동서남북 촘촘한 어망을 두르고 뜰채를 펄럭이며 좁혀 가는 셈이다. 그의 영상을 수놓는 재미있는 우연은 행운이 아니라, 당첨될 때까지 긁은 것이다.

로봇청소기는 보조 브러시와 카메라, 적외선 센서, 그리고 최후엔 본체의 물리적 충돌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온 집구석을 더듬는다. 김용현은 마치 브러시와 카메라, 센서를 다 뜯어낸 로봇청소기가 떠오른다. 그는 말이나 눈길 대신 온몸으로 부딪혀 더듬는다. 〈추락 없는 낙하〉를 비롯한 몇몇 작업은 아스팔트 길바닥을 기고, 의자에서 넘어지고, 데굴데굴 계단을 구른다. 우습고 엉성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저 ‘관종’으로 치부하기엔, 의식을 치르는 듯한 진지함이 오도독뼈처럼 곳곳 씹힌다. 실패가 반복, 점층할수록 개그에서 자조와 허망으로 넘어가고, 일견 숭고할 때가 있다. 될 때까지 반복하는 꼴을 방관하자니 보는 사람이 괜히 머쓱한 게, 뭐라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의미를 더듬게 부추긴다.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끝끝내 극복하는 우리 주변의 ‘높이’에서, 물리적 단차, 심리적 장벽, 사회적 격차, 논리적 괴리 그 모든 것을 포괄함”을 깨달아야 마땅하다.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게 만들다니, 기발한 아이템보다 더 빛나는 전략 아닌가? 이게 바로 ‘몰입’이다. 퍼포먼스의 과정성을 활용하는 그만의 방법론인 것. ‘엉성하며 진지한 슬랩스틱’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관객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그만의 비결이다. ‘슬랩스틱 리서처’답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정밀 스캔하는 멍투성이 몸과 문제의식보다 앞서 강조할 건 화법에서 엿보이는 그만의 섬세함, 치밀함이다. 화법은 내용 구성이든, 재료 활용이든, 형식 면이든 비중과 배분의 차이가 있을 뿐, 매한가지로 결국 ‘보여주기’의 문제이다. 애석하지만, 작가 대다수는 보는 데 능숙하고 보여주는 데 미숙하다. 보석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 진실과 사명이 넘치는 문제의식은 지난한 창작 과정을 오가다 ‘전시장에 단순 나열’로 귀결하며 대개 빛이 바랜다. 취재나 인터뷰 등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작업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는 유독 더 서툴고 투박하다. 섬세한 ‘보여주기’가, 다른 유형의 작가들보다 더욱 절실한데도 말이다.
숲속 동굴에서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와 야트막한 언덕에서 해를 등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 건너 초원이 펼쳐지는 풍경. 선사시대부터 현대인까지 두루 취향 저격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조망’을 안전하고 포근하고 여유롭고 아름답게 느낀다. 갑작스러운 사건에도 직접적 피해가 없을 적절한 안전거리(언덕), 쉬운 접근을 막는 울타리(강), 적보다 먼저 상황을 감지하고 대비할 수 있는 비대칭적인 넓은 시야(내려다보기), 쉴 수 있는 은신처(동굴), 곁에 두고 쓸 충분한 자원(숲)을 꼽는다. 많은 회화 작품에서 이미 숱하게 활용되어 온 좋은 그림의 요건을 그는 영상 포맷과 전개 전반에 접목한다. 자막과 내레이션의 의도적 배제, 반복과 점층의 리듬이 묻어나는 차근차근 전개, 아치형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듯 위쪽 모서리를 라운딩한 화면 판형,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운 엉거주춤한 호흡의 슬랩스틱 퍼포먼스는 미술 작품을 감상 대신 마치 버스킹처럼 ‘구경’하게끔 한다. 거리감과 여유, 안전장치를 곳곳에 두어, 관객이 몰입하고 동화할 ‘짬’을 충분히 주는 셈. 그렇게 관객은 각자의 의미망을 만들 시간을 선물 받는다. 사실 각 잡고 엉뚱한 미술 작품은 적나라하고 진지한 것보다 무섭다. 바보가 봐도 무언가 뼈 있는 이야기니까. 종합하면 진입 장벽은 낮고 여운은 길다. 참으로 치밀한 엉거주춤이다.
미술 작가의 화법은 그저 선언하면 바로 인정/수용되는 건 아니다. 작업군을 형성하고, 전시로 내보이고, 그 작가의 특성으로 자리잡아야 비로소 화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미술씬이 고도화하고 제도의 입김과 자원의 공유가 창작에 이바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갈수록, 고전적인 관념과 달리 예술 창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작업을 했다’라는 사실보다는 관객 저마다 다른 상황과 성향에서 전시 현장의 작품과 실제로 마주할 때 작품은 비로소 그 완결성과 의미를 더한다. 말하자면 개별 관람 경험의 중첩이 곧 창작이란 행위를 매듭짓는 셈. 창작에 활용할 자원이 풍부해지고, 창작 과정에 동원하는 정보나 기술이 고도화하고, 창작물의 범위와 규모와 형태가 방대해지고, 소비하는 계층이 넓어지고 그 방식이 다양해진다. 이러한 창작의 홍수 속에서 ‘보여주기’는 경쟁력과 몰입도, 심지어 작업물의 고민에 대한 진실성까지도 결부한 척도가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했던 꿈 이야기를 반복하곤 한다. 〈뚫린 이름〉에 나오는 동네 주민의 태몽 자랑이 바로 그것. 그런데 태몽은 경계도 대중도 줏대도 없다. 계속 바뀐다. 혼자 살아 있다. 아마도 기대와 희망이 은연중에 꿈속을 비집고 스며든 탓일지로 모른다. 주거니 받거니 태몽과 해몽의, ‘원전 없는 각색’이 대를 이어 난무할 뿐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워크샵의 참가자들 또한 작가의 예상을 벗어나는 언행을 보인다. 지렁이를 존경한다면서, 정작 지렁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곁다리만 짚다 때론 말문이 막힌다. 고도로 훈련된 연구자가 존경하는 인물은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져서’ 이다. 실컷 공부해 비논리 비이성적인 회로로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의 흔한 삶이고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의 참모습은, 번듯한 겉모습과 딴판으로, 단순 명쾌 또박또박 확언이나 결론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우왕좌왕 횡설수설이다. 군데군데 애매하고 흐리고 허술하다. 좌충우돌 다층적인 부정교합으로 가득하다. 이 괴리와 모순, 부조리와 표리부동을 그는 냉소하고 혐오하고 뜯어고치려 들진 않는다. 오히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풍경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슬랩스틱은 자못 사실적이다. 단순히 작가의 미감에서 비롯한 독특한 표현, 화법에 불과한 게 아니다. 검열 없는 적나라한 표현인 셈이다. 그에게 세계는 '거대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현장이다. 결국 그의 작업에서 풍기는 진지함 속 허무와 우스꽝스러움은 사실 그가 다루는, ‘세상의 본래 속성’이다. 작업을 통틀어 그가 되짚는 인간 세상의 연극성과 불완전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기꾼이 만든 성물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을 기다리는 이 거대한 코미디. 우리가 사는 현장을 겨냥한 고발장으로 오해하지 말길. 그건 그만의 웃픈 애정 표현이다.
2025.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