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시간여행
문소영(독립기획자)
(한 명의 작은 독자로서 비평을 바라봅니다.)
최근에 글들이 빠르고 가볍게 소모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평은 작업의 보이지 않는 면을 들춰 주고, 작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비평을 읽음으로써 타자의 시각으로 작가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전시가 소모적이지 않고 작업을 지속하는 단계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비평이 꼭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성된 비평이 어느 순간 소모적으로 느껴진다면, 무엇이 그 글의 의미를 계속 이어 가게 해줄까. 비평은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서만 순환하고 마감되는 둘만의 서신일까? 그렇지 않다면 비평은 발행된 이후에는 누구에게로 향하고,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비평이 영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변하는데, 끝도 없이 흐르고 변하는 판도 위에서 언제까지 날카롭고 개성 있고 신선할 수 있을까. 작가마다 관심사와 매체가 다른 것처럼 필자도 각자의 목소리를 갖고 있고 문체가 다르다. 같은 작가에 대한 비평도 모아 놓고 보면 꼭 컬러차트처럼 다양하게 펼쳐진다. 비평은 한 작가나 특정 담론을 다루는 글이면서도, 예술을 매개로 시각 언어 전반을 톺아보고 질문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비평가의 창작물이기도 하다. 비평은 시간이 한 작업을 단편적으로 고정하지 않도록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작업의 아름다움과 면밀한 관찰 속에서 떠오른 의문들을 기록해 미래로 부친다. 지금 눈앞에 드러난 과거의 한 순간이 다른 시간대에서는 어떻게 읽혔는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말과 시각은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한다. 비평은 얼마나 먼 미래로 송출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글이 닿은 시점에서도 유의미하게 읽힐 수 있을까.
의미는 단호한 일침보다는 글 속에 스며 있는 필자의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침은 무뎌지지만 태도는 각인된 상태로 오래 기억된다. 풍경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다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게 되었다. 「풍경에 대하여」라는 가라타니가 소세키의 문학을 근거로 풍경에 대해 쓴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 마음에 들어 새로 구매했다. 빌려 읽었을 때는 마음이 급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앞쪽에 이 책 속 글이 어떻게 갈무리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후기같은 서문이 있었다. 가라타니는 수록된 글들을 적을 당시에 현장참여적인 비평을 추구했고, 그렇기에 일본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 이 글이 출판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웠던 듯했다.1) 독자들의 이해에 글이 온전히 닿지 않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화가들이 마음 한켠에 남은 미세한 거슬림을 다듬고 싶어 하듯, 그도 글을 다듬고 싶었다는 의사를 길게 적어 놓았다. 저명한 학자도 글의 완성도에 오랜 시간 시달린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비평에는 큰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평의 지속은 비평가가 과거의 자신을 다듬고 번복하며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미술 잡지 속에는 이제 갓 활동을 시작한, 지금은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풋풋한 모습과 당시 평론들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던 주제들이 실려 있다. 몇몇 도서관에 가면 열람할 수 있고, 여러모로 흥미롭기 때문에 찾아볼 것을 추천한다. 당시의 문체로 선생님들의 초창기 작업을 읽어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고, 발품 팔거나 구독해야 볼 수 있었던 당시 지면 평론의 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현시점의 미술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세잔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를로퐁티의 오래된 글과 현시대 회화의 태도를 대조해 보거나, 보들레르의 사진에 대한 비판2)을 현 시점에 AI가 소비되는 방식에 연결지어 볼 수도 있겠다.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글에서도 감각을 느낄 수 있고, 시간이 단어들을 닳게 해도 요점은 뼈처럼 남겨진다. 비평의 내용이 거창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해묵은 유머가 당시 시대 감성을 날것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작가에 대한 필자의 관심과 애정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공명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실천되는 비평으로 돌아가 보자. 비평가가 가장 생생한 피드백을 얻는 곳은 결국 작가다.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비평을 읽어내고, 직접 전달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치열한 메타비평을 일으킨다. 무엇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동의하기 힘들었는지, 혹은 엇갈린 대화가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여지를 주었는지 고민할 것이다. 비평 속에는 관찰된 자와 관찰하는 자의 사유가 나란히 드러난다. 아니, 그렇게 위계 없이 드러나야 제대로 된 실천으로 읽히고, 독자의 이해로도 자연스럽게 확장되지 않을까?
다시, 비평은 미래에 마주할 미지의 독자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시간이 언어를 닳게 하더라도, 그 글에 각인된 태도는 누군가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여러 시간이 한 지면에서 겹쳐지며 또 다른 가능성의 창구를 여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와 작업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작업이 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전시되어야 했는지, 이 작업은 무엇을 말하고 그 말을 들음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비평은 지속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비평은 하나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을 낳도록 이끄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질문에 무한 동력을 더하기 위해, 비평가는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그 안에 압축하는 시간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발행된 사유를 미래의 누군가가 발견하게 된다면, 부디 누군가 공들여 모으고 쌓아 올린 시선과 시간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비평가와 필자들이 지치지 않고, 아름다운 사유와 태도가 기록 속에서 영원하길 바라본다.
1) “나는 이 책을 일본의 문학비평 현장에서 썼었는데 학문적이라기보다는 현실참여적인 비평 작업이었고 나는 그 점에 오히려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83년에 이 책의 영문판 출판 제의가 들어왔을 때엔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그대로는 외국인 독자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대폭적으로 수정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후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80년대 말에 갑작스럽게 번역 초고가 전달되었고, 나는 난감했다.” 가라타니 고진, 「개정판 서문」,『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역, 2010, 도서출판 b.
2) 보들레르는 1859년 개최된 살롱전에 대한 비평 속에서 사진 기술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사진 매체의 소멸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가 사진의 재현능력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하인(servante)’으로서 창작의 도구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현시대에 사진은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았고, 비슷한 형태의 고민과 우려는 AI의 활용 범위로 넘어온 듯하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사진에 대하여, 1859년 살롱전에 부쳐 (On Photography, from The Salon of 1859)」, (출처: https://www.csus.edu/indiv/o/obriene/art109/readings/11%20baudelaire%20photography.htm)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비평의 시간여행
문소영(독립기획자)
(한 명의 작은 독자로서 비평을 바라봅니다.)
최근에 글들이 빠르고 가볍게 소모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평은 작업의 보이지 않는 면을 들춰 주고, 작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비평을 읽음으로써 타자의 시각으로 작가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전시가 소모적이지 않고 작업을 지속하는 단계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비평이 꼭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성된 비평이 어느 순간 소모적으로 느껴진다면, 무엇이 그 글의 의미를 계속 이어 가게 해줄까. 비평은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서만 순환하고 마감되는 둘만의 서신일까? 그렇지 않다면 비평은 발행된 이후에는 누구에게로 향하고,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비평이 영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변하는데, 끝도 없이 흐르고 변하는 판도 위에서 언제까지 날카롭고 개성 있고 신선할 수 있을까. 작가마다 관심사와 매체가 다른 것처럼 필자도 각자의 목소리를 갖고 있고 문체가 다르다. 같은 작가에 대한 비평도 모아 놓고 보면 꼭 컬러차트처럼 다양하게 펼쳐진다. 비평은 한 작가나 특정 담론을 다루는 글이면서도, 예술을 매개로 시각 언어 전반을 톺아보고 질문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비평가의 창작물이기도 하다. 비평은 시간이 한 작업을 단편적으로 고정하지 않도록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작업의 아름다움과 면밀한 관찰 속에서 떠오른 의문들을 기록해 미래로 부친다. 지금 눈앞에 드러난 과거의 한 순간이 다른 시간대에서는 어떻게 읽혔는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말과 시각은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한다. 비평은 얼마나 먼 미래로 송출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글이 닿은 시점에서도 유의미하게 읽힐 수 있을까.
의미는 단호한 일침보다는 글 속에 스며 있는 필자의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침은 무뎌지지만 태도는 각인된 상태로 오래 기억된다. 풍경에 대한 참고문헌을 찾다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게 되었다. 「풍경에 대하여」라는 가라타니가 소세키의 문학을 근거로 풍경에 대해 쓴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 마음에 들어 새로 구매했다. 빌려 읽었을 때는 마음이 급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앞쪽에 이 책 속 글이 어떻게 갈무리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후기같은 서문이 있었다. 가라타니는 수록된 글들을 적을 당시에 현장참여적인 비평을 추구했고, 그렇기에 일본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 이 글이 출판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웠던 듯했다.1) 독자들의 이해에 글이 온전히 닿지 않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화가들이 마음 한켠에 남은 미세한 거슬림을 다듬고 싶어 하듯, 그도 글을 다듬고 싶었다는 의사를 길게 적어 놓았다. 저명한 학자도 글의 완성도에 오랜 시간 시달린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비평에는 큰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평의 지속은 비평가가 과거의 자신을 다듬고 번복하며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미술 잡지 속에는 이제 갓 활동을 시작한, 지금은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풋풋한 모습과 당시 평론들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던 주제들이 실려 있다. 몇몇 도서관에 가면 열람할 수 있고, 여러모로 흥미롭기 때문에 찾아볼 것을 추천한다. 당시의 문체로 선생님들의 초창기 작업을 읽어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고, 발품 팔거나 구독해야 볼 수 있었던 당시 지면 평론의 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현시점의 미술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세잔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를로퐁티의 오래된 글과 현시대 회화의 태도를 대조해 보거나, 보들레르의 사진에 대한 비판2)을 현 시점에 AI가 소비되는 방식에 연결지어 볼 수도 있겠다.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글에서도 감각을 느낄 수 있고, 시간이 단어들을 닳게 해도 요점은 뼈처럼 남겨진다. 비평의 내용이 거창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해묵은 유머가 당시 시대 감성을 날것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작가에 대한 필자의 관심과 애정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공명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실천되는 비평으로 돌아가 보자. 비평가가 가장 생생한 피드백을 얻는 곳은 결국 작가다.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비평을 읽어내고, 직접 전달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치열한 메타비평을 일으킨다. 무엇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동의하기 힘들었는지, 혹은 엇갈린 대화가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여지를 주었는지 고민할 것이다. 비평 속에는 관찰된 자와 관찰하는 자의 사유가 나란히 드러난다. 아니, 그렇게 위계 없이 드러나야 제대로 된 실천으로 읽히고, 독자의 이해로도 자연스럽게 확장되지 않을까?
다시, 비평은 미래에 마주할 미지의 독자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시간이 언어를 닳게 하더라도, 그 글에 각인된 태도는 누군가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여러 시간이 한 지면에서 겹쳐지며 또 다른 가능성의 창구를 여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와 작업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작업이 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전시되어야 했는지, 이 작업은 무엇을 말하고 그 말을 들음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비평은 지속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비평은 하나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을 낳도록 이끄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질문에 무한 동력을 더하기 위해, 비평가는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그 안에 압축하는 시간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발행된 사유를 미래의 누군가가 발견하게 된다면, 부디 누군가 공들여 모으고 쌓아 올린 시선과 시간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비평가와 필자들이 지치지 않고, 아름다운 사유와 태도가 기록 속에서 영원하길 바라본다.
1) “나는 이 책을 일본의 문학비평 현장에서 썼었는데 학문적이라기보다는 현실참여적인 비평 작업이었고 나는 그 점에 오히려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83년에 이 책의 영문판 출판 제의가 들어왔을 때엔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그대로는 외국인 독자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대폭적으로 수정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후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80년대 말에 갑작스럽게 번역 초고가 전달되었고, 나는 난감했다.” 가라타니 고진, 「개정판 서문」,『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역, 2010, 도서출판 b.
2) 보들레르는 1859년 개최된 살롱전에 대한 비평 속에서 사진 기술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사진 매체의 소멸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가 사진의 재현능력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하인(servante)’으로서 창작의 도구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현시대에 사진은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았고, 비슷한 형태의 고민과 우려는 AI의 활용 범위로 넘어온 듯하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사진에 대하여, 1859년 살롱전에 부쳐 (On Photography, from The Salon of 1859)」, (출처: https://www.csus.edu/indiv/o/obriene/art109/readings/11%20baudelaire%20photography.htm)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