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1)
정재연

이 글은 제목에서 시작한다.
사실 글의 제목을 버지니아 울프의 1929년 작인 <자기만의 방>으로 쓰고 싶었다. 2024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있었던 <오렌지 라운드 테이블>을 기획하던 중에 읽었던 박보나 작가의 <예술이 내 것이 되는 순간>에서 발견한 미국 예술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 의 작업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사 노동을 하듯 열심히 미술관 입구부터 내부까지 열심히 무릎 꿇고 손으로 닦는 퍼포먼스를 한다. 작가가 결혼과 출산, 육아로 한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에 다시 미술계로 돌아와 선보인 작업이다. 본인도 결혼과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친 여성이 늘 독립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왔던 터라 밑줄을 그어 읽었던 부분이다. 그 이후부터 더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많은 작업과 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출산 후, 본인의 생물학적, 심리적 변화도 일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늘 예술과 생활은 양립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엄마가 된 후 심리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
예술은 창조와 혁신, 파괴와 발전을 중심 가치로 매번 변화하고, 창조하고, 새롭고, 발전하고, 전진한다. 유켈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유지관리는 직관적으로 청소, 육아, 돌봄, 반복되는 가사 노동을 말한다. 깨끗하게 관리하고, 보존하고, 정리하고, 변하는 것들을 위해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한다. 이 유지관리는 이 사회를 지속시키는 본질적 행위다. 늘 생각한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과 퍼포먼스는 많아졌지만, 돌봄과 가사 노동을 예술적 행위로 보기 쉽지 않다. 그건 비평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여성 또는 엄마가 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물론 돌봄과 모성, 양육과 같은 예술의 본질적 기반을 다루는 작업이 물론 있다. 다만, 모성 경험을 ‘진정한 예술적 주제’로 보지 않는 사회 구조에 대한 한계는 작업하거나 글을 쓰는 여성 예술가 혹은 기획자에겐 아직 큰 벽이다. 작업의 주제 그리고 예술가의 성별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을 왜곡하고 해석 가능성을 한정한다. 생산(production)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가시적 창조의 과정으로 사회적인 인정과 보상을 받는다. 반면 유지의 노동은 반복되고 소모적이며, 흔히 여성, 이민자, 저임금 노동자에게 대부분 전가된다. 그럼, 누가 관리하고, 이들의 노동은 왜 예술에서 삭제되는가? 아니, 삭제 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뉴욕에서 글을 쓰고, 예술적인 무언가를 기획하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지속 해야만 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동시에 5살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엄마이기도 하다. 예술적, 지적 노동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 노동, 가사 노동은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실감한다. Tronto가 말하듯, 돌봄 윤리는 ‘정의’ 중심의 추상적 가치에서 벗어나, 의존 · 취약성 · 상호 의존성의 구체적 조건을 중심에 둔다. 그는 돌봄이 공동체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수행하는 돌봄 노동 -육아, 가사, 교육, 유지- 가 예술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재확인시킨다.2) 육아와 돌봄이 나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나는 ‘돌봄’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고 기획하는 동력이며, 예술의 언어로 계속해서 말해야만 하는 중요한 주제임을 깨닫는다. 육아는 예술의 가장 복합적인 형태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고, 밥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교를 마치면 놀이터에 가는 일. 동시에 집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며,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 동시에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대충 때우는 점심을 먹는 일. 이 과정은 결코 생산적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 물론 반복되고, 때로는 소모적이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고, 한 사람의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는 결정적 토대다. 보이지 않는데, 드러나는 일들.
엄마의 일 말고 본업으로 돌아오자면, 한국어를 가르치고, 때때로 글을 쓰며, 기획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수업 준비, 숙제 피드백, 학생 하나하나 발음에 귀 기울이는 일, 교육 과정은 언뜻 보면 소규모의 행정적 노동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유지 형태로 언어 학습의 생태계를 이어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엄마이지만 매일 조율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이의 등원 시간과 회의 시간, 일하는 시간을 조절하고, 글의 문장을 정리한다. 잠들기 전까지 집안을 치우고 정리한다. 경계가 없는 모든 삶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 소용이 있을까? 임신과 출산 여성이 작업하는 예술은 단순히 ‘가정적, 모성, 돌봄’의 이야기로 축소되는 구조를 비판한들 이 문제는 개선될까? 모성 또는 여성의 삶 경험이 예술이란 영역으로 넘어올 때 주로 경시되거나 단순화 되는 방식은 왜 되풀이 될까? 여전히 모성 경험을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회 구조가 존재한다. 본인이 결혼 이후 쓴 글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신적 투고’ 또는 ‘개인적 고백’으로만 여겨지는 왜곡된 재현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는 모성 담론이라고 하는 부분이 엄마의 글쓰기 경험이 단순한 회고로 보이는 점들이 있다. 또한 Federici가 지적하듯, 가사와 돌봄 노동은 역사적으로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됐고, 사회 재생산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폄하되고 무임금으로 남겨져 왔다. 예술 내부에서도 돌봄과 모성의 경험이 여전히 주변부에 있는 이유 역시 같은 구조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3)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존재하는 다양한 예술계 질서(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장벽)를 계속 두드리는 비평과 작업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물론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차화 되는 방식을 통해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성 경험(출산, 육아, 돌봄 등)은 분명 여성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억압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가령 이중 잣대, 사회 정치적인 무관심, 잘못된 인식과 범주화, 고립, 사회적 모델의 부족 등이 있다.4) 작업의 맥락 안에서 파악할 수 있지만, 예술가 혹은 주체의 성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만 작업 맥락 속에서 명확하게 파악된다. 결국 모성 작가 혹은 예술가들이 아니면 나처럼 기획하는 사람에게도 주제에 대한 한계성이 존재하고 사회적 모델이 아주 소수, 소위 잘나가는(?) 예술가들에게만 편향되어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와 연결된다.
모성 경험은 특히 ‘돌봄 노동을 통한 예술과 글쓰기’ 나 ‘모성의 내부 세계’가 예술적으로 미적 주제로 충분히 인식되어야 한다. 폄하되는 것보다 오히려 언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모성은 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기에 위상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자체는 억압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억압 구조에서 못 벗어 남은 사회가 만들어 낸 ‘좋은 엄마’, ‘일과 육아를 해내는 슈퍼맘’ 등의 단어다. 여성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하고, 임금체계 및 사회적 구조 속에서 결국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또한 감정 조절과 도덕성도 갖춰야 한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침묵시키도록 만드는 구조도 그러하다. “엄마는 원래 그래”라는 압력, 출산 경험과 상관없이 여성에게 모성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여성 정체성을 단일화시키고 제한하는 것이다. 결국 한계를 인정하지만,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또한 당연시되는 요즘 시대의 현실이다. 나는 모성 담론 안에서 엄마의 글쓰기, 돌봄 글쓰기를 어떻게 회복해서 비평적으로 사유하게 할 것인지 일상의 내러티브를 계속해서 쓸 것이다.
뒤틀리고 실수하고, 때론 사라지고, 강해지고 연약해짐을 반복하는. 나는 그 점이 좋다. 엄마라서.
추천 도서
Brandi Katherine Herrera, Mother Is a Body. Fonograf Editions, 2021.
김다은,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 팩토리, 2022.
1) 유켈리스의 유지 예술 선언문, 1969(Manifesto for Maintenance Art, 1969!) 에서 발달(development)와 유지관리(maintenance)를 두 개의 기본 체계로 구분한다. 작가는 선언문 앞문단에서 질문하고 있다.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After the revolution, who’s going to pick up the garbage on Monday morning?) 이 문장에 바로머릿속에 꽂혔다. 글을 쓰고 기획을 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멈출 수 없는 가사노동과 육아는 결국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자 연속적인 일이기도 하다.
2) Joan C. Tronto,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New York: Routledge, 1993), 103.
3) Silvia Federici, "Wages for Housework," in Revolution at Point Zero: Housework, Reproduction, and Feminist Struggle (Oakland: PM Press, 2012), 15-28.
4) 최근 읽기 시작한 조애나 러스(Joanna Russ)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에서 '여성 문학을 억압하는 11가지 전략' 중에서 몇 가지 전략을 예시로 가져왔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월요일 아침에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1)
정재연

이 글은 제목에서 시작한다.
사실 글의 제목을 버지니아 울프의 1929년 작인 <자기만의 방>으로 쓰고 싶었다. 2024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있었던 <오렌지 라운드 테이블>을 기획하던 중에 읽었던 박보나 작가의 <예술이 내 것이 되는 순간>에서 발견한 미국 예술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 의 작업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사 노동을 하듯 열심히 미술관 입구부터 내부까지 열심히 무릎 꿇고 손으로 닦는 퍼포먼스를 한다. 작가가 결혼과 출산, 육아로 한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에 다시 미술계로 돌아와 선보인 작업이다. 본인도 결혼과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친 여성이 늘 독립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왔던 터라 밑줄을 그어 읽었던 부분이다. 그 이후부터 더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많은 작업과 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출산 후, 본인의 생물학적, 심리적 변화도 일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늘 예술과 생활은 양립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엄마가 된 후 심리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
예술은 창조와 혁신, 파괴와 발전을 중심 가치로 매번 변화하고, 창조하고, 새롭고, 발전하고, 전진한다. 유켈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유지관리는 직관적으로 청소, 육아, 돌봄, 반복되는 가사 노동을 말한다. 깨끗하게 관리하고, 보존하고, 정리하고, 변하는 것들을 위해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한다. 이 유지관리는 이 사회를 지속시키는 본질적 행위다. 늘 생각한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과 퍼포먼스는 많아졌지만, 돌봄과 가사 노동을 예술적 행위로 보기 쉽지 않다. 그건 비평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여성 또는 엄마가 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물론 돌봄과 모성, 양육과 같은 예술의 본질적 기반을 다루는 작업이 물론 있다. 다만, 모성 경험을 ‘진정한 예술적 주제’로 보지 않는 사회 구조에 대한 한계는 작업하거나 글을 쓰는 여성 예술가 혹은 기획자에겐 아직 큰 벽이다. 작업의 주제 그리고 예술가의 성별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을 왜곡하고 해석 가능성을 한정한다. 생산(production)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가시적 창조의 과정으로 사회적인 인정과 보상을 받는다. 반면 유지의 노동은 반복되고 소모적이며, 흔히 여성, 이민자, 저임금 노동자에게 대부분 전가된다. 그럼, 누가 관리하고, 이들의 노동은 왜 예술에서 삭제되는가? 아니, 삭제 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뉴욕에서 글을 쓰고, 예술적인 무언가를 기획하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지속 해야만 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동시에 5살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엄마이기도 하다. 예술적, 지적 노동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 노동, 가사 노동은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실감한다. Tronto가 말하듯, 돌봄 윤리는 ‘정의’ 중심의 추상적 가치에서 벗어나, 의존 · 취약성 · 상호 의존성의 구체적 조건을 중심에 둔다. 그는 돌봄이 공동체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수행하는 돌봄 노동 -육아, 가사, 교육, 유지- 가 예술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재확인시킨다.2) 육아와 돌봄이 나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나는 ‘돌봄’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고 기획하는 동력이며, 예술의 언어로 계속해서 말해야만 하는 중요한 주제임을 깨닫는다. 육아는 예술의 가장 복합적인 형태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고, 밥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교를 마치면 놀이터에 가는 일. 동시에 집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며,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 동시에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대충 때우는 점심을 먹는 일. 이 과정은 결코 생산적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 물론 반복되고, 때로는 소모적이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고, 한 사람의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는 결정적 토대다. 보이지 않는데, 드러나는 일들.
엄마의 일 말고 본업으로 돌아오자면, 한국어를 가르치고, 때때로 글을 쓰며, 기획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수업 준비, 숙제 피드백, 학생 하나하나 발음에 귀 기울이는 일, 교육 과정은 언뜻 보면 소규모의 행정적 노동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유지 형태로 언어 학습의 생태계를 이어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엄마이지만 매일 조율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이의 등원 시간과 회의 시간, 일하는 시간을 조절하고, 글의 문장을 정리한다. 잠들기 전까지 집안을 치우고 정리한다. 경계가 없는 모든 삶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 소용이 있을까? 임신과 출산 여성이 작업하는 예술은 단순히 ‘가정적, 모성, 돌봄’의 이야기로 축소되는 구조를 비판한들 이 문제는 개선될까? 모성 또는 여성의 삶 경험이 예술이란 영역으로 넘어올 때 주로 경시되거나 단순화 되는 방식은 왜 되풀이 될까? 여전히 모성 경험을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회 구조가 존재한다. 본인이 결혼 이후 쓴 글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신적 투고’ 또는 ‘개인적 고백’으로만 여겨지는 왜곡된 재현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는 모성 담론이라고 하는 부분이 엄마의 글쓰기 경험이 단순한 회고로 보이는 점들이 있다. 또한 Federici가 지적하듯, 가사와 돌봄 노동은 역사적으로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됐고, 사회 재생산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폄하되고 무임금으로 남겨져 왔다. 예술 내부에서도 돌봄과 모성의 경험이 여전히 주변부에 있는 이유 역시 같은 구조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3)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존재하는 다양한 예술계 질서(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장벽)를 계속 두드리는 비평과 작업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물론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차화 되는 방식을 통해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성 경험(출산, 육아, 돌봄 등)은 분명 여성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억압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가령 이중 잣대, 사회 정치적인 무관심, 잘못된 인식과 범주화, 고립, 사회적 모델의 부족 등이 있다.4) 작업의 맥락 안에서 파악할 수 있지만, 예술가 혹은 주체의 성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만 작업 맥락 속에서 명확하게 파악된다. 결국 모성 작가 혹은 예술가들이 아니면 나처럼 기획하는 사람에게도 주제에 대한 한계성이 존재하고 사회적 모델이 아주 소수, 소위 잘나가는(?) 예술가들에게만 편향되어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와 연결된다.
모성 경험은 특히 ‘돌봄 노동을 통한 예술과 글쓰기’ 나 ‘모성의 내부 세계’가 예술적으로 미적 주제로 충분히 인식되어야 한다. 폄하되는 것보다 오히려 언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모성은 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기에 위상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자체는 억압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억압 구조에서 못 벗어 남은 사회가 만들어 낸 ‘좋은 엄마’, ‘일과 육아를 해내는 슈퍼맘’ 등의 단어다. 여성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하고, 임금체계 및 사회적 구조 속에서 결국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또한 감정 조절과 도덕성도 갖춰야 한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침묵시키도록 만드는 구조도 그러하다. “엄마는 원래 그래”라는 압력, 출산 경험과 상관없이 여성에게 모성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여성 정체성을 단일화시키고 제한하는 것이다. 결국 한계를 인정하지만,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또한 당연시되는 요즘 시대의 현실이다. 나는 모성 담론 안에서 엄마의 글쓰기, 돌봄 글쓰기를 어떻게 회복해서 비평적으로 사유하게 할 것인지 일상의 내러티브를 계속해서 쓸 것이다.
뒤틀리고 실수하고, 때론 사라지고, 강해지고 연약해짐을 반복하는. 나는 그 점이 좋다. 엄마라서.
추천 도서
Brandi Katherine Herrera, Mother Is a Body. Fonograf Editions, 2021.
김다은,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 팩토리, 2022.
1) 유켈리스의 유지 예술 선언문, 1969(Manifesto for Maintenance Art, 1969!) 에서 발달(development)와 유지관리(maintenance)를 두 개의 기본 체계로 구분한다. 작가는 선언문 앞문단에서 질문하고 있다.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After the revolution, who’s going to pick up the garbage on Monday morning?) 이 문장에 바로머릿속에 꽂혔다. 글을 쓰고 기획을 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멈출 수 없는 가사노동과 육아는 결국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자 연속적인 일이기도 하다.
2) Joan C. Tronto,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New York: Routledge, 1993), 103.
3) Silvia Federici, "Wages for Housework," in Revolution at Point Zero: Housework, Reproduction, and Feminist Struggle (Oakland: PM Press, 2012), 15-28.
4) 최근 읽기 시작한 조애나 러스(Joanna Russ)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에서 '여성 문학을 억압하는 11가지 전략' 중에서 몇 가지 전략을 예시로 가져왔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