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드라마:
결국에는 당신을 위한 비평 담론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문화평론가)
“내가 다섯 살이라 생각하고 설명해봐.”
연애가 행복한 경험인 동시에 때로는 혼자일 때보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건, 이기심의 충돌 또는 신뢰의 붕괴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연인이 함께 겪는 일에 대해 개인 각자의 감흥과 이해가 언제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함께 어떤 전시를 관람할 때, 나와 내 연인 모두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의 구체적인 성격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화는 회화이고 조각은 조각이며 영상은 영상인 것처럼, 연인 관계는 연인 관계이고 나는 나이며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같은 작품 앞에 나와 당신이 선다 하여도, 그 작품을 응시하는 내 시선과 당신의 시선, 그리고 내 정신-마음과 당신의 정신-마음은 똑같지 않기에, 결국 작품도 똑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미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수용미학이, 즉 한 작품에 대한 여러 감상자의 서로 다른 수용(감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평론도 마찬가지이다. 평론가가 쓰는 평론은 하나지만, 독자는 한 명이 아니고, 이에 저자의 손을 떠나서 인쇄되는 평론은 그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내용으로 번식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평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 평론을 독자가 자기 정신-마음 내에 다시 쓴다는 것임을 뜻하고, 이는 한 사람이 읽고 다시 쓴 평론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같을 수 없음을 함의한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니까. 따라서 이러한 통찰을 시도하는 평론가는 평론에 대한, 아니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대한 가장 오랜 논제 가운데 하나인 ‘내 글의 의미가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글은 독자가 어차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기 때문에, 원 저자의 의도는 필연적으로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글을 쓰는 사람을 커다란 좌절감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성숙하게 생각해보면 글을 쓰고 읽는 행위란 오히려 인간 관계를 통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더욱 큰 좌절들을 해소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가령 평론가는 ‘나는 미술 전문가이고, 이 작품에 대한 내 전문적인 분석과 소회를 그런 전문성이 없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라는 태도를 버리고 ‘독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전문가이든 아니든 내 사유와 감흥은 어차피 온전하게 전달될 수 없어, 특히 그걸 내 언어로만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러니 독자의 언어를 상상하고 배려하여, 마치 내가 독자의 입장이 되어 글을 다시 쓰는 과정을 대신 해드린다는 심정으로 글을 쓰면 어떨까? 즉 읽기라는 행위와 쓰기라는 행위를 대조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공통된 영역을 개척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면 어떨까?’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펜을 집으면 어떨까.
그런 정신을 기반으로 한 평론은 내가 작품과 예술가 뿐만 아니라 감상자와 독자 또한 좀 더 잘 이해해보려고 하는 태도를 그 근본으로 삼기에, 궁극적으로 독자 또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국 내 평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행간이 채워지리라. 또한 그런 믿음이 있기에 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평론인 방송에서 하는 평론의 내용을 작성할 때, 그리고 미술계 관계자/애호가가 주된 독자인 미술 잡지에 기고하는 평론을 작성할 때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지닌 평론가가 되어 각자의 어법과 어휘를 구사한다. 독일어만 아는 사람에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예술을 프랑스어로 소개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심지어 ‘내’ 생각인 ‘내’ 평론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의 언어로 하고자 한다.
비록 말처럼 쉽지 않고, 따라서 좌절이 따른다 하여도,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의 더 큰 좌절들이 해소될 수 있다면. 이 글의 첫 문장은 영미권의 유명 텔레비전 드라마인 《오피스》(The Office)의 명대사 중 하나인데, 평론가인 내게 평론을 쓴다는 것은 ‘내가 글을 드리고 싶은 마음’보다 ‘독자께서 내 글을 읽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임을 상기할 때마다 떠오른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최대한 전문적으로 기술하는 평론이 즐비한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평론가로서, 전문성의 연마를 소홀히 하지 않는 동시에 좀 더 외연이 확장된 독자 지향성이라는 낭만과 열정의 드라마틱한 비평 담론을 제언한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평론 드라마:
결국에는 당신을 위한 비평 담론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문화평론가)
“내가 다섯 살이라 생각하고 설명해봐.”
연애가 행복한 경험인 동시에 때로는 혼자일 때보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건, 이기심의 충돌 또는 신뢰의 붕괴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연인이 함께 겪는 일에 대해 개인 각자의 감흥과 이해가 언제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함께 어떤 전시를 관람할 때, 나와 내 연인 모두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의 구체적인 성격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화는 회화이고 조각은 조각이며 영상은 영상인 것처럼, 연인 관계는 연인 관계이고 나는 나이며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같은 작품 앞에 나와 당신이 선다 하여도, 그 작품을 응시하는 내 시선과 당신의 시선, 그리고 내 정신-마음과 당신의 정신-마음은 똑같지 않기에, 결국 작품도 똑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미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수용미학이, 즉 한 작품에 대한 여러 감상자의 서로 다른 수용(감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평론도 마찬가지이다. 평론가가 쓰는 평론은 하나지만, 독자는 한 명이 아니고, 이에 저자의 손을 떠나서 인쇄되는 평론은 그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내용으로 번식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평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 평론을 독자가 자기 정신-마음 내에 다시 쓴다는 것임을 뜻하고, 이는 한 사람이 읽고 다시 쓴 평론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같을 수 없음을 함의한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니까. 따라서 이러한 통찰을 시도하는 평론가는 평론에 대한, 아니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대한 가장 오랜 논제 가운데 하나인 ‘내 글의 의미가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글은 독자가 어차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기 때문에, 원 저자의 의도는 필연적으로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글을 쓰는 사람을 커다란 좌절감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성숙하게 생각해보면 글을 쓰고 읽는 행위란 오히려 인간 관계를 통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더욱 큰 좌절들을 해소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가령 평론가는 ‘나는 미술 전문가이고, 이 작품에 대한 내 전문적인 분석과 소회를 그런 전문성이 없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라는 태도를 버리고 ‘독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전문가이든 아니든 내 사유와 감흥은 어차피 온전하게 전달될 수 없어, 특히 그걸 내 언어로만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러니 독자의 언어를 상상하고 배려하여, 마치 내가 독자의 입장이 되어 글을 다시 쓰는 과정을 대신 해드린다는 심정으로 글을 쓰면 어떨까? 즉 읽기라는 행위와 쓰기라는 행위를 대조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공통된 영역을 개척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면 어떨까?’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펜을 집으면 어떨까.
그런 정신을 기반으로 한 평론은 내가 작품과 예술가 뿐만 아니라 감상자와 독자 또한 좀 더 잘 이해해보려고 하는 태도를 그 근본으로 삼기에, 궁극적으로 독자 또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국 내 평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행간이 채워지리라. 또한 그런 믿음이 있기에 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평론인 방송에서 하는 평론의 내용을 작성할 때, 그리고 미술계 관계자/애호가가 주된 독자인 미술 잡지에 기고하는 평론을 작성할 때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지닌 평론가가 되어 각자의 어법과 어휘를 구사한다. 독일어만 아는 사람에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예술을 프랑스어로 소개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심지어 ‘내’ 생각인 ‘내’ 평론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의 언어로 하고자 한다.
비록 말처럼 쉽지 않고, 따라서 좌절이 따른다 하여도,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의 더 큰 좌절들이 해소될 수 있다면. 이 글의 첫 문장은 영미권의 유명 텔레비전 드라마인 《오피스》(The Office)의 명대사 중 하나인데, 평론가인 내게 평론을 쓴다는 것은 ‘내가 글을 드리고 싶은 마음’보다 ‘독자께서 내 글을 읽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임을 상기할 때마다 떠오른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최대한 전문적으로 기술하는 평론이 즐비한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평론가로서, 전문성의 연마를 소홀히 하지 않는 동시에 좀 더 외연이 확장된 독자 지향성이라는 낭만과 열정의 드라마틱한 비평 담론을 제언한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