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슬프다. 전시장에서 글을 읽는 관객을 찾기가 어렵다. 전시장 벽면과 리플릿에는 열심히 고민한 문장들을 빼곡히 적어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을 따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벽면 텍스트는 한 번 눈으로 훑은 뒤, '뭔가가 적혀있구나' 정도에서 끝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작품만 향해 걸음을 옮긴다. 글은 분명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관람 동선에서는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다. 그래도 입구에서 나눠주는 리플릿은 중요한 도구처럼 느껴지긴 한다. 손에 들려 전시장 안으로 함께 들어오지만, 종이는 이내 반으로 접혀 가방 속으로 사라진다. '나우 유 씨 미(Now You See Me)'를 현실에서 보는 듯하다. 마술이 으레 그렇듯 사라진 것은 뜬금없는 곳에서 나타나야 더 놀라운 법, 사라진 리플릿은 놀랍게도 화장실에서 발견된다. 여자 화장실은 가보지 않아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위에 반으로 접힌 리플릿이 올려져 있다. 그 유명한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장 안으로 가져와 텍스트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도록 안배해 둔 가능성이 100여 년 뒤, 오늘에는 예술을 설명하려 애쓰는 텍스트가 소변기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뒤샹 때문에 어려워진 예술은 이제 해설 없이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고, 이를 위한 텍스트들이 결국 도착하는 자리는 다시 소변기가 되어버렸다.
텍스트가 이렇게 취급되고 있음에도, 전시가 열릴 때마다 글은 어김없이 생산된다. 읽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전시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처럼 말이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처럼 작품 옆에 있어야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비평 텍스트는 묘한 위치에 놓인다. 전시를 설명하고 사유를 확장하기 위해 쓰였지만 관람의 흐름 안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제도와 행정의 구조 안에서는 형식 요건을 채우는 문서처럼 다뤄진다. 결과적으로 비평은 '있어야 하니까 있는 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어쩌다 텍스트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비평이라는 형식이 애초에 어떤 역할을 맡도록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2.
‘비평’이라는 말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부터 그 안에 꽤 노골적인 기능이 들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크리티시즘(criticism)'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은 대상을 잘 살펴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르고, 추려내고, 판별한다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을 둘로 나누고,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행위가 언어의 시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같은 어근에서 나온 ‘크라이시스(krisis)’가 질병의 경과 속에서 생사가 결정되는 분기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은, 비평이라는 행위가 처음부터 진단과 선고의 이미지와 함께 태어났다는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비평은 애초부터 이해와 공감의 언어라기보다 평가와 판단의 언어였던 것이다. 무언가를 살펴보는 일보다 무엇이 더 낫고 옳은지, 어디까지가 기준 안에 들어오고 어디부터가 바깥으로 밀려나는지 선을 긋는 작업이 우선권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무거운 느낌과 함께 평가서와 같은 냄새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어 자체가 이미 가름과 서열, 판단의 기능을 안고 출발했기 때문에, 비평의 위치 역시 자연스럽게 판관으로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평이 이만큼이나 판단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모두 플라톤 탓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스승의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태도부터였던지 말이다. 어쨌든 가장 문제라 할 수 있는 이데아론은 태생부터 편가르기를 위해 태어났다. 플라톤에게 세계는 두 겹으로 나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 세계가 있고, 그 위에는 변하지 않는 참된 형상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현실의 모든 사물은 보이지 않는 원형을 불완전하게 흉내 내는 모사에 불과하다며 최초의 이상론자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게다가 이미 모방에 불과한 현실을 다시 베껴 그려내는 예술은 더 먼 자리로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진리에서 한 겹 떨어진 것이 아니라 두 겹이나 떨어져 있는 결과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위계 구조는 꽤 오래 이어졌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근거 없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의 꼭대기에 원형을 두고 나머지 것들의 위치를 차례로 배치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집요하게 반복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 비평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작품이 진리에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해 순서를 정하는 역할이다. 한 점의 그림을 두고도 비평가는 진리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포청천' 같은 인물이 된다. 누구의 작업이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지, 어떤 작품에게 '개작두'를 내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평이 설명이나 대화보다 판단과 선고의 말투를 먼저 습득하게 된 것은 다시 생각해 봐도 모두 플라톤 때문인 것 같다.
플라톤 이후 시간이 지나, 근대에 들어 예술이 독립된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도 이 위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설명하는 이론이 등장하고, 예술비평이 하나의 직업이자 전문 영역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비평가는 여전히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작품은 평가 대상이 되었고, 글은 그 평가를 정교하게 포장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좋은 작품'과 '덜 중요한 작품'을 나누고, 어떤 작업은 동시대의 핵심 경향으로, 어떤 작업은 주변부로 분류하는 것이 비평의 주요 역할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이때의 비평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권위였을 것이다. 비평이 설득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글과 구별되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난해한 개념어, 그 개념을 형용하기 위해 길게 이어 붙인 문장 구조,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중요할 것 같은 인물들의 인용들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비평의 언어는 점점 전문화되었고, 그 안에서 통용되는 어휘와 습관은 소수의 집단들만 이해하는 암호가 되었다. 그렇게 결국 비평 텍스트는 작품과 함께 놓여 있으면서도 관람자가 읽기에는 진입 장벽이 높은 글이 된 것이다. 글을 펼쳐 든 사람은 작품을 사유하기는커녕,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라는 자책과 먼저 마주하게 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가 실제로 그런 의도로 쓰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들리는 순간 비평은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답을 통보하는 폭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을 다시 묻는 질문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글을 더 어렵게 쓸 것인가, 덜 어렵게 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비평이 하나의 정답을 판결하는 언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작가의 의도, 작품의 형식, 관람자의 경험은 (대부분은) 하나의 문장 안에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해석이 동시에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독해가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평은 판단을 내려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이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글이어야 하지 않을까.
3.
이러한 비평의 방향성을 전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덧은 비평가의 위치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재료를 왜 선택했는지, 특정 장면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는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질문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을 둘러싼 인터뷰나 작업노트, 대화 속 발언들은 작품을 읽어 나가는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 같다. 문제는 이 나침반을 손에 쥐는 순간, 대다수가 그 방향으로 목적지를 굳혀 버린다는 데 있다. 의도는 단서를 풀기 위한 열쇠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 작품의 의미를 잠가 버리는 자물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생각으로 작업했다'라는 절대 권력의 문장이 등장하게 되면 다른 해석들은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사내는 세상 모든 작가들이 죽었다고 니체처럼 선언한 바 있다. 비약적으로 풀어내긴 했지만 사실 『저자의 죽음』은 작가는 죽었다거나 작가를 없애자는 급진적인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주인이 작가 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보는 관습을 해체해 보려 한 것이었다. 텍스트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완성된 순간부터는 작가의 손을 떠나고, 의미는 작가의 머릿속이 아니라 작품과 관객(감상)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시대와 맥락,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의미는 미리 정해져 있는 사전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가 만나는 순간마다 새로 갱신되는 사건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주체를 해체하는 일이지, 작가를 배제하거나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감상에 있어 작가의 의도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다만 그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정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라, 여러 해석 가능성 가운데 하나라는 축으로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비평은 작가의 말을 충실히 받아 적는 대필이 아니라, 의도와 텍스트, 읽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분기점을 탐색하는 글이 된다. 누가 '정답'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해석의 다른 길이 갈라지기 시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에서 작가의 말은 대개 작업의 출발점과 계기를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 특정 사건, 작업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같은 것들 말이다. 한편, 비평가의 글은 그와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작품을 어떤 이론적 틀 안에 배치하거나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려 한다. 반면 관객의 경험은 또 다른 측면에서 출발한다. 요즘 겪고 있는 생활의 피로, 뉴스에서 본 장면,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들이 작품과 연결되곤 하는 것이다. 같은 작품을 사이에 두고도, 작가의 말, 비평가의 문장, 관람자의 경험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는 것이다. 비평 텍스트가 모종의 작품을 어떤 담론의 끄트머리에 작품을 올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정작 작가는 "나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한다거나, 관객은 그 광경을 보며 “이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비난하는 장면이 어쩌면 오늘날 미술계의 풍경이 아닐까.
그런 불평에도 가장 먼저 흔들리는 쪽은 관객이다. 작가의 언어는 창작의 원천이라는 명분을 지니고 있고, 비평의 언어는 전문적인 해석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겠다.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 이 둘과 잘 겹치지 않을 때 가장 쉽게 '틀린' 쪽이 된다. 비평 텍스트의 난해한 문장과 익숙하지 않은 개념 앞에서, 관람자는 글이 과도하게 폐쇄적이라는 판단보다 '나는 글도 이해 못 하는 멍청이'라는 자책을 떠올리기 쉽다. 작품을 보며 분명 무언가를 느꼈음에도, 그 느낌이 작가의 의도, 혹은 비평의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감각이 미숙하거나 앎의 수준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의 언어는 이 구조 안에서 실패감을 생산한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관객은 글의 오류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의심하고, 그 의심이 반복될수록 텍스트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줄어든다.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를 만날 때마다 작은 상처가 남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상처를 피하는 편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읽기를 포기하는 쪽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라는 표현은 비평이 스스로 구축한 장벽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진짜 필요한 질문은 비평의 높은 장벽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가 아니다. 하나의 정답을 향해 세워진 구조 자체를 어떻게 돌려놓을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비평이 꼭 하나의 올바른 이해를 제시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 순간, 글은 판단문이 아니라 또 하나의 관점을 제안하는 것이 된다. 작품을 해석하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한 갈래를 또렷하게 드러내고, 그 관점에서 보이는 구조를 차분히 설명해 나가는 쪽으로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평은 정답을 알려주는 '답지'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지 '해설지'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평은 작가의 말을 옮겨 적는 대필과도 거리가 있다. 작가의 의도는 참고점으로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겠지만, 비평의 핵심은 작품과 세계 사이에서 형성되는 구조를 다른 시선으로 드러내는 데 있게 된다. 사용된 형식과 재료, 전시 방식, 작품이 놓인 사회적·역사적 환경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어떤 긴장과 의미가 생성되는지를 언어로 정리하는 작업이 비평의 몫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근거 없이 개념을 덧씌우거나, 작품과 무관한 이론을 끌어다 붙이는 과잉 해석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해석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가 작품을 지워버리는 순간, 비평은 오히려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 생산에 빠져들 수 있다. '내가 이만큼 해석했다'라는 해석의 크기가 아니라, 작품과 세계 사이에서 어떤 구조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가에 있다.
또 하나, 작가의 경력이나 인지도를 근거로 해석의 깊이를 미리 제한하는 관념 역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작가에게는 이 정도 수준의 해석은 과하다"라는 표현은, 작품을 일정한 성장 단계 안에 가두고 의미를 경력 연수에 맞춰 배분하려는 태도와 같다. 아직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 신진 작가의 작업에서도 충분히 복잡한 구조와 예리한 인식이 드러날 수 있고, 비평은 그 지점을 포착해 언어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혹여 작가가 보지 못한 부분이라도 말이다. 비평을 평가의 도구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를 보여주는 일로 이해할 때, 글은 작품의 '수준'을 재단하는 데 있지 않고, 작품이 드러내는 세계의 단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명하느냐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4.
사실, 오늘날의 비평가에게는 '수준'을 판단하거나 재단할 권한이 없다. 이 시대에 누가 판단의 권한을 쥐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 비평가보다는 별 다섯 개 아이콘과 알고리즘에게 있지 않을까. 영화, 전시, 책, 식당, 심지어 택시 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경험이 숫자와 한 줄 평으로 정리된다. OTT 플랫폼의 추천 목록, 포털 사이트의 평점, 배달 앱의 리뷰, 예매 사이트의 관람 후기가 하루에도 수없이 쌓이고 있다. 좋아요 개수와 조회 수, 구독자 수는 더 이상 부차적인 부가 정보가 아니라, 경험의 가치를 가늠하는 주된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딸깍' 한 번에 오늘의 문화생활과 소비 패턴을 일제히 정리하여 볼 수 있는 시대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상의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비평의 역할, 그러니까 '좋은지 나쁜지 가려주는 글'이라는 기능은 이미 다른 시스템에 의해 상당 부분 대체되었다. 빠르고 직관적인 수치와 그래프 앞에서, 비평이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려 할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장문의 글을 읽지 않아도 별점 평균과 상위 댓글만 훑으면 대략적인 평가가 파악되는데, 굳이 장문의 텍스트를 읽으라고 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평에게 꽤 노골적인 요구를 던지고 있다. 여전히 비평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의 이유는 더 이상 '판단을 내려준다'는 데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평가 시스템이 깔려 있는 환경에서 비평이 같은 역할을 반복한다면, 그 글은 느리고 효율적이지 못한 '리뷰'로 축소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별점과 랭킹이 이미 세상의 판결을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이 아직도 포청천 흉내를 내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평이 해야 할 일은 개작두를 대령할지, 호작두를 대령할지, 용작두를 대령할지 고민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비평은 더 이상 예술의 최종 판결문이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포청천과 같은 '엄근진'한 말투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비평의 난해함에 대해 말할 때, 문제의 출발점은 대개 '문체'라기보다 '관성'에 가까워 보인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글의 깊이가 자동으로 상승하는 것처럼 여겨져 온 오랜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복잡한 문장 구조와 낯선 개념은 어느 순간부터 전문성처럼 소비되었다. 읽기 어려운 글이 더 진지해 보이고, 이해하기 힘들수록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이상한 위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평이 누구나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다루는 형식과 구조는 낯설고 복잡할 때가 많다.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개념화와 구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어려운 말을 선택하는 태도이다. 다른 표현이 충분히 가능함에도 일부러 난해한 어휘와 문장 구조를 고집하는 경우, 그 어려움은 사유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문체의 관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복잡한 구조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개념을 그대로 옮겨 적는 대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시 생각해야 하고, 작품의 구체적인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문장을 짧게 유지하면서도 논리의 정확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 사람의 이해가 먼저 단단해져야 한다. 비평이 여전히 필요한 매체라면, 그 글은 최소한 읽힐 수 있는 형태를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5.
슬프게도 이 글은 화장실 소변기 위에 반으로 접힌 채 발견될 운명조차 갖지 못한다. 인쇄되는 글이 아니라, 모니터나 액정의 화면에만 떠다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변기에 앉아서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웹 브라우저의 즐겨 찾지 않는 즐겨찾기 항목 사이에 끼어 있다가 실수로 클릭되어 읽히든, 어떤 자세로 어떤 장소에서 읽히든지 간에, 어딘가에서 실제로 문장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글도 제 할 일을 한 번쯤은 한 셈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아직도 쓰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비평 씬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포부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공들여 쓴 대부분의 텍스트가 그때도 지금처럼 읽히지 않는 채 흘러가겠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어떤 문장에서 발을 멈추고, 그 문장을 매개로 작품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이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비평은 여전히 존재할 이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은 언제든 누군가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쓰이는 언어로 남아야 한다. 소변기 위에 놓인 리플릿을 손수 수거하면서도, 지금도 새로운 문장을 꾸역꾸역 눌러쓰는 이유는 그 가능성을 향해 글이 있기 때문이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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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전시장에서 글을 읽는 관객을 찾기가 어렵다. 전시장 벽면과 리플릿에는 열심히 고민한 문장들을 빼곡히 적어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을 따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벽면 텍스트는 한 번 눈으로 훑은 뒤, '뭔가가 적혀있구나' 정도에서 끝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작품만 향해 걸음을 옮긴다. 글은 분명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관람 동선에서는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다. 그래도 입구에서 나눠주는 리플릿은 중요한 도구처럼 느껴지긴 한다. 손에 들려 전시장 안으로 함께 들어오지만, 종이는 이내 반으로 접혀 가방 속으로 사라진다. '나우 유 씨 미(Now You See Me)'를 현실에서 보는 듯하다. 마술이 으레 그렇듯 사라진 것은 뜬금없는 곳에서 나타나야 더 놀라운 법, 사라진 리플릿은 놀랍게도 화장실에서 발견된다. 여자 화장실은 가보지 않아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위에 반으로 접힌 리플릿이 올려져 있다. 그 유명한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장 안으로 가져와 텍스트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도록 안배해 둔 가능성이 100여 년 뒤, 오늘에는 예술을 설명하려 애쓰는 텍스트가 소변기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뒤샹 때문에 어려워진 예술은 이제 해설 없이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고, 이를 위한 텍스트들이 결국 도착하는 자리는 다시 소변기가 되어버렸다.
텍스트가 이렇게 취급되고 있음에도, 전시가 열릴 때마다 글은 어김없이 생산된다. 읽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전시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처럼 말이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처럼 작품 옆에 있어야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비평 텍스트는 묘한 위치에 놓인다. 전시를 설명하고 사유를 확장하기 위해 쓰였지만 관람의 흐름 안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제도와 행정의 구조 안에서는 형식 요건을 채우는 문서처럼 다뤄진다. 결과적으로 비평은 '있어야 하니까 있는 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어쩌다 텍스트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비평이라는 형식이 애초에 어떤 역할을 맡도록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2.
‘비평’이라는 말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부터 그 안에 꽤 노골적인 기능이 들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크리티시즘(criticism)'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은 대상을 잘 살펴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르고, 추려내고, 판별한다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을 둘로 나누고,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행위가 언어의 시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같은 어근에서 나온 ‘크라이시스(krisis)’가 질병의 경과 속에서 생사가 결정되는 분기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은, 비평이라는 행위가 처음부터 진단과 선고의 이미지와 함께 태어났다는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비평은 애초부터 이해와 공감의 언어라기보다 평가와 판단의 언어였던 것이다. 무언가를 살펴보는 일보다 무엇이 더 낫고 옳은지, 어디까지가 기준 안에 들어오고 어디부터가 바깥으로 밀려나는지 선을 긋는 작업이 우선권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무거운 느낌과 함께 평가서와 같은 냄새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어 자체가 이미 가름과 서열, 판단의 기능을 안고 출발했기 때문에, 비평의 위치 역시 자연스럽게 판관으로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평이 이만큼이나 판단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모두 플라톤 탓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스승의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태도부터였던지 말이다. 어쨌든 가장 문제라 할 수 있는 이데아론은 태생부터 편가르기를 위해 태어났다. 플라톤에게 세계는 두 겹으로 나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 세계가 있고, 그 위에는 변하지 않는 참된 형상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현실의 모든 사물은 보이지 않는 원형을 불완전하게 흉내 내는 모사에 불과하다며 최초의 이상론자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게다가 이미 모방에 불과한 현실을 다시 베껴 그려내는 예술은 더 먼 자리로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진리에서 한 겹 떨어진 것이 아니라 두 겹이나 떨어져 있는 결과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위계 구조는 꽤 오래 이어졌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근거 없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의 꼭대기에 원형을 두고 나머지 것들의 위치를 차례로 배치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집요하게 반복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 비평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작품이 진리에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해 순서를 정하는 역할이다. 한 점의 그림을 두고도 비평가는 진리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포청천' 같은 인물이 된다. 누구의 작업이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지, 어떤 작품에게 '개작두'를 내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평이 설명이나 대화보다 판단과 선고의 말투를 먼저 습득하게 된 것은 다시 생각해 봐도 모두 플라톤 때문인 것 같다.
플라톤 이후 시간이 지나, 근대에 들어 예술이 독립된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도 이 위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설명하는 이론이 등장하고, 예술비평이 하나의 직업이자 전문 영역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비평가는 여전히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작품은 평가 대상이 되었고, 글은 그 평가를 정교하게 포장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좋은 작품'과 '덜 중요한 작품'을 나누고, 어떤 작업은 동시대의 핵심 경향으로, 어떤 작업은 주변부로 분류하는 것이 비평의 주요 역할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이때의 비평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권위였을 것이다. 비평이 설득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글과 구별되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난해한 개념어, 그 개념을 형용하기 위해 길게 이어 붙인 문장 구조,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중요할 것 같은 인물들의 인용들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비평의 언어는 점점 전문화되었고, 그 안에서 통용되는 어휘와 습관은 소수의 집단들만 이해하는 암호가 되었다. 그렇게 결국 비평 텍스트는 작품과 함께 놓여 있으면서도 관람자가 읽기에는 진입 장벽이 높은 글이 된 것이다. 글을 펼쳐 든 사람은 작품을 사유하기는커녕,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라는 자책과 먼저 마주하게 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가 실제로 그런 의도로 쓰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들리는 순간 비평은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답을 통보하는 폭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을 다시 묻는 질문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글을 더 어렵게 쓸 것인가, 덜 어렵게 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비평이 하나의 정답을 판결하는 언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작가의 의도, 작품의 형식, 관람자의 경험은 (대부분은) 하나의 문장 안에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해석이 동시에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독해가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평은 판단을 내려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이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글이어야 하지 않을까.
3.
이러한 비평의 방향성을 전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덧은 비평가의 위치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재료를 왜 선택했는지, 특정 장면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는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질문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을 둘러싼 인터뷰나 작업노트, 대화 속 발언들은 작품을 읽어 나가는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 같다. 문제는 이 나침반을 손에 쥐는 순간, 대다수가 그 방향으로 목적지를 굳혀 버린다는 데 있다. 의도는 단서를 풀기 위한 열쇠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 작품의 의미를 잠가 버리는 자물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생각으로 작업했다'라는 절대 권력의 문장이 등장하게 되면 다른 해석들은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사내는 세상 모든 작가들이 죽었다고 니체처럼 선언한 바 있다. 비약적으로 풀어내긴 했지만 사실 『저자의 죽음』은 작가는 죽었다거나 작가를 없애자는 급진적인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주인이 작가 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보는 관습을 해체해 보려 한 것이었다. 텍스트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완성된 순간부터는 작가의 손을 떠나고, 의미는 작가의 머릿속이 아니라 작품과 관객(감상)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시대와 맥락,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의미는 미리 정해져 있는 사전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가 만나는 순간마다 새로 갱신되는 사건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주체를 해체하는 일이지, 작가를 배제하거나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감상에 있어 작가의 의도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다만 그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정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라, 여러 해석 가능성 가운데 하나라는 축으로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비평은 작가의 말을 충실히 받아 적는 대필이 아니라, 의도와 텍스트, 읽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분기점을 탐색하는 글이 된다. 누가 '정답'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해석의 다른 길이 갈라지기 시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에서 작가의 말은 대개 작업의 출발점과 계기를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 특정 사건, 작업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같은 것들 말이다. 한편, 비평가의 글은 그와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작품을 어떤 이론적 틀 안에 배치하거나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려 한다. 반면 관객의 경험은 또 다른 측면에서 출발한다. 요즘 겪고 있는 생활의 피로, 뉴스에서 본 장면,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들이 작품과 연결되곤 하는 것이다. 같은 작품을 사이에 두고도, 작가의 말, 비평가의 문장, 관람자의 경험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는 것이다. 비평 텍스트가 모종의 작품을 어떤 담론의 끄트머리에 작품을 올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정작 작가는 "나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한다거나, 관객은 그 광경을 보며 “이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비난하는 장면이 어쩌면 오늘날 미술계의 풍경이 아닐까.
그런 불평에도 가장 먼저 흔들리는 쪽은 관객이다. 작가의 언어는 창작의 원천이라는 명분을 지니고 있고, 비평의 언어는 전문적인 해석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겠다.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 이 둘과 잘 겹치지 않을 때 가장 쉽게 '틀린' 쪽이 된다. 비평 텍스트의 난해한 문장과 익숙하지 않은 개념 앞에서, 관람자는 글이 과도하게 폐쇄적이라는 판단보다 '나는 글도 이해 못 하는 멍청이'라는 자책을 떠올리기 쉽다. 작품을 보며 분명 무언가를 느꼈음에도, 그 느낌이 작가의 의도, 혹은 비평의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감각이 미숙하거나 앎의 수준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의 언어는 이 구조 안에서 실패감을 생산한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관객은 글의 오류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의심하고, 그 의심이 반복될수록 텍스트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줄어든다.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를 만날 때마다 작은 상처가 남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상처를 피하는 편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읽기를 포기하는 쪽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라는 표현은 비평이 스스로 구축한 장벽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진짜 필요한 질문은 비평의 높은 장벽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가 아니다. 하나의 정답을 향해 세워진 구조 자체를 어떻게 돌려놓을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비평이 꼭 하나의 올바른 이해를 제시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 순간, 글은 판단문이 아니라 또 하나의 관점을 제안하는 것이 된다. 작품을 해석하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한 갈래를 또렷하게 드러내고, 그 관점에서 보이는 구조를 차분히 설명해 나가는 쪽으로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평은 정답을 알려주는 '답지'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지 '해설지'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평은 작가의 말을 옮겨 적는 대필과도 거리가 있다. 작가의 의도는 참고점으로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겠지만, 비평의 핵심은 작품과 세계 사이에서 형성되는 구조를 다른 시선으로 드러내는 데 있게 된다. 사용된 형식과 재료, 전시 방식, 작품이 놓인 사회적·역사적 환경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어떤 긴장과 의미가 생성되는지를 언어로 정리하는 작업이 비평의 몫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근거 없이 개념을 덧씌우거나, 작품과 무관한 이론을 끌어다 붙이는 과잉 해석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해석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가 작품을 지워버리는 순간, 비평은 오히려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 생산에 빠져들 수 있다. '내가 이만큼 해석했다'라는 해석의 크기가 아니라, 작품과 세계 사이에서 어떤 구조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가에 있다.
또 하나, 작가의 경력이나 인지도를 근거로 해석의 깊이를 미리 제한하는 관념 역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작가에게는 이 정도 수준의 해석은 과하다"라는 표현은, 작품을 일정한 성장 단계 안에 가두고 의미를 경력 연수에 맞춰 배분하려는 태도와 같다. 아직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 신진 작가의 작업에서도 충분히 복잡한 구조와 예리한 인식이 드러날 수 있고, 비평은 그 지점을 포착해 언어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혹여 작가가 보지 못한 부분이라도 말이다. 비평을 평가의 도구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를 보여주는 일로 이해할 때, 글은 작품의 '수준'을 재단하는 데 있지 않고, 작품이 드러내는 세계의 단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명하느냐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4.
사실, 오늘날의 비평가에게는 '수준'을 판단하거나 재단할 권한이 없다. 이 시대에 누가 판단의 권한을 쥐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 비평가보다는 별 다섯 개 아이콘과 알고리즘에게 있지 않을까. 영화, 전시, 책, 식당, 심지어 택시 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경험이 숫자와 한 줄 평으로 정리된다. OTT 플랫폼의 추천 목록, 포털 사이트의 평점, 배달 앱의 리뷰, 예매 사이트의 관람 후기가 하루에도 수없이 쌓이고 있다. 좋아요 개수와 조회 수, 구독자 수는 더 이상 부차적인 부가 정보가 아니라, 경험의 가치를 가늠하는 주된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딸깍' 한 번에 오늘의 문화생활과 소비 패턴을 일제히 정리하여 볼 수 있는 시대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상의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비평의 역할, 그러니까 '좋은지 나쁜지 가려주는 글'이라는 기능은 이미 다른 시스템에 의해 상당 부분 대체되었다. 빠르고 직관적인 수치와 그래프 앞에서, 비평이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려 할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장문의 글을 읽지 않아도 별점 평균과 상위 댓글만 훑으면 대략적인 평가가 파악되는데, 굳이 장문의 텍스트를 읽으라고 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평에게 꽤 노골적인 요구를 던지고 있다. 여전히 비평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의 이유는 더 이상 '판단을 내려준다'는 데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평가 시스템이 깔려 있는 환경에서 비평이 같은 역할을 반복한다면, 그 글은 느리고 효율적이지 못한 '리뷰'로 축소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별점과 랭킹이 이미 세상의 판결을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이 아직도 포청천 흉내를 내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평이 해야 할 일은 개작두를 대령할지, 호작두를 대령할지, 용작두를 대령할지 고민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비평은 더 이상 예술의 최종 판결문이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포청천과 같은 '엄근진'한 말투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비평의 난해함에 대해 말할 때, 문제의 출발점은 대개 '문체'라기보다 '관성'에 가까워 보인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글의 깊이가 자동으로 상승하는 것처럼 여겨져 온 오랜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복잡한 문장 구조와 낯선 개념은 어느 순간부터 전문성처럼 소비되었다. 읽기 어려운 글이 더 진지해 보이고, 이해하기 힘들수록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이상한 위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평이 누구나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다루는 형식과 구조는 낯설고 복잡할 때가 많다.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개념화와 구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어려운 말을 선택하는 태도이다. 다른 표현이 충분히 가능함에도 일부러 난해한 어휘와 문장 구조를 고집하는 경우, 그 어려움은 사유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문체의 관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복잡한 구조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개념을 그대로 옮겨 적는 대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시 생각해야 하고, 작품의 구체적인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문장을 짧게 유지하면서도 논리의 정확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 사람의 이해가 먼저 단단해져야 한다. 비평이 여전히 필요한 매체라면, 그 글은 최소한 읽힐 수 있는 형태를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5.
슬프게도 이 글은 화장실 소변기 위에 반으로 접힌 채 발견될 운명조차 갖지 못한다. 인쇄되는 글이 아니라, 모니터나 액정의 화면에만 떠다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변기에 앉아서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웹 브라우저의 즐겨 찾지 않는 즐겨찾기 항목 사이에 끼어 있다가 실수로 클릭되어 읽히든, 어떤 자세로 어떤 장소에서 읽히든지 간에, 어딘가에서 실제로 문장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글도 제 할 일을 한 번쯤은 한 셈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아직도 쓰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비평 씬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포부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공들여 쓴 대부분의 텍스트가 그때도 지금처럼 읽히지 않는 채 흘러가겠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어떤 문장에서 발을 멈추고, 그 문장을 매개로 작품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이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비평은 여전히 존재할 이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은 언제든 누군가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쓰이는 언어로 남아야 한다. 소변기 위에 놓인 리플릿을 손수 수거하면서도, 지금도 새로운 문장을 꾸역꾸역 눌러쓰는 이유는 그 가능성을 향해 글이 있기 때문이다.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