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는 안 되겠죠, 엄마?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슛돌아~!”
어린 시절, 〈축구왕 슛돌이〉란 TV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독수리 슛’, ‘도깨비 슛’ 등 공인구가 남아나지 않을 탈인간적 슈팅 연출이 압권이던 기억이다. 어린 맘에도 축구 컨셉의 서커스단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그보다 놀란 건 주인공의 이름. 본명이 ‘강슛돌’이었다. 임무, 역할, 대략적인 포지션까지 못 박은바, 아버님 강 모 씨는 아마 중증 축구광이셨을 거로 가늠한다. 심지어 작중 부부 동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슛돌이는 언감생심 골키퍼 같은 건 꿈도 못 꿀 고아가 된다.
천형과도 같은 석 자 ‘강슛돌’. 브라운관 너머로 북받치는 사명감. 공이 없어도, 프리킥 준비 중인 상대에게도, 감독이 되어도 양복에 구둣발로 슛을 해야 할 것 같은 그를 보며 어렴풋이 난 절감했다. 명명의 힘을. 제아무리 당당해도 의지와 늘 별개로 존재하는 음성 언어의 위력을. 그래, 눈뜬 건 아마 그때쯤인 모양이다. 칼끝보다 매서운 게 말끝, 서릿발보다 시린 게 글발임을. 칼 대신 펜 든 백정임을 잊지 말고 늘 새겨야 함을. 그 기억에 기대어 내 글의 본분을 새삼 되짚어본다.
1. 조연
출사표가 만고의 명문인들 제갈공명을 대문호라 칭하진 않는다. 목적이 또렷한 표문(表文)이니까. 문장 곳곳에 문학적 비장과 숭고, 우아가 반짝인다고 문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시 서문이나 작업 평론은 문학 작품과는 다르다. 문장이 제아무리 눈부셔도 이태백이나 셰익스피어가 될 순 없다. 되어서도 안 되고. 미술씬의 글꾼들은 완결된 예술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의 쓰임이 곧 동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쓸모 있는 글을 쓸 뿐이다. 근사하기까지하면 금상첨화이다. 그러나 작품이나 전시보다 근사하려 들면 우습다. 앞서 펜 든 백정이라 했다. 독자/관객 일반에게 ‘작가’나 ‘전시’란 통째로 내걸린 소 한 마리와 같다. 큰 뼈를 따라 덩어리를 가르고, 질긴 막을 치고, 담백한 부위부터 맛이 진한 부위까지 점층해 도린다. 기호에 맞게 각자 양념과 부재료를 곁들이더라도, 그에 앞서 큰길을 터 주어야 소를 오롯이 즐긴다. 서툰 칼질은 고기를 짓이기고 가죽에 구멍을 낸다. 구조를 훤히 꿰어야 탐스러운 살을 바르고 신묘한 뼈대를 온전히 들춘다. 재료를 망치지 않는 건 물론이요, 맛을 놓치지 않게 부위를 제대로 비추고 짚어내야 한다. 고기 맛보러 온 이들에게 칼맛 자랑하지 않는 게 첫 번째 미덕이다.
휘황한 미사여구, 맛깔나는 글발(?), 천지개벽할 전개, 벼린 칼날 같은 예리함...글의 인상이나 문체, 표현이 관건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눈부셔도 얼마든지 조연 노릇을 할 수 있다. 스스로 빛나는 조명은 그 자체로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멀리서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미 밝은 걸 또 밝히면 낭비이고, 제멋에 겨워 사방 천지 눈부시면 정작 뵈는 게 없으며, 독불장군 쇠고집에 엉뚱한 곳만 골라 비추면 그저 혼란스럽다. 반면 어두컴컴해 도무지 짚이지 않을 때,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은 면을 빛으로 불쑥 쑤실 때, 특정 파장을 받아 숨은 요소가 드러날 때 그 역할과 진가를 발휘한다. 즉 조명의 크기나 생김새, 브랜드보단, 위치와 방향, 의도가 관건. 글 또한 그러하다.
글과 그림의 구분은 엄밀할 수 없다? 모닥불 모양을 본떠 갑골문자를 거쳐 오늘날의 ‘火‘자로 변천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발생상의 비분절성과, 양자의 지향점을 혼동해선 안된다. 말과 글이 엄연히 다름에도 여기서 논하는 오늘날의 ‘글’은 사실상 음성언어에 대응하는 반면, 그림을 필두로 한 좁은 의미의 ‘시각언어‘는 비음성언어이다. 편하게 글과 그림으로 양분해, 그림이 직관적이라면 글은 상대적으로 논리적이고 보편적이다. 그 태생부터, 현상과 사고를 축약/기록/전달/해석/공유할 목적으로 고안한 일종의 소통 지도이니까. 필연적으로 고도화, 추상화, 분절화해 극한의 지시성과 효율을 지닌다. 또한 긴 세월 뭇사람을 타며 숱하게 정제한 약속 체계의 일종으로, 사회에 속하면 다짜고짜 주입받는다(이것도 선후가 뒤바뀐 이야기이고, 애초 대표적인 사회화 도구이다). 한 덩이 진리도 쪼개고 뒤집고 부수어, 서로 겹치지 않게 훑으려 저마다 힘쓰고 용쓰고 악쓰는 ‘그림’과는 종이 다르다. 말하자면 글은 수억의 불더미를 한 점에 모으고, 그림은 불더미 하나를 수억 갈래로 깬다. 그리고 그 두 청개구리의 밀당에서, 글과 그림의 상호 보완이 발생한다. 누가 누굴 중점적으로 보완할는지는 배역에 달렸다. 이번엔 누가 주인공이고 또 조연인지 말이다. 부가적인 창작성을 따지기 전에, 톨스토이 문학전집의 삽화와, (삽화가로 일했던)알폰스 무하 개인전 글월의 구분점은 다름 아닌 바로 그곳이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속성이 아니라 배역이다. 조연 맡기로 한 계약 말이다, 계약.
실천하는 길을 하나 꼽자면 바로, ‘노력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이는 좋은 글의 요건(좋은 글 이야기는 따로 한 편 쓸까 싶다)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목적이나 용도와 직결한다. 조연이다. 해석에 허비할 에너지가 없다. 주인공, 즉 작가나 작업 혹은 전시에 몰입할 에너지도 모자란 판에, 조력자라고 등장한 글까지 발목 잡다니 가당키나 한가. 저항을 보탤 게 아니라 저항할 새 없이 들어와 뇌리에 꽂히고 가슴에 박혀야 한다. 위력을 떠나, 그게 역할과 본분을 다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2. 구태의연한 거 하나만
하나만 한다. 작가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대변하겠다는 건 오만이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를 포함해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다 설명되는 작가, 다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면 뭐 하러 작업실을 차리고 물감을 쥐어짜며 자원 낭비를 할까? 그냥 그 글 하나로 만사형통인데. 무리해 만사형통을 노리면 똥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종종 봤을, 이름값 대비 시원찮은 글은 십중팔구 여기에 걸쳐 있다. 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펜에 힘을 주는 것. 작고 좁은 건 미덕이다. 줄이고 좁혀야 비로소 내 시야, 내 관점이다. 접점이 많되 안 겹쳐야 진정한 내 연구이다. 논문뿐만 아니라 여느 글, 그림, 전시 다 마찬가지이다. 지엽적, 국지적, 말초적인 각론이 총론과 접점을 유지할 때,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통찰이다.
흠잡을 데 없이 잘 쓸 필요도 없다. 글이 없을 때보다 어딘가 더 나으면 된다. 낫게 하는 방법은, 이미 살핀 대로 수도 없이 많다. 행간을 건들거나, 뻔한 것의 이면을 슬쩍 들추거나, 아직 주목받지 못한 것을 괜히 크게 소리쳐 불러도 좋다. 근데 다 하면 망한다. 나는 이걸 잊지 않으려 가장 애쓴다. 바보처럼 자꾸 까먹고, 이거저거 건들며 쓸데없이 더 잘 쓰려 들다 간신히 지운 게 이 글에서만 수십 문장이다.
아예 새로운 건 없다. 여기에 더해 새롭고 참신하려는 강박도 덧없다. 가장 큰 이유는 여태 살핀 내용들이 따지고 보면 사실 ‘새롭고 참신한 실전 글쓰기’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작가, 몇 번이고 출품한 작업, 어디서 본 듯한 조합, 뻔한 기획, 식상한 담론 모두 좋은 재료이다. ‘문제에 답이 있다’라는 학창 시절 명언을 되짚자. ‘색다른 구태의연’만큼 사람을 놀라고 기쁘게 하는 것도 없다. 안다고 믿던 것, 뻔하게 치던 것을 살짝 비틀 때가, 우리 우주 너머를 논할 때보다도 더 강렬하다. 각자 셀 수 없는 우주를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전에 이 우주의 속성이 애초 그러하다. 심지어 아무나 흔히 떠올릴 무언가를 ‘굳이 크게 소리쳐 불러 주는 일’조차 참신하다. 그런 것일수록 서로 눈치 보고 체면 차리다 여태 아무도 못 떠들던 것이다.
3. 착각 금지, 혼동 금지
슛돌이 가라사대, 칼끝보다 매서운 게 말끝이라 했다. 혹자는 오만과 아집을 매서움으로 착각한다. 단단한 껍질과 뒤엉긴 불순물을 손질해 먹기 좋게 차려내는 게 아니라, 작품을 난도질해 피투성이로 만든다. 글은 살인자가 아닌 요리사의 칼이다. 작가와 작업이 아니라 그 껍질과 불순물에 날을 세워야 옳다. 작품 비판과 작가 비하는 다르다.
또 서릿발보다 시린 게 글발이라 했다. 눈치 주고 찬물 끼얹어 위신을 세우란 게 아니다. 뜨거운 예술가의 열정과 관객의 흥분이 뒤엉켜 폭주할 때, 객관과 환기와 논리로 식혀 균형을 잡는 게 글의 본분이다.
쓰다 보니 한편으론 ‘독자/관객 친화적 실용주의’ 운동가가 된 기분이다. 그조차 경계해야 한다. 관객에게 친절한 것과 단순화 우민화하는 것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면을 조명하는 것과 의미를 지어내는 것은 발견과 발명만큼이나 다르다. 물론 대상을 보조/보완하는 글이 완결성을 얻어 마치 주객전도한 예술 작품처럼 부상하는 방식의 창작도, 창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럴 의도나 목적이 명백히 아님에도 결과가 그러하다면, 그건 실패이다. 의도 없는 기획은 없다. 의도가 없는 의도의 기획은 있어도. 그리고 이 ‘지킬 선’은 뻔한 게 무색하게 쉼 없이 까먹는다. 정상이다. 글마다 날마다 꼬박꼬박 되새겨야 지킬까 말까다. 얼마나 좋은가. 같은 거 또 쓰고 같은 말 또 해도 “유레카!”, 매일 다들 새로워해 주니.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골키퍼…는 안 되겠죠, 엄마?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슛돌아~!”
어린 시절, 〈축구왕 슛돌이〉란 TV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독수리 슛’, ‘도깨비 슛’ 등 공인구가 남아나지 않을 탈인간적 슈팅 연출이 압권이던 기억이다. 어린 맘에도 축구 컨셉의 서커스단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그보다 놀란 건 주인공의 이름. 본명이 ‘강슛돌’이었다. 임무, 역할, 대략적인 포지션까지 못 박은바, 아버님 강 모 씨는 아마 중증 축구광이셨을 거로 가늠한다. 심지어 작중 부부 동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슛돌이는 언감생심 골키퍼 같은 건 꿈도 못 꿀 고아가 된다.
천형과도 같은 석 자 ‘강슛돌’. 브라운관 너머로 북받치는 사명감. 공이 없어도, 프리킥 준비 중인 상대에게도, 감독이 되어도 양복에 구둣발로 슛을 해야 할 것 같은 그를 보며 어렴풋이 난 절감했다. 명명의 힘을. 제아무리 당당해도 의지와 늘 별개로 존재하는 음성 언어의 위력을. 그래, 눈뜬 건 아마 그때쯤인 모양이다. 칼끝보다 매서운 게 말끝, 서릿발보다 시린 게 글발임을. 칼 대신 펜 든 백정임을 잊지 말고 늘 새겨야 함을. 그 기억에 기대어 내 글의 본분을 새삼 되짚어본다.
1. 조연
출사표가 만고의 명문인들 제갈공명을 대문호라 칭하진 않는다. 목적이 또렷한 표문(表文)이니까. 문장 곳곳에 문학적 비장과 숭고, 우아가 반짝인다고 문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시 서문이나 작업 평론은 문학 작품과는 다르다. 문장이 제아무리 눈부셔도 이태백이나 셰익스피어가 될 순 없다. 되어서도 안 되고. 미술씬의 글꾼들은 완결된 예술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의 쓰임이 곧 동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쓸모 있는 글을 쓸 뿐이다. 근사하기까지하면 금상첨화이다. 그러나 작품이나 전시보다 근사하려 들면 우습다. 앞서 펜 든 백정이라 했다. 독자/관객 일반에게 ‘작가’나 ‘전시’란 통째로 내걸린 소 한 마리와 같다. 큰 뼈를 따라 덩어리를 가르고, 질긴 막을 치고, 담백한 부위부터 맛이 진한 부위까지 점층해 도린다. 기호에 맞게 각자 양념과 부재료를 곁들이더라도, 그에 앞서 큰길을 터 주어야 소를 오롯이 즐긴다. 서툰 칼질은 고기를 짓이기고 가죽에 구멍을 낸다. 구조를 훤히 꿰어야 탐스러운 살을 바르고 신묘한 뼈대를 온전히 들춘다. 재료를 망치지 않는 건 물론이요, 맛을 놓치지 않게 부위를 제대로 비추고 짚어내야 한다. 고기 맛보러 온 이들에게 칼맛 자랑하지 않는 게 첫 번째 미덕이다.
휘황한 미사여구, 맛깔나는 글발(?), 천지개벽할 전개, 벼린 칼날 같은 예리함...글의 인상이나 문체, 표현이 관건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눈부셔도 얼마든지 조연 노릇을 할 수 있다. 스스로 빛나는 조명은 그 자체로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멀리서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미 밝은 걸 또 밝히면 낭비이고, 제멋에 겨워 사방 천지 눈부시면 정작 뵈는 게 없으며, 독불장군 쇠고집에 엉뚱한 곳만 골라 비추면 그저 혼란스럽다. 반면 어두컴컴해 도무지 짚이지 않을 때,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은 면을 빛으로 불쑥 쑤실 때, 특정 파장을 받아 숨은 요소가 드러날 때 그 역할과 진가를 발휘한다. 즉 조명의 크기나 생김새, 브랜드보단, 위치와 방향, 의도가 관건. 글 또한 그러하다.
글과 그림의 구분은 엄밀할 수 없다? 모닥불 모양을 본떠 갑골문자를 거쳐 오늘날의 ‘火‘자로 변천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발생상의 비분절성과, 양자의 지향점을 혼동해선 안된다. 말과 글이 엄연히 다름에도 여기서 논하는 오늘날의 ‘글’은 사실상 음성언어에 대응하는 반면, 그림을 필두로 한 좁은 의미의 ‘시각언어‘는 비음성언어이다. 편하게 글과 그림으로 양분해, 그림이 직관적이라면 글은 상대적으로 논리적이고 보편적이다. 그 태생부터, 현상과 사고를 축약/기록/전달/해석/공유할 목적으로 고안한 일종의 소통 지도이니까. 필연적으로 고도화, 추상화, 분절화해 극한의 지시성과 효율을 지닌다. 또한 긴 세월 뭇사람을 타며 숱하게 정제한 약속 체계의 일종으로, 사회에 속하면 다짜고짜 주입받는다(이것도 선후가 뒤바뀐 이야기이고, 애초 대표적인 사회화 도구이다). 한 덩이 진리도 쪼개고 뒤집고 부수어, 서로 겹치지 않게 훑으려 저마다 힘쓰고 용쓰고 악쓰는 ‘그림’과는 종이 다르다. 말하자면 글은 수억의 불더미를 한 점에 모으고, 그림은 불더미 하나를 수억 갈래로 깬다. 그리고 그 두 청개구리의 밀당에서, 글과 그림의 상호 보완이 발생한다. 누가 누굴 중점적으로 보완할는지는 배역에 달렸다. 이번엔 누가 주인공이고 또 조연인지 말이다. 부가적인 창작성을 따지기 전에, 톨스토이 문학전집의 삽화와, (삽화가로 일했던)알폰스 무하 개인전 글월의 구분점은 다름 아닌 바로 그곳이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속성이 아니라 배역이다. 조연 맡기로 한 계약 말이다, 계약.
실천하는 길을 하나 꼽자면 바로, ‘노력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이는 좋은 글의 요건(좋은 글 이야기는 따로 한 편 쓸까 싶다)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목적이나 용도와 직결한다. 조연이다. 해석에 허비할 에너지가 없다. 주인공, 즉 작가나 작업 혹은 전시에 몰입할 에너지도 모자란 판에, 조력자라고 등장한 글까지 발목 잡다니 가당키나 한가. 저항을 보탤 게 아니라 저항할 새 없이 들어와 뇌리에 꽂히고 가슴에 박혀야 한다. 위력을 떠나, 그게 역할과 본분을 다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2. 구태의연한 거 하나만
하나만 한다. 작가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대변하겠다는 건 오만이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를 포함해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다 설명되는 작가, 다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면 뭐 하러 작업실을 차리고 물감을 쥐어짜며 자원 낭비를 할까? 그냥 그 글 하나로 만사형통인데. 무리해 만사형통을 노리면 똥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종종 봤을, 이름값 대비 시원찮은 글은 십중팔구 여기에 걸쳐 있다. 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펜에 힘을 주는 것. 작고 좁은 건 미덕이다. 줄이고 좁혀야 비로소 내 시야, 내 관점이다. 접점이 많되 안 겹쳐야 진정한 내 연구이다. 논문뿐만 아니라 여느 글, 그림, 전시 다 마찬가지이다. 지엽적, 국지적, 말초적인 각론이 총론과 접점을 유지할 때,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통찰이다.
흠잡을 데 없이 잘 쓸 필요도 없다. 글이 없을 때보다 어딘가 더 나으면 된다. 낫게 하는 방법은, 이미 살핀 대로 수도 없이 많다. 행간을 건들거나, 뻔한 것의 이면을 슬쩍 들추거나, 아직 주목받지 못한 것을 괜히 크게 소리쳐 불러도 좋다. 근데 다 하면 망한다. 나는 이걸 잊지 않으려 가장 애쓴다. 바보처럼 자꾸 까먹고, 이거저거 건들며 쓸데없이 더 잘 쓰려 들다 간신히 지운 게 이 글에서만 수십 문장이다.
아예 새로운 건 없다. 여기에 더해 새롭고 참신하려는 강박도 덧없다. 가장 큰 이유는 여태 살핀 내용들이 따지고 보면 사실 ‘새롭고 참신한 실전 글쓰기’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작가, 몇 번이고 출품한 작업, 어디서 본 듯한 조합, 뻔한 기획, 식상한 담론 모두 좋은 재료이다. ‘문제에 답이 있다’라는 학창 시절 명언을 되짚자. ‘색다른 구태의연’만큼 사람을 놀라고 기쁘게 하는 것도 없다. 안다고 믿던 것, 뻔하게 치던 것을 살짝 비틀 때가, 우리 우주 너머를 논할 때보다도 더 강렬하다. 각자 셀 수 없는 우주를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전에 이 우주의 속성이 애초 그러하다. 심지어 아무나 흔히 떠올릴 무언가를 ‘굳이 크게 소리쳐 불러 주는 일’조차 참신하다. 그런 것일수록 서로 눈치 보고 체면 차리다 여태 아무도 못 떠들던 것이다.
3. 착각 금지, 혼동 금지
슛돌이 가라사대, 칼끝보다 매서운 게 말끝이라 했다. 혹자는 오만과 아집을 매서움으로 착각한다. 단단한 껍질과 뒤엉긴 불순물을 손질해 먹기 좋게 차려내는 게 아니라, 작품을 난도질해 피투성이로 만든다. 글은 살인자가 아닌 요리사의 칼이다. 작가와 작업이 아니라 그 껍질과 불순물에 날을 세워야 옳다. 작품 비판과 작가 비하는 다르다.
또 서릿발보다 시린 게 글발이라 했다. 눈치 주고 찬물 끼얹어 위신을 세우란 게 아니다. 뜨거운 예술가의 열정과 관객의 흥분이 뒤엉켜 폭주할 때, 객관과 환기와 논리로 식혀 균형을 잡는 게 글의 본분이다.
쓰다 보니 한편으론 ‘독자/관객 친화적 실용주의’ 운동가가 된 기분이다. 그조차 경계해야 한다. 관객에게 친절한 것과 단순화 우민화하는 것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면을 조명하는 것과 의미를 지어내는 것은 발견과 발명만큼이나 다르다. 물론 대상을 보조/보완하는 글이 완결성을 얻어 마치 주객전도한 예술 작품처럼 부상하는 방식의 창작도, 창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럴 의도나 목적이 명백히 아님에도 결과가 그러하다면, 그건 실패이다. 의도 없는 기획은 없다. 의도가 없는 의도의 기획은 있어도. 그리고 이 ‘지킬 선’은 뻔한 게 무색하게 쉼 없이 까먹는다. 정상이다. 글마다 날마다 꼬박꼬박 되새겨야 지킬까 말까다. 얼마나 좋은가. 같은 거 또 쓰고 같은 말 또 해도 “유레카!”, 매일 다들 새로워해 주니.
2026.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