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 시간에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라는 주문이 끝날 때 쯤이면, 어김없이 '다음 이 시간에'라는 자막이 TV화면 한 켠을 차지했다. 그것은 절대 깨질 수 없는 우리의 굳건한 약속이었다. 내일 혹은 다음 주의 같은 시간에 어제의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증표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다음 날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다가도, 밥 먹으라는 절대자의 호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친절한 약속은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그 약속의 실종은 훨씬 더 거대한 붕괴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세상을 설명해주던 종교나 이데올로기,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동체의 신화 같은 거대한 이야기들마저 비슷한 운명을 맞이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스크롤을 내리다 우연히 마주친 30초짜리 요약본으로 어제의 이야기를 대체하고,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무수한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길을 잃는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중심은, 어쩌면 거대 서사와 일상의 서사가 모두 스킵되며 희미해지는 크고 작은 화면 안으로 이주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이 시간에'라는 약속을 믿던 소년은 언젠가부터 사라진 그 약속을, 이주된 그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기다리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된 김동훈은 군중 속 익명의 얼굴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의 행동과 같이 서사가 증발해버린 현실의 단면을 마치 미완으로 끝난 이야기의 잃어버린 페이지를 찾듯 집요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비어있는 페이지에 '상상'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슬쩍 끼워 넣는다. 이처럼 사라진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가는 행위는 주어진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다시 읽고 재배치하는 해석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훈은 '실제로는 어땠을까?'라는 관찰과 '어쩌면 이렇지 않았을까?'라는 상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2.
파편만 남은 세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김동훈은 '정확한 독해'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오히려 작가는 현실을 대놓고 '의도된 오독'을 시도한다. 작가는 서사가 파악되지 않는 장면 앞에서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그 안의 단서들을 낚아채 자신만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것이다. 작가에게 오독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현실의 조각들을 어떻게든 자신만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예술적 실천이다.
그 실천은 구체적인 제목을 통해 이미지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예컨대, <토요일늦은점심시간밖에는비가많이와>라는 작품은 누워있는 남녀의 이미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규정하지 않고 특정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질문을 유도한다. 이렇게 제목과 이미지를 결합하여 이야기의 여지를 여는 동시에, 작가는 이미지 자체를 과감하게 변형시킨다. 작가의 작업에서 왜곡은 비틀린 현실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면의 진실을 포착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로써 작동한다.
<아픔 잊고 춤을 추는 사람들>에서 처럼,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결핍된 존재들이지만, 클럽이나 페스티벌에서의 사람들은 현실의 모든 것을 잊은 듯 격렬하게 춤을 추며 몸부림친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을 해방의 순간으로 본 것은 아닐까. 혹은 그들의 춤사위가 어떤 유희가 아니라, 아픔을 이겨내려는 생명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김동훈에게 ‘오독’은 오류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맥락을 제시하고, 이미지의 왜곡을 통해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포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혼자만 알고 있는 숨겨진 진실처럼, 누구나 이불킥하게 만드는 흑역사나 이유 모를 불안 하나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살고 있다.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일지도 모른다. 김동훈의 작업 또한 바로 그 남사스러운 감정, '불안'을 동력으로 비롯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사실은 동시대인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각, 아니 시대와 세대를 막론한 ‘인류의 숙제’로 아직도 풀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게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보편적인 숙제를 다뤄 왔었다. 친척 집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따라간 미술학원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빈 도화지를 얻게 된 것이다. 눈치 보던 아이에게 도화지는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으며, 그림은 아이만의 생존술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생존술은, 이제 작가만의 고유한 예술적 태도로 자리 잡았다. 그의 예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기 보다는, 그것을 작업의 재료로 삼아 다른 형태로 전환시키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이 감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장된 장면들은 '불안'이라는 감정이 다른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결과물인 셈이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는 자전적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해석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의도된 오독'은, 바로 이 감정을 전환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도구가 되는 셈이다. 풀어내자면, 김동훈의 작업은 '나는 불안하다'와 같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는 이 보편적인 불안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시대와 인류를 향한 하나의 예술적 제안으로 나아가고 있다.
4.
그래서 김동훈의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유의미한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 서점에서는 '서사의 위기'를 논하는 책들이 팔리고, 스마트폰에서는 바로 그 위기의 증거인 이미지 파편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시대에, 작가는 홀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사의 위기와 제공하는 이미지의 단편들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상상을 통해 능동적으로 재배열하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파편을 연결하고 단서를 새롭게 배치하는 그의 태도는 완결된 이야기가 부재하는 시대에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태도와 시도는 작가의 회화에서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해석의 기술이 된다. 그 해석의 과정은 불안과 파편이라는 부정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긍정의 서사로 수렴하는 방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사회적 단절이나 개인의 불안을 해석 가능한 형태의 서사로 바꾸어냄으로써, 예술이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고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예술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미화나 맹목적인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예술적 실천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며, 이는 일종의 ‘해석의 윤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김동훈의 회화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태도의 가치에 있다. 물론 여기에 관객의 오독도 포함하여서 말이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다음 이 시간에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라는 주문이 끝날 때 쯤이면, 어김없이 '다음 이 시간에'라는 자막이 TV화면 한 켠을 차지했다. 그것은 절대 깨질 수 없는 우리의 굳건한 약속이었다. 내일 혹은 다음 주의 같은 시간에 어제의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증표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다음 날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다가도, 밥 먹으라는 절대자의 호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친절한 약속은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그 약속의 실종은 훨씬 더 거대한 붕괴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세상을 설명해주던 종교나 이데올로기,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동체의 신화 같은 거대한 이야기들마저 비슷한 운명을 맞이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스크롤을 내리다 우연히 마주친 30초짜리 요약본으로 어제의 이야기를 대체하고,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무수한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길을 잃는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중심은, 어쩌면 거대 서사와 일상의 서사가 모두 스킵되며 희미해지는 크고 작은 화면 안으로 이주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이 시간에'라는 약속을 믿던 소년은 언젠가부터 사라진 그 약속을, 이주된 그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기다리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된 김동훈은 군중 속 익명의 얼굴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의 행동과 같이 서사가 증발해버린 현실의 단면을 마치 미완으로 끝난 이야기의 잃어버린 페이지를 찾듯 집요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비어있는 페이지에 '상상'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슬쩍 끼워 넣는다. 이처럼 사라진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가는 행위는 주어진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다시 읽고 재배치하는 해석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훈은 '실제로는 어땠을까?'라는 관찰과 '어쩌면 이렇지 않았을까?'라는 상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2.
파편만 남은 세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김동훈은 '정확한 독해'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오히려 작가는 현실을 대놓고 '의도된 오독'을 시도한다. 작가는 서사가 파악되지 않는 장면 앞에서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그 안의 단서들을 낚아채 자신만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것이다. 작가에게 오독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현실의 조각들을 어떻게든 자신만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예술적 실천이다.
그 실천은 구체적인 제목을 통해 이미지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예컨대, <토요일늦은점심시간밖에는비가많이와>라는 작품은 누워있는 남녀의 이미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규정하지 않고 특정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질문을 유도한다. 이렇게 제목과 이미지를 결합하여 이야기의 여지를 여는 동시에, 작가는 이미지 자체를 과감하게 변형시킨다. 작가의 작업에서 왜곡은 비틀린 현실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면의 진실을 포착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로써 작동한다.
<아픔 잊고 춤을 추는 사람들>에서 처럼,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결핍된 존재들이지만, 클럽이나 페스티벌에서의 사람들은 현실의 모든 것을 잊은 듯 격렬하게 춤을 추며 몸부림친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을 해방의 순간으로 본 것은 아닐까. 혹은 그들의 춤사위가 어떤 유희가 아니라, 아픔을 이겨내려는 생명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김동훈에게 ‘오독’은 오류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맥락을 제시하고, 이미지의 왜곡을 통해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포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혼자만 알고 있는 숨겨진 진실처럼, 누구나 이불킥하게 만드는 흑역사나 이유 모를 불안 하나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살고 있다.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일지도 모른다. 김동훈의 작업 또한 바로 그 남사스러운 감정, '불안'을 동력으로 비롯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사실은 동시대인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각, 아니 시대와 세대를 막론한 ‘인류의 숙제’로 아직도 풀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게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보편적인 숙제를 다뤄 왔었다. 친척 집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따라간 미술학원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빈 도화지를 얻게 된 것이다. 눈치 보던 아이에게 도화지는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으며, 그림은 아이만의 생존술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생존술은, 이제 작가만의 고유한 예술적 태도로 자리 잡았다. 그의 예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기 보다는, 그것을 작업의 재료로 삼아 다른 형태로 전환시키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이 감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장된 장면들은 '불안'이라는 감정이 다른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결과물인 셈이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는 자전적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해석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의도된 오독'은, 바로 이 감정을 전환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도구가 되는 셈이다. 풀어내자면, 김동훈의 작업은 '나는 불안하다'와 같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는 이 보편적인 불안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시대와 인류를 향한 하나의 예술적 제안으로 나아가고 있다.
4.
그래서 김동훈의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유의미한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 서점에서는 '서사의 위기'를 논하는 책들이 팔리고, 스마트폰에서는 바로 그 위기의 증거인 이미지 파편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시대에, 작가는 홀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사의 위기와 제공하는 이미지의 단편들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상상을 통해 능동적으로 재배열하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파편을 연결하고 단서를 새롭게 배치하는 그의 태도는 완결된 이야기가 부재하는 시대에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태도와 시도는 작가의 회화에서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해석의 기술이 된다. 그 해석의 과정은 불안과 파편이라는 부정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긍정의 서사로 수렴하는 방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사회적 단절이나 개인의 불안을 해석 가능한 형태의 서사로 바꾸어냄으로써, 예술이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고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예술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미화나 맹목적인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예술적 실천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며, 이는 일종의 ‘해석의 윤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김동훈의 회화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태도의 가치에 있다. 물론 여기에 관객의 오독도 포함하여서 말이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