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묘의 기술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우리는 허구의 안전망 뒤에서 비로소 안심하고 타인의 비극을 응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영화의 쿠키를 끝으로 그 모든 처절한 고통이 나의 현실이 아님을 확인한다. 허구는 세상을 비추는 창이라기보다 진실이 나를 덮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투명한 막에 가깝다. 우리는 그 ‘가짜’라는 확신이 주는 지독하고도 자비로운 안도감에 기대어, 타인의 지옥을 풍경처럼 누린다. 이 기이한 향유는 재난의 풍경 앞에서 더욱 은밀해진다. 거대한 불길이나 도시를 삼키는 해일은 그 참혹함에도, 기묘한 숭고미를 풍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오직 ‘미적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만 허락되는 환상이다. 내 발밑이 무너지고 있지 않다는 고요한 확신이 전제될 때, 재난은 감상의 대상인 예술이 된다. 우리는 타인의 종말을 프레임이라는 방패 뒤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미처 전원을 끄지 못하고 가버린 온열 침대의 빈자리, 그리고 서서히 식어가던 자리의 열기와 눈앞에 보이는 빈 무덤. 이러한 경험을 한 이 기간의 일들은 그전까지 제가 관념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한국의 오래된 전통인 이 빈 무덤, 허묘라는 것이 나를 대신하여 존재하는 자리로 작동한다는 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나는 이미 무덤에 그러니까 죽음에 있다고 그 저승사자를 속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무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밤에 자기 전에 자리에 누우면서 낮에 봤던 무덤을 생각해 보고, 제가 그 무덤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니까 뭔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를 바꿔치기 하는 그래서 대리 좌표를 만드는 공간 기술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허묘를 한국적인 맥락에서 오래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던 초기 버전의 메타버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영주 작가의 말이다. 그의 <허묘> 작업은 이 ‘대리 좌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비어 있는 성소의 실체. 대리 좌표로서의 빈 무덤, 헛것으로서 존재하는 허묘는 무엇일까. 허묘는 빌 허(虛), 무덤 묘(墓). 즉,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빈 무덤'을 뜻한다.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상태로 조성된 묘를 말한다.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전사, 실종, 익사 등으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을 때, 고인의 유품이나 머리카락을 대신 묻어 넋을 기리기도 한다. 허묘와 달리 가묘는 살아생전에 미리 자리를 잡아 놓은 무덤을 의미한다. 민간 신앙에서는 병약한 사람의 액운을 막기 위해 가짜 무덤을 만들어 ‘이미 죽은 사람’처럼 꾸며 저승사자를 속인다는 주술적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image.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임영주 작가 파트 전시 전경
이렇게 허구의 실체가 믿음이 될 때가 있다.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이다. 나아가 허구가 실재를 완벽히 가리면, 허구는 이제 더 이상 가짜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유일한 바닥, 땅이 된다. 망각은 허구를 진실로 격상시키는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는 허구가 가짜임을 잊기 위해 그것에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허묘가 무덤이 되는 것은 그 아래 시신이 누워 있어서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이 부재의 공포를 잊기 위해 그 빈 공간을 믿음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결국,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허구 위에 지어 올린 견고한 성벽인 셈이다. 임영주의 ‘한국의 휴전 상태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또 다른 말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이 묘하다. 진실을 잊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을 덮는 허구가 생존 조건이 된다.
임영주는 이 허묘적 상태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감각임을 나직이 폭로한다. 그는 한국인들이 우리가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에. 이 통찰은 안도감의 정체를 국가적 규모의 생존술로 확장한다. 우리에게는 허묘의 기술이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실재는 지워지지 않은 채 선 너머에 박제되어 있고, 우리는 그 위태로운 빈 공간 위에서 일상이라는 허구를 견고하게 쌓아 올린다.
이쯤 되면 도입부에 이야기한 허구가 실재라는 말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나 더 이야기해 보자. 미술관이라는 공간 역시 하나의 거대한 허묘를 닮았다. 삶의 치열한 통증과 작가의 피비린내 나는 사유들은 화이트 큐브라는 매끈한 벽면 위에 박제된다. 날 것의 실재는 휘발되고 소독한 기호만 남은 그곳에서 관객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진열된 비극 사이를 거닌다. 미술관은 어쩌면 성소가 아니라, 의미 있는 빈 껍데기들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공간의 허구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며, 실재하지 않는 슬픔에 안심하고 탐닉한다. 여기서의 허묘란 또 무엇인가. 허묘는 죽음을 기억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부터 얼마나 도망쳐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쓸쓸한, 그리고 씁쓸한 지표가 된다. 우리는 오늘도 영화와 소설 속으로 도망치고, 재난의 풍경을 즐긴다.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허묘의 기술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우리는 허구의 안전망 뒤에서 비로소 안심하고 타인의 비극을 응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영화의 쿠키를 끝으로 그 모든 처절한 고통이 나의 현실이 아님을 확인한다. 허구는 세상을 비추는 창이라기보다 진실이 나를 덮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투명한 막에 가깝다. 우리는 그 ‘가짜’라는 확신이 주는 지독하고도 자비로운 안도감에 기대어, 타인의 지옥을 풍경처럼 누린다. 이 기이한 향유는 재난의 풍경 앞에서 더욱 은밀해진다. 거대한 불길이나 도시를 삼키는 해일은 그 참혹함에도, 기묘한 숭고미를 풍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오직 ‘미적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만 허락되는 환상이다. 내 발밑이 무너지고 있지 않다는 고요한 확신이 전제될 때, 재난은 감상의 대상인 예술이 된다. 우리는 타인의 종말을 프레임이라는 방패 뒤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미처 전원을 끄지 못하고 가버린 온열 침대의 빈자리, 그리고 서서히 식어가던 자리의 열기와 눈앞에 보이는 빈 무덤. 이러한 경험을 한 이 기간의 일들은 그전까지 제가 관념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한국의 오래된 전통인 이 빈 무덤, 허묘라는 것이 나를 대신하여 존재하는 자리로 작동한다는 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나는 이미 무덤에 그러니까 죽음에 있다고 그 저승사자를 속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무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밤에 자기 전에 자리에 누우면서 낮에 봤던 무덤을 생각해 보고, 제가 그 무덤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니까 뭔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를 바꿔치기 하는 그래서 대리 좌표를 만드는 공간 기술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허묘를 한국적인 맥락에서 오래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던 초기 버전의 메타버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영주 작가의 말이다. 그의 <허묘> 작업은 이 ‘대리 좌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비어 있는 성소의 실체. 대리 좌표로서의 빈 무덤, 헛것으로서 존재하는 허묘는 무엇일까. 허묘는 빌 허(虛), 무덤 묘(墓). 즉,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빈 무덤'을 뜻한다.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상태로 조성된 묘를 말한다.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전사, 실종, 익사 등으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을 때, 고인의 유품이나 머리카락을 대신 묻어 넋을 기리기도 한다. 허묘와 달리 가묘는 살아생전에 미리 자리를 잡아 놓은 무덤을 의미한다. 민간 신앙에서는 병약한 사람의 액운을 막기 위해 가짜 무덤을 만들어 ‘이미 죽은 사람’처럼 꾸며 저승사자를 속인다는 주술적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image.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임영주 작가 파트 전시 전경
이렇게 허구의 실체가 믿음이 될 때가 있다.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이다. 나아가 허구가 실재를 완벽히 가리면, 허구는 이제 더 이상 가짜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유일한 바닥, 땅이 된다. 망각은 허구를 진실로 격상시키는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는 허구가 가짜임을 잊기 위해 그것에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허묘가 무덤이 되는 것은 그 아래 시신이 누워 있어서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이 부재의 공포를 잊기 위해 그 빈 공간을 믿음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결국,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허구 위에 지어 올린 견고한 성벽인 셈이다. 임영주의 ‘한국의 휴전 상태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또 다른 말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이 묘하다. 진실을 잊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을 덮는 허구가 생존 조건이 된다.
임영주는 이 허묘적 상태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감각임을 나직이 폭로한다. 그는 한국인들이 우리가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에. 이 통찰은 안도감의 정체를 국가적 규모의 생존술로 확장한다. 우리에게는 허묘의 기술이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실재는 지워지지 않은 채 선 너머에 박제되어 있고, 우리는 그 위태로운 빈 공간 위에서 일상이라는 허구를 견고하게 쌓아 올린다.
이쯤 되면 도입부에 이야기한 허구가 실재라는 말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나 더 이야기해 보자. 미술관이라는 공간 역시 하나의 거대한 허묘를 닮았다. 삶의 치열한 통증과 작가의 피비린내 나는 사유들은 화이트 큐브라는 매끈한 벽면 위에 박제된다. 날 것의 실재는 휘발되고 소독한 기호만 남은 그곳에서 관객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진열된 비극 사이를 거닌다. 미술관은 어쩌면 성소가 아니라, 의미 있는 빈 껍데기들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공간의 허구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며, 실재하지 않는 슬픔에 안심하고 탐닉한다. 여기서의 허묘란 또 무엇인가. 허묘는 죽음을 기억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부터 얼마나 도망쳐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쓸쓸한, 그리고 씁쓸한 지표가 된다. 우리는 오늘도 영화와 소설 속으로 도망치고, 재난의 풍경을 즐긴다.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