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 탐구 - (1) 날짜들, 온 카와라.
문소영, 독립기획자
오래된 허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낡거나 지속된다는 것은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데,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오래될 수 있을까? 허구는 비어 있는 것을 엮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체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공허를 엮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에 서사라는 외피를 입힌다. 공허는 비어 있기에 부서질 수도 없지만, 실체 없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구는 무를 끝없이 감싸며 이어진다. 미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하나의 착각이기도 하다.
시간은 허구이다. 누구도 시간을 목격하거나 만진 적이 없고, 시간에게 시작과 끝이란 임시적인 조건일 뿐, 그 자체는 무한하다. 시간은 영원한 것일까,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반복되고 변화하는 삶을 특별한 것으로 깨닫게 하거나 속절없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속박하기도 한다. 우유부단한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수와 언어로 배분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시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식으로 정리되었을 과정을 떠올려 보면, 과학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시간이 체계화한 덕분에 우리는 기억에 좌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대신, 계절과 날짜를 통해 무수히 많은 오늘 중 어떤 오늘을 기리거나 기념하는지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술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술은 삶을 통해 터득한 감각과, 작업이라는 오랜 과정을 지나 비로소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화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면, 바라봄의 시간들이 어떻게 체화되고 심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어떻게 화면으로 이어지는지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물론 미술에서 다뤄지는 시공간이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논리의 시간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자꾸 엮고 싶을까? 회화는 이름이 없는 감각들에게 정처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너무 조용했던 나머지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낭만을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어쩌면 자기 연민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수치심과 함께.
시간이 가변적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어쩌면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큰 성과이다. 온 카와라(On Kawara, 1932-2014)는 1966년 1월 4일부터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약 3000점의 하루들을 기록했다. 반세기 동안의 모든 일자가 기록된 것은 아니고, 하루에 2-3점이 그려지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기록되지 않기도 했다. ‘하루’라는 시간적 제한을 두고, 자정이 되기 전에 마치지 못한 그림은 폐기했다. 완성되지 못한 상태도 여실한 기록이 될 수 있는데, 굳이 폐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려지는 날짜는 단순한 표기가 아니라, 한 개인의 시각을 드러내는 일종의 풍경으로서 작가가 살아낸 시간과 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1]. 자신이 속해 있던 하루를 강조하기 위해, 자정 전까지의 마감 시간을 엄격히 준수했다. 회화라는 뉘앙스만을 남긴 채 손결이 드러나는 스트로크를 모두 지워낸 태도로 미뤄봤을 때, 미완의 상태가 주는 서사와 감정적인 여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추측된다[2]. 날짜의 형태는 머물고 있는 지역의 언어와 표기법에 따른다. 기록은 적혔다기보다는 회화의 형식을 취한다. 그림은 무언가를 설명하는 대신 증명한다. 살아있는 손이 공들여 이 형상을 그렸고, 날짜가 증명하는 시공간적 좌표에 미지의 인물이 있었음을 알린다. 작품은 회화라는 태도를 통해 개별성과 생명력을 확보한다. 바탕색은 당일에 새로 조색하여 바른다[3]. 가까운 날짜는 거의 같거나 비슷한 톤으로 칠해져 있지만, 병치된 상태에서 보면 미묘한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수행을 통해 번뇌를 극복한 자리에 드러나는 깨달음처럼, 절제된 기록들은 어느덧 글자나 날짜라기보다 온 카와라가 존재했던 시간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때로는 관객의 기억과 얽히며 또 다른 시간으로 연장되기도 한다. 서사가 아닌, 누군가가 한 시공간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Date Paintings를 시작한 지 몇년 후, 카와라는 종종 그림을 보관하는 박스 내부에 해당 날짜에 발행된 신문을 붙여넣기 시작했다. 기사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함께 보관됨으로써 그려진 날짜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카와라는 본인의 오프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철저히 자신을 숨겼고, 인터뷰를 하는 등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4].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물이 전면에 드러나면 전하고자 했던 의미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극도로 철저하게 작업이 개별적인 언어로서 오롯이 드러날 방법을 탐구했다. 온 카와라는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읽히고 전시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기록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잇고, 자료를 제공하는 자와 열람하는 자 사이에 관계를 생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5]. 시간은 무한하지만 삶은 한정되어 있고, 그중에서 기억되는 것들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시간을 잇고 구체화하는 것은 갑자기 튀어오른 사건들보다는 물결처럼 이어지는 일상일 것이다. 사건은 시간을 단독적인 것으로 고립시키지만, 일상은 시간을 익숙한 감각으로 체화시킨다. 기록으로서의 카와라의 작업은,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기억과 체화된 감각을 보는 이가 스스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특정한 서사나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날짜만을 말끔한 은유처럼 드러냄으로써 사건과 시간을 분리한다. 그 날짜에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아는 시간을 그 안에 담아보는 일은 가능하다. 온 카와라가 강박에 가깝게 기록한 날짜들은 개인의 시간을 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끝없이 팽창하고 흩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되는 일상을 드러낸다. 카와라는 일상에서도 자신의 정보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날짜들이 개인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고정하기보다, 시간의 가변성을 실천하며 그 깊이와 모호함을 양가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태도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누군지 알리고 싶다기보다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지체 없이 흐르고 무너지는 시간에 휩쓸려 사라지더라도, 기억됨으로써 삶이 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희망일 것이다. 온 카와라의 작업은 시간이 얼마나 거대하고 끊임없이 흐르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동시에 우주처럼 광활하고 때로는 공허한 시간의 흐름 속에 누군가가 존재했었고, 그림을 통해 나 역시 그 시간의 일부임을 시사한다. 시간은 부재를 통해서만 깊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미술은 무엇이 부재하고, 무엇이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허구는 속이고 기만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쉽사리 무너지는 것들을 붙잡아 두려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1]“그의 그림들의 의미는 단순히 날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날짜 그 자체가 되는 것에 있다. (The significance of these paintings lies in the fact that they depict not only a date, but also their own date).” 앤 로리너( Anne Rorimer), 「The Date Paintings of On Kawara」,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Studies, vol. 17, no. 2, 1991.
[2] 기록을 진행함에 있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온 카와라는 <Bathroom Series>(1953-54)처럼 그로테스크한 구상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 태어나 13살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폐전 이후 경험한 무기력한 인간상을 묘사한다. 멕시코로 이주하고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작업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보다,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점차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이 시절의 그림이 조명 받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자기 부정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작업이 객관적이어야 하는 기록 작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카와라가 날짜를 그려나가는 과정. https://www.onemillionyearsfoundation.org/foundation (2026.1.23 접속).
[4]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에는 유화되었던 듯하다.
[5] 2015년 아트포럼에 기고된 조앤 키의 텍스트를 참고했다. “Kawara spent a lifetime searching for the point at which materials could best invoke those feelings, beliefs, and conditions paradoxically defined by their immateriality. Whether he fulfilled his goals is less relevant than his mining of the interface between how information appears and how viewers interact with it. This was Kawara’s métier. And it is what enables his works to live on, both as revitalized traces of history and as prospective ruins of a future to come.” Joan Kee, 「Uncommon Knowledge: The Art of On Kawara」, ArtForum, vol. 53, no. 5, January 2015, https://www.neugraphic.com/kawara/kawara-text3.html (2026.1.26 접속).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허구 탐구 - (1) 날짜들, 온 카와라.
문소영, 독립기획자
오래된 허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낡거나 지속된다는 것은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데,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오래될 수 있을까? 허구는 비어 있는 것을 엮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체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공허를 엮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에 서사라는 외피를 입힌다. 공허는 비어 있기에 부서질 수도 없지만, 실체 없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구는 무를 끝없이 감싸며 이어진다. 미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하나의 착각이기도 하다.
시간은 허구이다. 누구도 시간을 목격하거나 만진 적이 없고, 시간에게 시작과 끝이란 임시적인 조건일 뿐, 그 자체는 무한하다. 시간은 영원한 것일까,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반복되고 변화하는 삶을 특별한 것으로 깨닫게 하거나 속절없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속박하기도 한다. 우유부단한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수와 언어로 배분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시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식으로 정리되었을 과정을 떠올려 보면, 과학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시간이 체계화한 덕분에 우리는 기억에 좌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대신, 계절과 날짜를 통해 무수히 많은 오늘 중 어떤 오늘을 기리거나 기념하는지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술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술은 삶을 통해 터득한 감각과, 작업이라는 오랜 과정을 지나 비로소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화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면, 바라봄의 시간들이 어떻게 체화되고 심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어떻게 화면으로 이어지는지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물론 미술에서 다뤄지는 시공간이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논리의 시간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자꾸 엮고 싶을까? 회화는 이름이 없는 감각들에게 정처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너무 조용했던 나머지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낭만을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어쩌면 자기 연민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수치심과 함께.
시간이 가변적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어쩌면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큰 성과이다. 온 카와라(On Kawara, 1932-2014)는 1966년 1월 4일부터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약 3000점의 하루들을 기록했다. 반세기 동안의 모든 일자가 기록된 것은 아니고, 하루에 2-3점이 그려지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기록되지 않기도 했다. ‘하루’라는 시간적 제한을 두고, 자정이 되기 전에 마치지 못한 그림은 폐기했다. 완성되지 못한 상태도 여실한 기록이 될 수 있는데, 굳이 폐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려지는 날짜는 단순한 표기가 아니라, 한 개인의 시각을 드러내는 일종의 풍경으로서 작가가 살아낸 시간과 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1]. 자신이 속해 있던 하루를 강조하기 위해, 자정 전까지의 마감 시간을 엄격히 준수했다. 회화라는 뉘앙스만을 남긴 채 손결이 드러나는 스트로크를 모두 지워낸 태도로 미뤄봤을 때, 미완의 상태가 주는 서사와 감정적인 여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추측된다[2]. 날짜의 형태는 머물고 있는 지역의 언어와 표기법에 따른다. 기록은 적혔다기보다는 회화의 형식을 취한다. 그림은 무언가를 설명하는 대신 증명한다. 살아있는 손이 공들여 이 형상을 그렸고, 날짜가 증명하는 시공간적 좌표에 미지의 인물이 있었음을 알린다. 작품은 회화라는 태도를 통해 개별성과 생명력을 확보한다. 바탕색은 당일에 새로 조색하여 바른다[3]. 가까운 날짜는 거의 같거나 비슷한 톤으로 칠해져 있지만, 병치된 상태에서 보면 미묘한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수행을 통해 번뇌를 극복한 자리에 드러나는 깨달음처럼, 절제된 기록들은 어느덧 글자나 날짜라기보다 온 카와라가 존재했던 시간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때로는 관객의 기억과 얽히며 또 다른 시간으로 연장되기도 한다. 서사가 아닌, 누군가가 한 시공간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Date Paintings를 시작한 지 몇년 후, 카와라는 종종 그림을 보관하는 박스 내부에 해당 날짜에 발행된 신문을 붙여넣기 시작했다. 기사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함께 보관됨으로써 그려진 날짜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카와라는 본인의 오프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철저히 자신을 숨겼고, 인터뷰를 하는 등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4].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물이 전면에 드러나면 전하고자 했던 의미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극도로 철저하게 작업이 개별적인 언어로서 오롯이 드러날 방법을 탐구했다. 온 카와라는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읽히고 전시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기록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잇고, 자료를 제공하는 자와 열람하는 자 사이에 관계를 생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5]. 시간은 무한하지만 삶은 한정되어 있고, 그중에서 기억되는 것들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시간을 잇고 구체화하는 것은 갑자기 튀어오른 사건들보다는 물결처럼 이어지는 일상일 것이다. 사건은 시간을 단독적인 것으로 고립시키지만, 일상은 시간을 익숙한 감각으로 체화시킨다. 기록으로서의 카와라의 작업은,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기억과 체화된 감각을 보는 이가 스스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특정한 서사나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날짜만을 말끔한 은유처럼 드러냄으로써 사건과 시간을 분리한다. 그 날짜에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아는 시간을 그 안에 담아보는 일은 가능하다. 온 카와라가 강박에 가깝게 기록한 날짜들은 개인의 시간을 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끝없이 팽창하고 흩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되는 일상을 드러낸다. 카와라는 일상에서도 자신의 정보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날짜들이 개인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고정하기보다, 시간의 가변성을 실천하며 그 깊이와 모호함을 양가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태도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누군지 알리고 싶다기보다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지체 없이 흐르고 무너지는 시간에 휩쓸려 사라지더라도, 기억됨으로써 삶이 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희망일 것이다. 온 카와라의 작업은 시간이 얼마나 거대하고 끊임없이 흐르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동시에 우주처럼 광활하고 때로는 공허한 시간의 흐름 속에 누군가가 존재했었고, 그림을 통해 나 역시 그 시간의 일부임을 시사한다. 시간은 부재를 통해서만 깊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미술은 무엇이 부재하고, 무엇이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허구는 속이고 기만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쉽사리 무너지는 것들을 붙잡아 두려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1]“그의 그림들의 의미는 단순히 날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날짜 그 자체가 되는 것에 있다. (The significance of these paintings lies in the fact that they depict not only a date, but also their own date).” 앤 로리너( Anne Rorimer), 「The Date Paintings of On Kawara」,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Studies, vol. 17, no. 2, 1991.
[2] 기록을 진행함에 있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온 카와라는 <Bathroom Series>(1953-54)처럼 그로테스크한 구상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 태어나 13살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폐전 이후 경험한 무기력한 인간상을 묘사한다. 멕시코로 이주하고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작업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보다,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점차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이 시절의 그림이 조명 받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자기 부정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작업이 객관적이어야 하는 기록 작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카와라가 날짜를 그려나가는 과정. https://www.onemillionyearsfoundation.org/foundation (2026.1.23 접속).
[4]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에는 유화되었던 듯하다.
[5] 2015년 아트포럼에 기고된 조앤 키의 텍스트를 참고했다. “Kawara spent a lifetime searching for the point at which materials could best invoke those feelings, beliefs, and conditions paradoxically defined by their immateriality. Whether he fulfilled his goals is less relevant than his mining of the interface between how information appears and how viewers interact with it. This was Kawara’s métier. And it is what enables his works to live on, both as revitalized traces of history and as prospective ruins of a future to come.” Joan Kee, 「Uncommon Knowledge: The Art of On Kawara」, ArtForum, vol. 53, no. 5, January 2015, https://www.neugraphic.com/kawara/kawara-text3.html (2026.1.26 접속).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