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전영현
피로 쓴 병맛 동화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냥 바라보면”
연식이 좀 있는 이들은 다 아는 멜로디, 포장지에 큼지막한 ‘정(情)’이 떡 박힌, 모 제과 기업의 히트 간식 ‘초코파이’의 시엠송이다. 말하기 전에 알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가! 말도 똑바로 못 하는 주제에, 알기만 바라는 현실 곳곳의 이기적 행태와는 정반대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싫어도 어느새 몰입해 버리는 경지를 꿈꾸는 나는, 마음의 장벽을 넘어 알아서 밀려오는 그런 통함을 ‘다짜고짜 감동’이라 부른다.
전영현의 영상 작업은 초코파이 같다. 일단 말하지 않는다. 대사가 없다. 열심히 설명하지 않는다. 눈에 힘주고 줄거리를 좇지 않아도, 여느 장면을 그냥 바라보면 알아서 화살처럼 날아와 뇌리에 꽂히고 가슴에 박힌다. 초코파이와 사뭇 다른 점이라면 단맛 대신 ‘병맛’이다. 정(情) 대신 부조리한 현실의 매정 냉정 박정함이 흐른다는 것.

인간을 납치한다. 낫이 날아와 팔다리를 썰어버린다. 대신 낫을 달고 노역한다. 잘린 팔다리는 강철 인간의 원재료이다. 낫으로 잘게 다진다. 그리고 용광로에 녹여 틀에 붓는다. 그런데 그 틀은 잡아 온 인간이다. 틀을 벗기면 강철 인간이 주조된다. 재료 탓인지, 강철 인간에서 팔다리가 사방으로 나무처럼 자란다. 그건 다음 강철 인간을 찍어낼 땔감이다.
〈강철 인간 제조 공정〉은 제목부터 ‘무쇠 초코파이’처럼 심상찮다. ‘강철’, ‘제조’, ‘공정’ 모두 인간과는 너무 동떨어진 낱말 아닌가. 이어 인간을 재료로, 인간을 수단 삼아, 인간을 생산해, 인간을 연료로 쓰길 무한 반복하는 아스트랄한 전개에 말문이 막힌다. 닫힌계 내부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의 무한 반복, 주체와 목적이 전도되어 그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6분짜리 혼란의 도돌이표이다. 말하자면 해괴한 공장 테마의 ‘순환 지옥’. 이 ‘병맛 서린 촌극’은 어쩌면 우리가 놓인 시스템을 우리 바깥에서 본 광경인 듯싶다.

회사 업무 보듯 거리낌 없이 칼질과 접붙이길 반복하는 해괴한 설정, 난도질해도, 난도질당해도 유유자적 태연한 등장인물들, 화면 가득 들어차는 시뻘건 절단면과 핏방울. 그의 영상엔 자르고, 쪼개고, 접붙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해 개조하는 장면이 일상이다. 특히 이는 자르는 사건을 단순 지시함을 넘어, 말초적 감각을 간지럽히는 묘사가 넘치다 못해 특별함을 잃고 ‘생활화’한다는 점에서 여느 작가와는 사뭇 다르다.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컷으로 혀를 쪼개거나, 다리를 세로로 자른다. 그 끔찍한 느낌에 몸서리치는 찰나,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전개가 이어진다. 별안간 자른 부위를 펼쳐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하늘을 날거나, 떨어진 피가 강처럼 흐르다 방울방울 떠올라 구름이 되는 식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가장 원초적 감각 기관은 바로 몸이다. 즉 신체는 가장 싸고 쉽고 빠르고 보편적이며 외면하기 힘든 ‘세상 스캔 도구’인 것. 전영현은 신체 각부의 오묘한 감각과 감응에 일찍이 주목, 영상 표현에 적극 활용해 왔다. 종이에 손을 벨 때의 화끈한 철렁함, 주삿바늘이 살갗을 파고들 때의 섬찟한 뻐근함을 일상 언어처럼 구사한다. 관객은 몰입할수록 서사와 별개로 영상 내내 줄기차게 이어지는 신체 감각의 롤러코스터를 체험한다. 작업 각각이 또렷한 서사를 제시함에도 그에 앞서, 부조리와 불합리, 비극의 차고 맵고 쓴 쇠 맛을 이러한 감각적 묘사로 미리보기 시식하는 셈이다. 신체 감각을 교묘히 건드려 울리는 경고, 서사를 파악하기도 전에 섣불리 감지하는 몸의 신호, 그것은 전영현 특유의 ‘다짜고짜 감동’이다. 그의 작업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거나 모티프를 콕 집어 지시하지 않아도 비판과 냉소를 구사하는 비결은 바로 이런 극도의 ‘감각화’에 있다.

인간 일꾼들이 공장 지하에서 여전히 불을 때어 강철 인간을 생산한다. 땅은 말라 갈라졌으며 옥죄는 폭염에 사람은 무기력하다. 비가 필요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머리통을 짜니 피가 쏟아져 증발한다.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해 인공 강우를 시도한다. 인간 조각을 뭉친 모양의 구름에서 핏방울 같은 비가 내린다. 방울 속에 인간 조각들이 보인다. 땅에서 사람의 팔다리, 심지어 머리가 달린 나무가 솟고, 정작 더위는 멈출 기미가 없다.
〈강철 인간 제조 공정〉의 세계관은 〈잘못된 인공강우〉로 이어진다. 엉터리 시스템을 응용해 곤경에 맞서면 더 큰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 기상천외 잔혹 동화에서 구원은 결국 실패한다. 두 작업은 언젠가 울산 제철공장을 둘러보며 영감을 얻었다. 확실히 영감만 얻은 듯하다. 웬만한 개꿈은 범접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그 전개는, 비선형도 아니고 ‘탈선형’이라 해야 할 듯싶다.
그는 ‘프로 생각러’이다. 누구보다 생각이 많다. 작업하지 않는 시간은 곧 생각하는 시간.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 삶의 고뇌를 수없이 스캔한다. 그리고 공상을 넘어 망상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을 혁명가가 아닌 염세주의자라 한다. 그래서 불의에 항거하고 개선하고 뒤엎지 않는다. 차라리 한술 더 뜬다.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도,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다 일어났다. 더욱 잔혹하고 기괴하며 도무지 알 수 없이 병맛의 끝을 달리기, 냉소적인 풍자와 ‘음모론의 음모론’으로 맞받아치기. 어찌 보면 참으로 현실적인 대응이자 생존법이며 또한 전영현을 꿰는 작업 박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획일화한 공간에 갇히고 옥죄어 통제당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척’으로 가득한 건물을 내보인다. 빠져나올 수도, 해소할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순응과 자기 최면. "행복한가?" 묻는 대신, "행복해요!" 외치고, 도무지 행복한 구석이 없는 행복한 풍경을 제시하여, 관객의 비판적 반응을 유도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장면과 추상성 강한 개념의 전달은, 전영현 특유의 조형적 결단이 한몫한다. 눈, 코, 입은커녕 질감마저 완전히 배제한, 등장인물의 극도로 건조한 조형감은 사실 목각인형이나 마네킹에 가깝다. 생존에 필요하기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사람의 형상에 시선이 끌리기 마련. 이 조형은, 디자인에서 주인공을 위해 나머지가 죽어주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적 소음’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불순물 없이 본론 즉 동작, 흐름, 구조를 전달한다. 개체 간 구분이 무의미함은 익명성을 조장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강한 익명성은 단순히 특정 인물이나 계층을 지시하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인지 마네킹인지’조차 흐린다. 피는 좀 나긴 하지만, 작품 성향에 걸맞게 자르고 썰기 수월한 일종의 조형적 면죄부로 작용해 관객의 심리적 저항감을 달랜다. 또한 자유로운 몰입을 유도하는 열린 빈칸으로, 동시에 반대로 ‘웃지 마, 니 얘기야’, 누구에게나 겨냥하는 섬뜩한 냉소로 제 발 저리게도 만든다. 흑백과 포인트 색상(특히 피를 연상시키는 색)의 대비 또한 시각적 단순 명쾌의 발로로서 전달력 극대화에 일조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심해인, 그들과 닮게 혀 수술을 강요받는다. 혀 콤플렉스 보완 장치를 뇌에 삽입해 간신히 소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는 오류로 혀 컨트롤러가 폭주한다.
최신작 〈혀 파괴자〉에선 보다 다양한 조형적 변주와, 현실 이야기의 접목을 시도한다. 어두운 바탕과 상대적으로 밝은 색상으로 표현한 인물들, 인물의 내부와 기계 장치를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닮은, 속이 비치는 모양새로 얼개를 시각화한다. 칠흑 같은 깊은 바닷속에서 반투명한 몸 너머로 내부가 비치는 심해 생물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발음 교정 수술을 하고 기계를 삽입하는 장면은, 실제로 작가가 말투와 발음을 강요받으며 이방인의 설움을 느꼈던 지난 경험을 각색해 시각화했다. 말하자면 실화를 바탕한 ‘부조리 우화’이다. 소외와 강요에 자신을 재단해 맞춘 이방인의 비극적 말로를 목도하는 가운데, ‘획일적 잣대’가 얼마나 큰 폭력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전영현의 작업은, 세상에 만연한, 바꿀 수 없는 부조리를 절감한 한 예술가가, 동시대의 기술로 펼치는 냉소적 망상 유희이다.
그러나 그저 ‘자조적 놀이’라 얼버무리기엔, 그 구체성, 독창성, 적극성이 남다르다. 우선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개인이, 무지몽매와 몰상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짜내어 다듬은, 비음성언어적 화법의 말초적 치밀함이 돋보인다. 또한 한 인간의 절박한 생존기라기엔 도무지 한 치 앞을 종잡을 수 없는, 그만의 똘끼 넘치는 전개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더하여, 불합리한 현실 논리에 맞서, 망상을 재료 삼아 반 논리 체계를 구축해 무력감에 치열하게 저항하는, 적극적인 반군 투쟁임에 주목하자. 현실을 노골적으로 겨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자비 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영리한 우회 공격이라니. 빗발치는 총탄, 아니 한탄을 뚫고 무지성 정면 돌파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야수적이다. 이러나저러나 전쟁터보다 지랄맞은 현실을 견딜 예술 전투 식량이란 점에서 문득 다시금 초코파이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5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전영현
피로 쓴 병맛 동화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냥 바라보면”
연식이 좀 있는 이들은 다 아는 멜로디, 포장지에 큼지막한 ‘정(情)’이 떡 박힌, 모 제과 기업의 히트 간식 ‘초코파이’의 시엠송이다. 말하기 전에 알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가! 말도 똑바로 못 하는 주제에, 알기만 바라는 현실 곳곳의 이기적 행태와는 정반대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싫어도 어느새 몰입해 버리는 경지를 꿈꾸는 나는, 마음의 장벽을 넘어 알아서 밀려오는 그런 통함을 ‘다짜고짜 감동’이라 부른다.
전영현의 영상 작업은 초코파이 같다. 일단 말하지 않는다. 대사가 없다. 열심히 설명하지 않는다. 눈에 힘주고 줄거리를 좇지 않아도, 여느 장면을 그냥 바라보면 알아서 화살처럼 날아와 뇌리에 꽂히고 가슴에 박힌다. 초코파이와 사뭇 다른 점이라면 단맛 대신 ‘병맛’이다. 정(情) 대신 부조리한 현실의 매정 냉정 박정함이 흐른다는 것.

인간을 납치한다. 낫이 날아와 팔다리를 썰어버린다. 대신 낫을 달고 노역한다. 잘린 팔다리는 강철 인간의 원재료이다. 낫으로 잘게 다진다. 그리고 용광로에 녹여 틀에 붓는다. 그런데 그 틀은 잡아 온 인간이다. 틀을 벗기면 강철 인간이 주조된다. 재료 탓인지, 강철 인간에서 팔다리가 사방으로 나무처럼 자란다. 그건 다음 강철 인간을 찍어낼 땔감이다.
〈강철 인간 제조 공정〉은 제목부터 ‘무쇠 초코파이’처럼 심상찮다. ‘강철’, ‘제조’, ‘공정’ 모두 인간과는 너무 동떨어진 낱말 아닌가. 이어 인간을 재료로, 인간을 수단 삼아, 인간을 생산해, 인간을 연료로 쓰길 무한 반복하는 아스트랄한 전개에 말문이 막힌다. 닫힌계 내부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의 무한 반복, 주체와 목적이 전도되어 그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6분짜리 혼란의 도돌이표이다. 말하자면 해괴한 공장 테마의 ‘순환 지옥’. 이 ‘병맛 서린 촌극’은 어쩌면 우리가 놓인 시스템을 우리 바깥에서 본 광경인 듯싶다.

회사 업무 보듯 거리낌 없이 칼질과 접붙이길 반복하는 해괴한 설정, 난도질해도, 난도질당해도 유유자적 태연한 등장인물들, 화면 가득 들어차는 시뻘건 절단면과 핏방울. 그의 영상엔 자르고, 쪼개고, 접붙이고, 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해 개조하는 장면이 일상이다. 특히 이는 자르는 사건을 단순 지시함을 넘어, 말초적 감각을 간지럽히는 묘사가 넘치다 못해 특별함을 잃고 ‘생활화’한다는 점에서 여느 작가와는 사뭇 다르다.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컷으로 혀를 쪼개거나, 다리를 세로로 자른다. 그 끔찍한 느낌에 몸서리치는 찰나,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전개가 이어진다. 별안간 자른 부위를 펼쳐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하늘을 날거나, 떨어진 피가 강처럼 흐르다 방울방울 떠올라 구름이 되는 식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가장 원초적 감각 기관은 바로 몸이다. 즉 신체는 가장 싸고 쉽고 빠르고 보편적이며 외면하기 힘든 ‘세상 스캔 도구’인 것. 전영현은 신체 각부의 오묘한 감각과 감응에 일찍이 주목, 영상 표현에 적극 활용해 왔다. 종이에 손을 벨 때의 화끈한 철렁함, 주삿바늘이 살갗을 파고들 때의 섬찟한 뻐근함을 일상 언어처럼 구사한다. 관객은 몰입할수록 서사와 별개로 영상 내내 줄기차게 이어지는 신체 감각의 롤러코스터를 체험한다. 작업 각각이 또렷한 서사를 제시함에도 그에 앞서, 부조리와 불합리, 비극의 차고 맵고 쓴 쇠 맛을 이러한 감각적 묘사로 미리보기 시식하는 셈이다. 신체 감각을 교묘히 건드려 울리는 경고, 서사를 파악하기도 전에 섣불리 감지하는 몸의 신호, 그것은 전영현 특유의 ‘다짜고짜 감동’이다. 그의 작업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거나 모티프를 콕 집어 지시하지 않아도 비판과 냉소를 구사하는 비결은 바로 이런 극도의 ‘감각화’에 있다.

인간 일꾼들이 공장 지하에서 여전히 불을 때어 강철 인간을 생산한다. 땅은 말라 갈라졌으며 옥죄는 폭염에 사람은 무기력하다. 비가 필요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머리통을 짜니 피가 쏟아져 증발한다.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해 인공 강우를 시도한다. 인간 조각을 뭉친 모양의 구름에서 핏방울 같은 비가 내린다. 방울 속에 인간 조각들이 보인다. 땅에서 사람의 팔다리, 심지어 머리가 달린 나무가 솟고, 정작 더위는 멈출 기미가 없다.
〈강철 인간 제조 공정〉의 세계관은 〈잘못된 인공강우〉로 이어진다. 엉터리 시스템을 응용해 곤경에 맞서면 더 큰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 기상천외 잔혹 동화에서 구원은 결국 실패한다. 두 작업은 언젠가 울산 제철공장을 둘러보며 영감을 얻었다. 확실히 영감만 얻은 듯하다. 웬만한 개꿈은 범접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그 전개는, 비선형도 아니고 ‘탈선형’이라 해야 할 듯싶다.
그는 ‘프로 생각러’이다. 누구보다 생각이 많다. 작업하지 않는 시간은 곧 생각하는 시간.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 삶의 고뇌를 수없이 스캔한다. 그리고 공상을 넘어 망상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을 혁명가가 아닌 염세주의자라 한다. 그래서 불의에 항거하고 개선하고 뒤엎지 않는다. 차라리 한술 더 뜬다.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도,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다 일어났다. 더욱 잔혹하고 기괴하며 도무지 알 수 없이 병맛의 끝을 달리기, 냉소적인 풍자와 ‘음모론의 음모론’으로 맞받아치기. 어찌 보면 참으로 현실적인 대응이자 생존법이며 또한 전영현을 꿰는 작업 박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획일화한 공간에 갇히고 옥죄어 통제당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척’으로 가득한 건물을 내보인다. 빠져나올 수도, 해소할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순응과 자기 최면. "행복한가?" 묻는 대신, "행복해요!" 외치고, 도무지 행복한 구석이 없는 행복한 풍경을 제시하여, 관객의 비판적 반응을 유도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장면과 추상성 강한 개념의 전달은, 전영현 특유의 조형적 결단이 한몫한다. 눈, 코, 입은커녕 질감마저 완전히 배제한, 등장인물의 극도로 건조한 조형감은 사실 목각인형이나 마네킹에 가깝다. 생존에 필요하기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사람의 형상에 시선이 끌리기 마련. 이 조형은, 디자인에서 주인공을 위해 나머지가 죽어주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적 소음’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불순물 없이 본론 즉 동작, 흐름, 구조를 전달한다. 개체 간 구분이 무의미함은 익명성을 조장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강한 익명성은 단순히 특정 인물이나 계층을 지시하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인지 마네킹인지’조차 흐린다. 피는 좀 나긴 하지만, 작품 성향에 걸맞게 자르고 썰기 수월한 일종의 조형적 면죄부로 작용해 관객의 심리적 저항감을 달랜다. 또한 자유로운 몰입을 유도하는 열린 빈칸으로, 동시에 반대로 ‘웃지 마, 니 얘기야’, 누구에게나 겨냥하는 섬뜩한 냉소로 제 발 저리게도 만든다. 흑백과 포인트 색상(특히 피를 연상시키는 색)의 대비 또한 시각적 단순 명쾌의 발로로서 전달력 극대화에 일조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심해인, 그들과 닮게 혀 수술을 강요받는다. 혀 콤플렉스 보완 장치를 뇌에 삽입해 간신히 소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는 오류로 혀 컨트롤러가 폭주한다.
최신작 〈혀 파괴자〉에선 보다 다양한 조형적 변주와, 현실 이야기의 접목을 시도한다. 어두운 바탕과 상대적으로 밝은 색상으로 표현한 인물들, 인물의 내부와 기계 장치를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닮은, 속이 비치는 모양새로 얼개를 시각화한다. 칠흑 같은 깊은 바닷속에서 반투명한 몸 너머로 내부가 비치는 심해 생물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발음 교정 수술을 하고 기계를 삽입하는 장면은, 실제로 작가가 말투와 발음을 강요받으며 이방인의 설움을 느꼈던 지난 경험을 각색해 시각화했다. 말하자면 실화를 바탕한 ‘부조리 우화’이다. 소외와 강요에 자신을 재단해 맞춘 이방인의 비극적 말로를 목도하는 가운데, ‘획일적 잣대’가 얼마나 큰 폭력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전영현의 작업은, 세상에 만연한, 바꿀 수 없는 부조리를 절감한 한 예술가가, 동시대의 기술로 펼치는 냉소적 망상 유희이다.
그러나 그저 ‘자조적 놀이’라 얼버무리기엔, 그 구체성, 독창성, 적극성이 남다르다. 우선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개인이, 무지몽매와 몰상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짜내어 다듬은, 비음성언어적 화법의 말초적 치밀함이 돋보인다. 또한 한 인간의 절박한 생존기라기엔 도무지 한 치 앞을 종잡을 수 없는, 그만의 똘끼 넘치는 전개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더하여, 불합리한 현실 논리에 맞서, 망상을 재료 삼아 반 논리 체계를 구축해 무력감에 치열하게 저항하는, 적극적인 반군 투쟁임에 주목하자. 현실을 노골적으로 겨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자비 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영리한 우회 공격이라니. 빗발치는 총탄, 아니 한탄을 뚫고 무지성 정면 돌파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야수적이다. 이러나저러나 전쟁터보다 지랄맞은 현실을 견딜 예술 전투 식량이란 점에서 문득 다시금 초코파이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