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근원은 사랑일까
박준수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로맨스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미술의 근원은 사랑일까.’
이 질문은 다소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오늘날 미술은 제도와 시장, 담론과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로 취급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비되고 소멸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제기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넷플릭스 솔로지옥 5 공식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솔로지옥〉은 어느덧 다섯 번째 시즌에 접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청춘들이 적게 입은 몸으로 경쟁하듯 사랑을 연출하는 장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다섯 번째 시즌까지 이어진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던 흑백요리사만큼이나 이 프로그램이 지닌 대중적 흡인력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서사의 자원이지만, 그것은 이제 압축된 이미지와 짧은 클립 속에서 소비된다.
인도에서 열린 한 아트페어 현장을 도우며 비슷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휴식 시간마다 수많은 인부들은 바닥이나 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 속 짧은 숏폼 영상을 끊임없이 넘기고 있었다. 사라졌다가 곧바로 다음 이미지로 대체되는 영상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소비의 단위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팔로워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도 인플루언서들을 홍보에 활용했음에도, 한국에서처럼 그들의 게시물을 보고 실제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관객은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트페어는 이미 화면 속에서 충분히 소비된 대상이었다.
‘작품의 아우라는 직접 보아야 한다’는 말은 그곳에서 좀처럼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인플루언서가 방문한 전시나 아트페어를 직접 보기 위해 관객이 몰려들곤 하지만, 그 역시 과연 작품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인플루언서에 대한 동경의 연장선인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이미지의 시대에 감상은 종종 ‘보기’가 아니라 ‘동일시’의 문제로 전환된다.
라캉에 따르면 아직 자아가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거울단계의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나’라고 오인한다. 어릴 때 본 슈퍼맨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보자기를 망토처럼 매고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TV 화면에서 본 슈퍼맨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플루언서가 본 작품을 나 역시 보아야 한다는 충동은, 어쩌면 그러한 동일시의 현대적 변주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가 지나간 이후, 과연 우리는 자신의 취향, 자신의 감각, 다시 말해 자신의 자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미술의 기원으로 나를 이끈다. 회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알타미라 동굴벽화 같은 미술사적인 이야기보다도 고대 로마의 저술가 플리니우스가 전한 일화다. 그는 『박물지』에서 회화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회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로마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려진 데서 회화가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Joseph Benoit Suvee, 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 1791.
Groeningemuseum, Bruges
출처 : Wikimedia Commons
플리니우스는 코린트의 도예가 부타데스의 딸 이야기를 덧붙인다. 전쟁에 나가는 연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등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려 넣었다고 한다. 회화의 기원이 재현이나 기록이 아니라, 부재를 견디기 위한 감정, 사랑하는 존재를 붙잡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설화는 지금까지도 내게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취임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즐기게 된다. 즐기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전과는 달라진다.” 이 문장은 예술 감상의 단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부타데스의 딸이 남긴 최초의 회화와도 묘하게 겹쳐진다. 사랑은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 대신, 인식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현대미술을 이러한 감정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다소 미숙해 보일 수 있다. 제도와 시장, 정치와 담론이 복잡하게 얽힌 동시대 미술의 장에서 사랑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감상이 너무 빠르게 휘발되는 시대일수록, 미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은 어쩌면 그 오래된 감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미술의 근원이 사랑이었는지는 끝내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사랑이 미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감정임은, 여전히 내게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Chat gpt ai 생성이미지
외로움 호소 미술인에게 갤러리를 나가 러닝을 나가라고 농담하곤 하는데, 다시 말하면 외로움 호소 청춘들에게는 넷플릭스 안에서 사랑을 찾지 말고, 갤러리를 찾아가라고 하고 싶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미술의 근원은 사랑일까
박준수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로맨스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미술의 근원은 사랑일까.’
이 질문은 다소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오늘날 미술은 제도와 시장, 담론과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로 취급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비되고 소멸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제기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넷플릭스 솔로지옥 5 공식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솔로지옥〉은 어느덧 다섯 번째 시즌에 접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청춘들이 적게 입은 몸으로 경쟁하듯 사랑을 연출하는 장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다섯 번째 시즌까지 이어진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던 흑백요리사만큼이나 이 프로그램이 지닌 대중적 흡인력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서사의 자원이지만, 그것은 이제 압축된 이미지와 짧은 클립 속에서 소비된다.
인도에서 열린 한 아트페어 현장을 도우며 비슷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휴식 시간마다 수많은 인부들은 바닥이나 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 속 짧은 숏폼 영상을 끊임없이 넘기고 있었다. 사라졌다가 곧바로 다음 이미지로 대체되는 영상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소비의 단위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팔로워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도 인플루언서들을 홍보에 활용했음에도, 한국에서처럼 그들의 게시물을 보고 실제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관객은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트페어는 이미 화면 속에서 충분히 소비된 대상이었다.
‘작품의 아우라는 직접 보아야 한다’는 말은 그곳에서 좀처럼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인플루언서가 방문한 전시나 아트페어를 직접 보기 위해 관객이 몰려들곤 하지만, 그 역시 과연 작품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인플루언서에 대한 동경의 연장선인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이미지의 시대에 감상은 종종 ‘보기’가 아니라 ‘동일시’의 문제로 전환된다.
라캉에 따르면 아직 자아가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거울단계의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나’라고 오인한다. 어릴 때 본 슈퍼맨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보자기를 망토처럼 매고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TV 화면에서 본 슈퍼맨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플루언서가 본 작품을 나 역시 보아야 한다는 충동은, 어쩌면 그러한 동일시의 현대적 변주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가 지나간 이후, 과연 우리는 자신의 취향, 자신의 감각, 다시 말해 자신의 자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미술의 기원으로 나를 이끈다. 회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알타미라 동굴벽화 같은 미술사적인 이야기보다도 고대 로마의 저술가 플리니우스가 전한 일화다. 그는 『박물지』에서 회화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회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로마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려진 데서 회화가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Joseph Benoit Suvee, 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 1791.
Groeningemuseum, Bruges
출처 : Wikimedia Commons
플리니우스는 코린트의 도예가 부타데스의 딸 이야기를 덧붙인다. 전쟁에 나가는 연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등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려 넣었다고 한다. 회화의 기원이 재현이나 기록이 아니라, 부재를 견디기 위한 감정, 사랑하는 존재를 붙잡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설화는 지금까지도 내게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취임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즐기게 된다. 즐기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전과는 달라진다.” 이 문장은 예술 감상의 단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부타데스의 딸이 남긴 최초의 회화와도 묘하게 겹쳐진다. 사랑은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 대신, 인식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현대미술을 이러한 감정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다소 미숙해 보일 수 있다. 제도와 시장, 정치와 담론이 복잡하게 얽힌 동시대 미술의 장에서 사랑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감상이 너무 빠르게 휘발되는 시대일수록, 미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은 어쩌면 그 오래된 감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미술의 근원이 사랑이었는지는 끝내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사랑이 미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감정임은, 여전히 내게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Chat gpt ai 생성이미지
외로움 호소 미술인에게 갤러리를 나가 러닝을 나가라고 농담하곤 하는데, 다시 말하면 외로움 호소 청춘들에게는 넷플릭스 안에서 사랑을 찾지 말고, 갤러리를 찾아가라고 하고 싶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