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시간적 초현실주의: 몰리킴에 대하여
안재우, 독립 큐레이터/문화평론가

상징의 숲 no. 15(좌)와 상징의 숲 no. 16(2025,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각각123 × 60.6 cm)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거나 돌아갈 수 없다.
오늘의 삶은 어제의 삶보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
철학에서 ‘항진 명제’란 말 그대로 ‘항상 진인 (복합) 명제,’ 바꿔 말하면 ‘틀릴 수 없는 명제’를 뜻한다.[1] 대표적인 예로 ‘A 또는 A가 아니다’를 들 수 있다. A에 어떤 명제가 들어가도, ‘A 또는 A가 아니다’는 언제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A가 ‘회화는 시각 예술이다’라면, ‘A 또는 A가 아니다’는 맞는 말이다, 회화는 실제로 시각 예술이니까. 반면 A가 ‘회화는 코끼리의 조상이다’라면, ‘A가 아니다’가 참이 되기 때문에 ‘A 또는 A가 아니다’ 또한 참이 된다. 즉 A의 진릿값에 관계없이, ‘A 또는 A가 아니다’는 언제나 참이다.
그런데 A의 진릿값 자체가 모호한 경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선 항진 명제 자체에는 논리학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A가 참인지 아닌지 모호해도, 가령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이고, 그 진릿값이 참 또는 거짓인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A가 ‘우주는 무한하다’라면, 우리가 설사 그 진위 여부를 모른다고 해도, 우주가 무한하거나 무한하지 않은 건 언제나 참이지 않은가. 따라서 적어도 논리학적으로는 항진 명제가 실제로 언제나 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몰리킴의 예술이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항진 명제에 대해 존재론적인, 그리고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사유의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A가 만일 ‘삶은 아름답다’라고 해보자. ‘우주는 무한하다’와 마찬가지로, ‘삶은 아름답다’는 아직 그 절대적인 진릿값이 정해져 있지 않은 명제이며,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따라서 ‘삶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은 언제나 논리학적으로는 참이겠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그 진릿값을 넘어 그 철학적 함의를 찾아가는 여정은 우주의 가시적인 경계,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 존재할지도 모를 비가시적인 영역까지 탐사하는 여정만큼이나 난해하고 도전적일지도 모른다.
몰리킴의 초현실주의에 등장하는 재현의 대상들 가운데 대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일상적이다. 우선 물놀이용 고무 튜브, 생일 파티에 쓰이는 고깔모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각종 장난감 등 인공적인 사물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과 다양한 동식물 등의 생물들도 있으며, 하늘, 태양, 호수 등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보면 전혀 초현실적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구성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작품에 공존하고 있는 방식은 초현실적이다. 가령 〈상징의 숲 no. 16〉(2025)에 등장하는 숲은 나무들의 형태와 색, 숲 속 연못의 형태, 그 숲 속에서 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 그리고 숲 위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손과 구형 물체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생태학적으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가 불가능한 숲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작업은, ‘초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한 시각예술적 표현’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쉽지 않은 듯하다. 가령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의 숲 속에 있는 과자로 만든 집을 헨젤과 그레텔이 발견하는 순간을 생각해보자.[2] 과자로 만든 집이 실제로 존재하는 숲은 없을 테니까, 회화 작가가 이를 동화에 묘사된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분명 초현실주의적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재현에는 논리적인 서사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아이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 특이한 집을 발견했다’라는 명백한 인과적인 서사의 구조가 회화에도 논리적으로 명백히 존재하게 된다. 반면 몰리킴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이런 논리가 뚜렷하지 않다. 이것은 몰리킴의 작업이 동화와 같은, 그러니까 논리적인 서사의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기반으로 삼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다. 즉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앞서 언급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아, 두 아이가 숲 속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했구나’라고 논리정연하게 회화가 묘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반면, 몰리킴의 작업은 좀 더 깊은 숙고를 요구하고, 가장 진지한 숙고조차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귀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생추어리: 상징의 숲 no. 8(좌)와 생추어리 상징의 숲 no. 9
(2024,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각각116.5 × 90.5 cm)
몰리킴의 초현실주의가 갖고 있는 이러한 논리학적 모호함: 이것이 실은 작업의 미학적 광원이고, 그 빛은 작업의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가치를 비춘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예술적 실천이 논리적으로 모호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혀 모호하지 않은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예술가가 그 모호함을 선택하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즉 몰리킴이 모호함을 선택한 사실 자체는 전혀 모호하지 않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예술적 실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를 작업의 형태-의미 관계를 통해 유추해보면, 몰리킴의 작품 세계를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론적인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작업의 의미론적 감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의미의 깨달음이 선택의 인과를 밝히리라.
형태론적으로 볼 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사물들도 고깔모자, 장난감, 물놀이용 고무 튜브 등, 일반적으로 어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놀고 있거나, 호기심이 많은 모습을 하고 있거나,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 함께 등장하는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자연 환경 또한, 가령 숲 또는 사막처럼 사람이 함부로 방문하면 위험할 수 있는 환경 조차, 사람과 동물들에게 위협적인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마치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꾸는 꿈을 시각화한 모습이고, 작업에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파스텔 톤은 그 몽상적인 동시에 유년기/청소년기적 분위기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작업이 전반적인 형태적 차원에서 봤을 때 포-소박파(faux naïf)적인 속성을, 즉 작가의 실제 나이와 다르게 의도적으로 어린 사람이 그린 것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 것 또한 같은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몰리킴은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인이다. 이는 신체적 변화, 삶에 대한 경험적 변화, 그리고 그 둘의 동시 진행으로 인한 복합적인 정서적 변화 등을 필연적으로 함의하는데, 작업의 맥락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육체적으로 혈기왕성하고 삶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며 세상살이의 경험이 다소 부족한 시기인 미성년기의 현실은, 여전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성인에게는 더이상 현실이 아닌 것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세상의 본질에 변화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해도, 그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인 미성년자와 성인은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으며, 이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인식론적인 차이의 생성에도 관여한다: 몰리킴의 작업을 언어로 치환하여 이를 환언하면, 미성년의 현실은 성인에게 초현실인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시간적임을 통찰했다.[3] 그리고 시간은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즉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또한 계속 변화한다. 한편 시간의 동일한 변화가 존재의 동일한 변화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유전적 형질과 생일이 모두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장 및 몸무게 등의 생물학적 특징들이 서로 다소 다르게 변화하고, 세계관과 예술적 취향 등 정신적인 특징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이는 시간의 비가시성에 도전하여 그 가시화를 초현실주의적으로 시도한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는 ‘흐르는 시계’들을 그렸고, 반면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고통의 역사를 그렸다.
또 하나의 초현실주의 작가인 몰리킴 또한 이러한 시간성의 작가로 볼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초현실적 경험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론적인 독창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즉 과거의 현실이었던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필연적으로 초현실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고,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몰리킴의 예술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축 가운데 그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절망에는 다소 특이한 아이러니가 내재한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데 왜 절망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시간 역행의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새처럼 날 수 없다는 불가능성, 돌고래처럼 바다에서 살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리고 북극곰처럼 맨몸으로 혹한을 견딜 수 없는 불가능성 등 우리에게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것은 유독 절망적인 것일까. 우선 육체적 노화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은 유아기부터 성년기의 초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발육, 즉 더욱 강해지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 이후로는 죽는 순간까지 자연적으로 노쇠화를 겪게 되고, 따라서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수반된다. ‘건강을 잃는 건 모든 걸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 역행 불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절망감은 분명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육체적 노화 또한 순수히 자연적인 현상이니, 절망적일 수는 있어도 실망스러운 일은 아니다. 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정신적인 차원은 어떠한가. 그것은 세상에 대한 순진한 이해 또한 점차 성숙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특히 성인기를 충분히 겪은 많은 어른들에게는 그 과정이 즐거움으로만 구성된 역사가 아닐 것이다. 삶의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는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삶에 대한 좌절과 실망을 지속적으로 겪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좌절과 실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발생하며,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육체적 노화와 또 다른 절망과 조우하게 된다.

상징의 숲 no. 2(2023,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118 × 133 cm)
그 절망의 현실 속에서 절망의 초현실적 해체를 제공하는 작가로 우리는 몰리킴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그 불가능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예술을 실천하는 몰리킴: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통찰이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꿈의 생성을 논했다면, 몰리킴은 그 꿈들을 ‘드림 아트(dream art)’로 승화시켜 ‘꿈에서 깬 뒤에도, 아니 오히려 눈을 뜬 상태에서만 꿀 수 있는 평안한 꿈의 시각 예술이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으로 우리의 힘겨운 현실을 어루만진다.[4][5]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이 내 현실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그 서식을 통해 초현실인 동시에 현실이 된다.
[1] 2026년 1월 24일에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항진 명제’를 검색한 결과를 참고하였다.
[2] 그림 동화집 / 야코프 그림, 빌헬름 그림 [공]지음; 이민수 옮김. 서울: 노블마인, 2005.
[3] 존재와 시간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전양범 옮김. 3판. 서울: 동서문화사, 2008.
[4] Lacan et al. Desire and Its Interpretatio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VI / Jacques Lacan; Edited by Jacques-Alain Miller; Translated by Bruce Fink. Cambridge, UK; Medford, MA: Polity, 2019.
[5] 2026년 1월 24일에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dream art’를 검색한 결과를 참고하였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초시간적 초현실주의: 몰리킴에 대하여
안재우, 독립 큐레이터/문화평론가

상징의 숲 no. 15(좌)와 상징의 숲 no. 16(2025,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각각123 × 60.6 cm)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거나 돌아갈 수 없다.
오늘의 삶은 어제의 삶보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
철학에서 ‘항진 명제’란 말 그대로 ‘항상 진인 (복합) 명제,’ 바꿔 말하면 ‘틀릴 수 없는 명제’를 뜻한다.[1] 대표적인 예로 ‘A 또는 A가 아니다’를 들 수 있다. A에 어떤 명제가 들어가도, ‘A 또는 A가 아니다’는 언제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A가 ‘회화는 시각 예술이다’라면, ‘A 또는 A가 아니다’는 맞는 말이다, 회화는 실제로 시각 예술이니까. 반면 A가 ‘회화는 코끼리의 조상이다’라면, ‘A가 아니다’가 참이 되기 때문에 ‘A 또는 A가 아니다’ 또한 참이 된다. 즉 A의 진릿값에 관계없이, ‘A 또는 A가 아니다’는 언제나 참이다.
그런데 A의 진릿값 자체가 모호한 경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선 항진 명제 자체에는 논리학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A가 참인지 아닌지 모호해도, 가령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이고, 그 진릿값이 참 또는 거짓인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A가 ‘우주는 무한하다’라면, 우리가 설사 그 진위 여부를 모른다고 해도, 우주가 무한하거나 무한하지 않은 건 언제나 참이지 않은가. 따라서 적어도 논리학적으로는 항진 명제가 실제로 언제나 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몰리킴의 예술이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항진 명제에 대해 존재론적인, 그리고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사유의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A가 만일 ‘삶은 아름답다’라고 해보자. ‘우주는 무한하다’와 마찬가지로, ‘삶은 아름답다’는 아직 그 절대적인 진릿값이 정해져 있지 않은 명제이며,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따라서 ‘삶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은 언제나 논리학적으로는 참이겠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그 진릿값을 넘어 그 철학적 함의를 찾아가는 여정은 우주의 가시적인 경계,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 존재할지도 모를 비가시적인 영역까지 탐사하는 여정만큼이나 난해하고 도전적일지도 모른다.
몰리킴의 초현실주의에 등장하는 재현의 대상들 가운데 대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일상적이다. 우선 물놀이용 고무 튜브, 생일 파티에 쓰이는 고깔모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각종 장난감 등 인공적인 사물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과 다양한 동식물 등의 생물들도 있으며, 하늘, 태양, 호수 등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보면 전혀 초현실적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구성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작품에 공존하고 있는 방식은 초현실적이다. 가령 〈상징의 숲 no. 16〉(2025)에 등장하는 숲은 나무들의 형태와 색, 숲 속 연못의 형태, 그 숲 속에서 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 그리고 숲 위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손과 구형 물체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생태학적으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가 불가능한 숲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작업은, ‘초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한 시각예술적 표현’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쉽지 않은 듯하다. 가령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의 숲 속에 있는 과자로 만든 집을 헨젤과 그레텔이 발견하는 순간을 생각해보자.[2] 과자로 만든 집이 실제로 존재하는 숲은 없을 테니까, 회화 작가가 이를 동화에 묘사된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분명 초현실주의적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재현에는 논리적인 서사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아이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 특이한 집을 발견했다’라는 명백한 인과적인 서사의 구조가 회화에도 논리적으로 명백히 존재하게 된다. 반면 몰리킴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이런 논리가 뚜렷하지 않다. 이것은 몰리킴의 작업이 동화와 같은, 그러니까 논리적인 서사의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기반으로 삼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다. 즉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앞서 언급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아, 두 아이가 숲 속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했구나’라고 논리정연하게 회화가 묘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반면, 몰리킴의 작업은 좀 더 깊은 숙고를 요구하고, 가장 진지한 숙고조차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귀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생추어리: 상징의 숲 no. 8(좌)와 생추어리 상징의 숲 no. 9
(2024,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각각116.5 × 90.5 cm)
몰리킴의 초현실주의가 갖고 있는 이러한 논리학적 모호함: 이것이 실은 작업의 미학적 광원이고, 그 빛은 작업의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가치를 비춘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예술적 실천이 논리적으로 모호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혀 모호하지 않은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예술가가 그 모호함을 선택하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즉 몰리킴이 모호함을 선택한 사실 자체는 전혀 모호하지 않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예술적 실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를 작업의 형태-의미 관계를 통해 유추해보면, 몰리킴의 작품 세계를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론적인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작업의 의미론적 감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의미의 깨달음이 선택의 인과를 밝히리라.
형태론적으로 볼 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사물들도 고깔모자, 장난감, 물놀이용 고무 튜브 등, 일반적으로 어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놀고 있거나, 호기심이 많은 모습을 하고 있거나,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 함께 등장하는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자연 환경 또한, 가령 숲 또는 사막처럼 사람이 함부로 방문하면 위험할 수 있는 환경 조차, 사람과 동물들에게 위협적인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마치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꾸는 꿈을 시각화한 모습이고, 작업에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파스텔 톤은 그 몽상적인 동시에 유년기/청소년기적 분위기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작업이 전반적인 형태적 차원에서 봤을 때 포-소박파(faux naïf)적인 속성을, 즉 작가의 실제 나이와 다르게 의도적으로 어린 사람이 그린 것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 것 또한 같은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몰리킴은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인이다. 이는 신체적 변화, 삶에 대한 경험적 변화, 그리고 그 둘의 동시 진행으로 인한 복합적인 정서적 변화 등을 필연적으로 함의하는데, 작업의 맥락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육체적으로 혈기왕성하고 삶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며 세상살이의 경험이 다소 부족한 시기인 미성년기의 현실은, 여전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성인에게는 더이상 현실이 아닌 것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세상의 본질에 변화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해도, 그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인 미성년자와 성인은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으며, 이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인식론적인 차이의 생성에도 관여한다: 몰리킴의 작업을 언어로 치환하여 이를 환언하면, 미성년의 현실은 성인에게 초현실인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시간적임을 통찰했다.[3] 그리고 시간은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즉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또한 계속 변화한다. 한편 시간의 동일한 변화가 존재의 동일한 변화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유전적 형질과 생일이 모두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장 및 몸무게 등의 생물학적 특징들이 서로 다소 다르게 변화하고, 세계관과 예술적 취향 등 정신적인 특징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이는 시간의 비가시성에 도전하여 그 가시화를 초현실주의적으로 시도한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는 ‘흐르는 시계’들을 그렸고, 반면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고통의 역사를 그렸다.
또 하나의 초현실주의 작가인 몰리킴 또한 이러한 시간성의 작가로 볼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초현실적 경험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론적인 독창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즉 과거의 현실이었던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필연적으로 초현실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고,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몰리킴의 예술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축 가운데 그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절망에는 다소 특이한 아이러니가 내재한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데 왜 절망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시간 역행의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새처럼 날 수 없다는 불가능성, 돌고래처럼 바다에서 살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리고 북극곰처럼 맨몸으로 혹한을 견딜 수 없는 불가능성 등 우리에게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것은 유독 절망적인 것일까. 우선 육체적 노화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은 유아기부터 성년기의 초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발육, 즉 더욱 강해지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 이후로는 죽는 순간까지 자연적으로 노쇠화를 겪게 되고, 따라서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수반된다. ‘건강을 잃는 건 모든 걸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 역행 불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절망감은 분명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육체적 노화 또한 순수히 자연적인 현상이니, 절망적일 수는 있어도 실망스러운 일은 아니다. 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정신적인 차원은 어떠한가. 그것은 세상에 대한 순진한 이해 또한 점차 성숙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특히 성인기를 충분히 겪은 많은 어른들에게는 그 과정이 즐거움으로만 구성된 역사가 아닐 것이다. 삶의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는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삶에 대한 좌절과 실망을 지속적으로 겪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좌절과 실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발생하며,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육체적 노화와 또 다른 절망과 조우하게 된다.

상징의 숲 no. 2(2023,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118 × 133 cm)
그 절망의 현실 속에서 절망의 초현실적 해체를 제공하는 작가로 우리는 몰리킴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그 불가능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예술을 실천하는 몰리킴: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통찰이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꿈의 생성을 논했다면, 몰리킴은 그 꿈들을 ‘드림 아트(dream art)’로 승화시켜 ‘꿈에서 깬 뒤에도, 아니 오히려 눈을 뜬 상태에서만 꿀 수 있는 평안한 꿈의 시각 예술이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으로 우리의 힘겨운 현실을 어루만진다.[4][5]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이 내 현실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그 서식을 통해 초현실인 동시에 현실이 된다.
[1] 2026년 1월 24일에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항진 명제’를 검색한 결과를 참고하였다.
[2] 그림 동화집 / 야코프 그림, 빌헬름 그림 [공]지음; 이민수 옮김. 서울: 노블마인, 2005.
[3] 존재와 시간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전양범 옮김. 3판. 서울: 동서문화사, 2008.
[4] Lacan et al. Desire and Its Interpretatio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VI / Jacques Lacan; Edited by Jacques-Alain Miller; Translated by Bruce Fink. Cambridge, UK; Medford, MA: Polity, 2019.
[5] 2026년 1월 24일에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dream art’를 검색한 결과를 참고하였다.
2026.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