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기고했던 글입니다.
이제 지역은 나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오늘날 우리가 그려야 할 지역 예술의 지형도는 경계로만 이루어진 지도 위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대가 작가들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도 전국의 여러 도시들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하며 기존 작업실을 오가는 방식이 보편화된 것이다. 평일엔 레지던시 일정을 맞추고 주말엔 작업실이나 지역에 돌아와 다른 일정을 소화한다. 하물며 작가들의 작업 또한 특정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 동네 카페에서 들리는 사적인 대화, 낯선 도시의 특이한 간판, 이동 중 스치는 풍경 등 다양한 환경과 이웃하며 형성된다. 어느새 장소는 고정된 배경을 넘어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생성하고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역은 지도 상의 좌표가 아니라 오늘의 미술 생태계를 다른 관점으로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범례로 봐야하지 않을까.
2.
하지만 지역이 새로운 주체로서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언어와 제도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변화의 시도가 없었다거나, 모두 무의미하단 것도 아니다. 주지하듯 최근 한국의 문화 정책은 지역 예술을 주요 의제로 삼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럼에도 제도의 노력은 현장의 실제 시간과 조건에 닿지 못한 채 겉돌 때가 많다. 서류화된 정책이 전국에 배포되는 동안, 예술은 더 빠른 속도로 다른 세계선에서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어긋남은 정책과 현장의 속도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 방식이 충돌하며 생기는 구조적 간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구조적 간극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 S를 제도가 호명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대구에 주된 작업실을, 고양시에 또 다른 거점을 두고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다. 즉 작가 S의 삶과 작업은 대구, 고양, 서울 등 최소 세 개 이상의 도시를 가로지르며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도는 여전히 그를 ‘대구 작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작가 S의 사례는 ‘지역 작가’나 ‘지역 기반 전시’같은 낡은 호명이 얼마나 관성적으로 쓰여왔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복합적인 삶을 ‘대구 작가’라는 말로 압축하고 재단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역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현실과 어긋난 언어는 예술적 실천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게 하고 그 방황의 끝에서도 ‘지역’이라는 모호한 단어와 또 다시 씨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생각해보면, '지역'이란 단어는 너무도 자주 쓰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다의성을 '지역 작가', '지역 미술'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될 때 비롯된다. 그것이 장소를 가리키다가도 정책적 범위나 제도적 지원 체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복수의 장소를 오가며 다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가운데, ‘지역’이라는 불안정한 단어는 예술 실천의 맥락과 서사를 상실하게 만드는 위험을 동반한다. 작가의 사유, 태도, 이미지가 한 장소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장소에서의 시간, 관계, 기억들이 겹쳐져 형성되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기에 지역이라는 기표는 기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담아낼 수 없게 하는 상황의 배후에는 결국 '지역'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은 언제나 하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번역’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범인 번역은 어떻게 이런 혼란을 만들어냈을까. 그 범행(?)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가 겪은 압축된 근대화 과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개념과 제도를 빠르게 이식해왔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단어가 원어의 복잡한 함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번역·수용되었던 것이다. 지역이란 단어를 둘러싼 혼란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서구로부터 수용되어 '지역'으로 번역된 단어는 'region'과 'local'이라는 두 개의 다른 개념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쓰임은 전혀 다르다. region은 행정 단위나 정책 구획처럼 제도적 구분에 가깝고, local은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경험이 쌓이는 생활의 단위다. 지역성을 논할 때 이 두 용법이 뒤섞이면 작업의 맥락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지역 기반 예술'이라는 표현에서 '지역'은 주로 정책 문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기에 region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의 체류나 관계 형성을 중심으로 말할 때는 local의 의미로 접근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지역성(locality)’은 특정 장소의 시간과 관계의 흔적을 읽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성’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장소'라는 단어에서 비롯한다. '지역'이 그랬듯 '장소' 또한 우리말에서는 하나로 통칭되지만, 본래는 'site'와 'place'라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품고 있다. 'site'가 지도 위의 좌표처럼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위치를 가리킨다면, 'place'는 그곳에 우리의 경험, 기억, 감정이 얽혀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자리를 의미한다. 새로 이사온 집이 site라면, 그곳에 살며 온기가 스민 집은 place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온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보니 이 집을 어떻게 '특정'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운명의 데스티니'처럼 피어올랐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혼돈의 카오스'가 발생하게 된다.
우습게도 이러한 혼란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 'site-specific'이라는 용어가 처음 통용될 때만 해도 그 의미는 명료했었다. 바로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 1981)>와 같이 작품이 놓인 물리적 장소(site)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작업을 지시했었다. 작품을 옮기는 순간 작품의 의미도 파괴되는 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미원의 저서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 2002)』과 관련한 논의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은 꼬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site-specific'이 더 이상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나 역사적 담론 등 비물질적 맥락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고 분석했는데, 문제는 이 확장된 의미마저도 기존의 번역어인 '장소 특정성'으로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어 'site'의 건조한 물리성을 온전히 담아낼 마땅한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었기에 경험과 기억의 의미까지 품는 '장소'란 단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용어가 전혀 다른 맥락을 함께 지시하게 되면서 리처드 세라로 대표되는 장소 특정성의 급진적인 의미, 즉 제도를 벗어나려 했던 물리적 저항은 점차 희석되고 더 포괄적인 후자의 의미가 전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물리성에 기반한 작업과 담론에 기반한 작업을 동일한 용어로 뭉뚱그리면서 비평의 언어를 무뎌지게 했고, 용어의 미술사적 맥락은 삭제된 채 오독의 위험마저 따르게 되었다. 방심하는 순간 '장소 특정성'이란 단어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못하는, 기의 없는 기표로 전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이 혼란 속에서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던 사람은 번역된 언어로만 세계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다.
대상을 잃어버린 기표의 손을 잡고 기의를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맞춰온 개념의 지도에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야 한다. 바로 '장소성(place-specificity)'과 '지역성(locality)'을 구분하는 것이다. 장소성이 특정 지역의 사투리나 음식, 혹은 제주의 현무암처럼 그곳을 대표하는 고유한 지리적 특질이라면, 지역성은 그 장소에 머물며 형성된 관계와 기억, 즉 공간과 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장소성이 공간의 '발견'에 가깝다면 지역성은 공간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을 둘러싼 제도, 비평, 기획 등을 살펴보면 여전히 이 개념들을 구분하지 않은 채 뒤섞어 쓰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용어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해석의 폭은 좁아지고 언어는 실천을 담아내지 못한 채 겉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기존의 개념어들이 작동하는 맥락과 전제를 실제 예술 현장의 구체적인 실천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지역 미술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와 같이 지역을 고정된 틀로 규정하려는 낡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질문 자체가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서 새로운 예술 실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가치를 어떻게 탐색할 것인가에 대한 출발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4.
그 출발점에서 가장 가까운 실천의 현장은 아마도 레지던시가 아닐까.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쳤음에도 레지던시가 여전히 창작 공간 제공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짙지만 오늘날의 레지던시는 작가에게도 지역에게도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작업 공간 같은 물리적 환경보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형성된 상호작용이 작업의 서사나 구조를 바꿀 만큼 강한 에너지를 지니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의 여러 레지던시에서 많은 작가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 몇몇 작가들의 작업 안에서 공통적으로 호출되는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제주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대구에서 만난 작가 K와 광주에서 만난 작가 I였다. 이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시기별 작업의 변화를 살폈지만 두 작가 모두 본래의 맥락과 형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세계관이 뚜렷한 작가들이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의 작업에서 간헐적이나마 제주의 감각이 부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작가의 경험과 사유는 달랐지만 그곳에서의 체류가 단발적인 경험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시간은 여전히 작업 안에 잔류해 있었다. 장소는 이처럼 작가의 체류 이후에도 서사로 호출되어 작품에 머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울산의 레지던시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에서는 장소의 고유한 성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역성이 생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입주 작가뿐 아니라 과거 거쳐간 작가들 또한 이곳을 좋은 기억으로 언급했다. 이는 울산이 가진 특별한 장소성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이유가 있었다. 소금나루의 진짜 힘은 도시의 장소성이나 시설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기관 스스로 연구하고 기획한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지역성을 생성하는 데 있었다. 천안에서 만난 작가 J 또한 다양한 기회와 동력을 소금나루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울산은 광역시임에도 지역 내 작가층이 비교적 얇은 도시이다. 그러나 이 레지던시가 작가 유입의 관문으로 기능하면서 입주(했던) 작가들은 울산이 연고지가 아니어도 지역 전시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지역은 체류했던 이를 외부자로 남겨두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구조를 재편해가고 있었다.
이렇듯 레지던시는 이방인이었던 작가와의 관계를 통해 비어있던 서사가 채워지며 특정적 장소로 변모하고 나아가 새로운 지역성이 생성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레지던시가 지역성과 장소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중요한 거점이라는 점도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레지던시는 작가에게 그저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제도를 넘어 지역과 예술, 사람이 만나는 새로운 관계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5.
한 명의 작가가 이방인으로서 장소와 관계를 맺고 그곳을 고유한 기억이 깃든 장소로 바꾸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서사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의미한 예술 실천이 언제나 개인의 신화로만 견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의 태도가 실천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뒤를 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바로 이 조건 자체를 설계하려는 제도의 움직임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설계의 방식은 무엇일까. 오늘날 주목할 만한 제도의 움직임은 결과를 규정하기보다 가능성을 여는 데 집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술적 사건이 성공적으로 발생하도록 판을 깔아둘 뿐 결과물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제도의 역할은 가용 가능한 조건(공간, 시간, 자원)을 최대한 마련해 예술인에게 제공하는 것, 딱 거기까지다. 물론 정책을 구성할 때 일정한 기대 효과를 상정하겠지만 실천의 과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조건은 주어지되 결과는 열려 있는 이 불확정적 실험 속에서 제도와 예술인은 모두 고양이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슈뢰딩거가 만약 고양이가 아닌 개를 택했다면 예술계의 운명은 정말로 개 같은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확정적 실험을 가장 과감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바로 대구의 ‘실험적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기획자 중심의 지원 프로그램으로 팀당 8천만 원이라는 규모의 예산을 배정한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기획자들의 상상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규모다. 그럼에도 주최 측인 예술발전소는 판을 깔아줄 뿐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 선정의 전권을 위임하며 어떤 기획자가 뽑힐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이후 선정된 기획자가 어떤 작가를 초대하고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이는 기관의 명운까지 건 과감한 실험인 셈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용감한 설계의 의의에 있다. ‘지역 사업’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행정구역으로의 지역이나 그곳의 고유한 장소성에 대한 강박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대신 이 사업은 지리적 기반이 아닌 기획의 주제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인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성’ 자체를 신뢰하고 기다린다. 이는 여러 전시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기획이라는 실천을 하나의 독립된 매체로 상정하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실험의 과정 자체가 결과물과 무관하게 새로운 지역성을 구축하는 또 하나의 예술적 실천이 된다.
또 다른 지역성 구축의 방식은 대전의 ‘아티언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과학기술 연구기관과 예술인을 매칭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는 지리적 근접성이나 도시의 특성이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지적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독특하고 유동적인 지역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업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구조가 매년 변한다는 데 있다. 주제와 협업 기관이 바뀌면 예술인의 참여 방식도 새롭게 조정된다. 이는 제도가 고정된 형식을 반복하지 않고 실험의 조건 자체를 매번 새롭게 제시해 예술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유도하는 설계 방식이다.
두 도시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제도가 지역성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은 닮아 있다. 이들은 행정구역으로서의 지역이나 장소성에 얽매이지 않고 유동적인 조건과 관계의 설계를 통해 예술이 전개될 새로운 장소를 구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예술인을 지원하는 수동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지역성을 상상하고, 어떤 만남을 설계하며, 어떤 유연성을 허용하는가이다. 오늘날 지역의 제도들은 점차 구조를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고 있다.
6.
작가 개인의 실천이든 제도의 과감한 실험이든 오늘날 흥미로운 예술 실천은 공통적으로 ‘장소’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힘을 보인다. 이로써 예술은 장소를 감각하고 서술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이렇게 장소가 예술을 통해 새롭게 말해지고 기억되며 재구성되는 가장 큰 규모가 비엔날레이다. 도시가 가진 고유한 장소성을 재료로, 도시 전체를 거대한 전시장으로 삼아 그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간다. 예컨대 광주는 도시가 품은 역사적 기억과 감정을, 부산은 항구 도시 특유의 이질성과 혼종성을 각자의 장소성으로 삼아 전시를 구성해왔다. 그렇게 비엔날레의 작품들이 서로 이웃되어 도시의 기억과 감정이 또 다른 서사로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를 감각의 서사로 바꾸는 힘이 비엔날레처럼 거대한 예산과 인프라를 전제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일수록, 예술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회성 프로젝트가 지속성을 획득하며 장소에 스며들고 공동체와 함께 호흡하는 실천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땅을 서사가 발생하고 머무는 장소로 바꾸는 사례로 말이다.
구미는 이러한 빈 땅에 첫 서사를 새겨 넣는 출발점에 가까운 도시라 할 수 있다. 2024년 문화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술 기반의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하기 시작했다. 기획과 정책, 실천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며, 제도와 실천이 간극 없이 맞물려 움직이는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오시장과 금리단길 등 아직 문화 인프라가 조밀하지 않은 도시 곳곳에 예술이 스며들며 그곳을 새로운 기억을 지니는 장소로 바꾸고 있다. 예술은 이처럼 어떤 규정에도 속하지 않은 공간에 개입할 때 그 개입은 실천이자 장소의 역사가 된다.
다른 사례로, 의성군 안계면의 ‘안성예탕’은 제도와 실천이 이상적으로 결합한 모델을 보여준다. 폐업으로 기능은 멈췄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던 오래된 목욕탕에서 출발했다. 의성군의 선제적인 지원이 마중물이 되어 청년 예술인들의 예술 실천을 끌어냈다는 점까지는 다른 지역의 시도들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안성예탕의 서사는 그 단발적 사건이 ‘안계미술관’이라는 지속가능한 구조로 이어지고 행정이 이를 꾸준히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이는 제도의 지원이 어떻게 예술인의 ‘관계 맺기’를 촉발해, 버려진 site를 새로운 place로 탄생시키고 그 결과물이 지역성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엔날레부터 구미와 의성에 이르기까지의 사례들은 규모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예술이 어떻게 장소를 말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언어임을 보여준다. 예술이 장소를 말한다는 것은 그곳이 어떻게 기억되고 무엇으로 다시 호출되며 이후 어떤 관계로 이웃되는가를 구성하는 행위이다. 이 구성 방식이 반복되고 축적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지역을 지도 위의 좌표가 아닌, 잊을 수 없는 감각의 총체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7.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의 지역 예술이 고정된 장소의 특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소를 가로지르는 실천 속에서 새롭게 지역성을 획득하는 과정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쌓아 올린 감각은 생각보다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어렵게 구축된 지역성을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이으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먼저, 소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록'이다. 일반적인 예술 아카이빙은 결과물과 가시적 성과에 집중하지만, 제주에서의 '감각'이나 울산의 '유대'는 정형화된 서류로는 포착할 수 없다. 기획의 맥락과 현장의 공기, 참여자들의 상호작용까지 담아낼 수 있는 아카이빙이 구체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건을 텍스트나 이미지로 온전히 환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기록은 그것이 완전히 잊히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록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기록이 아무리 충실해도 이를 풀어낼 언어가 모호하면 의미는 흩어지기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해석은 성패를 가르는 평가가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되짚는 '질문'에 있다. 물론 '왜, 지금, 여기에서'와 같은 비평적 질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부 참여자들의 자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 즉 안과 밖의 질문이 교차하고 사유가 언어화될 때 단발적 사건은 지속성을 매개하는 서사로 전환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은 고립을 넘나드는 ‘연결’의 유연함이다. 고립을 곧 도태와 소멸로 여길 수 있으나, 적당한 고립은 지역의 고유한 서사를 만드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지역 개념은 행정구역이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 실천을 가두어왔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연결이다. 이 연결은 지역 간의 동일한 목표를 전제하지 않아야 한다. 각자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 필요한 지점에서 잠시 겹치고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의 관계면 충분하다. 타 지역 주제에 대한 관심, '비슷한' 문제의식의 공유, '비정기적' 대화의 흐름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계야말로 실천들이 고립되어 소모되는 것을 막고 지속성이 지치지 않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기록, 해석, 연결은 지역성을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기록은 소멸에 저항하고, 해석은 기록에 질서를 부여하며, 연결은 고립을 넘나들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장소에 깃든 서사를 기록하고 해석할 때, 장소는 지역성을 지닌 지역이 된다. 이 지역들이 서로 유연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지역 예술의 지형도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6.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아트인컬처 기고했던 글입니다.
이제 지역은 나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오늘날 우리가 그려야 할 지역 예술의 지형도는 경계로만 이루어진 지도 위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대가 작가들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도 전국의 여러 도시들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하며 기존 작업실을 오가는 방식이 보편화된 것이다. 평일엔 레지던시 일정을 맞추고 주말엔 작업실이나 지역에 돌아와 다른 일정을 소화한다. 하물며 작가들의 작업 또한 특정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 동네 카페에서 들리는 사적인 대화, 낯선 도시의 특이한 간판, 이동 중 스치는 풍경 등 다양한 환경과 이웃하며 형성된다. 어느새 장소는 고정된 배경을 넘어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생성하고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역은 지도 상의 좌표가 아니라 오늘의 미술 생태계를 다른 관점으로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범례로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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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역이 새로운 주체로서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언어와 제도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변화의 시도가 없었다거나, 모두 무의미하단 것도 아니다. 주지하듯 최근 한국의 문화 정책은 지역 예술을 주요 의제로 삼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럼에도 제도의 노력은 현장의 실제 시간과 조건에 닿지 못한 채 겉돌 때가 많다. 서류화된 정책이 전국에 배포되는 동안, 예술은 더 빠른 속도로 다른 세계선에서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어긋남은 정책과 현장의 속도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 방식이 충돌하며 생기는 구조적 간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구조적 간극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 S를 제도가 호명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대구에 주된 작업실을, 고양시에 또 다른 거점을 두고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다. 즉 작가 S의 삶과 작업은 대구, 고양, 서울 등 최소 세 개 이상의 도시를 가로지르며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도는 여전히 그를 ‘대구 작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작가 S의 사례는 ‘지역 작가’나 ‘지역 기반 전시’같은 낡은 호명이 얼마나 관성적으로 쓰여왔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복합적인 삶을 ‘대구 작가’라는 말로 압축하고 재단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역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현실과 어긋난 언어는 예술적 실천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게 하고 그 방황의 끝에서도 ‘지역’이라는 모호한 단어와 또 다시 씨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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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지역'이란 단어는 너무도 자주 쓰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다의성을 '지역 작가', '지역 미술'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될 때 비롯된다. 그것이 장소를 가리키다가도 정책적 범위나 제도적 지원 체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복수의 장소를 오가며 다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가운데, ‘지역’이라는 불안정한 단어는 예술 실천의 맥락과 서사를 상실하게 만드는 위험을 동반한다. 작가의 사유, 태도, 이미지가 한 장소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장소에서의 시간, 관계, 기억들이 겹쳐져 형성되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기에 지역이라는 기표는 기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담아낼 수 없게 하는 상황의 배후에는 결국 '지역'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은 언제나 하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번역’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범인 번역은 어떻게 이런 혼란을 만들어냈을까. 그 범행(?)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가 겪은 압축된 근대화 과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개념과 제도를 빠르게 이식해왔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단어가 원어의 복잡한 함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번역·수용되었던 것이다. 지역이란 단어를 둘러싼 혼란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서구로부터 수용되어 '지역'으로 번역된 단어는 'region'과 'local'이라는 두 개의 다른 개념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쓰임은 전혀 다르다. region은 행정 단위나 정책 구획처럼 제도적 구분에 가깝고, local은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경험이 쌓이는 생활의 단위다. 지역성을 논할 때 이 두 용법이 뒤섞이면 작업의 맥락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지역 기반 예술'이라는 표현에서 '지역'은 주로 정책 문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기에 region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의 체류나 관계 형성을 중심으로 말할 때는 local의 의미로 접근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지역성(locality)’은 특정 장소의 시간과 관계의 흔적을 읽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성’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장소'라는 단어에서 비롯한다. '지역'이 그랬듯 '장소' 또한 우리말에서는 하나로 통칭되지만, 본래는 'site'와 'place'라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품고 있다. 'site'가 지도 위의 좌표처럼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위치를 가리킨다면, 'place'는 그곳에 우리의 경험, 기억, 감정이 얽혀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자리를 의미한다. 새로 이사온 집이 site라면, 그곳에 살며 온기가 스민 집은 place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온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보니 이 집을 어떻게 '특정'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운명의 데스티니'처럼 피어올랐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혼돈의 카오스'가 발생하게 된다.
우습게도 이러한 혼란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 'site-specific'이라는 용어가 처음 통용될 때만 해도 그 의미는 명료했었다. 바로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 1981)>와 같이 작품이 놓인 물리적 장소(site)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작업을 지시했었다. 작품을 옮기는 순간 작품의 의미도 파괴되는 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미원의 저서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 2002)』과 관련한 논의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은 꼬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site-specific'이 더 이상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나 역사적 담론 등 비물질적 맥락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고 분석했는데, 문제는 이 확장된 의미마저도 기존의 번역어인 '장소 특정성'으로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어 'site'의 건조한 물리성을 온전히 담아낼 마땅한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었기에 경험과 기억의 의미까지 품는 '장소'란 단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용어가 전혀 다른 맥락을 함께 지시하게 되면서 리처드 세라로 대표되는 장소 특정성의 급진적인 의미, 즉 제도를 벗어나려 했던 물리적 저항은 점차 희석되고 더 포괄적인 후자의 의미가 전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물리성에 기반한 작업과 담론에 기반한 작업을 동일한 용어로 뭉뚱그리면서 비평의 언어를 무뎌지게 했고, 용어의 미술사적 맥락은 삭제된 채 오독의 위험마저 따르게 되었다. 방심하는 순간 '장소 특정성'이란 단어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못하는, 기의 없는 기표로 전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이 혼란 속에서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던 사람은 번역된 언어로만 세계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다.
대상을 잃어버린 기표의 손을 잡고 기의를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맞춰온 개념의 지도에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야 한다. 바로 '장소성(place-specificity)'과 '지역성(locality)'을 구분하는 것이다. 장소성이 특정 지역의 사투리나 음식, 혹은 제주의 현무암처럼 그곳을 대표하는 고유한 지리적 특질이라면, 지역성은 그 장소에 머물며 형성된 관계와 기억, 즉 공간과 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장소성이 공간의 '발견'에 가깝다면 지역성은 공간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을 둘러싼 제도, 비평, 기획 등을 살펴보면 여전히 이 개념들을 구분하지 않은 채 뒤섞어 쓰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용어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해석의 폭은 좁아지고 언어는 실천을 담아내지 못한 채 겉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기존의 개념어들이 작동하는 맥락과 전제를 실제 예술 현장의 구체적인 실천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지역 미술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와 같이 지역을 고정된 틀로 규정하려는 낡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질문 자체가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서 새로운 예술 실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가치를 어떻게 탐색할 것인가에 대한 출발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4.
그 출발점에서 가장 가까운 실천의 현장은 아마도 레지던시가 아닐까.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쳤음에도 레지던시가 여전히 창작 공간 제공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짙지만 오늘날의 레지던시는 작가에게도 지역에게도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작업 공간 같은 물리적 환경보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형성된 상호작용이 작업의 서사나 구조를 바꿀 만큼 강한 에너지를 지니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의 여러 레지던시에서 많은 작가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 몇몇 작가들의 작업 안에서 공통적으로 호출되는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제주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대구에서 만난 작가 K와 광주에서 만난 작가 I였다. 이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시기별 작업의 변화를 살폈지만 두 작가 모두 본래의 맥락과 형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세계관이 뚜렷한 작가들이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의 작업에서 간헐적이나마 제주의 감각이 부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작가의 경험과 사유는 달랐지만 그곳에서의 체류가 단발적인 경험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시간은 여전히 작업 안에 잔류해 있었다. 장소는 이처럼 작가의 체류 이후에도 서사로 호출되어 작품에 머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울산의 레지던시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에서는 장소의 고유한 성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역성이 생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입주 작가뿐 아니라 과거 거쳐간 작가들 또한 이곳을 좋은 기억으로 언급했다. 이는 울산이 가진 특별한 장소성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이유가 있었다. 소금나루의 진짜 힘은 도시의 장소성이나 시설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기관 스스로 연구하고 기획한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지역성을 생성하는 데 있었다. 천안에서 만난 작가 J 또한 다양한 기회와 동력을 소금나루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울산은 광역시임에도 지역 내 작가층이 비교적 얇은 도시이다. 그러나 이 레지던시가 작가 유입의 관문으로 기능하면서 입주(했던) 작가들은 울산이 연고지가 아니어도 지역 전시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지역은 체류했던 이를 외부자로 남겨두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구조를 재편해가고 있었다.
이렇듯 레지던시는 이방인이었던 작가와의 관계를 통해 비어있던 서사가 채워지며 특정적 장소로 변모하고 나아가 새로운 지역성이 생성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레지던시가 지역성과 장소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중요한 거점이라는 점도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레지던시는 작가에게 그저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제도를 넘어 지역과 예술, 사람이 만나는 새로운 관계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5.
한 명의 작가가 이방인으로서 장소와 관계를 맺고 그곳을 고유한 기억이 깃든 장소로 바꾸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서사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의미한 예술 실천이 언제나 개인의 신화로만 견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의 태도가 실천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뒤를 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바로 이 조건 자체를 설계하려는 제도의 움직임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설계의 방식은 무엇일까. 오늘날 주목할 만한 제도의 움직임은 결과를 규정하기보다 가능성을 여는 데 집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술적 사건이 성공적으로 발생하도록 판을 깔아둘 뿐 결과물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제도의 역할은 가용 가능한 조건(공간, 시간, 자원)을 최대한 마련해 예술인에게 제공하는 것, 딱 거기까지다. 물론 정책을 구성할 때 일정한 기대 효과를 상정하겠지만 실천의 과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조건은 주어지되 결과는 열려 있는 이 불확정적 실험 속에서 제도와 예술인은 모두 고양이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슈뢰딩거가 만약 고양이가 아닌 개를 택했다면 예술계의 운명은 정말로 개 같은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확정적 실험을 가장 과감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바로 대구의 ‘실험적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기획자 중심의 지원 프로그램으로 팀당 8천만 원이라는 규모의 예산을 배정한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기획자들의 상상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규모다. 그럼에도 주최 측인 예술발전소는 판을 깔아줄 뿐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 선정의 전권을 위임하며 어떤 기획자가 뽑힐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이후 선정된 기획자가 어떤 작가를 초대하고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이는 기관의 명운까지 건 과감한 실험인 셈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용감한 설계의 의의에 있다. ‘지역 사업’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행정구역으로의 지역이나 그곳의 고유한 장소성에 대한 강박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대신 이 사업은 지리적 기반이 아닌 기획의 주제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인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성’ 자체를 신뢰하고 기다린다. 이는 여러 전시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기획이라는 실천을 하나의 독립된 매체로 상정하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실험의 과정 자체가 결과물과 무관하게 새로운 지역성을 구축하는 또 하나의 예술적 실천이 된다.
또 다른 지역성 구축의 방식은 대전의 ‘아티언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과학기술 연구기관과 예술인을 매칭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는 지리적 근접성이나 도시의 특성이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지적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독특하고 유동적인 지역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업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구조가 매년 변한다는 데 있다. 주제와 협업 기관이 바뀌면 예술인의 참여 방식도 새롭게 조정된다. 이는 제도가 고정된 형식을 반복하지 않고 실험의 조건 자체를 매번 새롭게 제시해 예술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유도하는 설계 방식이다.
두 도시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제도가 지역성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은 닮아 있다. 이들은 행정구역으로서의 지역이나 장소성에 얽매이지 않고 유동적인 조건과 관계의 설계를 통해 예술이 전개될 새로운 장소를 구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예술인을 지원하는 수동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지역성을 상상하고, 어떤 만남을 설계하며, 어떤 유연성을 허용하는가이다. 오늘날 지역의 제도들은 점차 구조를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고 있다.
6.
작가 개인의 실천이든 제도의 과감한 실험이든 오늘날 흥미로운 예술 실천은 공통적으로 ‘장소’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힘을 보인다. 이로써 예술은 장소를 감각하고 서술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이렇게 장소가 예술을 통해 새롭게 말해지고 기억되며 재구성되는 가장 큰 규모가 비엔날레이다. 도시가 가진 고유한 장소성을 재료로, 도시 전체를 거대한 전시장으로 삼아 그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간다. 예컨대 광주는 도시가 품은 역사적 기억과 감정을, 부산은 항구 도시 특유의 이질성과 혼종성을 각자의 장소성으로 삼아 전시를 구성해왔다. 그렇게 비엔날레의 작품들이 서로 이웃되어 도시의 기억과 감정이 또 다른 서사로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를 감각의 서사로 바꾸는 힘이 비엔날레처럼 거대한 예산과 인프라를 전제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일수록, 예술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회성 프로젝트가 지속성을 획득하며 장소에 스며들고 공동체와 함께 호흡하는 실천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땅을 서사가 발생하고 머무는 장소로 바꾸는 사례로 말이다.
구미는 이러한 빈 땅에 첫 서사를 새겨 넣는 출발점에 가까운 도시라 할 수 있다. 2024년 문화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술 기반의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하기 시작했다. 기획과 정책, 실천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며, 제도와 실천이 간극 없이 맞물려 움직이는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오시장과 금리단길 등 아직 문화 인프라가 조밀하지 않은 도시 곳곳에 예술이 스며들며 그곳을 새로운 기억을 지니는 장소로 바꾸고 있다. 예술은 이처럼 어떤 규정에도 속하지 않은 공간에 개입할 때 그 개입은 실천이자 장소의 역사가 된다.
다른 사례로, 의성군 안계면의 ‘안성예탕’은 제도와 실천이 이상적으로 결합한 모델을 보여준다. 폐업으로 기능은 멈췄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던 오래된 목욕탕에서 출발했다. 의성군의 선제적인 지원이 마중물이 되어 청년 예술인들의 예술 실천을 끌어냈다는 점까지는 다른 지역의 시도들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안성예탕의 서사는 그 단발적 사건이 ‘안계미술관’이라는 지속가능한 구조로 이어지고 행정이 이를 꾸준히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이는 제도의 지원이 어떻게 예술인의 ‘관계 맺기’를 촉발해, 버려진 site를 새로운 place로 탄생시키고 그 결과물이 지역성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엔날레부터 구미와 의성에 이르기까지의 사례들은 규모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예술이 어떻게 장소를 말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언어임을 보여준다. 예술이 장소를 말한다는 것은 그곳이 어떻게 기억되고 무엇으로 다시 호출되며 이후 어떤 관계로 이웃되는가를 구성하는 행위이다. 이 구성 방식이 반복되고 축적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지역을 지도 위의 좌표가 아닌, 잊을 수 없는 감각의 총체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7.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의 지역 예술이 고정된 장소의 특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소를 가로지르는 실천 속에서 새롭게 지역성을 획득하는 과정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쌓아 올린 감각은 생각보다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어렵게 구축된 지역성을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이으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먼저, 소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록'이다. 일반적인 예술 아카이빙은 결과물과 가시적 성과에 집중하지만, 제주에서의 '감각'이나 울산의 '유대'는 정형화된 서류로는 포착할 수 없다. 기획의 맥락과 현장의 공기, 참여자들의 상호작용까지 담아낼 수 있는 아카이빙이 구체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건을 텍스트나 이미지로 온전히 환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기록은 그것이 완전히 잊히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록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기록이 아무리 충실해도 이를 풀어낼 언어가 모호하면 의미는 흩어지기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해석은 성패를 가르는 평가가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되짚는 '질문'에 있다. 물론 '왜, 지금, 여기에서'와 같은 비평적 질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부 참여자들의 자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 즉 안과 밖의 질문이 교차하고 사유가 언어화될 때 단발적 사건은 지속성을 매개하는 서사로 전환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은 고립을 넘나드는 ‘연결’의 유연함이다. 고립을 곧 도태와 소멸로 여길 수 있으나, 적당한 고립은 지역의 고유한 서사를 만드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지역 개념은 행정구역이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 실천을 가두어왔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연결이다. 이 연결은 지역 간의 동일한 목표를 전제하지 않아야 한다. 각자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 필요한 지점에서 잠시 겹치고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의 관계면 충분하다. 타 지역 주제에 대한 관심, '비슷한' 문제의식의 공유, '비정기적' 대화의 흐름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계야말로 실천들이 고립되어 소모되는 것을 막고 지속성이 지치지 않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기록, 해석, 연결은 지역성을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기록은 소멸에 저항하고, 해석은 기록에 질서를 부여하며, 연결은 고립을 넘나들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장소에 깃든 서사를 기록하고 해석할 때, 장소는 지역성을 지닌 지역이 된다. 이 지역들이 서로 유연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지역 예술의 지형도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6.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