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원선금
헤플수록 Happen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직장인의 피는 ‘커피’라고들 한다. 직장인은 커피를 연료 삼아 작동한다. 다행히 내가 근무하는 미술관에는 전자동 커피머신과 훌륭한 원두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커피 맛집으로 이 동네에선 나름 정평이 났다. 그런데 멀쩡한 ‘집 커피’ 두고 종종, 굳이 바깥에서 한잔 사다 빨곤 한다. 커피값이 국밥과 어깨동무하는 이 시국에 말이다.
혼자 사 마신 적은 없다. 후임들과 함께 가거나, 가끔은 학예실에 한 잔씩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집 커피’를 이길 만한 브랜드를 만나기 힘들다. ‘그럼 힘들여 돈 쓴 건 왜?’하고 물으면 글쎄. 잠깐 바람 쐬며 기분 전환? 평소와 다른 음료를 맛보는 재미? 생각해 보면 ‘내가 샀다’라는 타이틀이 사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맛보다는 소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소비의 효용일 수 있겠다.

원선금, Plastic Syndrome_2408, 재활용한 컵, 가변설치, 2024
원선금의 작업을 실물로 처음 접한 건 예술의 전당에서였다. 계단을 오르듯 거대한 사선 형태를 이루며 떼지어 공중에 매달린 수천 개의 투명 플라스틱 커피 용기 뚜껑 설치 작업 〈Plastic Syndrome_2408〉. 뚜껑 곡면을 따라 조명이 굴절하고, 오와 열을 맞춰 일사불란 줄지어 늘어선 뚜껑 군단이 그 빛무리를 바통 터치하듯 줄줄이 반사해 자아내는 근사한 분위기의 설치 미술 작품이다. 동시에 늦은 오전, 저마다 하나쯤 쓰레기통에 내던졌을 일회용품의 하찮은 존재감 사이의 괴리를 즐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걸 전부 주워다 씻어 말려 쓰진 않았겠지? 차라리 몇 박스 벌크로 사다 쓰는 게 더 싸겠네…” 플라스틱 문명의 거대한 징후(syndrome)를 시위하는 듯한 작품을 향해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재활용한 컵이란 맥락과 속성은 이 작업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인가? 일회용품의 재활용이란 사실 없이, 지시성이 비슷한 조형이라면 덜 좋은 작업인가?’

원선금, 재생된 권위, 가변설치, 2025, 출처-대구신문
색색의 초콜릿 포장재로 수십 미터 화려한 문양의 카펫을 짜고, 버려진 의자를 터무니없이 높다랗게 키운 대형 설치 작업 〈재생된 권위〉. 알맹이만 쏙 빼먹고 가차 없이 버린 폐기물을 기워 존귀한 위엄을 흉내내는 역설로, 물질의 계급성에 반기를 들고, 점지한 수명을 거부하고 초월하는 실험이다. ‘동일한 패턴의 대형 출력물로 대체한다면, 작업의 맥락이나 위력에 문제가 생길까?’ 커피 뚜껑을 떠올리며 또 한 번 물었다.
두 작업은 원선금의 작업 리듬을 또렷이 시사한다. 그는 버려진 플라스틱 컵, 껌 상자, 포장재 등 일상에서 쉽게 소비하고 폐기하는 물질을 수집해, 예술적 조형으로 환생시킨다. 쓰임이 다하는 시점이 곧, 쓰임의 새 시작인 셈. 일반적인 의미의 재활용이 산업적 유용성을 추출하는 것과 달리, 쓰레기에서 예쁨을 찾는다는 점에서, ‘예쁜 신상 쓰레기’와 같은 역설적 화법을 감지한다. 싼 게 심폐 소생해 비싸게 부활함에 착안하면, 소비의 흔적, 즉 껍질이 결정하는 값어치를 전복하는 뒤집개로도 볼 수 있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특히 〈Happen 6〉에선, 어릴 때 버스비를 아껴 엄마 몰래 사 먹던 과일 맛 껌, 증명사진만 한 그 작은 껌 상자가 반가웠다. 아직도 나오는 게 신기했다. 그땐 용돈의 종착지로, 지금은 작품으로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라니. 사소한 것이 새삼 근사하게 다가온다면…가만, 원선금의 작업 전반에 보이는 그 박자 아닌가!
조그만 껌 상자 수십 개를 흰 평면에 일목요연 그리드 배열했다. 상자마다 모터와 피지컬 컴퓨팅이 일대일 대응해 미묘하게 움직거린다. 몇몇 상자가 드문드문 시계방향 혹은 반시계 방향으로 옴찔, 아주 조금 돈다. 돌 때마다 톱니바퀴처럼 장단을 맞추는 그림자가 사뭇 기계적이다. 이 꿈틀거림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오브제에 담긴 소비의 일상성과 반복성을 함축한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꿈틀’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변화무쌍해 마치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를 하는 기분이다. 푸르게 칠한 벽면에 이 작품이 여덟 피스나 연달아 걸려 동분서주 천방지축으로 찍찍 돌아가는 앞에 서 있자면 어느 멈춘 상자마저 딸기 맛인들 포도 맛인들 그저 알록달록 아스라하다. 출근길 지옥철이나 쏟아져 나오는 퇴근 행렬을 떠올려 보라. 누군가는 나름 차려 입고 한껏 단장한들 형형색색 인간 파도의 방울방울일 뿐이다. 집합을 이루면 개체는 그렇게 익명화해 ‘요소’로 새로이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그리드 배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딸기, 포도, 멜론, 오렌지가 박힌 껌 상자 저마다의 디자인은 더 이상 독립적인 시각적 서사가 아니라, 원선금의 조형적 장(場)을 정의하는 일종의 ‘색채/형태 단위’로 작용한다.
이미 완성한 것을 다시 완성할 수 있다. 껌 상자, 초콜릿 포장재, 플라스틱 컵을 비롯, 그가 쓰는 ‘재료’는, 현대 제조업의 산물로서, 하나하나가 이미 독립적인 기능과 역할을 지닌 '제품'이자 고도의 완결성을 갖춘 디자인 '작품’이다. 나름의 조형적 총체성을 띤 이들 재료가 예술 작품의 일부로 떼 지어 편입한다. 뜻밖의 자격과 배열 속에 기존의 총체성은 일종의 '점'과 같이 개별 수렴해, 작품이 품은 수많은 요소의 하나로 응축한다. 쓰이고 생명을 다한 총체가, 작가의 창의력과 의지에 힘입어 재조합하고, 또 다른 조형의 일원으로 환생하는바, 전에 없던 '총체성의 총체성'이 탄생하는 것. 정리하자면 집합/조합의 의미는 시각적 수렴이고, 이는 원선금의 조형적 부활을 담당하는 주요 패턴이며, ‘조형이 재료인 조형’인 셈이다. 또한, 쓰고 버릴 때 이들 재료의 물질적 효용은 다하지만, 디자인적 총체성은 잔존한다. 이를 작품의 기본 단위로 인용한다는 점에서, 자원의 산업적인 재활용과는 그 궤를 아예 달리한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입구의 ‘Festival’ 네온사인은 이 모든 역설적 순환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장이 바로 현대 소비 사회임을 짓궂게 선언한다. 그 바탕인 대중적이고 익숙한 재료들, 일상의 오브제(레디 메이드)는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춘다. 레디 메이드의 집합적 조형은 수집의 고생을 동반한다. 작가피셜 ‘긁어모으는 재미와 쌓는 기쁨’이라니, 그건 재능이다.
다만 그로 족하다. 리사이클링 아트가 아니다.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예술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아니다. 사회 참여적 작업이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고 주위를 환기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틀에 원선금을 가두는 것을 반대한다. 사회 운동가가 마침 예술가일 수 있다. 예술가가 사회 운동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둘 중 하나여도 된다. 사명과 의무감에서 유리해 그는 예술가로서 조형에 몰입하고, 관객은 이에 감명받은 사회 운동가로 역할을 나눌까 한다.
2026.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5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원선금
헤플수록 Happen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직장인의 피는 ‘커피’라고들 한다. 직장인은 커피를 연료 삼아 작동한다. 다행히 내가 근무하는 미술관에는 전자동 커피머신과 훌륭한 원두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커피 맛집으로 이 동네에선 나름 정평이 났다. 그런데 멀쩡한 ‘집 커피’ 두고 종종, 굳이 바깥에서 한잔 사다 빨곤 한다. 커피값이 국밥과 어깨동무하는 이 시국에 말이다.
혼자 사 마신 적은 없다. 후임들과 함께 가거나, 가끔은 학예실에 한 잔씩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집 커피’를 이길 만한 브랜드를 만나기 힘들다. ‘그럼 힘들여 돈 쓴 건 왜?’하고 물으면 글쎄. 잠깐 바람 쐬며 기분 전환? 평소와 다른 음료를 맛보는 재미? 생각해 보면 ‘내가 샀다’라는 타이틀이 사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맛보다는 소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소비의 효용일 수 있겠다.

원선금, Plastic Syndrome_2408, 재활용한 컵, 가변설치, 2024
원선금의 작업을 실물로 처음 접한 건 예술의 전당에서였다. 계단을 오르듯 거대한 사선 형태를 이루며 떼지어 공중에 매달린 수천 개의 투명 플라스틱 커피 용기 뚜껑 설치 작업 〈Plastic Syndrome_2408〉. 뚜껑 곡면을 따라 조명이 굴절하고, 오와 열을 맞춰 일사불란 줄지어 늘어선 뚜껑 군단이 그 빛무리를 바통 터치하듯 줄줄이 반사해 자아내는 근사한 분위기의 설치 미술 작품이다. 동시에 늦은 오전, 저마다 하나쯤 쓰레기통에 내던졌을 일회용품의 하찮은 존재감 사이의 괴리를 즐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걸 전부 주워다 씻어 말려 쓰진 않았겠지? 차라리 몇 박스 벌크로 사다 쓰는 게 더 싸겠네…” 플라스틱 문명의 거대한 징후(syndrome)를 시위하는 듯한 작품을 향해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재활용한 컵이란 맥락과 속성은 이 작업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인가? 일회용품의 재활용이란 사실 없이, 지시성이 비슷한 조형이라면 덜 좋은 작업인가?’

원선금, 재생된 권위, 가변설치, 2025, 출처-대구신문
색색의 초콜릿 포장재로 수십 미터 화려한 문양의 카펫을 짜고, 버려진 의자를 터무니없이 높다랗게 키운 대형 설치 작업 〈재생된 권위〉. 알맹이만 쏙 빼먹고 가차 없이 버린 폐기물을 기워 존귀한 위엄을 흉내내는 역설로, 물질의 계급성에 반기를 들고, 점지한 수명을 거부하고 초월하는 실험이다. ‘동일한 패턴의 대형 출력물로 대체한다면, 작업의 맥락이나 위력에 문제가 생길까?’ 커피 뚜껑을 떠올리며 또 한 번 물었다.
두 작업은 원선금의 작업 리듬을 또렷이 시사한다. 그는 버려진 플라스틱 컵, 껌 상자, 포장재 등 일상에서 쉽게 소비하고 폐기하는 물질을 수집해, 예술적 조형으로 환생시킨다. 쓰임이 다하는 시점이 곧, 쓰임의 새 시작인 셈. 일반적인 의미의 재활용이 산업적 유용성을 추출하는 것과 달리, 쓰레기에서 예쁨을 찾는다는 점에서, ‘예쁜 신상 쓰레기’와 같은 역설적 화법을 감지한다. 싼 게 심폐 소생해 비싸게 부활함에 착안하면, 소비의 흔적, 즉 껍질이 결정하는 값어치를 전복하는 뒤집개로도 볼 수 있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특히 〈Happen 6〉에선, 어릴 때 버스비를 아껴 엄마 몰래 사 먹던 과일 맛 껌, 증명사진만 한 그 작은 껌 상자가 반가웠다. 아직도 나오는 게 신기했다. 그땐 용돈의 종착지로, 지금은 작품으로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라니. 사소한 것이 새삼 근사하게 다가온다면…가만, 원선금의 작업 전반에 보이는 그 박자 아닌가!
조그만 껌 상자 수십 개를 흰 평면에 일목요연 그리드 배열했다. 상자마다 모터와 피지컬 컴퓨팅이 일대일 대응해 미묘하게 움직거린다. 몇몇 상자가 드문드문 시계방향 혹은 반시계 방향으로 옴찔, 아주 조금 돈다. 돌 때마다 톱니바퀴처럼 장단을 맞추는 그림자가 사뭇 기계적이다. 이 꿈틀거림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오브제에 담긴 소비의 일상성과 반복성을 함축한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꿈틀’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변화무쌍해 마치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를 하는 기분이다. 푸르게 칠한 벽면에 이 작품이 여덟 피스나 연달아 걸려 동분서주 천방지축으로 찍찍 돌아가는 앞에 서 있자면 어느 멈춘 상자마저 딸기 맛인들 포도 맛인들 그저 알록달록 아스라하다. 출근길 지옥철이나 쏟아져 나오는 퇴근 행렬을 떠올려 보라. 누군가는 나름 차려 입고 한껏 단장한들 형형색색 인간 파도의 방울방울일 뿐이다. 집합을 이루면 개체는 그렇게 익명화해 ‘요소’로 새로이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그리드 배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딸기, 포도, 멜론, 오렌지가 박힌 껌 상자 저마다의 디자인은 더 이상 독립적인 시각적 서사가 아니라, 원선금의 조형적 장(場)을 정의하는 일종의 ‘색채/형태 단위’로 작용한다.
이미 완성한 것을 다시 완성할 수 있다. 껌 상자, 초콜릿 포장재, 플라스틱 컵을 비롯, 그가 쓰는 ‘재료’는, 현대 제조업의 산물로서, 하나하나가 이미 독립적인 기능과 역할을 지닌 '제품'이자 고도의 완결성을 갖춘 디자인 '작품’이다. 나름의 조형적 총체성을 띤 이들 재료가 예술 작품의 일부로 떼 지어 편입한다. 뜻밖의 자격과 배열 속에 기존의 총체성은 일종의 '점'과 같이 개별 수렴해, 작품이 품은 수많은 요소의 하나로 응축한다. 쓰이고 생명을 다한 총체가, 작가의 창의력과 의지에 힘입어 재조합하고, 또 다른 조형의 일원으로 환생하는바, 전에 없던 '총체성의 총체성'이 탄생하는 것. 정리하자면 집합/조합의 의미는 시각적 수렴이고, 이는 원선금의 조형적 부활을 담당하는 주요 패턴이며, ‘조형이 재료인 조형’인 셈이다. 또한, 쓰고 버릴 때 이들 재료의 물질적 효용은 다하지만, 디자인적 총체성은 잔존한다. 이를 작품의 기본 단위로 인용한다는 점에서, 자원의 산업적인 재활용과는 그 궤를 아예 달리한다.

원선금, Happen_6(#1) 껌 상자, 피지컬 컴퓨팅, 90×90cm, 가변설치, 2023-2025
입구의 ‘Festival’ 네온사인은 이 모든 역설적 순환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장이 바로 현대 소비 사회임을 짓궂게 선언한다. 그 바탕인 대중적이고 익숙한 재료들, 일상의 오브제(레디 메이드)는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춘다. 레디 메이드의 집합적 조형은 수집의 고생을 동반한다. 작가피셜 ‘긁어모으는 재미와 쌓는 기쁨’이라니, 그건 재능이다.
다만 그로 족하다. 리사이클링 아트가 아니다.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예술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아니다. 사회 참여적 작업이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고 주위를 환기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틀에 원선금을 가두는 것을 반대한다. 사회 운동가가 마침 예술가일 수 있다. 예술가가 사회 운동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둘 중 하나여도 된다. 사명과 의무감에서 유리해 그는 예술가로서 조형에 몰입하고, 관객은 이에 감명받은 사회 운동가로 역할을 나눌까 한다.
2026.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