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 메타비평 리뷰: 너라면 어쩌겠는가
정희라(큐레이터, 미술평론/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오늘날 예술에는 어떤 비평이나 논평이 바람직할까. 내 말은 예술 작품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묘사하거나 다시 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는 거다. -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은 내용에 대한 과잉 해석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통해 비평이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석의 오만을 경계하고, 형식에 대한 언어를 구축하는 일. 어쩌면 이는 오늘날 비평이 놓치고 있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현학적인 미술 비평은 왜 반복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는가. 단지 텍스트가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고 매개하기보다 작품을 딛고 앞서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희극인 강유미의 ‘도슨트 연기’가 대중적인 공감을 얻은 이유도 정확히 이 지점을 타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평과 해설이 작품 위에 군림하며 지적 허영을 뽐낼 때 발생하는 기묘한 어색함, 즉 ‘해석의 오만’을 통쾌하게 희화화한 장면이었다.
이번 ACK의 메타 비평 원고들은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위치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필자들은 비평을 작품을 ‘앞서는 언어’가 아니라 ‘곁에 머무는 언어’로 상정한다. 조연, 돌봄, 두 번째 슬픔, 아카이브, 허상의 권력. 표현의 결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비평은 결코 작품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비평은 정말 ‘조연’에 불과한가.
이 질문은 비평이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시에서 신이 된 작가, 기획한 전시를 두고 “이거 내 껀데!”라고 말하는 큐레이터,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관을 두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관장. 이 촌극 같은 장면들은 모두 예술계 내부에 깊게 뿌리내린 동일한 구조를 폭로한다. 바로 예술 생산의 장에서 ‘소유’와 ‘주도성’을 둘러싼 권력의 긴장이다. 전시라는 가상의 무대 위에서 저마다 주연이 되려 하는 욕망 속에서, 비평 역시 이 위계적 구조 안에 포섭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의미의 총체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조연’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프레임 자체에 있다. 우리는 흔히 주연과 조연을 권력과 위계의 질서로 이해하지만, 본래 그것은 역할의 구분일 뿐이다. 역할로서의 조연은 중심을 보완하고 전체 구조를 지탱한다. 이는 서열이나 중요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수행하는 고유한 기능의 문제다.
그러므로 비평은 주연도, 조연도 아니다. 그것은 작품에 종속되거나 작품을 대체하는 대신, 작품과 나란히 존재하며 담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인 층위다. 단순한 보조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해석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다.
이 글을 읽는 작가와 기획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딛고 선 예술의 장에서, 진정 주연과 조연의 경계는 그토록 명확한가. 아니면 그것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수용해 온, 낡고 빈곤한 오해에 불과한가.
2026.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ACK 메타비평 리뷰: 너라면 어쩌겠는가
정희라(큐레이터, 미술평론/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오늘날 예술에는 어떤 비평이나 논평이 바람직할까. 내 말은 예술 작품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묘사하거나 다시 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는 거다. -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은 내용에 대한 과잉 해석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통해 비평이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석의 오만을 경계하고, 형식에 대한 언어를 구축하는 일. 어쩌면 이는 오늘날 비평이 놓치고 있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현학적인 미술 비평은 왜 반복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는가. 단지 텍스트가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고 매개하기보다 작품을 딛고 앞서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희극인 강유미의 ‘도슨트 연기’가 대중적인 공감을 얻은 이유도 정확히 이 지점을 타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평과 해설이 작품 위에 군림하며 지적 허영을 뽐낼 때 발생하는 기묘한 어색함, 즉 ‘해석의 오만’을 통쾌하게 희화화한 장면이었다.
이번 ACK의 메타 비평 원고들은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위치와 경험에도 불구하고, 필자들은 비평을 작품을 ‘앞서는 언어’가 아니라 ‘곁에 머무는 언어’로 상정한다. 조연, 돌봄, 두 번째 슬픔, 아카이브, 허상의 권력. 표현의 결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비평은 결코 작품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비평은 정말 ‘조연’에 불과한가.
이 질문은 비평이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시에서 신이 된 작가, 기획한 전시를 두고 “이거 내 껀데!”라고 말하는 큐레이터,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관을 두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관장. 이 촌극 같은 장면들은 모두 예술계 내부에 깊게 뿌리내린 동일한 구조를 폭로한다. 바로 예술 생산의 장에서 ‘소유’와 ‘주도성’을 둘러싼 권력의 긴장이다. 전시라는 가상의 무대 위에서 저마다 주연이 되려 하는 욕망 속에서, 비평 역시 이 위계적 구조 안에 포섭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의미의 총체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조연’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프레임 자체에 있다. 우리는 흔히 주연과 조연을 권력과 위계의 질서로 이해하지만, 본래 그것은 역할의 구분일 뿐이다. 역할로서의 조연은 중심을 보완하고 전체 구조를 지탱한다. 이는 서열이나 중요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수행하는 고유한 기능의 문제다.
그러므로 비평은 주연도, 조연도 아니다. 그것은 작품에 종속되거나 작품을 대체하는 대신, 작품과 나란히 존재하며 담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인 층위다. 단순한 보조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해석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다.
이 글을 읽는 작가와 기획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딛고 선 예술의 장에서, 진정 주연과 조연의 경계는 그토록 명확한가. 아니면 그것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수용해 온, 낡고 빈곤한 오해에 불과한가.
2026.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