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고추잠자리는 없다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가을이 깊어지면 이상하게도 이름 붙이기 애매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숙제였는지, 놀이였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린 시절 도랑가에서 잠자리를 잡던 기억도 그중 하나다. 그 시절 우리는 분류학을 알 리 없었고, 학명은 우리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손에 쥔 곤충을 당장 어떻게 부를지가 더 중요했고, 생김새와 순간의 인상을 기준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꼬리가 붉으면 ‘고추잠자리’, 파란 빛이면 ‘물잠자리’, 유난히 가늘면 ‘실잠자리’. 왜 그런 이름을 써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눈앞의 형상이 먼저 주어지고 이름은 필요할 때 '대충' 따라오는 엉성한 방식이었지만, 우리의 세계는 문제없이 굴러갔다. 생각해보면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잠자리는 내 손에 있었고, 우리가 뭐라 부르든 달라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미첼 페레즈 폴로의 작업과 마주할 때도 유사한 기분이 든다. 그의 작업과 마주한 지금이 가을이라서일까. 아니면 그가 레퍼런스로 사용한 재료가 어린이용 점토라서일까. 이미지가 무엇을 닮았는지보다 굳이 그 이미지의 원형을 떠올려야 하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세계가 설명됐던 그 시절이 이미지에 있었다.
폴로는 작업이 모델–사진–회화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고 밝힌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 형상들은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어릴 적 누구나 빚어보았을 법한 점토 모형에 가깝다. 점토와 제작 과정의 부산물로 조립된 모형은 그것이 '나무'임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나무 형상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것은 아니다. 어딘가 알 듯하지만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묘한 형상, 어릴 적 우리가 그린 나무가 대체로 그런 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무엇'인지 파악하기보다 이름 없이도 이미지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이 나무처럼 보인다면 나무로 받아들이고, 혹시라도 캡션의 '어느 가을(Un otoño)'라는 단어가 형상 속에서 보인다면 이미지는 문자로 인식되는 식이다. 설명할 이름이 없어도 이미지는 그 자리에 있고, 언어는 그 앞에 서성일 뿐이다.
어쩌면 ‘어린’이라는 단어가 폴로의 작업을 관통하는 축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을>이 아이들이 주로 쓰는 점토 덩어리에서 구성된 것이라면 <볼레로(Bolero)>는 다른 방식의 ‘어린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볼레로>가쿠바 전통 노래 '롱기나(Longina)'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한 여인을 수많은 형용사로 묘사하는 곡이라는 점과 노랫말의 형용사들이 이미지의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노래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노랫말을 되짚기보다 그 노래가 작가에게 남겼을 어감이나 기분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노래를 애써 짐작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어릴 적에 들었던 가요의 노랫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랑', '그리움'과 같은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렸던 기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그 노래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이 작업을 더욱 투명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는 형상을 묶어두지 않고 말이 가리키고자 했던 방향만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폴로의 회화는 형상과 말 사이의 간격을 일부러 비워둔 것처럼 느껴진다. 화면 속 이미지들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형상이 먼저 오고 말은 뒤늦게 따라오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름이 비워져 있을 때 이미지는 더 오래 머물며 다른 가능성을 품는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 만났던 파브르는 곤충의 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지만 정작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관찰에만 몰두했기 때문인지, 그럴 기회가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태도는 존재를 정의하기보다 의미를 열어두는 쪽에 가까웠다. 폴로의 작업도 이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형상은 제시되지만 설명과 해석은 주변을 맴돈다. 우리는 그 간격을 억지로 좁히지 않아도 된다.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을 때 이미지가 품는 방향성은 오히려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회화를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2026.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세상에 고추잠자리는 없다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가을이 깊어지면 이상하게도 이름 붙이기 애매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숙제였는지, 놀이였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린 시절 도랑가에서 잠자리를 잡던 기억도 그중 하나다. 그 시절 우리는 분류학을 알 리 없었고, 학명은 우리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손에 쥔 곤충을 당장 어떻게 부를지가 더 중요했고, 생김새와 순간의 인상을 기준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꼬리가 붉으면 ‘고추잠자리’, 파란 빛이면 ‘물잠자리’, 유난히 가늘면 ‘실잠자리’. 왜 그런 이름을 써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눈앞의 형상이 먼저 주어지고 이름은 필요할 때 '대충' 따라오는 엉성한 방식이었지만, 우리의 세계는 문제없이 굴러갔다. 생각해보면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잠자리는 내 손에 있었고, 우리가 뭐라 부르든 달라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미첼 페레즈 폴로의 작업과 마주할 때도 유사한 기분이 든다. 그의 작업과 마주한 지금이 가을이라서일까. 아니면 그가 레퍼런스로 사용한 재료가 어린이용 점토라서일까. 이미지가 무엇을 닮았는지보다 굳이 그 이미지의 원형을 떠올려야 하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세계가 설명됐던 그 시절이 이미지에 있었다.
폴로는 작업이 모델–사진–회화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고 밝힌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 형상들은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어릴 적 누구나 빚어보았을 법한 점토 모형에 가깝다. 점토와 제작 과정의 부산물로 조립된 모형은 그것이 '나무'임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나무 형상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것은 아니다. 어딘가 알 듯하지만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묘한 형상, 어릴 적 우리가 그린 나무가 대체로 그런 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무엇'인지 파악하기보다 이름 없이도 이미지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이 나무처럼 보인다면 나무로 받아들이고, 혹시라도 캡션의 '어느 가을(Un otoño)'라는 단어가 형상 속에서 보인다면 이미지는 문자로 인식되는 식이다. 설명할 이름이 없어도 이미지는 그 자리에 있고, 언어는 그 앞에 서성일 뿐이다.
어쩌면 ‘어린’이라는 단어가 폴로의 작업을 관통하는 축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을>이 아이들이 주로 쓰는 점토 덩어리에서 구성된 것이라면 <볼레로(Bolero)>는 다른 방식의 ‘어린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볼레로>가쿠바 전통 노래 '롱기나(Longina)'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한 여인을 수많은 형용사로 묘사하는 곡이라는 점과 노랫말의 형용사들이 이미지의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노래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노랫말을 되짚기보다 그 노래가 작가에게 남겼을 어감이나 기분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노래를 애써 짐작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어릴 적에 들었던 가요의 노랫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랑', '그리움'과 같은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렸던 기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그 노래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이 작업을 더욱 투명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는 형상을 묶어두지 않고 말이 가리키고자 했던 방향만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폴로의 회화는 형상과 말 사이의 간격을 일부러 비워둔 것처럼 느껴진다. 화면 속 이미지들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형상이 먼저 오고 말은 뒤늦게 따라오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름이 비워져 있을 때 이미지는 더 오래 머물며 다른 가능성을 품는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 만났던 파브르는 곤충의 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지만 정작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관찰에만 몰두했기 때문인지, 그럴 기회가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태도는 존재를 정의하기보다 의미를 열어두는 쪽에 가까웠다. 폴로의 작업도 이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형상은 제시되지만 설명과 해석은 주변을 맴돈다. 우리는 그 간격을 억지로 좁히지 않아도 된다.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을 때 이미지가 품는 방향성은 오히려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회화를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2026.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