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이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재난 이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재난의 사진은 대개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소비되곤 한다. 피해의 규모를 증명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1은 전쟁과 고통의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보는 이의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이미지는 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거리를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재난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불길이 치솟는 장면, 검게 탄 능선, 망연자실한 표정들. 그 이미지들이 충분히 유통되고 나면 사건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 것이 되고, 소비된 사건은 다음 사건이 오기 전까지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아니, 다를 수 있기는 한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지 않을까. 예술 역시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시장에 걸리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재난을 소재로 삼은 예술이 결국 재난을 미화하거나 소비하는 구조를 반복한다는 비판은 타당할 수밖에 없고, 그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술이 재난 앞에 서는 일은 또 하나의 소비 행위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 씨앗》은 이 불편한 위치에 자리한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먼저 질문해야만 했다.
2025년 봄, 경북 일대를 가로지른 대형 산불은 수만 헥타르의 산림과 여러 마을을 휩쓸며 지나갔다. 멈출 것 같지 않던 불길이 바다 앞에서 겨우 멈추었지만, 탄 흙의 냄새와 윤곽만 남은 터, 재로 덮인 능선은 여전히 풍경 속에 남아 있다.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안미술관은 이 재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공간 가운데 하나였고, 그 근접성은 지리적 조건이기 이전에 시안미술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윤리적 조건이 되었다.
시안미술관은 폐교를 재생한 공간이다. 교육이라는 기능이 상실된 건물이 미술관으로 다시 열리는 과정은,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안미술관이 이미 한 번 몸으로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경험은 공간의 물리적 전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교가 미술관이 되고, 미술관이 마을의 구심점이 되고, 마을이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 시안미술관은 끊임없이 소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서사를 새겨왔다. 이러한 것들이 쌓여 시안미술관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을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장소에 서사를 새기는 공간, 재난 이후의 경북 일대를 예술의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시안미술관 안에서 발생한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시안미술관은 폐허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안미술관은 매년 동시대의 사회적 사건을 예술의 언어로 탐구하는 연례 기획 프로젝트를 예술통신사(藝術通信使)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왔다. 조선통신사가 외교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학자, 서화가, 의원, 악사 등이 함께 이동하며 두 국가 사이의 지식과 문화를 중개한 집단적 지적 실천이었듯, 예술통신사는 작가들이 사건의 현장을 함께 찾아가고 각자의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며 돌아오는 방식을 택해왔다. 통신(通信)이 '신뢰를 통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면, 이 프로젝트에서의 통신은 사건과 예술 사이, 현장과 전시장 사이, 기록과 해석 사이를 신뢰 위에서 잇는 실천에 가까운 것이다. 2026년, 이 프로젝트는 처음으로 'AT'라는 표기를 택했다. 'Art Tongsinsa'의 앞 글자를 딴 문자이지만, 영어 전치사 'at'이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 특정한 상황의 지점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 프로젝트의 방법론과 포개지면서 'AT'는 기호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되었다. 'AT'가 향하는 자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은 구체적 사건의 한가운데인 발화 지점과 피해 지역을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걸었고, 들었고, 만졌다. 재의 질감을 손으로 확인했고, 불에 탄 나무의 단면이 어떤 색인지를 들여다봤고, 그 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사건을 어떤 말로 설명하는지를 오래 붙들었다. 누군가는 현장에서 가져온 재료를 그대로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고, 누군가는 불이 지나간 이후의 풍경을 오랫동안 응시한 끝에 캔버스 앞에 비로소 섰다. 재난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도 있었으며, 재난 이후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천하고자 한 이도 있었다. 리서치가 곧 작업의 일부였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만큼이나 어떻게 보았는가가 이 전시의 성격을 결정하게 되었다.
재난 이후의 장소에서는 낯선 일들이 일어난다. 평소라면 교차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고, 제도가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2은 이 역설을 여러 재난의 사례를 통해 기록하면서, 폐허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AT 불의 씨앗》은 이 관찰이 예술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소방관과 기자, 주민이 남긴 실제 기록이 작가들의 작업과 나란히 놓일 때,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미지가 함께 만들어내는 긴장 속에서 사건이 다르게 사유될 수 있는 자리가 열리는 것이다. 예술이 현실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가 아니라, 예술이 현실 '옆'에 놓임으로써 현실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는 가능성, 그것이 이 전시가 구조 속에 심어둔 질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씨앗'은 두 가지 층위를 동시에 지닌다. 부주의로 시작된 불씨가 바람을 타고, 오래 말라 있던 나무들을 차례로 삼켜나갔다. 씨앗처럼 작았던 그 불씨가 능선을 넘고 마을을 가로질러 끝내 멈추지 않을 것처럼 번져나갔다. 그런데 저 먼 땅에서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극도의 열기를 겪은 뒤에야 껍질이 열리고 발아를 시작하는 씨앗들이 있다.3 씨앗이 불을 기다린 것도, 불이 씨앗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씨앗이 열리기 위해서는 그 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씨앗만 한 불씨가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관계와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예술은 그 가능성이 오래 남도록 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실험한다.

사진제공: 경북소방본부
2. 발화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노트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선생님의 발화는 동일했지만, 어디에 앉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겼느냐에 따라 필기는 전혀 다른 문서가 된다. 기록이란게 그렇다. 같은 것을 들었다는 전제 아래, 실은 아무도 같은 것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재난의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소방관은 진화 체계 안에서 카메라를 들었고, 기자는 보도라는 목적 아래 셔터를 눌렀으며, 오랜 기간 그 자리에 살던 사람은 재만 남은 터를 향해 휴대폰을 꺼냈다. 구도도 각도도 없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의도 없이 찍힌 사진일수록 오히려 그 자리에 더 가까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연출되지 않았기에 남은 것들, 프레임 밖으로 밀려날 뻔했던 지점이 보는 이 안에서 되려 오래 머물게 되었다. 장용근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온 사진들을 한곳에 모은 것은 어느 하나의 시선이 사건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는 배치였을 것이다. 어떤 사진 한 장도 재난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대신할 수 없기에 사진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기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사진이 있으려면 조건이 있다. 재난 이전의 풍경을 남기려면 재난이 오기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대부분이 충족하지 못하는 전제 말이다. 도시의 풍경이 변하고 난 뒤에야 그 도시의 옛 모습을 찾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사라진 다음에야 이전을 붙들려 한다. 박창모의 작업이 다른 무게를 갖는 것은 이 전제를 이미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장소의 전(前)과 후(後)가 나란히 놓일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소멸한 것들이 한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록은 재난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검은 봄이 지나간 자리에서 박창모는 다시 올 초록의 봄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다.
검은 봄의 시기에 뉴스 화면에는 "진화 완료"라는 자막이 떴다. 그리고는 빠르게 채널이 돌아갔고, 관심은 다음 뉴스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음에도 말이다.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경험은 종료되지 않는다. 서사가 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 반복되는 것들이 있다. 현장의 기록이 사건을 향한다면, 상처의 기록은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다. 심리상담사이기도 한 송혜경이 마을 회관을 찾아 피해민과 마주 앉고 카메라를 든 것은 그 다른 방향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타버린 능선은 사진으로 찍히지만, 타버린 마음은 찍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찍으려 했다는 것, 아니 찍기 전에 먼저 곁에 앉았다는 것은 진화의 현장에서, 보도의 현장에서 포착하지 못한 상실의 한가운데라는 지점을 향한 것이다. 어느 하나의 기록도 재난 전체를 담지 못한다. 불이 시작된 자리에서, 서사가 시작되고 있다.

3. 터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대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준비해 온 위로는 입 안에 맴돌다 삼켜지고, 남는 것은 그저 거기 서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유족이 기억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어떤 위로를 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왔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와서 거기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 이미 무언가가 달라져 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들이 있다. 재난이 지나간 곳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타버린 나무들 사이를 걷는 일은 일종의 조문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 있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 갔어야 했기 때문에 간 것이다.
배태열이 재난의 현장을 따라 걸은 것 또한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리로 경사를 읽고, 탄 흙과 나무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바람의 방향을 몸 전체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땅을 걸으면 재는 신발에 묻고, 옷에 스며들고, 피부 위에 앉는다. 그러나 재가 몸에 묻었다고 해서 그 불을 겪은 것은 아니다. 재를 안고 돌아온 사람과 불 속에 있었던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완전한 기억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겪어보지 못한 것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아야 했고, 그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야 했다.
묻어온 재를 털어내는 일이 내키지 않기도 한다. 서둘러 털어낸 그 자리에 다른 먼지가 앉을까봐, 그 이야기가 다른 서사로 덮이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있었던 것을 왜곡할 수 있겠다는 우려 때문이겠다. 덮지 않는다는 것은 채우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비워두는 것과 채우지 않는 것에는 모종의 차이가 있다. 비워두는 것이 처음부터 없는 상태라면, 채우지 않는 것은 있었던 것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일이다. 고운사를 반복적으로 찾으며 주지스님과 긴 시간을 보낸 김제원이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이 차이였을 것이다. 소멸한 것들을 빠르게 대체하고, 상실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이 회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급함이 앞서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덮여버린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에, 그 사라짐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질서에 조금은 더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채우지 않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기다림이 된다.

4. 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명태는 이름을 바꾼다. 얼리면 동태, 말리면 북어, 바닷바람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황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새끼는 노가리. 같은 물고기가 상태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도 "명태가 죽어서 북어가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무가 숯이 되는 것을 두고 왜 우리는 소멸이라 부르는 것일까. 숯을 손에 쥐면 놀라울 만큼 가볍다. 나무였을 때의 무게는 어디로 갔는지, 형태만 남기고 속이 비어 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나무가 아니라 무게다. 결은 여전히 남아 있고, 표면은 아직도 나무의 시간을 품고 있다. 어째서 명태가 북어가 되는 것은 변화이고, 나무가 숯이 되는 것은 끝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재난이라는 사건에 부여한 감정이 사물의 시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바스러진 재(灰)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숯이 된 나무는 사라진 나무가 아니다. 다른 것이 된 나무다. 심효선이 재난의 현장에서 가져온 것은 바로 그 다른 것이 된 나무였다. 불에 탄 나무를 빻았고, 그 가루는 캔버스 위에서 다시 산이 되었다. 생명을 다한 나무가 산의 형상을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숯이 된 나무는 나무의 언어가 아니라 숯의 언어로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숯은 캔버스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스스로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 지금도 캔버스에서 뛰어 내리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안배이기도 하지만, 숯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완성'이라는 끝을 향한 단어가 이 작업 앞에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뛰어 내리는 숯처럼, 부식되는 판도 멈추지 않는다. 김서울의 동판 위에 앉았던 산(酸)은 금속을 천천히 갉아먹고, 온도는 그 속도를 바꾸며, 시간은 작가가 그리지 않은 선을 표면 위에 새겨 넣기까지 한다. 작가가 조건은 설계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 판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항하고, 되돌아오고,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형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서울은 완성된 작품 위에서 다시 부식을 진행한다. 끝이라고 여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고운사가 산불 이후 인위적 복원이 아닌, 자연치유를 택했던 것은 숲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부식이 판 위에 새로운 표면을 만들어내기까지 작가는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재난 이후의 시간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고전 프린트, 그러니까 빛에 노출시켜 이미지를 얻는 이 방식에서 이미지는 작가의 손이 아니라 빛과 수분, 시간이 서로 반응하며 만들어진다. 어떤 사물과 이웃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이정민은 생명을 다한 식물과 재, 약수물, 그리고 결실을 채 맺지 못한 열매를 가져왔다. 이것들은 모두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온 것들이다. 산불이 휩쓸고 간 의성 운암사와 청송의 약수터, 그리고 아무도 재난이라 여기지 않았던,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꺾여 여물지 못한 것들이 있던 일상의 어딘가에서. 곳곳에서 온 이것들이 빛과 수분에 반응한다. 빛에 바래고, 수분에 흐려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표면이 옅어져 가는 것이 일반적인 움직임이다. 그런데 빛을 받을수록, 수분을 머금을수록 표면은 오히려 짙어졌다. 옅어지는 것이 끝을 받아들이는 사물의 시간이라면, 짙어지는 것은 다시 시작을 준비하는 사물의 시간인 것이다. 이 역시 작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느 하나가 주도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조건을 마련하되 결과를 열어두고, 열어둔 곳에서 사물과 환경이 서로를 통해 스스로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확정되지 않은 것들이 표면 위에 남는다. 숯이 캔버스에서 뛰어 내리고, 산(酸)이 판의 낯을 계속 바꾸고, 잔해와 수분과 빛이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표면을 만들어 내듯, 바스러진 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다른 상태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간다. 재(灰)는 재(再)로 작동하고 있다.

5. 씨앗
어제의 하루가 오늘의 하루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일과가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는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어제와 같지도 않다. 지하철이 연착된다든지, 예고 없이 비가 온다든지, 아니면 누군가의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듣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내일을 예상하며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내일을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향해 오늘을 반복하는 실천은 아닐까. 재난이 지나간 뒤의 현실에서도 실천은 그렇게 시작된다. 결과를 모른 채,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하루에는 수많은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켜면 친구 녀석의 호화스러운 저녁 식사부터 누군가의 특별한 일상, 각종 짧은 이미지들이 화면을 채운다. 그런 특별함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들은 너무 가볍게 스크롤되어 흘러간다. 재난의 이미지마저도. 인터넷 세상에 기록되고 박제되었다고 해서 그 이미지가 모두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는 소비되어, 다음 서사가 도착하는 즉시 밀려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는 방식의 기억이 가능할까. 캠핑이든 어떤 경로로든, 실제로 나무를 태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이 예상보다 훨씬 큰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불이 나무를 집어삼키는 속도가 어떤 것인지를, 그 열기가 피부에 어떻게 전해지고 남는지를. 이를 겪고 나면 경험은 머릿속이 아닌 신체에 새겨진다. 이미지는 다음 서사와 함께 잊히지만, 감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안성환이 소각 작업을 수행한 것은 잊혀지지 않기 위한 실천이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 잊히고 어떤 형태로 남는지는, 각자가 그 사건과 맺은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몸에 기억을 새길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수만 헥타르를 태운 압도적인 불 앞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어떤 노력으로도 좁힐 수는 없었다. 그 한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기원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기원한다는 것이 곧 무력한 기다림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겠다. 하늘이 우리의 기원에 응답할지 알 수 없는데도 멈추지 않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 오지 않는다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내일을 준비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승현은 불을 끄는 방법도, 피해를 복구하는 절차도, 다른 무엇도 제안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게 해달라는, 수행 불가능한 지시문만을 남겨뒀을 뿐이다. 수행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무력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 안에서 기원은 가장 솔직한 형태의 실천이 된다. "Let it rain, Let it rain, Again." 응답 없이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 문장이, 이 기원이, 내일을 여는 실천 방식이 되는 것이다.
비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문서진은 재난이 지나간 곳의 풀과 건초로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에 씨앗을 심어 다시 그곳에 뿌렸다.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온 것을 다시 거기로 돌려보내는 순환이었다. 이 순환 안에서 종이는 이중의 시간을 품게 된다. 식물의 생애를 다하고 도달한 종점이면서,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길 기다리는 빈 페이지이기도 한 것이다. 땅에 내려앉은 종이는 수일 내로 녹아 사라지고, 그 안의 씨앗은 움틀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재난은 많은 것을 삼키지만 다시 시작하는 능력까지 삼켜내지는 못한다. 잿더미 위에서도 무언가가 돋아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불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씨앗이 열리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실천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다. 씨앗은 서사가 될 것이고, 싹은 기억이 될 것이기에. 그곳에 무엇이 자라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6. 곁
풍경은 대개 지나치게 된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 능선들이 그렇다. 수년간 보아왔던 모습들이라 그런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발 딛는 장소의 풍경조차도 말이다. 이는 우리가 산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런데 어떤 순간이 되면 풍경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된다. 알고 있던 것과 눈앞의 장면이 어긋나는 순간, 발걸음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재난이 지나간 풍경이 그렇다. 묘하게도 인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자연을 묘사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이 풍경을 그저 서술하기만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재난 이후의 풍경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일이 있기는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불을 끄지도,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지도, 상처를 지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선을 돌릴 수야 있겠는가. 그럼에도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서는 것,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예술이 아닐까.
의성과 영덕의 풍경 앞에서 이재호의 발걸음이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알고 있던 산과 눈앞의 산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멈춰 선 곳에서 이재호는 그 풍경을 그대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천 위에서 재난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어서 머무른 시간을 천 위에 켜켜이 쌓았다. 풍경이 겪은 시간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이재호의 천 위에 묘사된 이미지는 재난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옆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시간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재난이 지나간 풍경은 한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떤 곳은 자연의 흐름에 맡겨진 채 천천히 변하고 있었고, 다른 곳은 이미 정리되어 새로운 조성이 시작되고 있기도 하였다. 같은 재난을 겪었지만 각각의 장소는 서로 다른 속도로 이후를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기범이 피해 지역에서 멈춰 선 지점은 바로 그 차이 앞에서였다. 그 차이는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되려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순간 차이는 지워지기에,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이후를 한 이미지 안에서 분리하지 않은 채 함께 두어야 했다. 이세준의 캔버스 또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네 개의 캔버스는 완전히 이어지지 않은 채 어긋나 있다. 각각은 연결되면서도 독립된 풍경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재난이 지나간 풍경이 파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을린 능선 위에도 하늘은 있고, 비어버린 곳에도 빛은 든다. 아름다움과 상흔이 경계 없이 이웃되어 거기에 있다. 이전과 같은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풍경은 스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세준의 캔버스들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합쳐지지 않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곳이 없는 시간 안에서 풍경은 열린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열린 채 남아 있는 풍경 앞에서 해석은 결코 그 자리에 다다를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던 곳에서, 가까이 다가섰을 때 보이는 것이 있다. 해석은 검게 탄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속도로,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채온의 목탄과 파스텔은 종이 위에 그어지기보다는 문질러져서 안착된다. 목탄과 파스텔 가루가 종이의 미세한 결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것들을 어루만지듯 느린 손으로 따라간다. 풍경을 해석하지 않는 태도처럼 채온은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한 채로 둔다. 마주한 것이 '풍경'이라 부르는 풍경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운사의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는 다른 사찰에서 남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간절함이 글씨가 되고, 그 글씨가 걸린 풍경이 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채온은 그 장면의 감정을 풀어내지 않고 그대로 종이 위로 옮겨온다. 재난 앞에서 느끼는 것들이 때로는 해석보다 먼저 도착하기 때문이다. 이우수의 필라멘트가 거미줄처럼 엉키며 만들어낸 그것이 다 타고 밑동만 남은 나무 같기도, 무언가를 품고 있는 둥지 같기도 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 안에 있어서겠다. 그 안의 파란 무언가가 가늘게 반짝이는 것 또한 느린 숨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다. 끝났다고 여겨지는 것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무엇이라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 있다. 곁에 있었기에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말이다.

7. 다시 봄
어느새 계절이 한 바퀴 돌았다. 검게 탄 능선 위로 다시 봄이 왔다. 그런데 이 봄은 작년의 봄은 아니다. 같은 곳에 같은 계절이 돌아왔지만, 그 아래의 땅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봄이 돌아왔다는 것이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시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돌아온 봄은 지나간 봄을 품은 채 다른 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본다는 것 또한 같은 것을 같은 눈으로 보는 일이 아니라, 한 번 보았기에 달라진 눈으로 달라진 풍경을 보는 것이다.
달라진 눈으로 다시 보았을 때, 건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위로가 입 안에서 맴돌다 끝내 종점을 잃는 이유는 위로하려는 대상이 위로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겠다. 윤세영이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허리 이상이 타버린 나무들이었다. 아주 멀리서 보면 수묵화 같은 풍경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다가섰을 때의 그 풍경은 더없이 처참했다. 시선은 불이 지나간 흔적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고, 목소리는 어떠한 문장도 온전히 소리낼 수 없었다. 위로가 소리의 형태를 띨 수 없을 때, 사물이 그 몫을 대신할 수 있을까. 윤세영은 숯을 매달고, 푸른 물을 배치하고, 그 물이 천천히 결정이 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결정이 어떤 형태로 굳어질지, 어떤 색으로 남을지는 시간이 결정하겠지만, 그럼에도 위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진행되고 있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었다. 신준민이 현장에서 받아들인 감각도 쉬이 사그라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회색빛과 검정빛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서는 여전히 아픔이 있었고, 비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있었으며, 그 기다림 속에서도 타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낮추거나 억누르는 것은 오히려 거짓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준민의 이미지는 사그라드는 대신 더 격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재가 쌓이고, 흰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백색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 감각 뒤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색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전의 상태로 향했다. 가녀린 나무 사이로 자그마한 빛들이 돋아난다. 모든 것을 삼키려는 불의 빛이 아니라 모든 것이 순환하는 생명의 빛으로.
빛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그곳에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한다. 최선은 오래전부터 사라졌다고 여겨진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을 지켜봐 온 작가이다. 그가 다뤄온 흰 캔버스는 비어 있는 페이지가 아니라, 많은 것이 지나간 뒤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백색이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거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었다. 타버린 나무의 검은 재가 천의 표면을 채웠다. 불이 모든 것을 벗겨냈고, 그 벗겨짐이 검은색으로 남은 것이다. 도망칠 수 없었던 것들이 벌거벗은 채로 거기에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검은 그림은 벗겨내어도 검게 남아있는, 다시 말해 벗겨낼 수 없는 것들의 색이 되었다. 남아 있되 그렇다고 붙들 수도 없다. 검은 천은 액자에 고정되지 않은 채, 천 자체의 무게와 결이 흔들림 그대로 드러난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 위에 남긴 흔적, 그것을 끝내 잡아 둘 수 없기에, 고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끝날 것이기에 소중한 것들이 있고, 소중하기에 끝남이 두려운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안민이 마주한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 고속도로를 달리며 느낀 산의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 겸허함을 요구하는 무게. 인간은 불을 지르고, 그것을 인간이 용서하고, 또다시 불을 지르는 일을 반복해왔다. 산은 그것을 오랜 기간 순환을 반복하는 가운데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안민이 느낀 것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천 위에서 검은 산을 긋고 닦아내고, 닦아낸 곳에서 빛이 배어나온다. 불이 난 장면일까, 아니면 산이 스스로 내뿜는 분노일까. 그 빛이 무엇인지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빛 앞에 서 있는 동안,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여지는 것의 경계가 흔들리는 곳에서, 다시 봄이 시작되고 있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재난 이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재난 이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재난의 사진은 대개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소비되곤 한다. 피해의 규모를 증명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1은 전쟁과 고통의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보는 이의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이미지는 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거리를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재난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불길이 치솟는 장면, 검게 탄 능선, 망연자실한 표정들. 그 이미지들이 충분히 유통되고 나면 사건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 것이 되고, 소비된 사건은 다음 사건이 오기 전까지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아니, 다를 수 있기는 한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지 않을까. 예술 역시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시장에 걸리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재난을 소재로 삼은 예술이 결국 재난을 미화하거나 소비하는 구조를 반복한다는 비판은 타당할 수밖에 없고, 그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술이 재난 앞에 서는 일은 또 하나의 소비 행위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 씨앗》은 이 불편한 위치에 자리한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먼저 질문해야만 했다.
2025년 봄, 경북 일대를 가로지른 대형 산불은 수만 헥타르의 산림과 여러 마을을 휩쓸며 지나갔다. 멈출 것 같지 않던 불길이 바다 앞에서 겨우 멈추었지만, 탄 흙의 냄새와 윤곽만 남은 터, 재로 덮인 능선은 여전히 풍경 속에 남아 있다.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안미술관은 이 재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공간 가운데 하나였고, 그 근접성은 지리적 조건이기 이전에 시안미술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윤리적 조건이 되었다.
시안미술관은 폐교를 재생한 공간이다. 교육이라는 기능이 상실된 건물이 미술관으로 다시 열리는 과정은,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시안미술관이 이미 한 번 몸으로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경험은 공간의 물리적 전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교가 미술관이 되고, 미술관이 마을의 구심점이 되고, 마을이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 시안미술관은 끊임없이 소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서사를 새겨왔다. 이러한 것들이 쌓여 시안미술관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을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장소에 서사를 새기는 공간, 재난 이후의 경북 일대를 예술의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시안미술관 안에서 발생한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시안미술관은 폐허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안미술관은 매년 동시대의 사회적 사건을 예술의 언어로 탐구하는 연례 기획 프로젝트를 예술통신사(藝術通信使)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왔다. 조선통신사가 외교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학자, 서화가, 의원, 악사 등이 함께 이동하며 두 국가 사이의 지식과 문화를 중개한 집단적 지적 실천이었듯, 예술통신사는 작가들이 사건의 현장을 함께 찾아가고 각자의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며 돌아오는 방식을 택해왔다. 통신(通信)이 '신뢰를 통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면, 이 프로젝트에서의 통신은 사건과 예술 사이, 현장과 전시장 사이, 기록과 해석 사이를 신뢰 위에서 잇는 실천에 가까운 것이다. 2026년, 이 프로젝트는 처음으로 'AT'라는 표기를 택했다. 'Art Tongsinsa'의 앞 글자를 딴 문자이지만, 영어 전치사 'at'이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 특정한 상황의 지점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 프로젝트의 방법론과 포개지면서 'AT'는 기호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되었다. 'AT'가 향하는 자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은 구체적 사건의 한가운데인 발화 지점과 피해 지역을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걸었고, 들었고, 만졌다. 재의 질감을 손으로 확인했고, 불에 탄 나무의 단면이 어떤 색인지를 들여다봤고, 그 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사건을 어떤 말로 설명하는지를 오래 붙들었다. 누군가는 현장에서 가져온 재료를 그대로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고, 누군가는 불이 지나간 이후의 풍경을 오랫동안 응시한 끝에 캔버스 앞에 비로소 섰다. 재난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도 있었으며, 재난 이후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천하고자 한 이도 있었다. 리서치가 곧 작업의 일부였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만큼이나 어떻게 보았는가가 이 전시의 성격을 결정하게 되었다.
재난 이후의 장소에서는 낯선 일들이 일어난다. 평소라면 교차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고, 제도가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2은 이 역설을 여러 재난의 사례를 통해 기록하면서, 폐허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연대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AT 불의 씨앗》은 이 관찰이 예술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소방관과 기자, 주민이 남긴 실제 기록이 작가들의 작업과 나란히 놓일 때,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미지가 함께 만들어내는 긴장 속에서 사건이 다르게 사유될 수 있는 자리가 열리는 것이다. 예술이 현실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가 아니라, 예술이 현실 '옆'에 놓임으로써 현실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한다는 가능성, 그것이 이 전시가 구조 속에 심어둔 질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씨앗'은 두 가지 층위를 동시에 지닌다. 부주의로 시작된 불씨가 바람을 타고, 오래 말라 있던 나무들을 차례로 삼켜나갔다. 씨앗처럼 작았던 그 불씨가 능선을 넘고 마을을 가로질러 끝내 멈추지 않을 것처럼 번져나갔다. 그런데 저 먼 땅에서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극도의 열기를 겪은 뒤에야 껍질이 열리고 발아를 시작하는 씨앗들이 있다.3 씨앗이 불을 기다린 것도, 불이 씨앗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씨앗이 열리기 위해서는 그 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씨앗만 한 불씨가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소멸한 자리에서 다른 관계와 질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예술은 그 가능성이 오래 남도록 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실험한다.

사진제공: 경북소방본부
2. 발화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노트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선생님의 발화는 동일했지만, 어디에 앉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겼느냐에 따라 필기는 전혀 다른 문서가 된다. 기록이란게 그렇다. 같은 것을 들었다는 전제 아래, 실은 아무도 같은 것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재난의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소방관은 진화 체계 안에서 카메라를 들었고, 기자는 보도라는 목적 아래 셔터를 눌렀으며, 오랜 기간 그 자리에 살던 사람은 재만 남은 터를 향해 휴대폰을 꺼냈다. 구도도 각도도 없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의도 없이 찍힌 사진일수록 오히려 그 자리에 더 가까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연출되지 않았기에 남은 것들, 프레임 밖으로 밀려날 뻔했던 지점이 보는 이 안에서 되려 오래 머물게 되었다. 장용근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온 사진들을 한곳에 모은 것은 어느 하나의 시선이 사건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는 배치였을 것이다. 어떤 사진 한 장도 재난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대신할 수 없기에 사진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기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사진이 있으려면 조건이 있다. 재난 이전의 풍경을 남기려면 재난이 오기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대부분이 충족하지 못하는 전제 말이다. 도시의 풍경이 변하고 난 뒤에야 그 도시의 옛 모습을 찾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사라진 다음에야 이전을 붙들려 한다. 박창모의 작업이 다른 무게를 갖는 것은 이 전제를 이미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장소의 전(前)과 후(後)가 나란히 놓일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소멸한 것들이 한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록은 재난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검은 봄이 지나간 자리에서 박창모는 다시 올 초록의 봄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다.
검은 봄의 시기에 뉴스 화면에는 "진화 완료"라는 자막이 떴다. 그리고는 빠르게 채널이 돌아갔고, 관심은 다음 뉴스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음에도 말이다.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경험은 종료되지 않는다. 서사가 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 반복되는 것들이 있다. 현장의 기록이 사건을 향한다면, 상처의 기록은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다. 심리상담사이기도 한 송혜경이 마을 회관을 찾아 피해민과 마주 앉고 카메라를 든 것은 그 다른 방향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타버린 능선은 사진으로 찍히지만, 타버린 마음은 찍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찍으려 했다는 것, 아니 찍기 전에 먼저 곁에 앉았다는 것은 진화의 현장에서, 보도의 현장에서 포착하지 못한 상실의 한가운데라는 지점을 향한 것이다. 어느 하나의 기록도 재난 전체를 담지 못한다. 불이 시작된 자리에서, 서사가 시작되고 있다.

3. 터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대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준비해 온 위로는 입 안에 맴돌다 삼켜지고, 남는 것은 그저 거기 서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유족이 기억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어떤 위로를 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왔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와서 거기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 이미 무언가가 달라져 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들이 있다. 재난이 지나간 곳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타버린 나무들 사이를 걷는 일은 일종의 조문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 있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 갔어야 했기 때문에 간 것이다.
배태열이 재난의 현장을 따라 걸은 것 또한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리로 경사를 읽고, 탄 흙과 나무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바람의 방향을 몸 전체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땅을 걸으면 재는 신발에 묻고, 옷에 스며들고, 피부 위에 앉는다. 그러나 재가 몸에 묻었다고 해서 그 불을 겪은 것은 아니다. 재를 안고 돌아온 사람과 불 속에 있었던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완전한 기억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겪어보지 못한 것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아야 했고, 그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야 했다.
묻어온 재를 털어내는 일이 내키지 않기도 한다. 서둘러 털어낸 그 자리에 다른 먼지가 앉을까봐, 그 이야기가 다른 서사로 덮이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있었던 것을 왜곡할 수 있겠다는 우려 때문이겠다. 덮지 않는다는 것은 채우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비워두는 것과 채우지 않는 것에는 모종의 차이가 있다. 비워두는 것이 처음부터 없는 상태라면, 채우지 않는 것은 있었던 것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일이다. 고운사를 반복적으로 찾으며 주지스님과 긴 시간을 보낸 김제원이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이 차이였을 것이다. 소멸한 것들을 빠르게 대체하고, 상실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이 회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급함이 앞서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덮여버린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에, 그 사라짐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질서에 조금은 더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채우지 않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기다림이 된다.

4. 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명태는 이름을 바꾼다. 얼리면 동태, 말리면 북어, 바닷바람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황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새끼는 노가리. 같은 물고기가 상태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도 "명태가 죽어서 북어가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무가 숯이 되는 것을 두고 왜 우리는 소멸이라 부르는 것일까. 숯을 손에 쥐면 놀라울 만큼 가볍다. 나무였을 때의 무게는 어디로 갔는지, 형태만 남기고 속이 비어 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나무가 아니라 무게다. 결은 여전히 남아 있고, 표면은 아직도 나무의 시간을 품고 있다. 어째서 명태가 북어가 되는 것은 변화이고, 나무가 숯이 되는 것은 끝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재난이라는 사건에 부여한 감정이 사물의 시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바스러진 재(灰)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숯이 된 나무는 사라진 나무가 아니다. 다른 것이 된 나무다. 심효선이 재난의 현장에서 가져온 것은 바로 그 다른 것이 된 나무였다. 불에 탄 나무를 빻았고, 그 가루는 캔버스 위에서 다시 산이 되었다. 생명을 다한 나무가 산의 형상을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숯이 된 나무는 나무의 언어가 아니라 숯의 언어로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숯은 캔버스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스스로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 지금도 캔버스에서 뛰어 내리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안배이기도 하지만, 숯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완성'이라는 끝을 향한 단어가 이 작업 앞에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뛰어 내리는 숯처럼, 부식되는 판도 멈추지 않는다. 김서울의 동판 위에 앉았던 산(酸)은 금속을 천천히 갉아먹고, 온도는 그 속도를 바꾸며, 시간은 작가가 그리지 않은 선을 표면 위에 새겨 넣기까지 한다. 작가가 조건은 설계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 판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항하고, 되돌아오고,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형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서울은 완성된 작품 위에서 다시 부식을 진행한다. 끝이라고 여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고운사가 산불 이후 인위적 복원이 아닌, 자연치유를 택했던 것은 숲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부식이 판 위에 새로운 표면을 만들어내기까지 작가는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재난 이후의 시간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고전 프린트, 그러니까 빛에 노출시켜 이미지를 얻는 이 방식에서 이미지는 작가의 손이 아니라 빛과 수분, 시간이 서로 반응하며 만들어진다. 어떤 사물과 이웃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이정민은 생명을 다한 식물과 재, 약수물, 그리고 결실을 채 맺지 못한 열매를 가져왔다. 이것들은 모두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온 것들이다. 산불이 휩쓸고 간 의성 운암사와 청송의 약수터, 그리고 아무도 재난이라 여기지 않았던,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꺾여 여물지 못한 것들이 있던 일상의 어딘가에서. 곳곳에서 온 이것들이 빛과 수분에 반응한다. 빛에 바래고, 수분에 흐려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표면이 옅어져 가는 것이 일반적인 움직임이다. 그런데 빛을 받을수록, 수분을 머금을수록 표면은 오히려 짙어졌다. 옅어지는 것이 끝을 받아들이는 사물의 시간이라면, 짙어지는 것은 다시 시작을 준비하는 사물의 시간인 것이다. 이 역시 작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느 하나가 주도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조건을 마련하되 결과를 열어두고, 열어둔 곳에서 사물과 환경이 서로를 통해 스스로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확정되지 않은 것들이 표면 위에 남는다. 숯이 캔버스에서 뛰어 내리고, 산(酸)이 판의 낯을 계속 바꾸고, 잔해와 수분과 빛이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표면을 만들어 내듯, 바스러진 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다른 상태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간다. 재(灰)는 재(再)로 작동하고 있다.

5. 씨앗
어제의 하루가 오늘의 하루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일과가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는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어제와 같지도 않다. 지하철이 연착된다든지, 예고 없이 비가 온다든지, 아니면 누군가의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듣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내일을 예상하며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내일을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향해 오늘을 반복하는 실천은 아닐까. 재난이 지나간 뒤의 현실에서도 실천은 그렇게 시작된다. 결과를 모른 채,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하루에는 수많은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켜면 친구 녀석의 호화스러운 저녁 식사부터 누군가의 특별한 일상, 각종 짧은 이미지들이 화면을 채운다. 그런 특별함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들은 너무 가볍게 스크롤되어 흘러간다. 재난의 이미지마저도. 인터넷 세상에 기록되고 박제되었다고 해서 그 이미지가 모두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는 소비되어, 다음 서사가 도착하는 즉시 밀려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는 방식의 기억이 가능할까. 캠핑이든 어떤 경로로든, 실제로 나무를 태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이 예상보다 훨씬 큰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불이 나무를 집어삼키는 속도가 어떤 것인지를, 그 열기가 피부에 어떻게 전해지고 남는지를. 이를 겪고 나면 경험은 머릿속이 아닌 신체에 새겨진다. 이미지는 다음 서사와 함께 잊히지만, 감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안성환이 소각 작업을 수행한 것은 잊혀지지 않기 위한 실천이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 잊히고 어떤 형태로 남는지는, 각자가 그 사건과 맺은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몸에 기억을 새길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수만 헥타르를 태운 압도적인 불 앞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어떤 노력으로도 좁힐 수는 없었다. 그 한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기원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기원한다는 것이 곧 무력한 기다림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겠다. 하늘이 우리의 기원에 응답할지 알 수 없는데도 멈추지 않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 오지 않는다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내일을 준비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승현은 불을 끄는 방법도, 피해를 복구하는 절차도, 다른 무엇도 제안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게 해달라는, 수행 불가능한 지시문만을 남겨뒀을 뿐이다. 수행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무력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 안에서 기원은 가장 솔직한 형태의 실천이 된다. "Let it rain, Let it rain, Again." 응답 없이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 문장이, 이 기원이, 내일을 여는 실천 방식이 되는 것이다.
비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문서진은 재난이 지나간 곳의 풀과 건초로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에 씨앗을 심어 다시 그곳에 뿌렸다.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온 것을 다시 거기로 돌려보내는 순환이었다. 이 순환 안에서 종이는 이중의 시간을 품게 된다. 식물의 생애를 다하고 도달한 종점이면서,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길 기다리는 빈 페이지이기도 한 것이다. 땅에 내려앉은 종이는 수일 내로 녹아 사라지고, 그 안의 씨앗은 움틀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재난은 많은 것을 삼키지만 다시 시작하는 능력까지 삼켜내지는 못한다. 잿더미 위에서도 무언가가 돋아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불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씨앗이 열리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실천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다. 씨앗은 서사가 될 것이고, 싹은 기억이 될 것이기에. 그곳에 무엇이 자라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6. 곁
풍경은 대개 지나치게 된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 능선들이 그렇다. 수년간 보아왔던 모습들이라 그런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발 딛는 장소의 풍경조차도 말이다. 이는 우리가 산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런데 어떤 순간이 되면 풍경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된다. 알고 있던 것과 눈앞의 장면이 어긋나는 순간, 발걸음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재난이 지나간 풍경이 그렇다. 묘하게도 인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자연을 묘사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이 풍경을 그저 서술하기만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재난 이후의 풍경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일이 있기는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불을 끄지도,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지도, 상처를 지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선을 돌릴 수야 있겠는가. 그럼에도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서는 것,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예술이 아닐까.
의성과 영덕의 풍경 앞에서 이재호의 발걸음이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알고 있던 산과 눈앞의 산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멈춰 선 곳에서 이재호는 그 풍경을 그대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천 위에서 재난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어서 머무른 시간을 천 위에 켜켜이 쌓았다. 풍경이 겪은 시간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이재호의 천 위에 묘사된 이미지는 재난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옆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시간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재난이 지나간 풍경은 한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떤 곳은 자연의 흐름에 맡겨진 채 천천히 변하고 있었고, 다른 곳은 이미 정리되어 새로운 조성이 시작되고 있기도 하였다. 같은 재난을 겪었지만 각각의 장소는 서로 다른 속도로 이후를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기범이 피해 지역에서 멈춰 선 지점은 바로 그 차이 앞에서였다. 그 차이는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되려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순간 차이는 지워지기에,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이후를 한 이미지 안에서 분리하지 않은 채 함께 두어야 했다. 이세준의 캔버스 또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네 개의 캔버스는 완전히 이어지지 않은 채 어긋나 있다. 각각은 연결되면서도 독립된 풍경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재난이 지나간 풍경이 파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을린 능선 위에도 하늘은 있고, 비어버린 곳에도 빛은 든다. 아름다움과 상흔이 경계 없이 이웃되어 거기에 있다. 이전과 같은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풍경은 스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세준의 캔버스들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합쳐지지 않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곳이 없는 시간 안에서 풍경은 열린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열린 채 남아 있는 풍경 앞에서 해석은 결코 그 자리에 다다를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던 곳에서, 가까이 다가섰을 때 보이는 것이 있다. 해석은 검게 탄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속도로,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채온의 목탄과 파스텔은 종이 위에 그어지기보다는 문질러져서 안착된다. 목탄과 파스텔 가루가 종이의 미세한 결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것들을 어루만지듯 느린 손으로 따라간다. 풍경을 해석하지 않는 태도처럼 채온은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한 채로 둔다. 마주한 것이 '풍경'이라 부르는 풍경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운사의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는 다른 사찰에서 남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간절함이 글씨가 되고, 그 글씨가 걸린 풍경이 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채온은 그 장면의 감정을 풀어내지 않고 그대로 종이 위로 옮겨온다. 재난 앞에서 느끼는 것들이 때로는 해석보다 먼저 도착하기 때문이다. 이우수의 필라멘트가 거미줄처럼 엉키며 만들어낸 그것이 다 타고 밑동만 남은 나무 같기도, 무언가를 품고 있는 둥지 같기도 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 안에 있어서겠다. 그 안의 파란 무언가가 가늘게 반짝이는 것 또한 느린 숨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다. 끝났다고 여겨지는 것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무엇이라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 있다. 곁에 있었기에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말이다.

7. 다시 봄
어느새 계절이 한 바퀴 돌았다. 검게 탄 능선 위로 다시 봄이 왔다. 그런데 이 봄은 작년의 봄은 아니다. 같은 곳에 같은 계절이 돌아왔지만, 그 아래의 땅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봄이 돌아왔다는 것이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시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돌아온 봄은 지나간 봄을 품은 채 다른 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본다는 것 또한 같은 것을 같은 눈으로 보는 일이 아니라, 한 번 보았기에 달라진 눈으로 달라진 풍경을 보는 것이다.
달라진 눈으로 다시 보았을 때, 건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위로가 입 안에서 맴돌다 끝내 종점을 잃는 이유는 위로하려는 대상이 위로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겠다. 윤세영이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허리 이상이 타버린 나무들이었다. 아주 멀리서 보면 수묵화 같은 풍경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다가섰을 때의 그 풍경은 더없이 처참했다. 시선은 불이 지나간 흔적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고, 목소리는 어떠한 문장도 온전히 소리낼 수 없었다. 위로가 소리의 형태를 띨 수 없을 때, 사물이 그 몫을 대신할 수 있을까. 윤세영은 숯을 매달고, 푸른 물을 배치하고, 그 물이 천천히 결정이 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결정이 어떤 형태로 굳어질지, 어떤 색으로 남을지는 시간이 결정하겠지만, 그럼에도 위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진행되고 있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었다. 신준민이 현장에서 받아들인 감각도 쉬이 사그라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회색빛과 검정빛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서는 여전히 아픔이 있었고, 비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있었으며, 그 기다림 속에서도 타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낮추거나 억누르는 것은 오히려 거짓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준민의 이미지는 사그라드는 대신 더 격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재가 쌓이고, 흰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백색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 감각 뒤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색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전의 상태로 향했다. 가녀린 나무 사이로 자그마한 빛들이 돋아난다. 모든 것을 삼키려는 불의 빛이 아니라 모든 것이 순환하는 생명의 빛으로.
빛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그곳에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한다. 최선은 오래전부터 사라졌다고 여겨진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을 지켜봐 온 작가이다. 그가 다뤄온 흰 캔버스는 비어 있는 페이지가 아니라, 많은 것이 지나간 뒤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백색이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거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었다. 타버린 나무의 검은 재가 천의 표면을 채웠다. 불이 모든 것을 벗겨냈고, 그 벗겨짐이 검은색으로 남은 것이다. 도망칠 수 없었던 것들이 벌거벗은 채로 거기에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검은 그림은 벗겨내어도 검게 남아있는, 다시 말해 벗겨낼 수 없는 것들의 색이 되었다. 남아 있되 그렇다고 붙들 수도 없다. 검은 천은 액자에 고정되지 않은 채, 천 자체의 무게와 결이 흔들림 그대로 드러난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 위에 남긴 흔적, 그것을 끝내 잡아 둘 수 없기에, 고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끝날 것이기에 소중한 것들이 있고, 소중하기에 끝남이 두려운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안민이 마주한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 고속도로를 달리며 느낀 산의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 겸허함을 요구하는 무게. 인간은 불을 지르고, 그것을 인간이 용서하고, 또다시 불을 지르는 일을 반복해왔다. 산은 그것을 오랜 기간 순환을 반복하는 가운데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안민이 느낀 것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천 위에서 검은 산을 긋고 닦아내고, 닦아낸 곳에서 빛이 배어나온다. 불이 난 장면일까, 아니면 산이 스스로 내뿜는 분노일까. 그 빛이 무엇인지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빛 앞에 서 있는 동안,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여지는 것의 경계가 흔들리는 곳에서, 다시 봄이 시작되고 있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