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박준수

오지은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AGT 전시 전경
사진 : 이행진 (이하 동일)
흰 캔버스 앞에 앉아 막막했던 시간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익힌 손놀림 덕분에 또래보다 앞서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미대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잘 그리는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평가와 비판 앞에서 지나치게 쉽게 흔들리는 나 자신의 마음이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을 그리든 틀렸다고 말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투수가 겪는다는 입스처럼 나는 더 이상 흰 캔버스 앞에서 자유롭게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붓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창작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어쩌면 그렇게 나는 창작자에서 감상자가 되었고, 기획자와 운영자의 자리로 조금씩 이동해갔는지도 모른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트페어를 만들고, 전시를 조율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일을 했다. 그 안에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큰 그림이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그림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더 세밀하게 다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고, 스스로도 아트페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일들은 결코 혼자서 해낸 것이 아니었다. 늘 곁에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함께 움직여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트페어 현장을 떠난 뒤에도 나는 그간 쌓아온 경험 위에서 살아왔다. 칼럼을 쓰고, 강의를 하고, 기관과 재단의 전시를 기획하고, 다른 아트페어의 운영을 맡기도 했다. 물론 새로운 일을 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동안은 과거의 경험을 조금씩 꺼내 쓰며 살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감사한 기회로 작은 공간이지만 전시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흰 캔버스 앞에 선 사람처럼 막막해졌다. 무슨 전시를 해야 할까. 어떤 작가를, 어떤 방식으로, 왜 지금 여기서 보여주어야 할까. 나를 둘러싼 허명과 기대는 오히려 이 질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전시여야 하나, 시대적 의제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나, 혹은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쉽게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머뭇거리던 사이, 나는 오지은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지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22년 화랑미술제의 ‘줌인’ 섹션을 통해서였다. 이후 그의 작업을 지켜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화면 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붓질이 단순한 형식적 제스처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의 붓질은 설명보다 앞서 감각으로 도착하고, 묘사보다 먼저 정서의 결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언가를 잘 그리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 자신 안에 저장된 감정과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밖으로 꺼내는 움직임에 가깝다. 그의 회화는 자기 고백적 서사의 형식을 띠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과 잔상, 지나간 시간의 분위기를 화면 위에 붙잡아두려는 시도 위에 놓여 있다.
그의 그림은 풍경이나 정물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외부 세계의 재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날의 장면을 있는 그대로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감정, 그 순간 몸을 스쳐간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미묘하게 비틀려 있다. 하나의 장면은 완결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 남긴 인상으로 존재한다. 선명한 색은 특정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환기하고, 겹쳐지는 레이어와 밀고 흘리고 지나가는 붓질은 화면 안에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지 ‘보는 것’을 넘어, 어떤 소리와 온도, 움직임을 함께 느끼게 한다. 회화가 시처럼 읽히고, 춤처럼 감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내가 그의 작업에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사회적 장면에 깊이 반응하던 작가가 이후 개인의 기억과 감정, 관계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겨온 변화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진입처럼 보인다. ‘우리’에서 ‘나’로의 이동은 더 작은 세계로의 축소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가장 내밀한 접점 속에서 다시 사회를 발견하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상실과 애정, 두려움과 회복, 불안과 다독임 같은 감정의 층위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가장 실제적인 결이다. 오지은은 바로 그 지점에서 풍경을 빌려 마음을 펼친다.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oil on canvas, 162.2 × 130.3cm, 2021

먼지가 추는 춤 1, 2, oil on canvas, 145.5 × 97.0cm (each), 2020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 역시 그러한 감정의 잔상에서 출발한다.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과 ‘먼지가 추는 춤’ 연작은 말린 꽃을 모으던 어머니와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스무살 독립 이후 자신의 취향으로만 채우고 싶었던 공간 속에서, 한때는 불편하게 느껴졌던 말린 꽃을 치우려던 순간 꽃에서 떨어진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버려지려던 말린 꽃, 거기에 이름 붙일 수 없던 먼지 같은 것들 속에서도 기억과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아빠의 서재, oil on canvas, 60.6 × 80.3cm, 2022
‘아빠의 서재’에서는 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감정이 드러난다. 말수가 적고 다정함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의 공간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인물처럼 읽히며,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감정이 조용히 드러난다. 직접적인 서사가 아니라 사물과 공간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감정의 밀도가 이 작업을 지탱한다.

구름에 네 얼굴이 비칠 때, oil on canvas, 130.3 × 162.2cm, 2024
한편 ‘구름에 네 얼굴이 비칠 때’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풍경으로 번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감정에 깊이 고민한다. 전작에 보여주었던 ‘세상의 모든딸들(2021)’, ‘난 너밖에 없어라는 말이 얼마나 쓸모없는지(2022)’, ‘봄날은 간다(2023)’, ‘우리는 왜 상실을 사랑할까(2023)’의 연장선 상에서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의 층위를 화면의 긴장과 리듬 속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물에 비추는 마음, oil on canvas, 145.5 × 112.1cm, 2025
‘물에 비추는 마음’은 대전시립미술관 워크샵으로 함께 했던 계룡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수도가 될 뻔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계룡산에 남겨진 돌탑들은 누군가의 소원과 희망이 쌓인 흔적으로 읽힌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오지 않은 계절에 대한 감각이 화면 안에서 미묘하게 흔들린다. 이처럼 그의 풍경은 특정 장소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서 느껴진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함께 담아낸다.
오지은의 그림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붙들기 위해, 사라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 그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지극히 개인적인 화면은 보는 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누군가의 내밀한 풍경이 타인의 마음속 풍경과 이어지는 순간, 회화는 하나의 공통된 감각의 장소가 된다.
이 전시는 그 장소를 함께 건너가 보려는 시도다. 설명보다 감각이 앞서고, 판단보다 기억이 먼저 움직이는 자리. 그렇게 오지은의 회화는 오늘 우리 앞에 하나의 풍경으로, 한 편의 시로, 그리고 조용한 춤처럼 놓인다.
이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하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질문 앞에 다시 서는 일이었고, 한때 내려놓았던 감각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회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린다’는 행위의 떨림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쩌면 이 전시는 어떤 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에 가깝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오지은의 회화가 보여주듯, 감각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 오래전에 멈춰두었던 흰 캔버스 앞에 다시 서 있는 기분이다. 아직 무엇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시 한 번 용기내 움직여볼 수 있을 것 같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박준수

오지은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AGT 전시 전경
사진 : 이행진 (이하 동일)
흰 캔버스 앞에 앉아 막막했던 시간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익힌 손놀림 덕분에 또래보다 앞서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미대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잘 그리는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평가와 비판 앞에서 지나치게 쉽게 흔들리는 나 자신의 마음이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을 그리든 틀렸다고 말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투수가 겪는다는 입스처럼 나는 더 이상 흰 캔버스 앞에서 자유롭게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붓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창작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어쩌면 그렇게 나는 창작자에서 감상자가 되었고, 기획자와 운영자의 자리로 조금씩 이동해갔는지도 모른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트페어를 만들고, 전시를 조율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일을 했다. 그 안에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큰 그림이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그림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더 세밀하게 다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고, 스스로도 아트페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일들은 결코 혼자서 해낸 것이 아니었다. 늘 곁에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함께 움직여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트페어 현장을 떠난 뒤에도 나는 그간 쌓아온 경험 위에서 살아왔다. 칼럼을 쓰고, 강의를 하고, 기관과 재단의 전시를 기획하고, 다른 아트페어의 운영을 맡기도 했다. 물론 새로운 일을 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동안은 과거의 경험을 조금씩 꺼내 쓰며 살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감사한 기회로 작은 공간이지만 전시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흰 캔버스 앞에 선 사람처럼 막막해졌다. 무슨 전시를 해야 할까. 어떤 작가를, 어떤 방식으로, 왜 지금 여기서 보여주어야 할까. 나를 둘러싼 허명과 기대는 오히려 이 질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전시여야 하나, 시대적 의제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나, 혹은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쉽게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머뭇거리던 사이, 나는 오지은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지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22년 화랑미술제의 ‘줌인’ 섹션을 통해서였다. 이후 그의 작업을 지켜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화면 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붓질이 단순한 형식적 제스처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의 붓질은 설명보다 앞서 감각으로 도착하고, 묘사보다 먼저 정서의 결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언가를 잘 그리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 자신 안에 저장된 감정과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밖으로 꺼내는 움직임에 가깝다. 그의 회화는 자기 고백적 서사의 형식을 띠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과 잔상, 지나간 시간의 분위기를 화면 위에 붙잡아두려는 시도 위에 놓여 있다.
그의 그림은 풍경이나 정물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외부 세계의 재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날의 장면을 있는 그대로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감정, 그 순간 몸을 스쳐간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미묘하게 비틀려 있다. 하나의 장면은 완결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 남긴 인상으로 존재한다. 선명한 색은 특정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환기하고, 겹쳐지는 레이어와 밀고 흘리고 지나가는 붓질은 화면 안에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지 ‘보는 것’을 넘어, 어떤 소리와 온도, 움직임을 함께 느끼게 한다. 회화가 시처럼 읽히고, 춤처럼 감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내가 그의 작업에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사회적 장면에 깊이 반응하던 작가가 이후 개인의 기억과 감정, 관계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겨온 변화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진입처럼 보인다. ‘우리’에서 ‘나’로의 이동은 더 작은 세계로의 축소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가장 내밀한 접점 속에서 다시 사회를 발견하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상실과 애정, 두려움과 회복, 불안과 다독임 같은 감정의 층위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가장 실제적인 결이다. 오지은은 바로 그 지점에서 풍경을 빌려 마음을 펼친다.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 oil on canvas, 162.2 × 130.3cm, 2021

먼지가 추는 춤 1, 2, oil on canvas, 145.5 × 97.0cm (each), 2020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 역시 그러한 감정의 잔상에서 출발한다. ‘먼지가 흩날리는 시간’과 ‘먼지가 추는 춤’ 연작은 말린 꽃을 모으던 어머니와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스무살 독립 이후 자신의 취향으로만 채우고 싶었던 공간 속에서, 한때는 불편하게 느껴졌던 말린 꽃을 치우려던 순간 꽃에서 떨어진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버려지려던 말린 꽃, 거기에 이름 붙일 수 없던 먼지 같은 것들 속에서도 기억과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아빠의 서재, oil on canvas, 60.6 × 80.3cm, 2022
‘아빠의 서재’에서는 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감정이 드러난다. 말수가 적고 다정함을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의 공간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인물처럼 읽히며,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감정이 조용히 드러난다. 직접적인 서사가 아니라 사물과 공간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감정의 밀도가 이 작업을 지탱한다.

구름에 네 얼굴이 비칠 때, oil on canvas, 130.3 × 162.2cm, 2024
한편 ‘구름에 네 얼굴이 비칠 때’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풍경으로 번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감정에 깊이 고민한다. 전작에 보여주었던 ‘세상의 모든딸들(2021)’, ‘난 너밖에 없어라는 말이 얼마나 쓸모없는지(2022)’, ‘봄날은 간다(2023)’, ‘우리는 왜 상실을 사랑할까(2023)’의 연장선 상에서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의 층위를 화면의 긴장과 리듬 속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물에 비추는 마음, oil on canvas, 145.5 × 112.1cm, 2025
‘물에 비추는 마음’은 대전시립미술관 워크샵으로 함께 했던 계룡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수도가 될 뻔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계룡산에 남겨진 돌탑들은 누군가의 소원과 희망이 쌓인 흔적으로 읽힌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오지 않은 계절에 대한 감각이 화면 안에서 미묘하게 흔들린다. 이처럼 그의 풍경은 특정 장소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서 느껴진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함께 담아낸다.
오지은의 그림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붙들기 위해, 사라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 그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지극히 개인적인 화면은 보는 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누군가의 내밀한 풍경이 타인의 마음속 풍경과 이어지는 순간, 회화는 하나의 공통된 감각의 장소가 된다.
이 전시는 그 장소를 함께 건너가 보려는 시도다. 설명보다 감각이 앞서고, 판단보다 기억이 먼저 움직이는 자리. 그렇게 오지은의 회화는 오늘 우리 앞에 하나의 풍경으로, 한 편의 시로, 그리고 조용한 춤처럼 놓인다.
이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하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질문 앞에 다시 서는 일이었고, 한때 내려놓았던 감각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회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린다’는 행위의 떨림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쩌면 이 전시는 어떤 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에 가깝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오지은의 회화가 보여주듯, 감각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 오래전에 멈춰두었던 흰 캔버스 앞에 다시 서 있는 기분이다. 아직 무엇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시 한 번 용기내 움직여볼 수 있을 것 같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