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게 이어진
문소영(독립큐레이터)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상을 공유하는 무리이고, 마주 보고 있는 시간만큼 서로를 배경 속에 담아두는 것이 냉정하게 여겨지지 않는 관계이다. 그러자고 합의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함께 기억된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완전히 같은 형태로 남기보다, 각자 다른 모양과 감정으로 품어진다. 그런 기억과 감정이 한자리에 모여 이미지를 이룰 때, 가족이라는 입체적인 관계는 어떻게 그려질까? 이 전시에 참여하는 두 작가는 부부이자 두 아이의 부모이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누는 아름다운 네 가족이다. 전시에는 두 사람의 그림이 걸려 있지만, 원래는 네 가족이 함께 그림을 그린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업으로 빚어내지만, 가족들의 그림은 어딘가 닮아 있다. 혹은 닮지 않은 부분들도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공유된 일상은 각자의 시선으로 관찰되었다가, 작업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박환희는 일상에서 느낌표처럼 떠오르는 아름다운 순간이나, 문득 달라 보이는 사물과 풍경을 일기처럼 기록한다. 황기훈은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 오랜 시간 머무는 사물들의 파편으로부터 새로운 패턴을 본다. 두 사람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드러나지만 함께 지내 온 계절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로써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장소는 어떻게 조립되는지, 서로 다른 사물들이 그림 속에서 집이라는 접점에서 만나게 되는지 들여다보자.
박환희는 학습된 기술에서 벗어나,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에 집중해 보는 꾸밈없는 회화를 탐구해 왔다. 그는 편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손이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방법을 사사해 본다. 그리기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 이내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어린아이가 크레용을 끼적이는 감각에 매료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눈에 담은 것들을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라나고, 그것을 잘 그리기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연마하는 긴 시간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입시와 같은 그리기 훈련을 거친다. 꼭 입시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진 방법을 따라가며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언젠가는 버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박환희는 이러한 ‘잘 그리기’의 문법에서 벗어나, 세상을 해석하기보다 느껴지는 그대로 그려 보는 아이들의 방식을 떠올려 본다. 그에게 회화는 배운 것을 실행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 보는 과정에 더 가깝다. 단순함은 의미가 얕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 가장 온전하고 순수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오래전에 그린 그림을 다시 볼 때, 지금의 감각으로는 고치고 싶은 부분을 발견하면서도, 손에 남아 있는 습관이 그때의 화면에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습관은 작가 고유의 필적이라고 불리우고, 우연과 필연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회화가 숨길 수 없는 면모를 드러낸다. 의도보다 먼저 화면에 닿은 습관들, 계산되기 이전의 손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 형상들이 어쩌면 박환희가 지향하는 회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황기훈은 디자이너이자 작가이다. 디자인의 규칙과 균형의 요소가 회화의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성질과 만나며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기도 하고, 다시 화면의 균형을 잡는 기호나 형상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이미지들이 어우러지며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다. 작업의 소재나 재료는 삶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형상들이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버려진 사물들, 사물의 잘려 나간 일부분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기존에 있던 사물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색을 더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목재의 작은 조각들은 트럭이 되기도, 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조각들은 다시 가족의 일상으로 들어와 굳게 자리하다가, 박환희의 회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약국에서 약을 타면, 종이에 가루약을 담아 편지처럼 고이 접어 주었었다.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모습이지만, 쪽지처럼 접힌 약봉투는 아픈 곳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황기훈은 봉투에 씨앗을 담았다. 씨앗 속에는 색과 형태가 담겨 있어서, 심으면 꽃으로 자라난다. 어릴 적 바라본 꽃에 대한 기억이 문득문득 작업으로 소환되는 과정을 떠올려 본다. 재미난 이미지를 머릿속에 심었다가, 상상을 거름 삼아 또 다른 상상으로 자라나게 한다.
‘그리다’는 형상을 묘사하는 움직임이면서, 애틋하게 여기는 존재를 떠올려 보는 행동이기도 하다. 익숙해져 잠시 잊고 있었던 사물과 장면, 공기처럼 배경에 스며 있던 가족들의 모습이 어느 날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예고 없이 나타나는 풍경들은 때로 마음먹고 형태를 갖춘 것들보다 아름답다. 햇빛을 따라 흐르듯 춤추며 모양을 바꾸는 나무들, 바닷물에 이리저리 구르다 손바닥에 올릴 만큼 작아진 산호 조각과 조약돌, 무심하게 내려놓은 귤이나 자전거,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은하수,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꾸밈없는 표정처럼 말이다. 이렇게 반짝하고 빛나는 사물들을 박환희는 그림이라는 단순한 상태 속에 담아 보고, 황기훈은 그 안에서 순환하며 자라나는 상상의 갈래들을 발견하고 이어 나가 본다. 서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이 한 가정에 모여 집이라는 공기를 이루듯, 두 사람의 작업도 호호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낸다. 사소한 풍경들을 감싸거나 스쳐 지나가는 계절이 자아내는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발견하는 일은, 살아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큰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지, 그림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중 하나는 지나간 시간들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일일 것이다.
메기 넬슨은 낭만적인 언어로서 아르고호에 대한 바르트의 말[1]을 빌리며, 긴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각 부위가 교체되어 예전과 같은 배가 아니게 된 순간에도 변함없는 이름으로 불린 아르고호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전해지는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2].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해 영웅의 배인 아르고호를 타고, 기약 없는 여행 속에서도 끊임없이 배를 보수해 나가는 선원들의 모습으로부터 가족이라는 단순한 듯 복잡한 관계를 떠올려 본다. 불완전함마저 끌어안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 가며 이어진다는 점에서, 가족은 사랑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연관 없어 보이던 사람과 사물이 한 공간에 모여 집이라는 공기를 이루고, 때로는 양육과 돌봄이라는 접점을 나누기도 한다. 집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이다. 가족은 집이라는 시간을 함께 조립하는 관계이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까지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다. 함께 보고 싶은 것, 희로애락의 순간들, 정성을 쏟은 것들과 모양은 서툴지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얼기설기 엮다 보면, 추억들이 마음 아래 융단처럼 깔린다. 행복을 토대처럼 쌓아 두어, 언젠가 넘어졌을 때 아프지 않고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1] 아르고호(Argo)는 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Jason)과 50인의 아르고나우타이(Argonauts)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타고 떠났다고 전해지는 배이다. 바르트는 아르고호가 여정 속에서 모든 부품이 교체되어도 동일한 이름을 유지한다는 점을 들어, 사물이나 장소의 정체성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로 묶는 체계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동녘, 2013, p.62-63.
[2] "동일한 한 마디에 억양과 어조, 굴절을 통해 나날이 새로운 굽이들 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과제이자 언어의 과제" 이기에.
매기 넬슨(Meggy Nelson), 『아르고호의 선원들』, 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2024, p.11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느슨하게 이어진
문소영(독립큐레이터)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상을 공유하는 무리이고, 마주 보고 있는 시간만큼 서로를 배경 속에 담아두는 것이 냉정하게 여겨지지 않는 관계이다. 그러자고 합의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함께 기억된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완전히 같은 형태로 남기보다, 각자 다른 모양과 감정으로 품어진다. 그런 기억과 감정이 한자리에 모여 이미지를 이룰 때, 가족이라는 입체적인 관계는 어떻게 그려질까? 이 전시에 참여하는 두 작가는 부부이자 두 아이의 부모이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누는 아름다운 네 가족이다. 전시에는 두 사람의 그림이 걸려 있지만, 원래는 네 가족이 함께 그림을 그린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업으로 빚어내지만, 가족들의 그림은 어딘가 닮아 있다. 혹은 닮지 않은 부분들도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공유된 일상은 각자의 시선으로 관찰되었다가, 작업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박환희는 일상에서 느낌표처럼 떠오르는 아름다운 순간이나, 문득 달라 보이는 사물과 풍경을 일기처럼 기록한다. 황기훈은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 오랜 시간 머무는 사물들의 파편으로부터 새로운 패턴을 본다. 두 사람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드러나지만 함께 지내 온 계절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로써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장소는 어떻게 조립되는지, 서로 다른 사물들이 그림 속에서 집이라는 접점에서 만나게 되는지 들여다보자.
박환희는 학습된 기술에서 벗어나,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에 집중해 보는 꾸밈없는 회화를 탐구해 왔다. 그는 편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손이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방법을 사사해 본다. 그리기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 이내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어린아이가 크레용을 끼적이는 감각에 매료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눈에 담은 것들을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라나고, 그것을 잘 그리기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연마하는 긴 시간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입시와 같은 그리기 훈련을 거친다. 꼭 입시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진 방법을 따라가며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언젠가는 버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박환희는 이러한 ‘잘 그리기’의 문법에서 벗어나, 세상을 해석하기보다 느껴지는 그대로 그려 보는 아이들의 방식을 떠올려 본다. 그에게 회화는 배운 것을 실행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 보는 과정에 더 가깝다. 단순함은 의미가 얕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 가장 온전하고 순수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오래전에 그린 그림을 다시 볼 때, 지금의 감각으로는 고치고 싶은 부분을 발견하면서도, 손에 남아 있는 습관이 그때의 화면에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습관은 작가 고유의 필적이라고 불리우고, 우연과 필연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회화가 숨길 수 없는 면모를 드러낸다. 의도보다 먼저 화면에 닿은 습관들, 계산되기 이전의 손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 형상들이 어쩌면 박환희가 지향하는 회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황기훈은 디자이너이자 작가이다. 디자인의 규칙과 균형의 요소가 회화의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성질과 만나며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기도 하고, 다시 화면의 균형을 잡는 기호나 형상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이미지들이 어우러지며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다. 작업의 소재나 재료는 삶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형상들이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버려진 사물들, 사물의 잘려 나간 일부분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기존에 있던 사물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색을 더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목재의 작은 조각들은 트럭이 되기도, 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조각들은 다시 가족의 일상으로 들어와 굳게 자리하다가, 박환희의 회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약국에서 약을 타면, 종이에 가루약을 담아 편지처럼 고이 접어 주었었다.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모습이지만, 쪽지처럼 접힌 약봉투는 아픈 곳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황기훈은 봉투에 씨앗을 담았다. 씨앗 속에는 색과 형태가 담겨 있어서, 심으면 꽃으로 자라난다. 어릴 적 바라본 꽃에 대한 기억이 문득문득 작업으로 소환되는 과정을 떠올려 본다. 재미난 이미지를 머릿속에 심었다가, 상상을 거름 삼아 또 다른 상상으로 자라나게 한다.
‘그리다’는 형상을 묘사하는 움직임이면서, 애틋하게 여기는 존재를 떠올려 보는 행동이기도 하다. 익숙해져 잠시 잊고 있었던 사물과 장면, 공기처럼 배경에 스며 있던 가족들의 모습이 어느 날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예고 없이 나타나는 풍경들은 때로 마음먹고 형태를 갖춘 것들보다 아름답다. 햇빛을 따라 흐르듯 춤추며 모양을 바꾸는 나무들, 바닷물에 이리저리 구르다 손바닥에 올릴 만큼 작아진 산호 조각과 조약돌, 무심하게 내려놓은 귤이나 자전거,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은하수,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꾸밈없는 표정처럼 말이다. 이렇게 반짝하고 빛나는 사물들을 박환희는 그림이라는 단순한 상태 속에 담아 보고, 황기훈은 그 안에서 순환하며 자라나는 상상의 갈래들을 발견하고 이어 나가 본다. 서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이 한 가정에 모여 집이라는 공기를 이루듯, 두 사람의 작업도 호호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낸다. 사소한 풍경들을 감싸거나 스쳐 지나가는 계절이 자아내는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발견하는 일은, 살아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큰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지, 그림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중 하나는 지나간 시간들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일일 것이다.
메기 넬슨은 낭만적인 언어로서 아르고호에 대한 바르트의 말[1]을 빌리며, 긴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각 부위가 교체되어 예전과 같은 배가 아니게 된 순간에도 변함없는 이름으로 불린 아르고호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전해지는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2].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해 영웅의 배인 아르고호를 타고, 기약 없는 여행 속에서도 끊임없이 배를 보수해 나가는 선원들의 모습으로부터 가족이라는 단순한 듯 복잡한 관계를 떠올려 본다. 불완전함마저 끌어안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 가며 이어진다는 점에서, 가족은 사랑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연관 없어 보이던 사람과 사물이 한 공간에 모여 집이라는 공기를 이루고, 때로는 양육과 돌봄이라는 접점을 나누기도 한다. 집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이다. 가족은 집이라는 시간을 함께 조립하는 관계이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까지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다. 함께 보고 싶은 것, 희로애락의 순간들, 정성을 쏟은 것들과 모양은 서툴지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얼기설기 엮다 보면, 추억들이 마음 아래 융단처럼 깔린다. 행복을 토대처럼 쌓아 두어, 언젠가 넘어졌을 때 아프지 않고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1] 아르고호(Argo)는 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Jason)과 50인의 아르고나우타이(Argonauts)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타고 떠났다고 전해지는 배이다. 바르트는 아르고호가 여정 속에서 모든 부품이 교체되어도 동일한 이름을 유지한다는 점을 들어, 사물이나 장소의 정체성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로 묶는 체계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동녘, 2013, p.62-63.
[2] "동일한 한 마디에 억양과 어조, 굴절을 통해 나날이 새로운 굽이들 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과제이자 언어의 과제" 이기에.
매기 넬슨(Meggy Nelson), 『아르고호의 선원들』, 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2024, p.11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