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힘든 거 아니지? 휴, 다행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최악의 위로 1순위로 꼽힌다는 그 대사. 모 방송인의 말처럼, 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남이 더 힘든 걸 안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다. 그래서 김상덕은 힘들기론 최고라 자부하는 각계의 ‘힘듦러’들이 모여 마음껏 미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든다. 이름하여 ‘상덕랜드’ 개장.
살다가 스스로 바보 같단 자책이 들 때, 문득 주변에 들어오는 구제 불능 바보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그래도 덜 바보로서 이렇게 의기소침해선 안 돼. 힘내자. 중증 바보들을 보듬자.’ 완벽은 사회악이다. 결함이 곧 인간미 아니겠는가. 인간미 넘치는 바보들 속에 있을 때 안심이다. 바보스러움을 중계하는 메이저 무대. 오답을 잘 찍어야 1등 하는 시험장. 그는 더 저렴하고, 더 해괴하고, 더 막살고, 더 정신 나간 친구들로 가득한, 오직 자신을 위한 B급 놀이동산을 건설했다. 그렇다, 상덕랜드의 실체는 김상덕의 불행, 걱정 격리 수용소이다. 따지고 보면 이 자체도 블랙코미디. 금기와 욕구와 울분으로 점철한 대나무 숲, 상덕랜드에 입장한 것을 환영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대책 없이 명랑한 원색이 폭발하는 상덕랜드의 풍경은 분명 현실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초현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무언가와도 거리가 멀다. 현실 부정도 아니다. 뜬구름 잡듯 허망한 몸부림도 없다. 초현실(surreal), 비현실(unreal), 탈현실(dereal) 그 어느 것도 아니라니. 그가 현실을 인용하는 방식은 ‘짭’이다. 그는 짭현실(pseudoreal) 딜러, 가짜와 싸구려 유통 전문이다. 저 멋진 하늘을 뜯어다 붙이긴 요원하니 화방에서 좀 싼 하늘색을 잔뜩 사다 신나게 바른다. 그리고 아껴두었던 비싼 물감을 조금 덜어 덕지덕지 덮어 본다. 좀 모자랐나 보다. 군데군데 저렴함이 새는 걸 보니. 음…구름을 몇 뭉치 달면 좀 나을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의 구름을 모셔 오기엔 어딘가 부담스럽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굴러다니는, 어제 창고 수리하고 남은 구름 벽지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슈퍼마리오에 나오는 구름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무도 몇 그루 심고 싶다. 학예회 가설무대에서 쓰다 남은 듯 사람만 한 성냥처럼 생긴 엉성한 나무 소품을 그림 곁에 세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그를 물리치는 영웅? 예쁜 공주님? 상덕랜드엔 출입 금지이다. 여긴 제대로 된 배역 따윈 없다. BBC에서 해고당해 먹고 살기 급급한 전직 텔레토비, 점유율이 떨어져 더 이상 안경을 쓰고 변장을 안 해도, 바지 위에 팬티를 입어도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병석의 슈퍼맨, 후원 없는 1인 기업 특성상 다단계 영업에 광신도 모집에 경전 쓸 틈도 없는 삼류 사이비 교주, 성형이 무너져 괴물이 된 늙은 공주와 탈을 뒤집어쓴 변태 어린이들이 B급 감성을 뽐내며 주연 조연 구분도 없이 뒤엉켜 산다.
힘든 사람은 울지만 힘들어 실성한 사람은 웃는다. 그래서 상덕랜드는 핸드폰 대리점 오픈 행사에서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길쭉하고 엉성한 모습의 헤벌쭉한 등장인물로 어질어질하다. 진짜라기엔 썩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딘가 나사가 한 주먹 빠져, 누가 봐도 1인분 해 내기 힘겨운 친구들이 ‘왜 사냐건 웃지요’ 하며 즐겁게 허덕이는 동산이다. 바보가 많아 안심인 곳. 삶의 부조리에 멍투성이 절름발이가 된 자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셈이다.
설정은 또 어떠한가.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무대와 시설과 아이템과 사건 또한 학예회 나무 소품의 논리적 변용이다.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우화적 세계관과 장면 설정을 ‘맥거핀적 미장센’으로 형상화한다. 맥거핀은 일견 그럴듯함에도 불구, 무언가를 상징하듯, 무게 있는 척, 중요할 법한데 ‘뻥’이다. 미장센은 특정한 장소나 사물의 일루전이라기보다 무대 소품 만들 듯 장면을 설계하고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고쳐 버전업하는 행태이다. 말하자면 “지금 보니 너무 평지 같아 허전하다. 산이 없어서 우선 산처럼 생긴 돌을 그린다. 이윽고 돌산에 천둥번개가 치고 구름이 휘감으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젠 정말 끝이다, 끝이야!” 야단법석 우왕좌왕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준비했다. 사람들 말처럼 끝이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맑은 들판에 돌 하나가 서 있다.” 와 같은 전개가 일상이다. 안 중요해도 주인공일 수 있다. 내키는 대로 고친다. 셀럽 따로 있고, 못 주워 담는 현실과 달리.

또 하나, 크다. 언제 다 그릴까 싶을 만치 그림이 정말 크다. 비주류 가득한 마이너 감성을, 메이저급 볼륨으로 웅장히 폭로하는 역설은 그의 주된 물리적 화법이다. 전시장을 사방 가득 채우며 시야를 압도하는, 현란하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자면 관객과 거의 일대일 대응하는 실제 크기의 형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부대껴 동산을 함께 거닌다. 몰입을 넘어 체험으로 잡아끄는 스케일의 위력은 그의 표현적 갈망과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작업량에서 비롯한다.

건조 속도가 빠른 아크릴 물감이 그의 주요 채색 재료이다. 그렇대도 저렴하지 않은 데 비해 이 ‘어마무시’한 캔버스 면적은 그에게도 사실 큰 부담. 물감 짜는 손이 벌벌 떨려 고민하다 그는 팔레트에도 ‘쌈마이 향연’을 벌인다. 싼 물감 특유의 저렴한 색감을 주요한 색조로 삼자, 보다 과감한 손놀림에 스피디한 필치까지 더해져, 보다 진정성 넘치는 B급 갬성 페인터로 발돋움을 수 있었던 것. 몇 번 혼색하면 소위 ‘똥색’이 되어버리는 처참한 투광성에 감동해 색을 마구 올려 밑색으로 활용했다. 흥한들 망한들 어차피 나중엔 보이지도 않을 거, 그냥 총알받이나 고기 방패처럼 깔고, 발색 좋은 비싼 친구들은 맨 위에 고명처럼 올린다. 말하자면 그의 스피디함, 야생성, 강렬함의 배후는 똥색이다. 내용은 물론 형식까지 전폭적인 B급의 협찬이라니. 이들을 그는 ‘색 기미상궁’으로 추서한다. 죽어서 다른 색을 살리니까. 이러나저러나 이발소 색상과 B급 감성은 숱한 기미상궁의 현충탑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최근엔 과슈의 텁텁 쫀쫀하고 매트한 차분함에 빠져들었다. 야단법석 그 자체인 화면을 오랫동안 몰입할 수 있게 차분히 붙들어주는 과슈 작업의 표면감이 의의로 시각적으로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기존의 아크릴 페인팅과의 분위기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어 작품 구성 면에서도 상당한 시너지를 낸다.
따지자면 그의 작업은 이미지의 비중이 내용보다 크다. 그런데 작업실 밖을 따라가 보면 의외로, 탄탄한 사생에서 출발한다. 스케치북과 아이패드를 이고 다니며 수많은 드로잉으로 현장을 포착하고 그 영감을 낚는다. 사진 레퍼런스를 수집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사진은 놓치지 않는 것이고, 사생은 주워 담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주관 덩어리’라 한다. 무수한 취사선택의 반복이 바로 드로잉이다. 설정, 과장, 변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활발하고 격렬하다. ‘불행 놀이’의 분위기를 꾸미고, 보는 이가 각자 알아서 내용을 써넣을 수 있게 이미지의 비중을 높여 가며 다듬는 것. ‘회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그가 ‘설명충 퇴치 부적’이라 답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미지를 이미지로 나 둬, 제발’
〈한 놈만 걸려, 그게 내가 아니길〉
〈핵상쾌동산〉
〈덜 익은 음식 전문점〉
〈변태보다 더한 변태들〉
그래서 오히려 더 신임하는 그의 일꾼 중 하나가 바로 ‘작품 제목’이다. 주옥같은 저 제목들을 보라. 제목은 일종의 보조 캔버스이다. 선택적이라 어느 작가에겐 때론 말을 아끼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반면 다른 누군가에겐 화면 못지않은 큰 위력을 지닌다. 제목은 내용과 어조를 함축해 큰 힌트로 작용하기도, 혹은 의도적으로 화면과 의도, 대치하거나 어그로(?)를 끌어 종합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때때로 관객에게 직접 대사를 읊는 창구이기도 하다. 음성 언어가 제목에 들어간다고 전에 없던 특별한 형식으로 변신하는 건 아니지만, ‘제목이란 사실’이 무게와 함축성을 제 멋대로 배가하기에 보다 특별해진다.
그는 현실에 돌을 던져 깨뜨리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튕겨 나온 돌에 얻어맞은 부상병을 규합해, 바닥에 널브러진 현실 잉여 조각을 묵묵히 줍는다. 모으고 또 모아 변두리 어딘가에 상덕랜드를 짓는다. 이는 그의 현란한 풍경이 곧 우리가 외면한 불편한 진실의 파편으로 이리저리 짜맞춘 거친 거울임을 시사한다. 그는 이면에서 주류에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흑색 혁명 분자가 아니다. 취향과 시선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 차라리 흑역사의 일원이 되길 자처할 뿐. ‘불행 포르노’라는 그의 자조가 와닿는 이유이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나만 힘든 거 아니지? 휴, 다행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최악의 위로 1순위로 꼽힌다는 그 대사. 모 방송인의 말처럼, 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남이 더 힘든 걸 안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다. 그래서 김상덕은 힘들기론 최고라 자부하는 각계의 ‘힘듦러’들이 모여 마음껏 미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든다. 이름하여 ‘상덕랜드’ 개장.
살다가 스스로 바보 같단 자책이 들 때, 문득 주변에 들어오는 구제 불능 바보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그래도 덜 바보로서 이렇게 의기소침해선 안 돼. 힘내자. 중증 바보들을 보듬자.’ 완벽은 사회악이다. 결함이 곧 인간미 아니겠는가. 인간미 넘치는 바보들 속에 있을 때 안심이다. 바보스러움을 중계하는 메이저 무대. 오답을 잘 찍어야 1등 하는 시험장. 그는 더 저렴하고, 더 해괴하고, 더 막살고, 더 정신 나간 친구들로 가득한, 오직 자신을 위한 B급 놀이동산을 건설했다. 그렇다, 상덕랜드의 실체는 김상덕의 불행, 걱정 격리 수용소이다. 따지고 보면 이 자체도 블랙코미디. 금기와 욕구와 울분으로 점철한 대나무 숲, 상덕랜드에 입장한 것을 환영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대책 없이 명랑한 원색이 폭발하는 상덕랜드의 풍경은 분명 현실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초현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무언가와도 거리가 멀다. 현실 부정도 아니다. 뜬구름 잡듯 허망한 몸부림도 없다. 초현실(surreal), 비현실(unreal), 탈현실(dereal) 그 어느 것도 아니라니. 그가 현실을 인용하는 방식은 ‘짭’이다. 그는 짭현실(pseudoreal) 딜러, 가짜와 싸구려 유통 전문이다. 저 멋진 하늘을 뜯어다 붙이긴 요원하니 화방에서 좀 싼 하늘색을 잔뜩 사다 신나게 바른다. 그리고 아껴두었던 비싼 물감을 조금 덜어 덕지덕지 덮어 본다. 좀 모자랐나 보다. 군데군데 저렴함이 새는 걸 보니. 음…구름을 몇 뭉치 달면 좀 나을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의 구름을 모셔 오기엔 어딘가 부담스럽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굴러다니는, 어제 창고 수리하고 남은 구름 벽지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슈퍼마리오에 나오는 구름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무도 몇 그루 심고 싶다. 학예회 가설무대에서 쓰다 남은 듯 사람만 한 성냥처럼 생긴 엉성한 나무 소품을 그림 곁에 세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그를 물리치는 영웅? 예쁜 공주님? 상덕랜드엔 출입 금지이다. 여긴 제대로 된 배역 따윈 없다. BBC에서 해고당해 먹고 살기 급급한 전직 텔레토비, 점유율이 떨어져 더 이상 안경을 쓰고 변장을 안 해도, 바지 위에 팬티를 입어도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병석의 슈퍼맨, 후원 없는 1인 기업 특성상 다단계 영업에 광신도 모집에 경전 쓸 틈도 없는 삼류 사이비 교주, 성형이 무너져 괴물이 된 늙은 공주와 탈을 뒤집어쓴 변태 어린이들이 B급 감성을 뽐내며 주연 조연 구분도 없이 뒤엉켜 산다.
힘든 사람은 울지만 힘들어 실성한 사람은 웃는다. 그래서 상덕랜드는 핸드폰 대리점 오픈 행사에서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길쭉하고 엉성한 모습의 헤벌쭉한 등장인물로 어질어질하다. 진짜라기엔 썩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딘가 나사가 한 주먹 빠져, 누가 봐도 1인분 해 내기 힘겨운 친구들이 ‘왜 사냐건 웃지요’ 하며 즐겁게 허덕이는 동산이다. 바보가 많아 안심인 곳. 삶의 부조리에 멍투성이 절름발이가 된 자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셈이다.
설정은 또 어떠한가.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무대와 시설과 아이템과 사건 또한 학예회 나무 소품의 논리적 변용이다.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우화적 세계관과 장면 설정을 ‘맥거핀적 미장센’으로 형상화한다. 맥거핀은 일견 그럴듯함에도 불구, 무언가를 상징하듯, 무게 있는 척, 중요할 법한데 ‘뻥’이다. 미장센은 특정한 장소나 사물의 일루전이라기보다 무대 소품 만들 듯 장면을 설계하고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고쳐 버전업하는 행태이다. 말하자면 “지금 보니 너무 평지 같아 허전하다. 산이 없어서 우선 산처럼 생긴 돌을 그린다. 이윽고 돌산에 천둥번개가 치고 구름이 휘감으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젠 정말 끝이다, 끝이야!” 야단법석 우왕좌왕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준비했다. 사람들 말처럼 끝이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맑은 들판에 돌 하나가 서 있다.” 와 같은 전개가 일상이다. 안 중요해도 주인공일 수 있다. 내키는 대로 고친다. 셀럽 따로 있고, 못 주워 담는 현실과 달리.

또 하나, 크다. 언제 다 그릴까 싶을 만치 그림이 정말 크다. 비주류 가득한 마이너 감성을, 메이저급 볼륨으로 웅장히 폭로하는 역설은 그의 주된 물리적 화법이다. 전시장을 사방 가득 채우며 시야를 압도하는, 현란하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자면 관객과 거의 일대일 대응하는 실제 크기의 형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부대껴 동산을 함께 거닌다. 몰입을 넘어 체험으로 잡아끄는 스케일의 위력은 그의 표현적 갈망과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작업량에서 비롯한다.

건조 속도가 빠른 아크릴 물감이 그의 주요 채색 재료이다. 그렇대도 저렴하지 않은 데 비해 이 ‘어마무시’한 캔버스 면적은 그에게도 사실 큰 부담. 물감 짜는 손이 벌벌 떨려 고민하다 그는 팔레트에도 ‘쌈마이 향연’을 벌인다. 싼 물감 특유의 저렴한 색감을 주요한 색조로 삼자, 보다 과감한 손놀림에 스피디한 필치까지 더해져, 보다 진정성 넘치는 B급 갬성 페인터로 발돋움을 수 있었던 것. 몇 번 혼색하면 소위 ‘똥색’이 되어버리는 처참한 투광성에 감동해 색을 마구 올려 밑색으로 활용했다. 흥한들 망한들 어차피 나중엔 보이지도 않을 거, 그냥 총알받이나 고기 방패처럼 깔고, 발색 좋은 비싼 친구들은 맨 위에 고명처럼 올린다. 말하자면 그의 스피디함, 야생성, 강렬함의 배후는 똥색이다. 내용은 물론 형식까지 전폭적인 B급의 협찬이라니. 이들을 그는 ‘색 기미상궁’으로 추서한다. 죽어서 다른 색을 살리니까. 이러나저러나 이발소 색상과 B급 감성은 숱한 기미상궁의 현충탑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최근엔 과슈의 텁텁 쫀쫀하고 매트한 차분함에 빠져들었다. 야단법석 그 자체인 화면을 오랫동안 몰입할 수 있게 차분히 붙들어주는 과슈 작업의 표면감이 의의로 시각적으로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기존의 아크릴 페인팅과의 분위기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어 작품 구성 면에서도 상당한 시너지를 낸다.
따지자면 그의 작업은 이미지의 비중이 내용보다 크다. 그런데 작업실 밖을 따라가 보면 의외로, 탄탄한 사생에서 출발한다. 스케치북과 아이패드를 이고 다니며 수많은 드로잉으로 현장을 포착하고 그 영감을 낚는다. 사진 레퍼런스를 수집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사진은 놓치지 않는 것이고, 사생은 주워 담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주관 덩어리’라 한다. 무수한 취사선택의 반복이 바로 드로잉이다. 설정, 과장, 변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활발하고 격렬하다. ‘불행 놀이’의 분위기를 꾸미고, 보는 이가 각자 알아서 내용을 써넣을 수 있게 이미지의 비중을 높여 가며 다듬는 것. ‘회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그가 ‘설명충 퇴치 부적’이라 답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미지를 이미지로 나 둬, 제발’
〈한 놈만 걸려, 그게 내가 아니길〉
〈핵상쾌동산〉
〈덜 익은 음식 전문점〉
〈변태보다 더한 변태들〉
그래서 오히려 더 신임하는 그의 일꾼 중 하나가 바로 ‘작품 제목’이다. 주옥같은 저 제목들을 보라. 제목은 일종의 보조 캔버스이다. 선택적이라 어느 작가에겐 때론 말을 아끼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반면 다른 누군가에겐 화면 못지않은 큰 위력을 지닌다. 제목은 내용과 어조를 함축해 큰 힌트로 작용하기도, 혹은 의도적으로 화면과 의도, 대치하거나 어그로(?)를 끌어 종합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때때로 관객에게 직접 대사를 읊는 창구이기도 하다. 음성 언어가 제목에 들어간다고 전에 없던 특별한 형식으로 변신하는 건 아니지만, ‘제목이란 사실’이 무게와 함축성을 제 멋대로 배가하기에 보다 특별해진다.
그는 현실에 돌을 던져 깨뜨리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튕겨 나온 돌에 얻어맞은 부상병을 규합해, 바닥에 널브러진 현실 잉여 조각을 묵묵히 줍는다. 모으고 또 모아 변두리 어딘가에 상덕랜드를 짓는다. 이는 그의 현란한 풍경이 곧 우리가 외면한 불편한 진실의 파편으로 이리저리 짜맞춘 거친 거울임을 시사한다. 그는 이면에서 주류에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흑색 혁명 분자가 아니다. 취향과 시선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 차라리 흑역사의 일원이 되길 자처할 뿐. ‘불행 포르노’라는 그의 자조가 와닿는 이유이다.
2026.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