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CK 앜앜앜: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이 세계의 사물이 이세계의 서사가 될 때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수천만 년 전, 모기 한 마리가 나무의 진액에 빠져 죽었다. 진액은 굳어 호박이 되었고, 그 안에서 모기는 수천만 년 동안 박제되었다. 그 모기의 뱃속에 남은 피 한 방울에서 이미 사라진 세계를 통째로 복원할 수 있다는 상상은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오히려 터무니없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 상상이 가능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파편이 전체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뼈 하나에서 그 존재의 걸음걸이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하고, 지층의 단면에서 수백만 년 전의 기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돌멩이 하나의 성분표에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역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파편에서 복원된 세계는 파편이 발견된 '지금'의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공룡의 후손이 닭이라는 영상을 본 날은 꽤 충격적이었다. 지구상 가장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던 존재의 후손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 존재에게 깃털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천만 년 전의 세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석에 새겨진 위엄(?)은 뼈를 발굴한 사람의 상상이 덧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파편을 손에 쥔 사람이 현재의 언어로 구성한 서사인 것이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이 과거를 그대로 재생한다는 전제와 달리, 떠올리는 순간마다 기억은 지금의 조건 안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는 리플레이되지 않는다. 재생되는 것은 현재가 재구성한 과거인 것이다.
이수현의 작업은 이러한 파편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도시의 형성과 소멸 속에서 남겨진 파편을 수집한다. 빈집의 대추, 신도시의 익숙한 이질감, 아파트 공원에 묻힌 슬래그 등. 그 사물들은 장소가 살아온 시간의 파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하는 일은 그 파편을 토대로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이 장소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려는 것도 아니다. 이수현은 지금, 이 사물을 처음 마주한 경험에서 출발하여 아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파편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 위에 놓여 있다.
2.
장소에는 시간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때 지어진 공간에서 그때의 누군가가 살았을 것이고, 그때의 시간 위에 다시 무언가 세워진다. 도시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전의 시간을 끊임없이 덮는다. 그러나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새로운 도로가 깔리고 새로운 공원이 조성되더라도 이전의 것이 보이지 않게 될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도시는 그 보이지 않음을 위해 끊임없이 그 '새로움'을 수행한다.
장소를 다루는 동시대 미술 작업은 이 덮인 시간을 다시 들추려는 시도에 가닿아 있다. 레지던시에 입주하고, 리서치하고,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고 전시장에 옮겨놓는 루틴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업이라는 개념 안에는 두 갈래의 전통이 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와 권미원으로 대표되는 장소특정성이 그것이다. 리처드 세라식 장소특정성이란 작업이 특정한 물리적 좌표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옮기는 즉시 작업은 예술로서의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반면 권미원은 이 좌표를 담론으로 확장하여, 사회적·정치적·제도적 조건 자체가 작업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재정의하였다. 귀속이거나 확장이거나, 장소 작업의 대부분은 이 두 갈래의 어딘가에서 성립된다.
3.
이수현의 첫 번째 장소는 빈집이었다. 10여 년간 번복된 재개발 계획에 의해 방치되었던 집이다. 이수현은 장위동 주변을 거닐다 빈집의 마지막 거주자였던 어르신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으로부터 장소의 기억을 수집하였다. 어르신과 함께 빈집을 들어서면서 만난 대추나무는 각별한 사물이었다. 1989년에 이사하면서 옮겨 심은 나무가 아직 마당에 서 있다는 회상에, 작가는 대추를 가져와 대나무 발 위에 펼쳐 말리고, 매일 대추차를 끓여 관객과 나눠 마셨다. 앞마당에 가꾸던 화단이 이제는 없다는 아쉬움 섞인 푸념에, 물도 나오지 않는 옥색 욕조 안에 흙이 채워져 꽃이 피게 하였다. 그 집을 지키던 강아지 복실이 또한 지금은 없지만, 현관 아래에 센서를 달아 누군가 문 앞에 서면 짖는 소리가 나도록 하였다. 어르신의 기억에 깃든 행위들이 빈집 안에서 다시 작동하고 있었다. 대추를 말리고 차를 끓이는 행위, 꽃을 가꾸는 행위, 문 앞에서 짖는 행위. 기억은 장면이 아니라 '행위'로 남아 있었고, 작가는 그 행위를 다시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빈집의 시간을 오늘 위에 리플레이시켰다.

대추 말리기, 2021, 대추, 대나무발, 공간설치

앞마당 화단, 2021, 화초, 공간설치
장소의 기억을 다루는 작업은 보편적인 아카이브의 형식을 취하기 쉽다. 그리고 그 아카이브는 과거를 보존하고 다시 소환한다. 그러나 그 과거가 지금의 시간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수현이 사물의 역할을 되살리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과거를 기록하는 한편, 지금 이 공간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장소에 오래 머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서사를 바탕으로 공간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권미원이 말한 장소특정성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로소 마주하다,_전시 전경
4.
청년 작가에게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장소가 품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 응답하는 것이 장소 작업의 당연한 방법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장소가 이런 시간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어떤 도시는 애초에 이전의 시간을 갖지 않도록 설계되기 때문이다. 고양시는 제1신도시이다. 격자무늬의 주거지 사이에 아파트와 학교가 퍼즐처럼 끼워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호수와 공원이 배치되어 있다. 평화롭다. 그런데 이 평화로움이 이상하다. 나무가 있어야 할 곳에 나무가 있고, 물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 정확하다. 어느 날 공원의 그네에 앉아 있던 이수현에게 낯선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어디로 가야 상권이 나오느냐고. 바로 옆 블록에 상권이 있는데, 그 남자의 동선은 산책을 위한 계획 위에 있었던 것이다. 설계가 완벽할수록 설계는 보이지 않는다. 호박 속 모기의 피로 공룡을 복원하여 만든 테마파크에서 공룡들은 살아 있으나 설계 속의 생명인 것처럼, 풍경은 스스로 그러해야 하는 자연이지만 통제된 것이다. 복원이 완벽할수록 오히려 인공임이 드러나는 이 역설은, 고양시의 계획된 자연과 묘하게 겹쳐진다.
장위동의 빈집에서는 대추와 욕조와 강아지 소리를 남겼다. 장소가 스스로 사물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양에는 그런 사물이 없었다. 이전의 시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파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도시의 시간을 품고 있으며 가장 쉽게 수집할 수 있는 것은 거기서 나고 자란 이수현 자신이었다. 작가 스스로가 도시의 시간을 방증하는 사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수현은 이를 이미지로 옮기기 위한 재료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수현은 소금을 택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신도시에서 느꼈던 불안정한 시간성을, 스스로 변하고 스며들고 결정화되는 소금의 성질로 번역하려 한 것이다. 물 없이 돌과 모래만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일본식 정원처럼, 소금과 먹으로 일산호수공원의 밤물결을 산수풍경으로 재구성하고, 고양시 지형도를 밤안개 낀 풍경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흩어지는 달빛_전시전경

흩어지는달빛, 2024, 소금에 먹, 암염, 포맥스, 가변설치
시각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장소특정적 미술은 항상 출처와 근거를 질문한다. 이수현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소금을 왜 선택했는지, 소금과 고양이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어쩌면 이 질문은 장위동에서부터 비롯된 장소특정성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수현은 소금을 가져왔다. 작가가 특별히 음식을 짜게 먹는 식습관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닷가에 연고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소금을 쓴다는 것은 소금이, 아니 사물이 특정 장소에 귀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이자 주장이기도 한 것이다. 바다가 없는 도시에 바다의 사물을 가져온 셈인데, 이것은 소금이라는 사물이 장소를 가리키는 것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장소에 귀속된 사물만이 장소를 말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5.
그 의심을 울산에서 증명하려 했다. 소금이라는 물성을 이어가며 실험하려는 의도였고, 공교롭게도 입주한 레지던시의 이름이 '소금나루'였던 것이다. 울산 북구 염포(鹽浦)동. 소금 포구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소금을 실어 나르던 포구가 있었다 한다. 과연 소금이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수현의 소금은 이 동네의 소금이 아니었다. 작가의 소금은 신도시의 불안정한 시간성을 짜게 품고 있었지, 염포동의 역사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사물이되 다른 서사를 담은 사물인 것이다. 게다가 이수현이 본 울산의 산업은 소금과 거리가 멀었다. 개인의 삶부터 산업의 역사까지 이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이야기는 방대했지만, 소금은 그 이야기의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사물이 장소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장소가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붉은 착륙지, 2025, 싱글채널비디오, 4K, 2분
붉은 착륙지, 2025, 울산 쇠부리복원사업에서 발생한 슬래그, 토철, 가변설치
그렇게 사물과 장소를 연구하다 발견한 것이 철이었다. 울산에는 달천철장이라는 오래된 제철 산업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도시재생지원센터의 관계자를 통해 쇠부리복원사업이라는 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철의 도시에서 철을 복원하는 행사라니, 이수현은 옛 제련의 흔적이라든지, 근엄 가득한 현장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아파트 단지의 공원은 정겨운 동네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이것이 철의 축제인가 싶은 이질감 속에서, 가마에서 꺼낸 시커먼 덩어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슬래그였다. 작가가 이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 떠올린 것은 달천철장의 역사도 울산을 지탱하는 산업의 역사도 아니었다. 돌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숯과 재, 조개껍질과 철가루가 뒤엉켜 굳어버린 이 덩어리는, 이 땅의 것이라기보다 어딘가 먼 곳에서 날아와 박힌 것처럼 보였다. 장소의 서사를 파악하기 전에 사물의 이질감이 먼저였던 것이다.


중력관찰1 탐사코드 D-SL-16, 2025, 슬래그, 스테인레스스틸, 자기부상장치, 135×70×85cm
중력관찰2 정지된 궤도, 2025, 슬래그, 스테인레스스틸, 40×50×80cm
그러나 이 이질감은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도시가 새로움으로 덮어놓은 그곳, 거기 있을 리 없지만 있어야 해서 있는 자연이 끼워져 있는 그곳, 그리드 위에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깔려 있던 그곳에서의 경험이, 슬래그 앞에서 비로소 또렷해졌다. 아파트 공원의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이수현을 사로잡은 이유는, 바로 그 이질감의 가장 극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6.
그렇다면 이 이질감을 어떻게 작업으로 옮길 것인가. 작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토하듯이, 슬래그를 운석이라 부르는 것은 유치한 상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유치함에는 재미있는 배경이 숨어 있는데, 놀랍게도 산화철로 뒤덮인 달천철장의 붉은 땅은 화성의 표면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산화철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론 머스크의 상상이 뭇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시대에 장소를, 아니 장소의 서사를 좌표로 고정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쥬라기 월드에 출연하는 공룡들이 실은 대부분 백악기 시대의 종이라는 사실은,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실제가 가리키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디폴트값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수현은 이 간극을 교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증폭시킨다. 슬래그를 운석으로, 달천을 착륙지로, 채집 기록을 탐사일지로 옮기는 작업은 장소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사물을 마주했을 때의 이질감을 이세계(異世界)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이다.
세라의 장소특정성에서 사물은 지정된 좌표를 벗어나는 즉시 죽음에 이른다. 권미원의 장소특정성에서 장소는 물리적 좌표를 벗어나 담론이 된다. 그런데 이수현의 사물은 어느 쪽도 아니다. 슬래그는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의 전시장에 놓였음에도 죽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떠남으로써 그 사물 앞에서 작가가 느꼈던 이질감이 비로소 드러난다. 울산 공원에 묻혀 있을 때는 그냥 돌덩이였던 것이, 다른 좌표 위에 놓이는 순간 '이질감' 그 자체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금도 마찬가지다. 고양의 소금이 염포동의 소금과 다른 서사를 품고 있었듯이, 사물은 장소에 귀속되지 않고도 장소의 시간을 말할 수 있다.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산화철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붉어지고, 소금은 습도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슬래그도 전시장의 습도에 따라 어제와 다른 빛깔을 띤다. 이 사물들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변하고 있다. 멈춰 있는 사물은 없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느려서 우리는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이수현이 물성을 통제하기보다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이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붉은 착륙지_전시전경1 착륙지 현장
7.
그렇다면 이수현이 씨름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소의 이야기를 수집하지만 그 장소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장위동에서 개인 서사로 풀어봤고, 고양에서는 물성으로 풀어봤다. 그리고 울산에서는 SF적 이세계의 허구로 풀어보기도 했다. 세 번의 개인전에서 세 개의 다른 방법을 남겼는데, 되짚어보면 작가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장소가 아니라 장소를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세 번의 개인전에는 방식과 무관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수현은 어디에서든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공간의 빈 벽이나 위치에 작품을 배치한다기 보다, 공간 자체를 작가의 세계로 구축하는데, 그럼으로써 관객이 이수현이 마주한 세계를 거닐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방식이 이수현의 '취향'이나 전시를 위한 '연출'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가 장소를 거닐며 사물과 마주하고, 거기서 낯섦을 발견하는 경험의 구조 자체를 전시장 안의 관객에게 전이 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서사를 파악하기 전에 사물을 먼저 만나고, 맥락을 알기 전에 낯섦을 먼저 느낄 수밖에 없다. 이수현이 장위동의 빈집에서, 고양의 그리드 안에서 그리고 울산의 아파트 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 형식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소금은 또 다른 서사를 입힐 장소를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있고, 슬래그는 울산을 떠나 다른 좌표 위에서 새로운 맥락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장위동의 대추, 고양의 소금, 울산의 슬래그, 나아가 다른 도시의 사물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지도 위에서는 영영 이어지지 않을 좌표들이, 한 사람의 경험 안에서 이미 이웃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26.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6 ACK 앜앜앜: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이 세계의 사물이 이세계의 서사가 될 때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1.
수천만 년 전, 모기 한 마리가 나무의 진액에 빠져 죽었다. 진액은 굳어 호박이 되었고, 그 안에서 모기는 수천만 년 동안 박제되었다. 그 모기의 뱃속에 남은 피 한 방울에서 이미 사라진 세계를 통째로 복원할 수 있다는 상상은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오히려 터무니없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 상상이 가능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파편이 전체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뼈 하나에서 그 존재의 걸음걸이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하고, 지층의 단면에서 수백만 년 전의 기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돌멩이 하나의 성분표에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역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파편에서 복원된 세계는 파편이 발견된 '지금'의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공룡의 후손이 닭이라는 영상을 본 날은 꽤 충격적이었다. 지구상 가장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던 존재의 후손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 존재에게 깃털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천만 년 전의 세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석에 새겨진 위엄(?)은 뼈를 발굴한 사람의 상상이 덧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파편을 손에 쥔 사람이 현재의 언어로 구성한 서사인 것이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이 과거를 그대로 재생한다는 전제와 달리, 떠올리는 순간마다 기억은 지금의 조건 안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는 리플레이되지 않는다. 재생되는 것은 현재가 재구성한 과거인 것이다.
이수현의 작업은 이러한 파편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도시의 형성과 소멸 속에서 남겨진 파편을 수집한다. 빈집의 대추, 신도시의 익숙한 이질감, 아파트 공원에 묻힌 슬래그 등. 그 사물들은 장소가 살아온 시간의 파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하는 일은 그 파편을 토대로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이 장소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려는 것도 아니다. 이수현은 지금, 이 사물을 처음 마주한 경험에서 출발하여 아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파편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 위에 놓여 있다.
2.
장소에는 시간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때 지어진 공간에서 그때의 누군가가 살았을 것이고, 그때의 시간 위에 다시 무언가 세워진다. 도시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전의 시간을 끊임없이 덮는다. 그러나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새로운 도로가 깔리고 새로운 공원이 조성되더라도 이전의 것이 보이지 않게 될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도시는 그 보이지 않음을 위해 끊임없이 그 '새로움'을 수행한다.
장소를 다루는 동시대 미술 작업은 이 덮인 시간을 다시 들추려는 시도에 가닿아 있다. 레지던시에 입주하고, 리서치하고,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고 전시장에 옮겨놓는 루틴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업이라는 개념 안에는 두 갈래의 전통이 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와 권미원으로 대표되는 장소특정성이 그것이다. 리처드 세라식 장소특정성이란 작업이 특정한 물리적 좌표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옮기는 즉시 작업은 예술로서의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반면 권미원은 이 좌표를 담론으로 확장하여, 사회적·정치적·제도적 조건 자체가 작업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재정의하였다. 귀속이거나 확장이거나, 장소 작업의 대부분은 이 두 갈래의 어딘가에서 성립된다.
3.
이수현의 첫 번째 장소는 빈집이었다. 10여 년간 번복된 재개발 계획에 의해 방치되었던 집이다. 이수현은 장위동 주변을 거닐다 빈집의 마지막 거주자였던 어르신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으로부터 장소의 기억을 수집하였다. 어르신과 함께 빈집을 들어서면서 만난 대추나무는 각별한 사물이었다. 1989년에 이사하면서 옮겨 심은 나무가 아직 마당에 서 있다는 회상에, 작가는 대추를 가져와 대나무 발 위에 펼쳐 말리고, 매일 대추차를 끓여 관객과 나눠 마셨다. 앞마당에 가꾸던 화단이 이제는 없다는 아쉬움 섞인 푸념에, 물도 나오지 않는 옥색 욕조 안에 흙이 채워져 꽃이 피게 하였다. 그 집을 지키던 강아지 복실이 또한 지금은 없지만, 현관 아래에 센서를 달아 누군가 문 앞에 서면 짖는 소리가 나도록 하였다. 어르신의 기억에 깃든 행위들이 빈집 안에서 다시 작동하고 있었다. 대추를 말리고 차를 끓이는 행위, 꽃을 가꾸는 행위, 문 앞에서 짖는 행위. 기억은 장면이 아니라 '행위'로 남아 있었고, 작가는 그 행위를 다시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빈집의 시간을 오늘 위에 리플레이시켰다.

대추 말리기, 2021, 대추, 대나무발, 공간설치

앞마당 화단, 2021, 화초, 공간설치
장소의 기억을 다루는 작업은 보편적인 아카이브의 형식을 취하기 쉽다. 그리고 그 아카이브는 과거를 보존하고 다시 소환한다. 그러나 그 과거가 지금의 시간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수현이 사물의 역할을 되살리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과거를 기록하는 한편, 지금 이 공간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장소에 오래 머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서사를 바탕으로 공간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권미원이 말한 장소특정성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로소 마주하다,_전시 전경
4.
청년 작가에게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장소가 품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 응답하는 것이 장소 작업의 당연한 방법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장소가 이런 시간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어떤 도시는 애초에 이전의 시간을 갖지 않도록 설계되기 때문이다. 고양시는 제1신도시이다. 격자무늬의 주거지 사이에 아파트와 학교가 퍼즐처럼 끼워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호수와 공원이 배치되어 있다. 평화롭다. 그런데 이 평화로움이 이상하다. 나무가 있어야 할 곳에 나무가 있고, 물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 정확하다. 어느 날 공원의 그네에 앉아 있던 이수현에게 낯선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어디로 가야 상권이 나오느냐고. 바로 옆 블록에 상권이 있는데, 그 남자의 동선은 산책을 위한 계획 위에 있었던 것이다. 설계가 완벽할수록 설계는 보이지 않는다. 호박 속 모기의 피로 공룡을 복원하여 만든 테마파크에서 공룡들은 살아 있으나 설계 속의 생명인 것처럼, 풍경은 스스로 그러해야 하는 자연이지만 통제된 것이다. 복원이 완벽할수록 오히려 인공임이 드러나는 이 역설은, 고양시의 계획된 자연과 묘하게 겹쳐진다.
장위동의 빈집에서는 대추와 욕조와 강아지 소리를 남겼다. 장소가 스스로 사물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양에는 그런 사물이 없었다. 이전의 시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파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도시의 시간을 품고 있으며 가장 쉽게 수집할 수 있는 것은 거기서 나고 자란 이수현 자신이었다. 작가 스스로가 도시의 시간을 방증하는 사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수현은 이를 이미지로 옮기기 위한 재료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수현은 소금을 택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신도시에서 느꼈던 불안정한 시간성을, 스스로 변하고 스며들고 결정화되는 소금의 성질로 번역하려 한 것이다. 물 없이 돌과 모래만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일본식 정원처럼, 소금과 먹으로 일산호수공원의 밤물결을 산수풍경으로 재구성하고, 고양시 지형도를 밤안개 낀 풍경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흩어지는 달빛_전시전경

흩어지는달빛, 2024, 소금에 먹, 암염, 포맥스, 가변설치
시각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장소특정적 미술은 항상 출처와 근거를 질문한다. 이수현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소금을 왜 선택했는지, 소금과 고양이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어쩌면 이 질문은 장위동에서부터 비롯된 장소특정성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수현은 소금을 가져왔다. 작가가 특별히 음식을 짜게 먹는 식습관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닷가에 연고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소금을 쓴다는 것은 소금이, 아니 사물이 특정 장소에 귀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이자 주장이기도 한 것이다. 바다가 없는 도시에 바다의 사물을 가져온 셈인데, 이것은 소금이라는 사물이 장소를 가리키는 것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장소에 귀속된 사물만이 장소를 말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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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심을 울산에서 증명하려 했다. 소금이라는 물성을 이어가며 실험하려는 의도였고, 공교롭게도 입주한 레지던시의 이름이 '소금나루'였던 것이다. 울산 북구 염포(鹽浦)동. 소금 포구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소금을 실어 나르던 포구가 있었다 한다. 과연 소금이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수현의 소금은 이 동네의 소금이 아니었다. 작가의 소금은 신도시의 불안정한 시간성을 짜게 품고 있었지, 염포동의 역사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사물이되 다른 서사를 담은 사물인 것이다. 게다가 이수현이 본 울산의 산업은 소금과 거리가 멀었다. 개인의 삶부터 산업의 역사까지 이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이야기는 방대했지만, 소금은 그 이야기의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사물이 장소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장소가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붉은 착륙지, 2025, 싱글채널비디오, 4K, 2분
붉은 착륙지, 2025, 울산 쇠부리복원사업에서 발생한 슬래그, 토철, 가변설치
그렇게 사물과 장소를 연구하다 발견한 것이 철이었다. 울산에는 달천철장이라는 오래된 제철 산업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도시재생지원센터의 관계자를 통해 쇠부리복원사업이라는 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철의 도시에서 철을 복원하는 행사라니, 이수현은 옛 제련의 흔적이라든지, 근엄 가득한 현장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아파트 단지의 공원은 정겨운 동네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이것이 철의 축제인가 싶은 이질감 속에서, 가마에서 꺼낸 시커먼 덩어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슬래그였다. 작가가 이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 떠올린 것은 달천철장의 역사도 울산을 지탱하는 산업의 역사도 아니었다. 돌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숯과 재, 조개껍질과 철가루가 뒤엉켜 굳어버린 이 덩어리는, 이 땅의 것이라기보다 어딘가 먼 곳에서 날아와 박힌 것처럼 보였다. 장소의 서사를 파악하기 전에 사물의 이질감이 먼저였던 것이다.


중력관찰1 탐사코드 D-SL-16, 2025, 슬래그, 스테인레스스틸, 자기부상장치, 135×70×85cm
중력관찰2 정지된 궤도, 2025, 슬래그, 스테인레스스틸, 40×50×80cm
그러나 이 이질감은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도시가 새로움으로 덮어놓은 그곳, 거기 있을 리 없지만 있어야 해서 있는 자연이 끼워져 있는 그곳, 그리드 위에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깔려 있던 그곳에서의 경험이, 슬래그 앞에서 비로소 또렷해졌다. 아파트 공원의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이수현을 사로잡은 이유는, 바로 그 이질감의 가장 극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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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이질감을 어떻게 작업으로 옮길 것인가. 작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토하듯이, 슬래그를 운석이라 부르는 것은 유치한 상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유치함에는 재미있는 배경이 숨어 있는데, 놀랍게도 산화철로 뒤덮인 달천철장의 붉은 땅은 화성의 표면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산화철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론 머스크의 상상이 뭇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시대에 장소를, 아니 장소의 서사를 좌표로 고정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쥬라기 월드에 출연하는 공룡들이 실은 대부분 백악기 시대의 종이라는 사실은,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실제가 가리키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디폴트값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수현은 이 간극을 교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증폭시킨다. 슬래그를 운석으로, 달천을 착륙지로, 채집 기록을 탐사일지로 옮기는 작업은 장소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사물을 마주했을 때의 이질감을 이세계(異世界)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이다.
세라의 장소특정성에서 사물은 지정된 좌표를 벗어나는 즉시 죽음에 이른다. 권미원의 장소특정성에서 장소는 물리적 좌표를 벗어나 담론이 된다. 그런데 이수현의 사물은 어느 쪽도 아니다. 슬래그는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의 전시장에 놓였음에도 죽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떠남으로써 그 사물 앞에서 작가가 느꼈던 이질감이 비로소 드러난다. 울산 공원에 묻혀 있을 때는 그냥 돌덩이였던 것이, 다른 좌표 위에 놓이는 순간 '이질감' 그 자체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금도 마찬가지다. 고양의 소금이 염포동의 소금과 다른 서사를 품고 있었듯이, 사물은 장소에 귀속되지 않고도 장소의 시간을 말할 수 있다.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산화철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붉어지고, 소금은 습도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슬래그도 전시장의 습도에 따라 어제와 다른 빛깔을 띤다. 이 사물들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변하고 있다. 멈춰 있는 사물은 없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느려서 우리는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이수현이 물성을 통제하기보다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이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붉은 착륙지_전시전경1 착륙지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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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수현이 씨름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소의 이야기를 수집하지만 그 장소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장위동에서 개인 서사로 풀어봤고, 고양에서는 물성으로 풀어봤다. 그리고 울산에서는 SF적 이세계의 허구로 풀어보기도 했다. 세 번의 개인전에서 세 개의 다른 방법을 남겼는데, 되짚어보면 작가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장소가 아니라 장소를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세 번의 개인전에는 방식과 무관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수현은 어디에서든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공간의 빈 벽이나 위치에 작품을 배치한다기 보다, 공간 자체를 작가의 세계로 구축하는데, 그럼으로써 관객이 이수현이 마주한 세계를 거닐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방식이 이수현의 '취향'이나 전시를 위한 '연출'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가 장소를 거닐며 사물과 마주하고, 거기서 낯섦을 발견하는 경험의 구조 자체를 전시장 안의 관객에게 전이 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서사를 파악하기 전에 사물을 먼저 만나고, 맥락을 알기 전에 낯섦을 먼저 느낄 수밖에 없다. 이수현이 장위동의 빈집에서, 고양의 그리드 안에서 그리고 울산의 아파트 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 형식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소금은 또 다른 서사를 입힐 장소를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있고, 슬래그는 울산을 떠나 다른 좌표 위에서 새로운 맥락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장위동의 대추, 고양의 소금, 울산의 슬래그, 나아가 다른 도시의 사물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지도 위에서는 영영 이어지지 않을 좌표들이, 한 사람의 경험 안에서 이미 이웃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26.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