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CK 앜앜앜: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Meet Me in Montauk[1]
문소영(독립 큐레이터)

이영수, 침묵의 공간, 2022, Oil, cold wax on canvas, 227.3 × 182.8 cm.
영원히 흐르는 시간에게 시작과 끝은 허구인 것처럼, 그림이 완성된다는 것은 끝이라기보단 가장 적절한 지점에서 멈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영수의 작업은 특정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영수가 잡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인 시간이나 대상이라기보다는, 피부와 뼈를 타고 느껴지는 과거의 어떤 부분이다. 너무 멀어져 정확한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지만 여전히 신체에 잔류하는 감각과 감정에 집중해 본다. 현재와 과거, 기억과 몸의 움직임이 교차하고 축적된 자리에 회화가 드러난다. 작가는 어떠한 형상이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자신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기억의 흐름을 추적해 보는 과정 자체를 드러내려고 한다. 완결된 형상은 은유나 서사로 확장되거나 전환되지만, 그림의 물성과 흔적은 바라보는 이를 회화라는 행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기억은 가변적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과 사건들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영수는 그렇게 변하고 소실되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듯 먹먹하게 남아 있는 감정과 감각을 발견한다. 그 감각을 형상으로 끌어오려 해도, 희미해진 기억이 막처럼 드리워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기이지만, 말끔한 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영수는 변덕스러운 기억의 형태를 포용하면서, 언젠가의 사건이 신체에 남긴 감각들을 회화라는 움직임을 통해 꺼내보려 한다.
솔라리스[2]의 바다는 바라보는 순간 그 시선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을 형상으로 되돌려 준다. 과거를 닮은 형상은 기억을 재현한 듯 보이지만, 실은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감정과 감각을 특정한 형상을 통해 소환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본다. 회화적 서사 또한 기억을 통해 서술된다기보다는 시간을 통해 축적된 감각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다. 회화는 그리는 사람의 몸을 떠나는 순간부터 서사와 물질, 감각을 어떻게 이어 볼 것인지에 대한 과제로 남겨진다. 이영수는 그 과정에서 기억보다는 감각에 주목해본다. 형상을 따라가며 사건을 복원하기보다는, 그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과 감각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기억과 감각은 사건이나 경험으로 인해 잠시 얽히지만, 어느 순간 서로 분리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사건이라 불리던 감각은 목적을 상실한 감정의 잔여처럼 남아 부유하기도 한다. 이영수는 시선보다 눈과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감각에 집중하며, 체득된 기억의 흔적을 왜곡 없이 화면에 꺼내 보려 한다. 막연한 나머지 ‘느낌’이라는 단어 속으로 숨어 버린 기분과 감각은, 콜드왁스와 유화 물감, 그리고 필치를 통해 물질적 형상을 얻는다. 하지만 서사는 묵음으로 남고, 몸짓만이 남겨진 이미지를 관찰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감각은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까?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on canvas, 193.9 ×130.3 cm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and airbrush on canvas, 116.8 ×72.7 cm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on canvas, 193.9 ×130.3 cm
여름 바람과 습한 풀 냄새가 오래된 감정들을 되살린다. 모든 기억이 선명하고 선형적인 서사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느꼈던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설렘은 여름의 냄새와 습기 속에 감각으로 남아 있다. 체득된 감각은 선형적인 시간에 종속되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이영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억을 들여다보며 그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체험과 감정에 집중해 본다. 그 과정에서 떨쳐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선명해지지 않을 움직임이 드러난다.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 감각을 회화를 통해 추적해 보는 작가의 시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2020-2022년 전후의 작업에서는 물성보다는 신체의 움직임을 필치를 통해 드러내는 경향이 보인다. 가령, <와해된 신체 반응>(2021)과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2021)은 다른 작업에 비해 보다 즉흥적인 감각으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정제되기 이전의 감각을 화면 위에 곧바로 펼쳐내지만, 오히려 이러한 직접성 덕분에 감정의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드러난다. 기억이 사건을 복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체에 남겨진 감각이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영수, 막, 2024, Oil, cold wax and paraffin wax on canvas, 193.9 ×130.3 cm
하지만 필치로서 드러낼 수 있는 서사는 몸의 움직임에 한하고, 부동의 매체는 겹겹이 쌓여 나가는 시간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지점은 작가가 왁스나 파라핀과 같은 두께감 있고 흔적이 잘 남는 재료를 사용하며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이영수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완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드러내 회화를 생동하는 상태로 남겨보는 일이다. 하지만 캔버스라는 고정된 지점과 물감이라는 부동의 물질을 통해 어떻게 시간의 유동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작가는 파라핀을 얇게 쌓았다가 긁어내거나 그을리고, 다시 물성을 얹는 과정은 예기치 못한 형상이나 흠집 같은 우연을 수반한다. 작가가 멈추기 전까지 그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형상을 통해 맥락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실천 그 자체와 재료의 변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이영수는 인식의 한계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재료의 변화와 함께 등장한 막이라는 개념은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막>(2024)은 기억과 감각을 구체화하려 할수록 가로막히는 듯한 상태를 그려낸다. 화면은 여러 색이 얕게 겹겹이 쌓이며 마치 흐릿한 베일에 덮인 것처럼 드러난다. 작가에게 막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로를 차단하는 요소인 동시에, 인식이 닿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을 암시하는 문이기도 하다. 또한 회화가 형성하는 층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기억은 언제나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완전히 도달할 수 없으며, 붙잡으려 할수록 미끄러져 사라진다. 화면 위에 쌓인 파라핀은 막으로서 여러 층의 흔적과 잔상을 드러냄으로써 감각의 차단과 투과를 동시에 수행한다[3].

이영수, Untitled, 2026, Oil, cold wax and paraffin wax on canvas, 227.3 × 182.8 cm.
최근의 작업에서는 척추와 장기처럼 신체 일부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유로서도, 실제 의학적으로도 신경과 밀접하게 반응하는 부위이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몸속 에너지의 흐름을 지도처럼 그려낸 차크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참조는 특정 형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작가 내면에 침잠해 있던 기억과 감각을 환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최소한의 형상을 통해 내재된 감각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상태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보는 것이다[4]. 따라서 이영수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 자체라기보다, 형상을 매개로 감각이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영수는 느껴지는 감각을 언어로 정리하기보다는, 있는 그 자체로 그림 속에 담아보려 한다.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화면을 전개해 나가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무책임하게 남겨지지 않도록 신중을 가한다. 이영수가 체득된 감각을 꺼내보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배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빌린 단어가 아닌 온전한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해 보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 틀도, 기댈 언어도 없이 내면을 뒤집어 꺼내보려 한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과 흐릿해진 기억이 엇갈리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헤매어 본다.
이영수는 즉흥무를 추듯 신체에 떠오르는 움직임을 화면에 전개해 나간다. 이는 추상을 통해 무언가를 발언하려는 태도라기 보다는,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오직 행위를 통해 시험해보기 위함이다. 필치를 통해 표현되던 것들을 콜드왁스와 파라핀의 밀도와 우연성으로 옮겨오며 한 차례 작업의 한계를 풀어냈듯, 작가는 표현적이던 단계에서 한 발 나아가, 형상에 기대지 않고 감정 자체를 화면 위에 남기는 방향으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영수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떠한 감각을 불러내는가일 것이다. 이영수의 작업 속에서 기억과 감각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어긋난다. 하지만 그 어긋남은 극복해야 하는 지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화의 원동력이 된다. 체득된 감각은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시작과 끝은 임시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회화에서도 완성이란 가장 온전한 멈춤의 순간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영수의 화면도 나아감을 전제로 한다. 회화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음으로써 온전해진다.
[1]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 속 대사. 주인공들은 기억은 지워졌지만 마음에 잔류하는 감각을 따라 움직인다.
[2] 솔라리스의 바다는 인간의 기억과 죄책감, 트라우마를 형상으로 복제한다. 소설 속 과학자들은 이를 물질과 기억을 연결하는 의미 있는 발견으로 여겼지만, 연구가 진행될수록 솔라리스는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모호하고 공허한 세계로 드러난다. 크리스 앞에 나타난 죽은 아내 레야 (하레이) 역시 그의 기억과 고통으로부터 생성된 존재이지만, 정작 기억 자체는 갖고 있지 않다. 대신 크리스가 기억하는 행동과 감정의 흔적만이 몸에 남아 있으며, 자신이 왜 크리스 곁에 머무는지 알지 못한 채 그를 향한 감각적 끌림만을 따른다. 기억의 내용은 소실되었지만 감각은 지속되는 상태인 것이다. 솔라리스의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기억과 물성을 연결하는 회화의 가능성과, 그 연결로부터 감각을 다시 분리해내는 이영수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았다.. Stanisław Lem, 1961, Solaris, trans. Joanna Kilmartin and Steve Cox, (Walker and Company, 1970)
[3] 이영수, 침묵의 공간, 2022, 캔버스에 유화, 콜드 왁스, 227.3 × 182.8 cm.
[4] “신체의 윤곽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대상이라기보다 통로에 가깝다. 기억은 몸을 통과하며 형태를 잠시 빌려 나타났다가 다시 흐려진다.” 이영수 작가노트(2026) 중 발췌.
2026.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6 ACK 앜앜앜: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Meet Me in Montauk[1]
문소영(독립 큐레이터)

이영수, 침묵의 공간, 2022, Oil, cold wax on canvas, 227.3 × 182.8 cm.
영원히 흐르는 시간에게 시작과 끝은 허구인 것처럼, 그림이 완성된다는 것은 끝이라기보단 가장 적절한 지점에서 멈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영수의 작업은 특정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영수가 잡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인 시간이나 대상이라기보다는, 피부와 뼈를 타고 느껴지는 과거의 어떤 부분이다. 너무 멀어져 정확한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지만 여전히 신체에 잔류하는 감각과 감정에 집중해 본다. 현재와 과거, 기억과 몸의 움직임이 교차하고 축적된 자리에 회화가 드러난다. 작가는 어떠한 형상이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자신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기억의 흐름을 추적해 보는 과정 자체를 드러내려고 한다. 완결된 형상은 은유나 서사로 확장되거나 전환되지만, 그림의 물성과 흔적은 바라보는 이를 회화라는 행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기억은 가변적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과 사건들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영수는 그렇게 변하고 소실되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듯 먹먹하게 남아 있는 감정과 감각을 발견한다. 그 감각을 형상으로 끌어오려 해도, 희미해진 기억이 막처럼 드리워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기이지만, 말끔한 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영수는 변덕스러운 기억의 형태를 포용하면서, 언젠가의 사건이 신체에 남긴 감각들을 회화라는 움직임을 통해 꺼내보려 한다.
솔라리스[2]의 바다는 바라보는 순간 그 시선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을 형상으로 되돌려 준다. 과거를 닮은 형상은 기억을 재현한 듯 보이지만, 실은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감정과 감각을 특정한 형상을 통해 소환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본다. 회화적 서사 또한 기억을 통해 서술된다기보다는 시간을 통해 축적된 감각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다. 회화는 그리는 사람의 몸을 떠나는 순간부터 서사와 물질, 감각을 어떻게 이어 볼 것인지에 대한 과제로 남겨진다. 이영수는 그 과정에서 기억보다는 감각에 주목해본다. 형상을 따라가며 사건을 복원하기보다는, 그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과 감각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기억과 감각은 사건이나 경험으로 인해 잠시 얽히지만, 어느 순간 서로 분리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사건이라 불리던 감각은 목적을 상실한 감정의 잔여처럼 남아 부유하기도 한다. 이영수는 시선보다 눈과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감각에 집중하며, 체득된 기억의 흔적을 왜곡 없이 화면에 꺼내 보려 한다. 막연한 나머지 ‘느낌’이라는 단어 속으로 숨어 버린 기분과 감각은, 콜드왁스와 유화 물감, 그리고 필치를 통해 물질적 형상을 얻는다. 하지만 서사는 묵음으로 남고, 몸짓만이 남겨진 이미지를 관찰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감각은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까?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on canvas, 193.9 ×130.3 cm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and airbrush on canvas, 116.8 ×72.7 cm
이영수,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 2021, Oil on canvas, 193.9 ×130.3 cm
여름 바람과 습한 풀 냄새가 오래된 감정들을 되살린다. 모든 기억이 선명하고 선형적인 서사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느꼈던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설렘은 여름의 냄새와 습기 속에 감각으로 남아 있다. 체득된 감각은 선형적인 시간에 종속되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이영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억을 들여다보며 그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체험과 감정에 집중해 본다. 그 과정에서 떨쳐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선명해지지 않을 움직임이 드러난다.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 감각을 회화를 통해 추적해 보는 작가의 시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2020-2022년 전후의 작업에서는 물성보다는 신체의 움직임을 필치를 통해 드러내는 경향이 보인다. 가령, <와해된 신체 반응>(2021)과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2021)은 다른 작업에 비해 보다 즉흥적인 감각으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정제되기 이전의 감각을 화면 위에 곧바로 펼쳐내지만, 오히려 이러한 직접성 덕분에 감정의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드러난다. 기억이 사건을 복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체에 남겨진 감각이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영수, 막, 2024, Oil, cold wax and paraffin wax on canvas, 193.9 ×130.3 cm
하지만 필치로서 드러낼 수 있는 서사는 몸의 움직임에 한하고, 부동의 매체는 겹겹이 쌓여 나가는 시간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지점은 작가가 왁스나 파라핀과 같은 두께감 있고 흔적이 잘 남는 재료를 사용하며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이영수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완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드러내 회화를 생동하는 상태로 남겨보는 일이다. 하지만 캔버스라는 고정된 지점과 물감이라는 부동의 물질을 통해 어떻게 시간의 유동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작가는 파라핀을 얇게 쌓았다가 긁어내거나 그을리고, 다시 물성을 얹는 과정은 예기치 못한 형상이나 흠집 같은 우연을 수반한다. 작가가 멈추기 전까지 그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형상을 통해 맥락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실천 그 자체와 재료의 변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이영수는 인식의 한계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재료의 변화와 함께 등장한 막이라는 개념은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막>(2024)은 기억과 감각을 구체화하려 할수록 가로막히는 듯한 상태를 그려낸다. 화면은 여러 색이 얕게 겹겹이 쌓이며 마치 흐릿한 베일에 덮인 것처럼 드러난다. 작가에게 막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로를 차단하는 요소인 동시에, 인식이 닿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을 암시하는 문이기도 하다. 또한 회화가 형성하는 층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기억은 언제나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완전히 도달할 수 없으며, 붙잡으려 할수록 미끄러져 사라진다. 화면 위에 쌓인 파라핀은 막으로서 여러 층의 흔적과 잔상을 드러냄으로써 감각의 차단과 투과를 동시에 수행한다[3].

이영수, Untitled, 2026, Oil, cold wax and paraffin wax on canvas, 227.3 × 182.8 cm.
최근의 작업에서는 척추와 장기처럼 신체 일부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유로서도, 실제 의학적으로도 신경과 밀접하게 반응하는 부위이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몸속 에너지의 흐름을 지도처럼 그려낸 차크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참조는 특정 형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작가 내면에 침잠해 있던 기억과 감각을 환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최소한의 형상을 통해 내재된 감각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상태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보는 것이다[4]. 따라서 이영수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 자체라기보다, 형상을 매개로 감각이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영수는 느껴지는 감각을 언어로 정리하기보다는, 있는 그 자체로 그림 속에 담아보려 한다.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화면을 전개해 나가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무책임하게 남겨지지 않도록 신중을 가한다. 이영수가 체득된 감각을 꺼내보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배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빌린 단어가 아닌 온전한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해 보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 틀도, 기댈 언어도 없이 내면을 뒤집어 꺼내보려 한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과 흐릿해진 기억이 엇갈리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헤매어 본다.
이영수는 즉흥무를 추듯 신체에 떠오르는 움직임을 화면에 전개해 나간다. 이는 추상을 통해 무언가를 발언하려는 태도라기 보다는,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오직 행위를 통해 시험해보기 위함이다. 필치를 통해 표현되던 것들을 콜드왁스와 파라핀의 밀도와 우연성으로 옮겨오며 한 차례 작업의 한계를 풀어냈듯, 작가는 표현적이던 단계에서 한 발 나아가, 형상에 기대지 않고 감정 자체를 화면 위에 남기는 방향으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영수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떠한 감각을 불러내는가일 것이다. 이영수의 작업 속에서 기억과 감각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어긋난다. 하지만 그 어긋남은 극복해야 하는 지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화의 원동력이 된다. 체득된 감각은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시작과 끝은 임시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회화에서도 완성이란 가장 온전한 멈춤의 순간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영수의 화면도 나아감을 전제로 한다. 회화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음으로써 온전해진다.
[1]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 속 대사. 주인공들은 기억은 지워졌지만 마음에 잔류하는 감각을 따라 움직인다.
[2] 솔라리스의 바다는 인간의 기억과 죄책감, 트라우마를 형상으로 복제한다. 소설 속 과학자들은 이를 물질과 기억을 연결하는 의미 있는 발견으로 여겼지만, 연구가 진행될수록 솔라리스는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모호하고 공허한 세계로 드러난다. 크리스 앞에 나타난 죽은 아내 레야 (하레이) 역시 그의 기억과 고통으로부터 생성된 존재이지만, 정작 기억 자체는 갖고 있지 않다. 대신 크리스가 기억하는 행동과 감정의 흔적만이 몸에 남아 있으며, 자신이 왜 크리스 곁에 머무는지 알지 못한 채 그를 향한 감각적 끌림만을 따른다. 기억의 내용은 소실되었지만 감각은 지속되는 상태인 것이다. 솔라리스의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기억과 물성을 연결하는 회화의 가능성과, 그 연결로부터 감각을 다시 분리해내는 이영수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았다.. Stanisław Lem, 1961, Solaris, trans. Joanna Kilmartin and Steve Cox, (Walker and Company, 1970)
[3] 이영수, 침묵의 공간, 2022, 캔버스에 유화, 콜드 왁스, 227.3 × 182.8 cm.
[4] “신체의 윤곽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대상이라기보다 통로에 가깝다. 기억은 몸을 통과하며 형태를 잠시 빌려 나타났다가 다시 흐려진다.” 이영수 작가노트(2026) 중 발췌.
2026.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