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팔복예술공장 입주작가 박경진
백지를 두려워 않는 아이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혼밥, 혼자 여행. 내가 못 하는 것들이다. 혼자 앉아 있어도 근처에 누군가 있는 게 좋다. 산사를 찾을 때나 갈까, 산기슭에도 안 간다. 그래서 혼자 산을 ‘헤매러 가는’ 박경진 작가에게 물었다. ‘혼자? 산? 그걸 둘 다? 좋아 그게?’ 그래서 어린 시절 좋았던 기억, 생태적 관심, 익숙함, 또 가고 싶은 기분, 그가 말하는 모든 게 결국 재능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코에 닿을 듯 관객에 바싹 머리를 디밀고 하늘대는 짙푸른 풀숲, 굽이치던 어느 나무줄기는, 후방 추돌에 뒷목 잡고 내린 운전자처럼 화면을 베개 삼아 벌러덩 드러눕는다. 듬성듬성 찍은 꽃잎은 그 와중에 제일 좋은 목에 떡 하니 들어앉아 능청스레 눈을 간지럽힌다.
굽이굽이 펼쳐진 원경, 쭉 뻗은 하늘, 탁 트인 물가, 호연지기가 절로 시동을 거는 훤칠하고 의연한 조망, 나무가 엮여 어느새 숲을 짓는 대자연의 놀라운 짜임새… 박경진에게 그런 건 없다. 그는 몸을 낮춰 바위를 안고, 말라비틀어진 꽃과 눈을 맞추고, 흙바닥을 짚고, 메마른 수풀을 긴다. 구름을 찌른 산 대신, 바닥에 쌓인 낙엽 산을 조망한다. 낮고 좁고 작은 시야를 달고, 하늘이 아니라 땅을 종일 우러르며, 길도 없는 외진 구석을 소경처럼 더듬는다. 산을 오른다기보단 차라리 숲을 헤매러 가는 격이다.
때문에 박경진의 사생은 범상치 않다. 눈앞을 가로막은 나무 둥치와 풀더미, 종아리를 휘감고 발목을 붙들어 늘어지는 질긴 덩굴, 팔꿈치를 스치고 뺨을 할퀴는 이파리와 잔가지의 투정을 화폭에 친다. 갈라지고 군데군데 껍질이 말려 일어난 나무토막의 까칠함과, 마른 잔가지의 뾰족한 신음과, 텁텁한 시린 공기를 홀로 헤집는 거친 입김과, 바삭하게 깨지는 낙엽과, 그 소리를 뚝 먹고 시치미 떼는 축축한 흙의 촉감을 긋는다. 채찍 삼아 사방으로 오감을 휘두른다.
기운생동, 이형사신, 화룡점정, 일호불사? 글쎄, 생동하는 기의 운율을 담고, 자아를 현현하고, 숨을 불어넣고, 한 가닥도 놓치지 않을 심산이면, 붓질할 힘으로 차라리 오두막을 짓고 진짜 숲에 전입신고 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형태를 따고 식생을 채집하는 건 물론, 자연을 관조하고, 세상을 파악하고, 이치를 깨닫는 사생이 아니다. 사생을 구실 삼아 자신의 촉각적 체험을 녹취한, ‘성가신 자연’과의 대화에 가깝다.
던지고, 부르고, 휘두르면 숲이 맞받아치고, 산이 튕겨 낸다. 그리고 터진 압력솥에 뒤집어쓴 밥풀처럼, 그 반향이 고스란히 화폭에 튄다. 숲이 긋고, 산이 칠한 그림인 이유이다. 그 현장에 홀로 선 작가는 아마, 사방을 부딪은 초음파를 온몸으로 되받으며 자신을 확인하는 박쥐가 된 기분일까? 자연은 그렇게 큼직하고 유용한 거울이자, 감각이든 투정이든 한 가닥 흘리는 법도 없이 척척 잘만 받아내는 메이저리그 1군 포수이다.

꾸준한 작품 명명 ‘공유 지도’. 각자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두 단어가 엮여,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지도는 실체를 대신할 수 없는, 실체에 기생해야 의미가 있는 ‘가이드’이다. 박경진이 국가지리원 소속 주무관도 아니고, 숲의 위치나 지리 탐사 정보를 제공할 리는 없다. 그림을 그리는데 ‘지도’는 그럼 왜? 뭘 ‘공유’하겠단 걸까?
오히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지도와는 대척점에 있는, 실로 엉뚱한 지도의 면모가 그의 작업 곳곳에 엿보인다. 먼저 목적지가 없는 지도이다. 찾아가려는 게 아니라 헤매려 편다. 또한 대개 범례와 축척, 기호로 객관성을 담보하는 반면, 이 지도는 시선, 걸음, 바람, 냄새, 소리, 기운과 같은 주관으로 뒤범벅이다. 게다가 마치 시즌 1만 나온 넷플릭스 신작이 떠오르는, 완결되지 않은 열린 결말이다. 점선으로 그린 기분이 드는 이 지도는, 관객이 개입하여 작동하고 몰입하여 비로소 완성한다.
이에 착안하면 그의 그림은, 무언가를 화폭에 따 온 관찰기가 아니라, 화폭 바깥을 온종일 기웃대는 일종의 장치이다. 숲을 부르는 수정 구슬이 아니라, 숲으로 발길을 끄는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 같은 것. 확정된 장면 대신 경로, 행위, 흔적, 궤적, 과정, 시간 경과를 담은 ‘탈 결과적 결과물’이다. 그것도 감각 자체를 전하기보단, 그걸 느낄 수 있는 곳을 선발대로 다녀온 수기나 감각 맛집 분포도에 가깝다. 무궁무진한 경험의 가능성을 품은 그곳을 뜯어 빵 조각처럼 뿌리며, 각자 인상을 형성하게끔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내 감각이 휘감긴 현장을 표기한 지도. 맘껏 헤맬 수 있는 무대를 공유하는 지도. 그래서 ‘공유+지도’이다. 말하자면 오히려 잘 헤매려 쓰는 ‘헤맴 지도’인 것. 그렇게 그림은 ‘감상할 면모가 넘치는, 탈 감상적 그림’, ‘순수성과 예술성 가득한, 유용한 그림’이 된다. 이는 망원경이나 돋보기 같은 도구보단, 관객 각자 빈칸을 고르고 채우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작용한다. 제멋에 겨워 집집마다 천태만상인 새 아파트 인테리어처럼 말이다.

‘낮은 사생’, ‘헤매기 지도’에 더해, 박경진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지막 요술은 바로 그만의 조형감이다.
커다란 나무토막, 그 둘레를 혈관 뻗듯 휘감다 털뭉치처럼 서로 뒤엉켜 이젠 평생 그리 살 판인 수풀 한 다발. 시선을 주도하는 거국적인 형상은 대개 한쪽으로 치우치고, 쏠려 기울고, 화폭 어름에 발을 헛디뎌 고꾸라질 듯 어딘가 위태롭다. 그런데 작업 곳곳에 배인 이 ‘갸우뚱’은 불안하기보단 사뭇 도전적이다. 엉킨 붓질과 묵직한 여백, 후한 필묵과 콕 찍어 선명한 아크릴 물감, 현란한 형태와 그에 지지 않는 색채, 단칸방에 한데 몰아넣은 이들은 밤새 옥신각신한다. 그는 건장한 주인공에 괜히 퉁을 놓고, 쫄지 않고 대드는 야무진 라이벌을 그 대척점에 심는다. 위계를 흔들고 대칭에 맞서며 안정을 휘젓는다. 매번 다른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찾아 맞춘다. 때문에 구도와 개별 형상의 배치, 위치 교환은 늘 실험적이다. 한껏 뒤틀린 골반에 짝다리를 짚은 듯 조신하지 못한 위치감이야말로, 박경진의 조형감을 이루는 첫 번째 요소이다.

화면을 양단하는 팔뚝만 한 묵필, 주눅 들지 않고 올라타 마디마디 오뚝한 삐침과 파임. 가로지르고 내리긋고, 톡톡 찍은 붓이 종횡무진 뒤얽히는 박경진의 화면을 이리저리 눈으로 따르다 보면, 문득 눈발 날리는 금요일 저녁의 종로가 떠오른다. 옷깃 여미고 잰걸음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깍지 끼고 눈 맞는 젊은 남녀, 길 막고 뭉그대는 커플에 부아가 오른 아주머니, 요리조리 따릉이 모는 관광객, 기어이 주황 불을 밟는 택시, 빨갛든 파랗든 모르쇠 길부터 냅다 건너는 할아버지, 설 듯 말 듯 꿀렁꿀렁 길가에 어슬렁대는 시내버스, 틈새를 비집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배달 바이크…그는 초겨울의 종로보다 더 다채로운 속도를 한 폭에 엮는다. 몰아치는 큰 붓으로 기세를 잡고, 점과 선을 집요히 엉겨 시선을 붙들고 숨을 고른다. 청량한 속도감과 아기자기한 볼거리, 빅재미(?)와 잔재미의 절묘한 배합에, 술술 넘어가던 발길이 멈칫, 주억거리던 고개가 흠칫, 그렇게 눈길을 끌어모으다 어느새 홱 뿌리치며 흩어버린다. 관객의 망막과 내내 ‘밀당’하겠다는 심보가 훤히 비친다. 조형에 에너지가 있다면, 형태는 물길이라 눈도 마음도 따라 흐른다. 이 변덕맞은 속도와 곡률의 조련에 감상자는 도통 눈을 뗄 새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다 문득, 시선에도 흐름과 관성과 가속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일곱 개면 충분해요, 팔레트 몇 장이랑”
사생 도구를 살피다 눈에 들어온, 손바닥만 한 팔레트. 생각보다 작아 문득, 몇 가지 색을 준비하느냐 묻자 박경진 작가가 답했다.
많은 색이 좋은 색을 담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어만 복잡할 때가 많다. 그의 그림을 넌지시 훑으면, 몇몇 주조색이 화면의 가닥을 잡고 색의 기강을 세우느라 바쁘다. 형광에 근접한 청량 싱싱한 초록과, 수렁같이 묵직 굵직한 먹색의 대비, 종이 특유의 팽팽 탱탱한 미색과, 과즙처럼 짜릿하게 튀는 주황의 티격태격에 눈이 시끄럽다. 오르락내리락 그 와중에도 섬세한 농도 줄타기에, 나서고 물러남이 능숙하여, 보는 이는 별다른 도전과 절제를 알아채지 못한다. 만일, 차례로 덜어 컬러픽을 짜면 의외로 힙하고 핫하고 팝해, 심지어 어딘가 이질적이랄 수도 있을 배색이다. 그리고 따로 떼어 하나씩 다시 살피면, 철저히 자연물에서 채집/추출한, ‘유기농 동시대 색’임에 놀란다.
“잘 그리는 작가는,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토크 행사 막판에 한 관객이, 진행자인 나를 콕 집어 이렇게 물었다. 아마 ‘붓을 잘 놓는 작가’라 대답한 듯하다. 자기 붓을 지니고, 확신을 듬뿍 찍어 휘두르는 것으론 부족하다. 놓을 때 정말로 붓을 놓아야, 잘 그리는 작가이다. 경력과 확신이 쌓일수록 더 힘든 일이기에 또한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박경진은 ‘좀 놓는’ 작가이다. 사실 물리적 면적만 놓고 보면 그의 그림 속 최대 지분은 논리적 흰색, 즉 종이색이다. 이질적인 색상끼리 화목한, 이 ‘다채로운 독과점’의 배후(?)엔 종이색이 도사린다. 든든히 뒤를 바치고, 모든 색을 보듬어 안아 한데 모은다.
구상부터 마감까지, 가장 두려운 시간은 언제일까? 작가들은 대개 말한다. 백지 앞에 설 때 가장 막막하다고. 사실 흰 화면에 색을 긋고 입히기 시작할 때 덜 채워 언뜻언뜻 비치는 여백 날것의 생동감과 자유로움, 그 산뜻한 시각적 공명을 살리고 활용하려 애쓰는 작가가 부지기수이다. 마무리가 호락호락 그리 안 되니 문제이지. 반면 박경진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답했다.
“종이색도 색이에요, 원래 예뻐서 화장을 더 시킬 필요도 없죠”
대화에서 느낀 그는, 여백을 숙제로 여기지도, 타협, 다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백지를 두려워 않는 아이”라 혼자 메모하고 밑줄 긋고 색칠해 뒀다.

‘달필’, 박경진의 작업에 종종 모이는 반응이다. 흥미로운 건, 몇몇 중견 회화 작가들을 향한 ‘필력이 돋보인다’라는 찬사와 닮았지만, 다른 결이 한 가닥 더 있다는 것. 그의 사생에 엿보이는 필치는 때때로 ‘서도’의 그것에 가깝다. 분명 그림인데, 일필휘지 잘 후린 글씨가 떠오른다. 글은 고도화, 추상화, 분절화한 의미 전달 체계로 극한의 지시성과 효율을 지닌다. 기록의 수단인 문자는, 그 규칙성에 발맞추어 기본적으로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의 극단적인 대비로 형을 강조해 시인성을 담보한다. 긋고 치고 색색 찍으며 종이의 여백을 종횡무진 희롱하는 그의 운필에, 백지에 걸쭉한 먹으로 갈긴 영자팔법(永字八法)이 떠오른다. 서와 화를 오가는 줄타기. 시신경에 줄곧 배기는 ‘명필 바이브’에는 까닭이 있다.
그 명필 바이브 저마다 한 번 타려 그림을 유심히 훑다 문득 깨닫는다. 그림 낱장을 잇대어 한 타래로 엮은 그의 대작은 대개 불연속적임을. 조각 어름마다 형태는 교묘히 어긋나고, 시야는 은근히 들어맞지 않으며, 시간은 희미한 유격이 있다.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홀려 뒤늦게 눈치챌 뿐.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의 근간 중 프레그난츠의 법칙(Law of Prägnanz) 따르면 인간의 시지각은 ‘완결성’을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완결이란 ‘유의미한 단일 형상’을 말한다. 그렇게 그저 한 꾸러미 숲이겠거니 싶던 그의 야생은, 결코 박제와 보존이 아니다. 더듬어 채집한 숲의 뼈대와 부산물을, 식판에 밥 푸듯 화폭에 옮겨 담는 대신, 해체하고 정교하게 재조합, 재배치한다. 마치 산에서 휘갈긴 자투리 메모 뭉텅이를 풀어 정리하듯. 그래서 설계하고 기워 낸 야생, 다시 지은 야생이다. 파편적/지엽적 이미지를, 스캔하듯 한 시선으로 소비하는 세태에 걸맞은 리듬도 짚인다.

크고 작음, 집합과 산개, 빠름과 느림, 정(靜)과 동(動), 먹색과 종이색, 굳은 아크릴의 걸쭉함과 스민 먹선의 촉촉함, 서와 화, 단절과 연속. 박경진의 미감은 ‘상반의 공존/대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의 동거는 인류를 꾀는 가장 큰 매력이다. 통일 속의 변화가 균형을 이루는 구도에 끌리는 것처럼. 쉼 없는 티키타카, 내리 흔들리는 줄타기와 같은 동적 균형이다. 저지르고 수습하는 도전적, 역동적 균형감이 생동과 세련을 더한다. 더 정확히는, 보면 볼수록 뜻밖의 안배가 선물 상자 열듯 차례로 드러날 때, 사람은 경이를 느낀다. 쥐락펴락, 이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감상자로 하여금 의미 지도를 저마다 알아서 그리게끔 한다.

문득 주변을 돌아본다. 전시장 곳곳 채집물과 기록, 도구로 가득한 수납장과 테이블, 차트 형식의 책자와 영상은, 그저 그림을 거드는 조수가 아니다. 점 하나, 필획 하나에서 그림을 둘러싼 이들 장치 모두,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NPC처럼 단서를 품었다. 사방에서 툭툭, 힌트를 뿌리고 던져 거대한 공유지도를 얼기설기 암시하는 ‘십시일반’의 광경이다. 그 배치와 조합은 연구자적이고 과정 지향적인 냄새를 전시장에 채운다. 그림에 묻은 이 냄새가 진입 장벽을 허물고 관객의 몰입감을 고조한다. 말하자면 ‘그림과 아이들’이 아니라, 그 그림조차 공유 지도를 구성하는 멤버 중 하나일 뿐이다.
2026.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5 팔복예술공장 입주작가 박경진
백지를 두려워 않는 아이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혼밥, 혼자 여행. 내가 못 하는 것들이다. 혼자 앉아 있어도 근처에 누군가 있는 게 좋다. 산사를 찾을 때나 갈까, 산기슭에도 안 간다. 그래서 혼자 산을 ‘헤매러 가는’ 박경진 작가에게 물었다. ‘혼자? 산? 그걸 둘 다? 좋아 그게?’ 그래서 어린 시절 좋았던 기억, 생태적 관심, 익숙함, 또 가고 싶은 기분, 그가 말하는 모든 게 결국 재능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코에 닿을 듯 관객에 바싹 머리를 디밀고 하늘대는 짙푸른 풀숲, 굽이치던 어느 나무줄기는, 후방 추돌에 뒷목 잡고 내린 운전자처럼 화면을 베개 삼아 벌러덩 드러눕는다. 듬성듬성 찍은 꽃잎은 그 와중에 제일 좋은 목에 떡 하니 들어앉아 능청스레 눈을 간지럽힌다.
굽이굽이 펼쳐진 원경, 쭉 뻗은 하늘, 탁 트인 물가, 호연지기가 절로 시동을 거는 훤칠하고 의연한 조망, 나무가 엮여 어느새 숲을 짓는 대자연의 놀라운 짜임새… 박경진에게 그런 건 없다. 그는 몸을 낮춰 바위를 안고, 말라비틀어진 꽃과 눈을 맞추고, 흙바닥을 짚고, 메마른 수풀을 긴다. 구름을 찌른 산 대신, 바닥에 쌓인 낙엽 산을 조망한다. 낮고 좁고 작은 시야를 달고, 하늘이 아니라 땅을 종일 우러르며, 길도 없는 외진 구석을 소경처럼 더듬는다. 산을 오른다기보단 차라리 숲을 헤매러 가는 격이다.
때문에 박경진의 사생은 범상치 않다. 눈앞을 가로막은 나무 둥치와 풀더미, 종아리를 휘감고 발목을 붙들어 늘어지는 질긴 덩굴, 팔꿈치를 스치고 뺨을 할퀴는 이파리와 잔가지의 투정을 화폭에 친다. 갈라지고 군데군데 껍질이 말려 일어난 나무토막의 까칠함과, 마른 잔가지의 뾰족한 신음과, 텁텁한 시린 공기를 홀로 헤집는 거친 입김과, 바삭하게 깨지는 낙엽과, 그 소리를 뚝 먹고 시치미 떼는 축축한 흙의 촉감을 긋는다. 채찍 삼아 사방으로 오감을 휘두른다.
기운생동, 이형사신, 화룡점정, 일호불사? 글쎄, 생동하는 기의 운율을 담고, 자아를 현현하고, 숨을 불어넣고, 한 가닥도 놓치지 않을 심산이면, 붓질할 힘으로 차라리 오두막을 짓고 진짜 숲에 전입신고 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형태를 따고 식생을 채집하는 건 물론, 자연을 관조하고, 세상을 파악하고, 이치를 깨닫는 사생이 아니다. 사생을 구실 삼아 자신의 촉각적 체험을 녹취한, ‘성가신 자연’과의 대화에 가깝다.
던지고, 부르고, 휘두르면 숲이 맞받아치고, 산이 튕겨 낸다. 그리고 터진 압력솥에 뒤집어쓴 밥풀처럼, 그 반향이 고스란히 화폭에 튄다. 숲이 긋고, 산이 칠한 그림인 이유이다. 그 현장에 홀로 선 작가는 아마, 사방을 부딪은 초음파를 온몸으로 되받으며 자신을 확인하는 박쥐가 된 기분일까? 자연은 그렇게 큼직하고 유용한 거울이자, 감각이든 투정이든 한 가닥 흘리는 법도 없이 척척 잘만 받아내는 메이저리그 1군 포수이다.

꾸준한 작품 명명 ‘공유 지도’. 각자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두 단어가 엮여,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지도는 실체를 대신할 수 없는, 실체에 기생해야 의미가 있는 ‘가이드’이다. 박경진이 국가지리원 소속 주무관도 아니고, 숲의 위치나 지리 탐사 정보를 제공할 리는 없다. 그림을 그리는데 ‘지도’는 그럼 왜? 뭘 ‘공유’하겠단 걸까?
오히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지도와는 대척점에 있는, 실로 엉뚱한 지도의 면모가 그의 작업 곳곳에 엿보인다. 먼저 목적지가 없는 지도이다. 찾아가려는 게 아니라 헤매려 편다. 또한 대개 범례와 축척, 기호로 객관성을 담보하는 반면, 이 지도는 시선, 걸음, 바람, 냄새, 소리, 기운과 같은 주관으로 뒤범벅이다. 게다가 마치 시즌 1만 나온 넷플릭스 신작이 떠오르는, 완결되지 않은 열린 결말이다. 점선으로 그린 기분이 드는 이 지도는, 관객이 개입하여 작동하고 몰입하여 비로소 완성한다.
이에 착안하면 그의 그림은, 무언가를 화폭에 따 온 관찰기가 아니라, 화폭 바깥을 온종일 기웃대는 일종의 장치이다. 숲을 부르는 수정 구슬이 아니라, 숲으로 발길을 끄는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 같은 것. 확정된 장면 대신 경로, 행위, 흔적, 궤적, 과정, 시간 경과를 담은 ‘탈 결과적 결과물’이다. 그것도 감각 자체를 전하기보단, 그걸 느낄 수 있는 곳을 선발대로 다녀온 수기나 감각 맛집 분포도에 가깝다. 무궁무진한 경험의 가능성을 품은 그곳을 뜯어 빵 조각처럼 뿌리며, 각자 인상을 형성하게끔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내 감각이 휘감긴 현장을 표기한 지도. 맘껏 헤맬 수 있는 무대를 공유하는 지도. 그래서 ‘공유+지도’이다. 말하자면 오히려 잘 헤매려 쓰는 ‘헤맴 지도’인 것. 그렇게 그림은 ‘감상할 면모가 넘치는, 탈 감상적 그림’, ‘순수성과 예술성 가득한, 유용한 그림’이 된다. 이는 망원경이나 돋보기 같은 도구보단, 관객 각자 빈칸을 고르고 채우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작용한다. 제멋에 겨워 집집마다 천태만상인 새 아파트 인테리어처럼 말이다.

‘낮은 사생’, ‘헤매기 지도’에 더해, 박경진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지막 요술은 바로 그만의 조형감이다.
커다란 나무토막, 그 둘레를 혈관 뻗듯 휘감다 털뭉치처럼 서로 뒤엉켜 이젠 평생 그리 살 판인 수풀 한 다발. 시선을 주도하는 거국적인 형상은 대개 한쪽으로 치우치고, 쏠려 기울고, 화폭 어름에 발을 헛디뎌 고꾸라질 듯 어딘가 위태롭다. 그런데 작업 곳곳에 배인 이 ‘갸우뚱’은 불안하기보단 사뭇 도전적이다. 엉킨 붓질과 묵직한 여백, 후한 필묵과 콕 찍어 선명한 아크릴 물감, 현란한 형태와 그에 지지 않는 색채, 단칸방에 한데 몰아넣은 이들은 밤새 옥신각신한다. 그는 건장한 주인공에 괜히 퉁을 놓고, 쫄지 않고 대드는 야무진 라이벌을 그 대척점에 심는다. 위계를 흔들고 대칭에 맞서며 안정을 휘젓는다. 매번 다른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찾아 맞춘다. 때문에 구도와 개별 형상의 배치, 위치 교환은 늘 실험적이다. 한껏 뒤틀린 골반에 짝다리를 짚은 듯 조신하지 못한 위치감이야말로, 박경진의 조형감을 이루는 첫 번째 요소이다.

화면을 양단하는 팔뚝만 한 묵필, 주눅 들지 않고 올라타 마디마디 오뚝한 삐침과 파임. 가로지르고 내리긋고, 톡톡 찍은 붓이 종횡무진 뒤얽히는 박경진의 화면을 이리저리 눈으로 따르다 보면, 문득 눈발 날리는 금요일 저녁의 종로가 떠오른다. 옷깃 여미고 잰걸음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깍지 끼고 눈 맞는 젊은 남녀, 길 막고 뭉그대는 커플에 부아가 오른 아주머니, 요리조리 따릉이 모는 관광객, 기어이 주황 불을 밟는 택시, 빨갛든 파랗든 모르쇠 길부터 냅다 건너는 할아버지, 설 듯 말 듯 꿀렁꿀렁 길가에 어슬렁대는 시내버스, 틈새를 비집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배달 바이크…그는 초겨울의 종로보다 더 다채로운 속도를 한 폭에 엮는다. 몰아치는 큰 붓으로 기세를 잡고, 점과 선을 집요히 엉겨 시선을 붙들고 숨을 고른다. 청량한 속도감과 아기자기한 볼거리, 빅재미(?)와 잔재미의 절묘한 배합에, 술술 넘어가던 발길이 멈칫, 주억거리던 고개가 흠칫, 그렇게 눈길을 끌어모으다 어느새 홱 뿌리치며 흩어버린다. 관객의 망막과 내내 ‘밀당’하겠다는 심보가 훤히 비친다. 조형에 에너지가 있다면, 형태는 물길이라 눈도 마음도 따라 흐른다. 이 변덕맞은 속도와 곡률의 조련에 감상자는 도통 눈을 뗄 새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다 문득, 시선에도 흐름과 관성과 가속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일곱 개면 충분해요, 팔레트 몇 장이랑”
사생 도구를 살피다 눈에 들어온, 손바닥만 한 팔레트. 생각보다 작아 문득, 몇 가지 색을 준비하느냐 묻자 박경진 작가가 답했다.
많은 색이 좋은 색을 담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어만 복잡할 때가 많다. 그의 그림을 넌지시 훑으면, 몇몇 주조색이 화면의 가닥을 잡고 색의 기강을 세우느라 바쁘다. 형광에 근접한 청량 싱싱한 초록과, 수렁같이 묵직 굵직한 먹색의 대비, 종이 특유의 팽팽 탱탱한 미색과, 과즙처럼 짜릿하게 튀는 주황의 티격태격에 눈이 시끄럽다. 오르락내리락 그 와중에도 섬세한 농도 줄타기에, 나서고 물러남이 능숙하여, 보는 이는 별다른 도전과 절제를 알아채지 못한다. 만일, 차례로 덜어 컬러픽을 짜면 의외로 힙하고 핫하고 팝해, 심지어 어딘가 이질적이랄 수도 있을 배색이다. 그리고 따로 떼어 하나씩 다시 살피면, 철저히 자연물에서 채집/추출한, ‘유기농 동시대 색’임에 놀란다.
“잘 그리는 작가는,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토크 행사 막판에 한 관객이, 진행자인 나를 콕 집어 이렇게 물었다. 아마 ‘붓을 잘 놓는 작가’라 대답한 듯하다. 자기 붓을 지니고, 확신을 듬뿍 찍어 휘두르는 것으론 부족하다. 놓을 때 정말로 붓을 놓아야, 잘 그리는 작가이다. 경력과 확신이 쌓일수록 더 힘든 일이기에 또한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박경진은 ‘좀 놓는’ 작가이다. 사실 물리적 면적만 놓고 보면 그의 그림 속 최대 지분은 논리적 흰색, 즉 종이색이다. 이질적인 색상끼리 화목한, 이 ‘다채로운 독과점’의 배후(?)엔 종이색이 도사린다. 든든히 뒤를 바치고, 모든 색을 보듬어 안아 한데 모은다.
구상부터 마감까지, 가장 두려운 시간은 언제일까? 작가들은 대개 말한다. 백지 앞에 설 때 가장 막막하다고. 사실 흰 화면에 색을 긋고 입히기 시작할 때 덜 채워 언뜻언뜻 비치는 여백 날것의 생동감과 자유로움, 그 산뜻한 시각적 공명을 살리고 활용하려 애쓰는 작가가 부지기수이다. 마무리가 호락호락 그리 안 되니 문제이지. 반면 박경진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답했다.
“종이색도 색이에요, 원래 예뻐서 화장을 더 시킬 필요도 없죠”
대화에서 느낀 그는, 여백을 숙제로 여기지도, 타협, 다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백지를 두려워 않는 아이”라 혼자 메모하고 밑줄 긋고 색칠해 뒀다.

‘달필’, 박경진의 작업에 종종 모이는 반응이다. 흥미로운 건, 몇몇 중견 회화 작가들을 향한 ‘필력이 돋보인다’라는 찬사와 닮았지만, 다른 결이 한 가닥 더 있다는 것. 그의 사생에 엿보이는 필치는 때때로 ‘서도’의 그것에 가깝다. 분명 그림인데, 일필휘지 잘 후린 글씨가 떠오른다. 글은 고도화, 추상화, 분절화한 의미 전달 체계로 극한의 지시성과 효율을 지닌다. 기록의 수단인 문자는, 그 규칙성에 발맞추어 기본적으로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의 극단적인 대비로 형을 강조해 시인성을 담보한다. 긋고 치고 색색 찍으며 종이의 여백을 종횡무진 희롱하는 그의 운필에, 백지에 걸쭉한 먹으로 갈긴 영자팔법(永字八法)이 떠오른다. 서와 화를 오가는 줄타기. 시신경에 줄곧 배기는 ‘명필 바이브’에는 까닭이 있다.
그 명필 바이브 저마다 한 번 타려 그림을 유심히 훑다 문득 깨닫는다. 그림 낱장을 잇대어 한 타래로 엮은 그의 대작은 대개 불연속적임을. 조각 어름마다 형태는 교묘히 어긋나고, 시야는 은근히 들어맞지 않으며, 시간은 희미한 유격이 있다.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홀려 뒤늦게 눈치챌 뿐.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의 근간 중 프레그난츠의 법칙(Law of Prägnanz) 따르면 인간의 시지각은 ‘완결성’을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완결이란 ‘유의미한 단일 형상’을 말한다. 그렇게 그저 한 꾸러미 숲이겠거니 싶던 그의 야생은, 결코 박제와 보존이 아니다. 더듬어 채집한 숲의 뼈대와 부산물을, 식판에 밥 푸듯 화폭에 옮겨 담는 대신, 해체하고 정교하게 재조합, 재배치한다. 마치 산에서 휘갈긴 자투리 메모 뭉텅이를 풀어 정리하듯. 그래서 설계하고 기워 낸 야생, 다시 지은 야생이다. 파편적/지엽적 이미지를, 스캔하듯 한 시선으로 소비하는 세태에 걸맞은 리듬도 짚인다.

크고 작음, 집합과 산개, 빠름과 느림, 정(靜)과 동(動), 먹색과 종이색, 굳은 아크릴의 걸쭉함과 스민 먹선의 촉촉함, 서와 화, 단절과 연속. 박경진의 미감은 ‘상반의 공존/대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의 동거는 인류를 꾀는 가장 큰 매력이다. 통일 속의 변화가 균형을 이루는 구도에 끌리는 것처럼. 쉼 없는 티키타카, 내리 흔들리는 줄타기와 같은 동적 균형이다. 저지르고 수습하는 도전적, 역동적 균형감이 생동과 세련을 더한다. 더 정확히는, 보면 볼수록 뜻밖의 안배가 선물 상자 열듯 차례로 드러날 때, 사람은 경이를 느낀다. 쥐락펴락, 이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감상자로 하여금 의미 지도를 저마다 알아서 그리게끔 한다.

문득 주변을 돌아본다. 전시장 곳곳 채집물과 기록, 도구로 가득한 수납장과 테이블, 차트 형식의 책자와 영상은, 그저 그림을 거드는 조수가 아니다. 점 하나, 필획 하나에서 그림을 둘러싼 이들 장치 모두,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NPC처럼 단서를 품었다. 사방에서 툭툭, 힌트를 뿌리고 던져 거대한 공유지도를 얼기설기 암시하는 ‘십시일반’의 광경이다. 그 배치와 조합은 연구자적이고 과정 지향적인 냄새를 전시장에 채운다. 그림에 묻은 이 냄새가 진입 장벽을 허물고 관객의 몰입감을 고조한다. 말하자면 ‘그림과 아이들’이 아니라, 그 그림조차 공유 지도를 구성하는 멤버 중 하나일 뿐이다.
2026.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