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박스, 묶어둔 장소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이다혜, 인생은 끊임없는 무정착이 아닐까_100x80.3cm_한지에 먹,분채,석채,방해말가루_2025
우리는 이동한다. 정착의 삶이 기본이었던 역사책 속 생활 방식은 끊임없는 변화와 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문화에서 이제 희귀해졌다. 변화는 이동으로 이어지고, 지속적인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의 우리에겐 더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삶의 방식이다. 주변에서 평생직장이나 지역 토박이를 쉽게 발견하기 어려워진 만큼, 우리는 빈번한 ‘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주변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정작 한 공간에 깊이 뿌리내리기는 어려워졌다.
이다혜의 작업은 이렇듯 현대 사회가 지닌 유동성을 내포한다. 하루아침 사이, 아니 촌각을 다투며 급변하는 정세, 화폐 가치의 급격한 등락, 지속적인 고용 불안과 유연한 노동 방식, 그리고 단편적인 상호 작용 등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빗댄다. 장소의 이동이 낳는 우리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동은 모든 환경을 뒤바꾸기 때문이다. 삶의 조건이, 삶의 방식이, 삶의 온도가 변화한다. 그렇기에 ‘집’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역사와 가치가 새겨진 삶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보이듯, 작가는 자주 이사를 하며 이삿짐을 풀지 않는다. 대신 풀지 않은 박스들을 그대로 가지고 이동한다. 당장 쓸 일이 없는 짐들을 굳이 업고 다니는 행위는 켜켜이 쌓여가는 우리의 마음 상태와 닮아 있다. 짐을 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장소에 머무는 동안 미처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던 물건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쓸모를 보류한 채 짐을 업고 다니는 상태는 과거가 박제된 흑백 사진을 연상시킨다. 이다혜는 이렇듯 그림이라는 자신만의 박스 안에 장소를 박제함으로써 공간의 변화를 기록해 왔다.
작가의 기록은 사라진 장소, 정확히는 자신의 삶에서 소거된 장소에 대한 애도이다. 작가는 이 애틋한 감정을 박스라는 사물에 투사한다. 그림 속에서 사정없이 여기저기 가득 쌓인 박스 더미는 우리의 눈을 어지럽힌다. 박스에 담긴 내용물을 상상해 보면,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애착 박스’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봉인 박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직은 온전히 떠나보낼 수 없기에 박스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다. 그 박스에 담긴 것들은 아마도 과거와 현재 사이를 떠다니는, 방랑하는 마음일 테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 우리 스스로도 이다혜의 풀지 않은 박스처럼 방랑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 나를 대입하는 순간, 이는 결코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온다. 대전, 서울, 고양, 파주를 거치며 항상 이동 중인 나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서울 안에서도 서초구, 강남구, 은평구, 노원구 등 하루에 몇 번씩 구역을 오갈 때도 있다. 항상 풀지 않은 짐을 껴안고 이동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그의 그림 위에 겹쳐 보인다.
정착과 무정착, 이동과 머무름, 열기와 봉인 사이에 놓인 이다혜의 이삿짐 그림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자아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토록 발랄한 이동을 감행한다면, 무정착의 서사 안에는 또 어떠한 흥미로운 사건과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다혜의 그림이 제안하는 방랑은 현재의 서사 안에 깃든 우리의 소유와 무소유 모두를 긍정하게 만든다.
마음을 어딘가에 묶어두듯이, 우리는 어느샌가 무언가를 소유하기를 원하며 집이 제공하는 영속성의 환상을 질투하곤 한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것을 꿈꾼다. 더 이상 움직이기 싫고, 짐을 풀었다 쌌다 하는 과정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어차피 또 떠날 텐데 굳이 짐을 풀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 짐들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자신들의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언젠가’라는 환상 때문에 우리는 짐을 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환상을 좇는 태도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당연한 욕망을 지나치게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다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공감의 위로를 건넨다.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필요도 있는 법이다.
나의 시간과 육체, 그리고 마음이 머물렀던 장소는 어느샌가 나 자신과 동일시된다. 떠나온 장소를 봉인한다고 해서 지나간 마음까지 온전히 봉인할 수 있을까. 떠다니는 마음은 결국 박스에 보관되었다. 이다혜의 캔버스 작업은 한지와 장지의 프레임, 그 상태 자체를 하나의 박스로 보아도 무방하다. 작품 자체가 그녀의 박스인 셈이다. 자신의 시간과 물건, 머물렀던 장소의 온기를 작품이라는 박스 안에 담아내었다. 이 박스는 무정착의 삶을 가시화한다. 박스에 담긴 것은 결국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다. 장소가 고정된다고 해서 삶의 여정까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늘 부유한다. 이다혜의 작업은 유동적인 장소의 궤적을 따라 작가의 삶 자체, 그리고 일상에 고인 마음의 부유함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2026.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방랑하는 박스, 묶어둔 장소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이다혜, 인생은 끊임없는 무정착이 아닐까_100x80.3cm_한지에 먹,분채,석채,방해말가루_2025
우리는 이동한다. 정착의 삶이 기본이었던 역사책 속 생활 방식은 끊임없는 변화와 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문화에서 이제 희귀해졌다. 변화는 이동으로 이어지고, 지속적인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의 우리에겐 더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삶의 방식이다. 주변에서 평생직장이나 지역 토박이를 쉽게 발견하기 어려워진 만큼, 우리는 빈번한 ‘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주변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정작 한 공간에 깊이 뿌리내리기는 어려워졌다.
이다혜의 작업은 이렇듯 현대 사회가 지닌 유동성을 내포한다. 하루아침 사이, 아니 촌각을 다투며 급변하는 정세, 화폐 가치의 급격한 등락, 지속적인 고용 불안과 유연한 노동 방식, 그리고 단편적인 상호 작용 등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빗댄다. 장소의 이동이 낳는 우리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동은 모든 환경을 뒤바꾸기 때문이다. 삶의 조건이, 삶의 방식이, 삶의 온도가 변화한다. 그렇기에 ‘집’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역사와 가치가 새겨진 삶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보이듯, 작가는 자주 이사를 하며 이삿짐을 풀지 않는다. 대신 풀지 않은 박스들을 그대로 가지고 이동한다. 당장 쓸 일이 없는 짐들을 굳이 업고 다니는 행위는 켜켜이 쌓여가는 우리의 마음 상태와 닮아 있다. 짐을 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장소에 머무는 동안 미처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던 물건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쓸모를 보류한 채 짐을 업고 다니는 상태는 과거가 박제된 흑백 사진을 연상시킨다. 이다혜는 이렇듯 그림이라는 자신만의 박스 안에 장소를 박제함으로써 공간의 변화를 기록해 왔다.
작가의 기록은 사라진 장소, 정확히는 자신의 삶에서 소거된 장소에 대한 애도이다. 작가는 이 애틋한 감정을 박스라는 사물에 투사한다. 그림 속에서 사정없이 여기저기 가득 쌓인 박스 더미는 우리의 눈을 어지럽힌다. 박스에 담긴 내용물을 상상해 보면,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애착 박스’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봉인 박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직은 온전히 떠나보낼 수 없기에 박스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다. 그 박스에 담긴 것들은 아마도 과거와 현재 사이를 떠다니는, 방랑하는 마음일 테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 우리 스스로도 이다혜의 풀지 않은 박스처럼 방랑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 나를 대입하는 순간, 이는 결코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온다. 대전, 서울, 고양, 파주를 거치며 항상 이동 중인 나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서울 안에서도 서초구, 강남구, 은평구, 노원구 등 하루에 몇 번씩 구역을 오갈 때도 있다. 항상 풀지 않은 짐을 껴안고 이동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그의 그림 위에 겹쳐 보인다.
정착과 무정착, 이동과 머무름, 열기와 봉인 사이에 놓인 이다혜의 이삿짐 그림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자아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토록 발랄한 이동을 감행한다면, 무정착의 서사 안에는 또 어떠한 흥미로운 사건과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다혜의 그림이 제안하는 방랑은 현재의 서사 안에 깃든 우리의 소유와 무소유 모두를 긍정하게 만든다.
마음을 어딘가에 묶어두듯이, 우리는 어느샌가 무언가를 소유하기를 원하며 집이 제공하는 영속성의 환상을 질투하곤 한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것을 꿈꾼다. 더 이상 움직이기 싫고, 짐을 풀었다 쌌다 하는 과정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어차피 또 떠날 텐데 굳이 짐을 풀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 짐들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자신들의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언젠가’라는 환상 때문에 우리는 짐을 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환상을 좇는 태도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당연한 욕망을 지나치게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다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공감의 위로를 건넨다.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필요도 있는 법이다.
나의 시간과 육체, 그리고 마음이 머물렀던 장소는 어느샌가 나 자신과 동일시된다. 떠나온 장소를 봉인한다고 해서 지나간 마음까지 온전히 봉인할 수 있을까. 떠다니는 마음은 결국 박스에 보관되었다. 이다혜의 캔버스 작업은 한지와 장지의 프레임, 그 상태 자체를 하나의 박스로 보아도 무방하다. 작품 자체가 그녀의 박스인 셈이다. 자신의 시간과 물건, 머물렀던 장소의 온기를 작품이라는 박스 안에 담아내었다. 이 박스는 무정착의 삶을 가시화한다. 박스에 담긴 것은 결국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다. 장소가 고정된다고 해서 삶의 여정까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늘 부유한다. 이다혜의 작업은 유동적인 장소의 궤적을 따라 작가의 삶 자체, 그리고 일상에 고인 마음의 부유함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2026.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