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정재연
먼지와 햇빛이 뒤섞여 끓는 불덩이 같은 뜨거운 공기. 한국은 심각한 더위에 또다시 역대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2023년 여름, 경기일보 천자춘추에 지구가 앓고 있는 몸살에 대해 간단히 기사를 썼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같은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어쩌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우리가 흔히 매일 입에 달고 살듯이 이 지독한 기후 위기가 더 이상 ‘다가올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매일의 날씨를 체크하며 이야기한다. ‘지구가 많이 아픈가 봐.’ 하면서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 버린 걸 수도.
2024년은 관측 이래 가장 따뜻한 해로 기록됐다. 산업화 이전 평균보다 지구 평균기온이 약 1.55°C 높았고, 2025년 역시 역대 두 번째 또는 세 번째로 따뜻한 해가 될 것으로 기록됐다. 2025년에는 해양의 열 함량 역시 관측 기록상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이상기후’라는 단어조차 이상하지 않다. 폭염과 홍수, 산불과 가뭄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절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넘기는 우리의 손가락도 점점 무덤덤해진다. 뉴욕의 더위는 한국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다. 적어도 습한 기운에서는 절대적이다. 기사를 열면 또 폭염이라고 한다. 또 산불이라고 한다. 또 홍수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일상생활을 이어 나간다. 위기를 인식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2023년의 나는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전시가 가능할까?’라고 물었다. 2026년의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미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후위기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미술은 오랫동안 자연을 바라보고 재현해 왔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세 번 이상은 된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풍경과 자연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서부터 자연을 작품의 재료와 장소로 끌어들인 대지미술, 동물의 뼈와 무기적인 소재, 산업 폐기물, 폐품을 새로운 미술의 언어로 사용했던 누보 레알리즘까지 자연과 물질을 둘러싼 미술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환경미술과 생태미술은 그 흐름을 이어받아 자연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산업화, 자원 고갈, 오염과 생태계의 변화를 작품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지구라는 행성은 벌써 오래전에 쓰레기 더미로 변모하여 너무 뜨거워진 나머지 대부분의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렀으리라.[1]
그러나 지금의 기후위기는 이전과 조금 다르다. 기후를 ‘소재’로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지질학적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커졌다는 인식을 제공했다. 물론 예전 글에서 쓴 적도 있지만 작가들의 예술활동도 재생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 효율적인 기술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생태적인 제작 관행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류세’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모든 인간의 책임을 뭉뚱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가 더 많이 소비하고, 누가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며, 누가 그 결과를 더 먼저 감당하는가. 기후위기는 단순히 ‘인간 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 식민주의와 불평등, 자원과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시대의 생태미술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선 여러 재료의 지속 가능한 활용 그리고 보존 방법과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여전히 그것에서만 그친다는 점이 아쉽지만 말이다.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자연과 함께 작업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미생물과 박테리아, 식물과 균류, 물과 흙을 작업의 주체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미래의 생활환경을 상상하거나, 이미 사라지고 있는 생태계를 기록하고, 기후 재난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미술은 기후 위기를 설명하는 도구에서 나아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장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멈춰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작품을 비행기로 운송하고, 거대한 가벽을 세우고, 미술관을 확대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끊임없이 제작한다. 하… 어쩌면 좋을까?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갤러리의 온도와 습도를 엄격하게 유지하고, 여전히 수많은 인쇄물을 만들고, 전 세계에서 작가와 관객을 이동시킨다면 어떨까. 기후위기를 말하는 전시 역시 탄소를 배출한다. 전시를 우리는 왜 만드는 걸까? 작품을 어떻게 운송하는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료를 사용하는지, 전시가 끝난 뒤 무엇을 버리고,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지. 최근 Getty가 2024~2025년 PST Art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한 Climate Impact Program은 전시의 배출량과 폐기물, 재료 사용 등을 실제로 측정했다. 그 결과 항공 이동과 작품의 항공 운송이 특히 탄소 집약적인 영역으로 나타났고, 일부 기관은 벽면 그래픽을 비닐에서 종이로 바꾸거나 갤러리의 기후조절 기준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에너지와 비용을 동시에 줄였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변화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친환경 전시라고 하면 재활용 소재로 작품을 만들거나 자연을 소재로 한 전시를 떠올렸다. 이제는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야 한다. 작품 한 점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까지 필요한 에너지,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나무 crate, 전시장의 조명과 냉난방, 관객의 이동, 전시가 끝난 뒤 버려지는 가벽과 그래픽까지. 작품은 전시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탄소 발자국을 가지고 있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역시 이러한 변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고 있다. 2025년 ICOM의 지속가능한 발전 실천상에는 전시와 운영, 지역사회 참여까지 지속가능성을 기관의 핵심 활동에 통합한 프로젝트들이 선정됐다.
흥미로운 것은 ‘덜 만드는 것’이 반드시 미술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적게 만들고, 더 오래 사용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작품을 가까운 지역에서 제작하고, 불필요한 항공 운송을 줄이고, 전시의 기후조절 조건을 작품의 보존 상태에 맞게 다시 생각하는 것. 가능한 일일까?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전시는 결국 하나의 임시적인 생태계고, 여전히 작품과 관객은 필요로 하고, 운송과 노동, 에너지 사용과 폐기물은 연결되어 있다. 삼박자가 맞춰져야 한다. 작품과 전시가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보이지 않는 이동과 소비들. 그래서 나는 이제 ‘친환경적인 미술’이라는 표현도 조금 조심스럽다.
친환경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종이 대신 재생 플라스틱을 사용했다고 해서, 재활용 재료를 썼다고 해서 전시 전체가 지속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재료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문제에 가깝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태환경이나 기후위기에 대한 전시에 대한 모순을 너무나 잘 알기에…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미술계의 생산 방식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을 보호하자고 말하면서 더 많은 물건을 만들고, 탄소 배출을 줄이자고 말하면서 작품을 비행기로 이동시키고, 지구를 생각하자고 말하면서 전시가 끝난 뒤 수많은 쓰레기를 남긴다면 그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23년에 나는 쓰레기봉투를 묶으며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전시가 과연 가능할까?’라고 생각했다. 2026년에도 여전히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완벽한 답은 없을 것이다. 만들지 않아도 되는 주제의 전시가 있을까? 예술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늘도 나는 그 질문을 들고 무슨 전시를 볼지 리서치를 한다.
[1]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사월의 책, 2023), p.21
2026.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정재연
먼지와 햇빛이 뒤섞여 끓는 불덩이 같은 뜨거운 공기. 한국은 심각한 더위에 또다시 역대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2023년 여름, 경기일보 천자춘추에 지구가 앓고 있는 몸살에 대해 간단히 기사를 썼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같은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어쩌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우리가 흔히 매일 입에 달고 살듯이 이 지독한 기후 위기가 더 이상 ‘다가올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매일의 날씨를 체크하며 이야기한다. ‘지구가 많이 아픈가 봐.’ 하면서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 버린 걸 수도.
2024년은 관측 이래 가장 따뜻한 해로 기록됐다. 산업화 이전 평균보다 지구 평균기온이 약 1.55°C 높았고, 2025년 역시 역대 두 번째 또는 세 번째로 따뜻한 해가 될 것으로 기록됐다. 2025년에는 해양의 열 함량 역시 관측 기록상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이상기후’라는 단어조차 이상하지 않다. 폭염과 홍수, 산불과 가뭄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절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넘기는 우리의 손가락도 점점 무덤덤해진다. 뉴욕의 더위는 한국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다. 적어도 습한 기운에서는 절대적이다. 기사를 열면 또 폭염이라고 한다. 또 산불이라고 한다. 또 홍수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일상생활을 이어 나간다. 위기를 인식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2023년의 나는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전시가 가능할까?’라고 물었다. 2026년의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미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후위기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미술은 오랫동안 자연을 바라보고 재현해 왔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세 번 이상은 된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풍경과 자연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서부터 자연을 작품의 재료와 장소로 끌어들인 대지미술, 동물의 뼈와 무기적인 소재, 산업 폐기물, 폐품을 새로운 미술의 언어로 사용했던 누보 레알리즘까지 자연과 물질을 둘러싼 미술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환경미술과 생태미술은 그 흐름을 이어받아 자연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산업화, 자원 고갈, 오염과 생태계의 변화를 작품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지구라는 행성은 벌써 오래전에 쓰레기 더미로 변모하여 너무 뜨거워진 나머지 대부분의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렀으리라.[1]
그러나 지금의 기후위기는 이전과 조금 다르다. 기후를 ‘소재’로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지질학적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커졌다는 인식을 제공했다. 물론 예전 글에서 쓴 적도 있지만 작가들의 예술활동도 재생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 효율적인 기술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생태적인 제작 관행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류세’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모든 인간의 책임을 뭉뚱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가 더 많이 소비하고, 누가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며, 누가 그 결과를 더 먼저 감당하는가. 기후위기는 단순히 ‘인간 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 식민주의와 불평등, 자원과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시대의 생태미술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선 여러 재료의 지속 가능한 활용 그리고 보존 방법과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여전히 그것에서만 그친다는 점이 아쉽지만 말이다.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자연과 함께 작업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미생물과 박테리아, 식물과 균류, 물과 흙을 작업의 주체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미래의 생활환경을 상상하거나, 이미 사라지고 있는 생태계를 기록하고, 기후 재난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미술은 기후 위기를 설명하는 도구에서 나아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장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멈춰야 한다.
여전히 우리는 작품을 비행기로 운송하고, 거대한 가벽을 세우고, 미술관을 확대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끊임없이 제작한다. 하… 어쩌면 좋을까?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갤러리의 온도와 습도를 엄격하게 유지하고, 여전히 수많은 인쇄물을 만들고, 전 세계에서 작가와 관객을 이동시킨다면 어떨까. 기후위기를 말하는 전시 역시 탄소를 배출한다. 전시를 우리는 왜 만드는 걸까? 작품을 어떻게 운송하는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료를 사용하는지, 전시가 끝난 뒤 무엇을 버리고,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지. 최근 Getty가 2024~2025년 PST Art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한 Climate Impact Program은 전시의 배출량과 폐기물, 재료 사용 등을 실제로 측정했다. 그 결과 항공 이동과 작품의 항공 운송이 특히 탄소 집약적인 영역으로 나타났고, 일부 기관은 벽면 그래픽을 비닐에서 종이로 바꾸거나 갤러리의 기후조절 기준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에너지와 비용을 동시에 줄였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변화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친환경 전시라고 하면 재활용 소재로 작품을 만들거나 자연을 소재로 한 전시를 떠올렸다. 이제는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야 한다. 작품 한 점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까지 필요한 에너지,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나무 crate, 전시장의 조명과 냉난방, 관객의 이동, 전시가 끝난 뒤 버려지는 가벽과 그래픽까지. 작품은 전시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탄소 발자국을 가지고 있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역시 이러한 변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고 있다. 2025년 ICOM의 지속가능한 발전 실천상에는 전시와 운영, 지역사회 참여까지 지속가능성을 기관의 핵심 활동에 통합한 프로젝트들이 선정됐다.
흥미로운 것은 ‘덜 만드는 것’이 반드시 미술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적게 만들고, 더 오래 사용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작품을 가까운 지역에서 제작하고, 불필요한 항공 운송을 줄이고, 전시의 기후조절 조건을 작품의 보존 상태에 맞게 다시 생각하는 것. 가능한 일일까?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전시는 결국 하나의 임시적인 생태계고, 여전히 작품과 관객은 필요로 하고, 운송과 노동, 에너지 사용과 폐기물은 연결되어 있다. 삼박자가 맞춰져야 한다. 작품과 전시가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보이지 않는 이동과 소비들. 그래서 나는 이제 ‘친환경적인 미술’이라는 표현도 조금 조심스럽다.
친환경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종이 대신 재생 플라스틱을 사용했다고 해서, 재활용 재료를 썼다고 해서 전시 전체가 지속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재료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문제에 가깝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태환경이나 기후위기에 대한 전시에 대한 모순을 너무나 잘 알기에…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미술계의 생산 방식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을 보호하자고 말하면서 더 많은 물건을 만들고, 탄소 배출을 줄이자고 말하면서 작품을 비행기로 이동시키고, 지구를 생각하자고 말하면서 전시가 끝난 뒤 수많은 쓰레기를 남긴다면 그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23년에 나는 쓰레기봉투를 묶으며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전시가 과연 가능할까?’라고 생각했다. 2026년에도 여전히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완벽한 답은 없을 것이다. 만들지 않아도 되는 주제의 전시가 있을까? 예술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늘도 나는 그 질문을 들고 무슨 전시를 볼지 리서치를 한다.
[1]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사월의 책, 2023), p.21
2026.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