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하고 잔인한,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망각은 얼마나 강력하고 또 잔인한가”. 우리는 망각을 행하기보다 맞이한다. 이는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서, 그저 받아들이는 변화에 가깝다. 어떤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어떤 것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희미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지 애써 선택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잊게 될지는 좀처럼 정할 수 없다.
잊는다는 것. 이는 기억의 실패나 상실의 결과일까. 과거를 보존하는 기억과 달리 망각은 현재의 관계를 재배열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공백 대신 추측과 상상, 왜곡과 서사가 제멋대로 채워진다. 그렇다면 망각은 새로운 기억과 믿음이 만들어지는 생산의 조건이 될까? 망각의 영향력은 개인 안에서보다 사회 안에서 더 적극적이다.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 재현되지 않은 사건, 공식적인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일화들은 어디로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잊는가’보다 ‘무엇이 잊히도록 형성되었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망각은 살아가기 위한 능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증명이 다시 한번 지워지는 폭력이 된다.
예술에서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태도가 때로 관습적이고 식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과거를 종결된 서사로 기념비화하며 그 안의 타자를 연민의 대상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역할은 이미 지나간 시간을 재현하거나 상실된 존재를 감상적으로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긴 자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시간에 파열음을 내고, 억압된 과거를 현재와 충돌시키는 데 있지 않을까. 현대미술이 고착화된 서사를 해체하고 전복시키며, 파편화된 미학을 경유해 온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이 망각에 맞서 잊힌 이들을 재차 호명하는 것은 오히려 온전한 호출과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역사에서 배제된 존재들이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존재들은 데리다가 말한 유령처럼 현재를 배회한다. 지워진 얼굴들은 ‘부재하는 현존’으로서 지금 여기에 다시 삽입/기록되어야 한다. 기억을 다루는 예술은 바로 이 결손을 감지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무엇을 지운 채 구축되었는지를 묻는 실천이 된다.
그러니 지금의 비평과 예술이 마주해야 할 지점은 지워져서는 안 될 존재들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가 망각에 맞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잊혀서는 안 되는가“, 망각 이후의 빈자리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재를 또다시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이다.
2026.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강력하고 잔인한,
정희라, 미술평론/미술사 (화이트블럭 학예팀장)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망각은 얼마나 강력하고 또 잔인한가”. 우리는 망각을 행하기보다 맞이한다. 이는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서, 그저 받아들이는 변화에 가깝다. 어떤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어떤 것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희미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지 애써 선택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잊게 될지는 좀처럼 정할 수 없다.
잊는다는 것. 이는 기억의 실패나 상실의 결과일까. 과거를 보존하는 기억과 달리 망각은 현재의 관계를 재배열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공백 대신 추측과 상상, 왜곡과 서사가 제멋대로 채워진다. 그렇다면 망각은 새로운 기억과 믿음이 만들어지는 생산의 조건이 될까? 망각의 영향력은 개인 안에서보다 사회 안에서 더 적극적이다.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 재현되지 않은 사건, 공식적인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일화들은 어디로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잊는가’보다 ‘무엇이 잊히도록 형성되었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망각은 살아가기 위한 능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증명이 다시 한번 지워지는 폭력이 된다.
예술에서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태도가 때로 관습적이고 식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과거를 종결된 서사로 기념비화하며 그 안의 타자를 연민의 대상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역할은 이미 지나간 시간을 재현하거나 상실된 존재를 감상적으로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긴 자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시간에 파열음을 내고, 억압된 과거를 현재와 충돌시키는 데 있지 않을까. 현대미술이 고착화된 서사를 해체하고 전복시키며, 파편화된 미학을 경유해 온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이 망각에 맞서 잊힌 이들을 재차 호명하는 것은 오히려 온전한 호출과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역사에서 배제된 존재들이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존재들은 데리다가 말한 유령처럼 현재를 배회한다. 지워진 얼굴들은 ‘부재하는 현존’으로서 지금 여기에 다시 삽입/기록되어야 한다. 기억을 다루는 예술은 바로 이 결손을 감지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무엇을 지운 채 구축되었는지를 묻는 실천이 된다.
그러니 지금의 비평과 예술이 마주해야 할 지점은 지워져서는 안 될 존재들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가 망각에 맞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잊혀서는 안 되는가“, 망각 이후의 빈자리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재를 또다시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이다.
2026.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