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대구예술발전소 《파편화된 알고리즘》 입주작가 정재엽 전시 서문
자연과 문명이 번갈아 채우는 ‘콤포지션’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버려진 문틀을 쪼개 켜고 다듬고 잇대어 빌딩 숲을 연상시키는 뼈대를 짠다. 나무 틀을 따라 잔가지를 꼼꼼히 둘러 만든 면은, 마치 금 간 유리거울처럼 허공을 덮는다. 그 사이로 엿보이는 환기구 문짝의 촘촘한 창살 너머로, 강렬한 조명 하나가 태양처럼 반짝인다. 온몸에 빛을 흠뻑 뒤집어 쓴 조각은, 사방을 두른 쉬폰 천막에 선명한 그림자를 마음놓고 기댄다.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조각과, 그보다도 훨씬 크게 드리운 천막 위의 그림자는 밝디밝은 빛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장엄과 섬뜩을 한꺼번에 풍긴다.
정재엽의 조각은 이미 그 재료부터 범상치 않다. 나무와 천, 공간과 빛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조각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층위가 있다. 멀리서 다가갈 때 흰 천에 비친 선명하고 거대한 그림자와, 그 나머지를 가득 채우는 밝은 빛은 마치 자체발광하는 거대한 조명 기구나 그림자 인형극 스크린을 연상시킨다. 그림자의 형상은 더욱 독특한데, 각지고 미끈하고 깔끔하고 기하학적인 인공적 조형과, 곡선, 불규칙, 유기체적인 생태적 조형이 절묘히 뒤얽힌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그림자와 공간까지 아우르는 조각. 달리 보아, 빛과 그림자야말로 최종 결과물이라면 재밌게도, ‘조각으로 하는 드로잉‘이라 부를만 하다. 장소에 따라 빛이 변하면 그림자도 공간을 채우고 비우며 서로 감응할 것이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는 공간을 조각으로 편입하는 외교관의 역할을 겸한다.
치미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천막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목조 구조물은 버려진 문짝과 문틀, 나무 팔레트를 한 꺼풀 켜내어 말끔하게 다듬어 짰다. 현대판 나무꾼이 되어 밤새 도로를 뛰어다니며 가지치기 후 가득 널브라진 나뭇가지를 몇 트럭씩 주워다 적당히 다듬고 엮어 틀 안을 채워 나간다. 목재는 버릴 게 하나 없고, 늘 다시 태어난다는 목수들의 말이 실감이 난다. 같은 목재이지만 하나는 인공의 조형, 하나는 자연을 대표하는 형상으로 재탄생하다니 미묘하다. 같은 조상에게서 솟은, 서로 다른 운명의 후손들이 대립하고 조화하는 형상이랄까.
그의 조형은 건물숲이 나무숲으로, 인공물의 영역이 자연의 영역으로 점차 트랜지션하는전개가 유독 돋보인다. 결과적으로 대립과 대조, 조화와 공존의 리듬을 일관적, 지속적,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일례로 동박 페인팅 작업을 잠깐 살피면, 버려진 틀에 유리를 씌우고, 동박을 얇게 자르고 오려, 무척 섬세한 조형을 표면에 앉힌다. 그런데 투명한 유리 표면과, 동박의 선명하고 강렬한 실루엣의 대비가, 이미 먼저 본 그 느낌, 빛과 그림자로 둘러싼 문틀 조각의 인상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형상 또한 그 궤를 같이하는데, 우선 나무와 숲과 들판의 실루엣이 우뚝 선다. 그리고 그 발밑으로 높다란 빌딩숲과 건설 장비 등 문명을 대표하는 육중한 기하학적 구조물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달리 보면, 드높은 기술문명이 궁극적으로 떠받쳐야 할 건 다름아닌 자연 그 자체임을 외치는 듯하다.
회화 작업 전반에서부터 선명한 문명과 자연의 대비, 기하학적 조형과 생태적 조형의 조합, 문을 넘어 경계와 층을 직접 뚫고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 조각 작업은 공통적으로 ‘선‘을 암시한다. 경계와 한계를 체험하는 행위로 인간의 분수와 자연이 견뎌 낼 한계를 가늠하게 한다. 결국 이 ‘선’이 무너지면 손해보는 건 인간. 결국 그의 작업은 부드럽고 점잖게 타이른다. ‘선 넘지 말자’고.
산업에서 가장 꿋꿋한 화두가 탄소중립(활성 온실기체 증가량을 0으로 맞춤)이라면, 미술씬의 영원한 화두 중 하나는 지속가능과 생태적 관점일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첫 대결은 애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태생적이고 운명적인 구도였다. 이후 처절한 자연 극복사로 조금씩 누적한 여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화하면 모순이 생기는 일종의 상위 개념이 된 것. 이를 다루는 작업, 그리고 그 연장선상의 전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자의 발목을 잡으며(생태주의자들은 그래야 그 전시란 것도 중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결처럼 주기적으로 부상한다. 마치 호경기 불경기를 되풀이하듯.
이미 익숙한 주제인 만큼 이젠 참신함보다는, 차라리 간명하게 정리되는 맛이 있다. 현실적인 생태주의적 관점은 절충, 양보, 타협으로 요약 가능하다. ‘서로 한 발씩 물러서자’, ‘큰일 안 나잖아? 조금 불편해도’ 그래서 가장 흔히 다루는 실현 모델은 공존 공유 공생이다.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 서로의 영역을 보장하면서…사실 지구가 니 건 아니니까‘ 의식을 변혁해 대단한 혁명을 일으키려는 의도도 기대도 없다. 시각과 화법이 특이하고 유난할 필요도 없다. 뾰족한 수보다는 익숙함이 더 효과적이란 사실은 곳곳에서 증명된다. 그래, 문명과 자연 사이좋게 서로 한 조각씩 번갈아 채우자. 목표는 동점, 바로 현상 유지이다.
2025.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4 대구예술발전소 《파편화된 알고리즘》 입주작가 정재엽 전시 서문
자연과 문명이 번갈아 채우는 ‘콤포지션’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버려진 문틀을 쪼개 켜고 다듬고 잇대어 빌딩 숲을 연상시키는 뼈대를 짠다. 나무 틀을 따라 잔가지를 꼼꼼히 둘러 만든 면은, 마치 금 간 유리거울처럼 허공을 덮는다. 그 사이로 엿보이는 환기구 문짝의 촘촘한 창살 너머로, 강렬한 조명 하나가 태양처럼 반짝인다. 온몸에 빛을 흠뻑 뒤집어 쓴 조각은, 사방을 두른 쉬폰 천막에 선명한 그림자를 마음놓고 기댄다.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조각과, 그보다도 훨씬 크게 드리운 천막 위의 그림자는 밝디밝은 빛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장엄과 섬뜩을 한꺼번에 풍긴다.
정재엽의 조각은 이미 그 재료부터 범상치 않다. 나무와 천, 공간과 빛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조각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층위가 있다. 멀리서 다가갈 때 흰 천에 비친 선명하고 거대한 그림자와, 그 나머지를 가득 채우는 밝은 빛은 마치 자체발광하는 거대한 조명 기구나 그림자 인형극 스크린을 연상시킨다. 그림자의 형상은 더욱 독특한데, 각지고 미끈하고 깔끔하고 기하학적인 인공적 조형과, 곡선, 불규칙, 유기체적인 생태적 조형이 절묘히 뒤얽힌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그림자와 공간까지 아우르는 조각. 달리 보아, 빛과 그림자야말로 최종 결과물이라면 재밌게도, ‘조각으로 하는 드로잉‘이라 부를만 하다. 장소에 따라 빛이 변하면 그림자도 공간을 채우고 비우며 서로 감응할 것이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는 공간을 조각으로 편입하는 외교관의 역할을 겸한다.
치미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천막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목조 구조물은 버려진 문짝과 문틀, 나무 팔레트를 한 꺼풀 켜내어 말끔하게 다듬어 짰다. 현대판 나무꾼이 되어 밤새 도로를 뛰어다니며 가지치기 후 가득 널브라진 나뭇가지를 몇 트럭씩 주워다 적당히 다듬고 엮어 틀 안을 채워 나간다. 목재는 버릴 게 하나 없고, 늘 다시 태어난다는 목수들의 말이 실감이 난다. 같은 목재이지만 하나는 인공의 조형, 하나는 자연을 대표하는 형상으로 재탄생하다니 미묘하다. 같은 조상에게서 솟은, 서로 다른 운명의 후손들이 대립하고 조화하는 형상이랄까.
그의 조형은 건물숲이 나무숲으로, 인공물의 영역이 자연의 영역으로 점차 트랜지션하는전개가 유독 돋보인다. 결과적으로 대립과 대조, 조화와 공존의 리듬을 일관적, 지속적,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일례로 동박 페인팅 작업을 잠깐 살피면, 버려진 틀에 유리를 씌우고, 동박을 얇게 자르고 오려, 무척 섬세한 조형을 표면에 앉힌다. 그런데 투명한 유리 표면과, 동박의 선명하고 강렬한 실루엣의 대비가, 이미 먼저 본 그 느낌, 빛과 그림자로 둘러싼 문틀 조각의 인상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형상 또한 그 궤를 같이하는데, 우선 나무와 숲과 들판의 실루엣이 우뚝 선다. 그리고 그 발밑으로 높다란 빌딩숲과 건설 장비 등 문명을 대표하는 육중한 기하학적 구조물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달리 보면, 드높은 기술문명이 궁극적으로 떠받쳐야 할 건 다름아닌 자연 그 자체임을 외치는 듯하다.
회화 작업 전반에서부터 선명한 문명과 자연의 대비, 기하학적 조형과 생태적 조형의 조합, 문을 넘어 경계와 층을 직접 뚫고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 조각 작업은 공통적으로 ‘선‘을 암시한다. 경계와 한계를 체험하는 행위로 인간의 분수와 자연이 견뎌 낼 한계를 가늠하게 한다. 결국 이 ‘선’이 무너지면 손해보는 건 인간. 결국 그의 작업은 부드럽고 점잖게 타이른다. ‘선 넘지 말자’고.
산업에서 가장 꿋꿋한 화두가 탄소중립(활성 온실기체 증가량을 0으로 맞춤)이라면, 미술씬의 영원한 화두 중 하나는 지속가능과 생태적 관점일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첫 대결은 애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태생적이고 운명적인 구도였다. 이후 처절한 자연 극복사로 조금씩 누적한 여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화하면 모순이 생기는 일종의 상위 개념이 된 것. 이를 다루는 작업, 그리고 그 연장선상의 전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자의 발목을 잡으며(생태주의자들은 그래야 그 전시란 것도 중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결처럼 주기적으로 부상한다. 마치 호경기 불경기를 되풀이하듯.
이미 익숙한 주제인 만큼 이젠 참신함보다는, 차라리 간명하게 정리되는 맛이 있다. 현실적인 생태주의적 관점은 절충, 양보, 타협으로 요약 가능하다. ‘서로 한 발씩 물러서자’, ‘큰일 안 나잖아? 조금 불편해도’ 그래서 가장 흔히 다루는 실현 모델은 공존 공유 공생이다.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 서로의 영역을 보장하면서…사실 지구가 니 건 아니니까‘ 의식을 변혁해 대단한 혁명을 일으키려는 의도도 기대도 없다. 시각과 화법이 특이하고 유난할 필요도 없다. 뾰족한 수보다는 익숙함이 더 효과적이란 사실은 곳곳에서 증명된다. 그래, 문명과 자연 사이좋게 서로 한 조각씩 번갈아 채우자. 목표는 동점, 바로 현상 유지이다.
2025.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