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대구예술발전소 《파편화된 알고리즘》 입주작가 손민효 전시 서문
매일 대출하는 작가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빵빠~앙!!”
현대인은 언제 가장 용감할까? 손꼽히는 겁쟁이도, 내로라하는 찌질이(?)도 방구석에선 여포임은 익히 알려진 과학적 사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여포 할애비도 우습다. 동네 편의점 알바 얼굴은 고사하고, 길고양이 눈길도 못 마주치는 소심꾼도 부릉부릉 도핑 한방이면 욕지거리 투팍, 육두문자 에미넴이 된다. 세모 무적버튼 도로 위에선 부처님도 투견이다. 고대 로마의 이름 모를 어느 검투사처럼 비장함이 맺힌 험상궂은 얼굴로, 칼 대신 핸들을 움키고, 클락션을 마구 두들기며 서로 삿대질한다. 오죽하면 소개팅 상대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얌체와 김여사, 무대뽀와 양아치로 가득 찬 도심 길바닥에 드라이브나 한번 나가라 할까. 비상등 세모 무적버튼
현대에도 콜로세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도로 위일 것이다. 손민효는 아스팔트 깔린 콜로세움 〈CARLOSSEUM〉(2024), 도로 위의 투기장으로 관객을 부른다. 아스팔트 위를 빙빙 돌며 원형으로 늘어선 자동차 문짝들. 차창 너머로 다른 차의 운전자와 흘기듯 마주 본다. 익숙한 그 느낌과 함께, 이종격투기 중계에서나 볼 법한 원형 경기장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짙은 그림자 너머로 상대의 ‘야리는’ 눈길을 그냥 넘길 수 없다. 스타워즈 광선검 뽑듯 상향등을 꺼내 선빵(?)으로 눈뽕(?)을 꽂는다. 다가오는 상대를 창문 내려 반기며, 한쪽 팔을 걸친 채 삐딱한 눈길로 묻는다 ‘어쩌라고?’
…‘실례해요, 지나가요~’ 그때, 심상찮음을 느낀 심판처럼, 둘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 무지성으로 앞바퀴를 들이민다. ‘운전은 초보, 성깔은 람보’ 꼴불견 스티커도 모자라, 비겁하게 ‘무적버튼’ 비상등 세모를 지그시 누른 채. “동작 그만! 삼십 분 동안 비상이야 이 양반아?” 이미 아수라장이 된 도로 곳곳에서 울리는 경적을 라운드 시작 종소리 삼아, 글러브 터치하듯 그 길로 사이드미러라도 서로 갖다 박을 기세. 이건 숫제 ‘국토교통부 주관 전 국민 UFC’ 같지 않은가!
“드드득!” 결국 일냈다. 문짝 옆구리를 서로 비벼 버린 것. 오늘 처음 본 사람끼리 남사스럽게 도로 위의 즉석 스킨십이라니. 아무리 설레어도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렇다. 둘만의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도로 위의 만남이라면? 더 설렌다. 문짝이 그대로 달라붙어 버린 이 작업의 제목이 그래서 만남을 뜻하는 〈Rendez-Vous〉(2024). 경기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알통 까고 트래시 토크를 싸지르며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선수들이 떠오른다. 우주선의 접촉도 랑데부라 부른다는데, 과연 우리는 성공적인 도킹으로 생활 결합, 사회 결속을 이룰 수 있을까?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을 기점으로 ‘레디 메이드(ready made)’는 미술씬의 중요한 화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패러디나 오마주, 헌정 등의 개념은 이전에도 있었다. ‘제조’의 연장선에서 이해한다면 일종의 ‘개조’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제 ‘참조’도 ‘창조’에 편입한다. 이른바 ‘적극적 참조’의 시작이다.
손민효는 기성품에 묻은 맥락을 빌리고 인용하고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다. 맥락은 쓰임일 수도 인상 혹은 사회적 의미일 수도 있다. 버드 스파이크를 엮어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통행 공간을 가로막으며 버젓이 전시한 대형 설치 작업 〈Humanbird〉(2024)는 이러한 그의 작업 리듬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다 못해 강제로 체험시킨다. 관객은 전시장 바깥 복도에 가로(!)로 세운 아름드리 흰색 기둥을 맞닥뜨린다. 뛰어넘기엔 너무 크고 높다. 지나가긴 해야 하니 엉거주춤 쭈그리거나, 반대로 상체를 뉘어 림보를 한다. 자연히 코앞으로 지나는 기둥을 자세히 살피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를 쫓을 때 쓰는 플라스틱제 스파이크로 짠 구조물이다. 사람이 편해지려 새를 위협하는 구조물로, 사람을 통제한다. 뾰족한 못 끝은 바깥이 아니라 반대로 기둥 중심으로 나 있다. 그야말로 용도와 용례 모두를 뒤집고 비튼, 기이한 조각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비둘기의 복수?
그의 작업은 내용과 표현 양면에서, 누구나 떠올리고 겪고 공감하고 수긍하는 것을 꼬집는다. 전위적인 포효나 괴이하고 독특한 제안보다는, 뭇 삶에서 수없이 스치는 평이한 것을 포착하고, 그와 엮인 가치의 재조명에 그 무게와 묘미를 두는 작가인 것. 아이템 자체는 보편적이되, 이를 꼬집는 기발한 상황 설정과 익살스러운 판 깔기, 짓궂은 화법이 곧 그의 작가색이다. 복잡한 현상이나 관계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재구성하면 치부와 모순이 선명히 드러난다. 자연 그 결과물은 우습고 신랄하다. 물론 현실의 수렴이 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하며 초점이 들어맞을 때까지 이야기를 모으고 사족을 도려낸다. 작가란 완성한 그 눈을 빌려주는 사람이다.
손민효는 맥락을 빌리고 그 대가로, 보는 방법을 빌려준다. 그가 빌려주는 눈은 혁신의 색깔을 지녔지만, 난생처음 보는 기상천외함 보다는 평범 속의 재치에 더 가깝다. 혁신이란 사실, 다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잘 쓴 글은 놀라지만, 그보다 더 잘 쓴 글은 그저 수긍한다. 좋은 전시는 감탄하고, 그보다 더 좋은 전시는 동조한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내가 먼저 써먹을 걸 싶어서. 바위를 깨는 달걀은 놀랍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은 ‘어, 그러네?’ 하는 것과 같다.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순전히 온전히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만일 있다면 누구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기발함이 아니라 진입 장벽인 셈. 예술가가 전위적 혁신가 혁명가일 필요는 없다. 생활인이자 사회인인데, 거기에 더해 살짝 꼬집는 유연함이 있을 뿐. 이야기를 듣던 작가가 문득 무릎을 친다. “어? 그러네요, 선생님!?”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4 대구예술발전소 《파편화된 알고리즘》 입주작가 손민효 전시 서문
매일 대출하는 작가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빵빠~앙!!”
현대인은 언제 가장 용감할까? 손꼽히는 겁쟁이도, 내로라하는 찌질이(?)도 방구석에선 여포임은 익히 알려진 과학적 사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여포 할애비도 우습다. 동네 편의점 알바 얼굴은 고사하고, 길고양이 눈길도 못 마주치는 소심꾼도 부릉부릉 도핑 한방이면 욕지거리 투팍, 육두문자 에미넴이 된다. 세모 무적버튼 도로 위에선 부처님도 투견이다. 고대 로마의 이름 모를 어느 검투사처럼 비장함이 맺힌 험상궂은 얼굴로, 칼 대신 핸들을 움키고, 클락션을 마구 두들기며 서로 삿대질한다. 오죽하면 소개팅 상대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얌체와 김여사, 무대뽀와 양아치로 가득 찬 도심 길바닥에 드라이브나 한번 나가라 할까. 비상등 세모 무적버튼
현대에도 콜로세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도로 위일 것이다. 손민효는 아스팔트 깔린 콜로세움 〈CARLOSSEUM〉(2024), 도로 위의 투기장으로 관객을 부른다. 아스팔트 위를 빙빙 돌며 원형으로 늘어선 자동차 문짝들. 차창 너머로 다른 차의 운전자와 흘기듯 마주 본다. 익숙한 그 느낌과 함께, 이종격투기 중계에서나 볼 법한 원형 경기장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짙은 그림자 너머로 상대의 ‘야리는’ 눈길을 그냥 넘길 수 없다. 스타워즈 광선검 뽑듯 상향등을 꺼내 선빵(?)으로 눈뽕(?)을 꽂는다. 다가오는 상대를 창문 내려 반기며, 한쪽 팔을 걸친 채 삐딱한 눈길로 묻는다 ‘어쩌라고?’
…‘실례해요, 지나가요~’ 그때, 심상찮음을 느낀 심판처럼, 둘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 무지성으로 앞바퀴를 들이민다. ‘운전은 초보, 성깔은 람보’ 꼴불견 스티커도 모자라, 비겁하게 ‘무적버튼’ 비상등 세모를 지그시 누른 채. “동작 그만! 삼십 분 동안 비상이야 이 양반아?” 이미 아수라장이 된 도로 곳곳에서 울리는 경적을 라운드 시작 종소리 삼아, 글러브 터치하듯 그 길로 사이드미러라도 서로 갖다 박을 기세. 이건 숫제 ‘국토교통부 주관 전 국민 UFC’ 같지 않은가!
“드드득!” 결국 일냈다. 문짝 옆구리를 서로 비벼 버린 것. 오늘 처음 본 사람끼리 남사스럽게 도로 위의 즉석 스킨십이라니. 아무리 설레어도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렇다. 둘만의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도로 위의 만남이라면? 더 설렌다. 문짝이 그대로 달라붙어 버린 이 작업의 제목이 그래서 만남을 뜻하는 〈Rendez-Vous〉(2024). 경기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알통 까고 트래시 토크를 싸지르며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선수들이 떠오른다. 우주선의 접촉도 랑데부라 부른다는데, 과연 우리는 성공적인 도킹으로 생활 결합, 사회 결속을 이룰 수 있을까?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을 기점으로 ‘레디 메이드(ready made)’는 미술씬의 중요한 화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패러디나 오마주, 헌정 등의 개념은 이전에도 있었다. ‘제조’의 연장선에서 이해한다면 일종의 ‘개조’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제 ‘참조’도 ‘창조’에 편입한다. 이른바 ‘적극적 참조’의 시작이다.
손민효는 기성품에 묻은 맥락을 빌리고 인용하고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다. 맥락은 쓰임일 수도 인상 혹은 사회적 의미일 수도 있다. 버드 스파이크를 엮어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통행 공간을 가로막으며 버젓이 전시한 대형 설치 작업 〈Humanbird〉(2024)는 이러한 그의 작업 리듬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다 못해 강제로 체험시킨다. 관객은 전시장 바깥 복도에 가로(!)로 세운 아름드리 흰색 기둥을 맞닥뜨린다. 뛰어넘기엔 너무 크고 높다. 지나가긴 해야 하니 엉거주춤 쭈그리거나, 반대로 상체를 뉘어 림보를 한다. 자연히 코앞으로 지나는 기둥을 자세히 살피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를 쫓을 때 쓰는 플라스틱제 스파이크로 짠 구조물이다. 사람이 편해지려 새를 위협하는 구조물로, 사람을 통제한다. 뾰족한 못 끝은 바깥이 아니라 반대로 기둥 중심으로 나 있다. 그야말로 용도와 용례 모두를 뒤집고 비튼, 기이한 조각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비둘기의 복수?
그의 작업은 내용과 표현 양면에서, 누구나 떠올리고 겪고 공감하고 수긍하는 것을 꼬집는다. 전위적인 포효나 괴이하고 독특한 제안보다는, 뭇 삶에서 수없이 스치는 평이한 것을 포착하고, 그와 엮인 가치의 재조명에 그 무게와 묘미를 두는 작가인 것. 아이템 자체는 보편적이되, 이를 꼬집는 기발한 상황 설정과 익살스러운 판 깔기, 짓궂은 화법이 곧 그의 작가색이다. 복잡한 현상이나 관계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재구성하면 치부와 모순이 선명히 드러난다. 자연 그 결과물은 우습고 신랄하다. 물론 현실의 수렴이 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하며 초점이 들어맞을 때까지 이야기를 모으고 사족을 도려낸다. 작가란 완성한 그 눈을 빌려주는 사람이다.
손민효는 맥락을 빌리고 그 대가로, 보는 방법을 빌려준다. 그가 빌려주는 눈은 혁신의 색깔을 지녔지만, 난생처음 보는 기상천외함 보다는 평범 속의 재치에 더 가깝다. 혁신이란 사실, 다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잘 쓴 글은 놀라지만, 그보다 더 잘 쓴 글은 그저 수긍한다. 좋은 전시는 감탄하고, 그보다 더 좋은 전시는 동조한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내가 먼저 써먹을 걸 싶어서. 바위를 깨는 달걀은 놀랍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은 ‘어, 그러네?’ 하는 것과 같다.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순전히 온전히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만일 있다면 누구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기발함이 아니라 진입 장벽인 셈. 예술가가 전위적 혁신가 혁명가일 필요는 없다. 생활인이자 사회인인데, 거기에 더해 살짝 꼬집는 유연함이 있을 뿐. 이야기를 듣던 작가가 문득 무릎을 친다. “어? 그러네요, 선생님!?”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