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불이
박준수
1922년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근검절약 및 토산품 애용 포스터
출처 : 동아일보
한국 미술 시장의 불황이 찾아오기 전부터, 지인들로부터 해외 작가의 작품을 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은 가격이 잘 안 오르고, 오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해외 작가의 작품은 가격이 잘 오를 뿐 아니라, 유명 해외 갤러리에 전속 작가가 되기라도 하면 10배, 20배씩 상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국인은 사대주의가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마치 나는 아닌 사람인 척했지만, 사실 나의 성장기에도 사대주의의 흔적이 깊이 스며있었다.
미국에 계신 외삼촌은 한국에 올때마다 폴로 셔츠, 리바이스 청바지, G.I. JOE (당시에는 G.I.유격대라고 불렀다) 같은 미제 장난감과 디즈니 만화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사다 주셨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많았고, 친구들이 집에 와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집 같다”고 말하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MARIAH CAREY와 BOYZ II MEN이 부른 ONE SWEET DAY 앨범
그때나 지금이나 즐겨찾기 목록에 항상 들어가 있다.
중학생이 되어 H.O.T와 젝스키스, 핑클과 S.E.S를 두고 친구들이 편을 갈라 다툴 때, 나는《MAX》나 《NOW》같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즐겨 들으며 머라이어 캐리나 BOYZ II MEN을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한국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척한 것이다. 나이 터울이 나는 사촌 형들 덕분에 자드나 X-JAPAN 같은 J-POP과 J-ROCK을 일찍 접했고,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모노노케 히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 지내기도 하였다. 노래방에서는 국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주제가를 부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L’Arc en Ciel의 “Driver’s High!”를 부르며, 우쭐해 하던 적도 있다. 이렇게 미국과 일본 등 해외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는 경험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아트페어 일을 할 때 나는 슬램덩크 안선생님의 아픈 손가락 재중군처럼 생각했다. 현대미술의 심장인 뉴욕의 공기를 맡는 것만으로 세계적인 아트페어를 만들 수 있을꺼야!
이런 태도는 내가 한국 미술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미술 시장에 국가대표격인 키아프를 운영하면서도, 아트바젤이나 프리즈 같은 해외 아트페어를 동경했고, 그들을 흉내 내려 애썼다. 직원들이 낸 기획안을 반대하는 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아트바젤이나 프리즈를 들먹이기도 했다. “아트바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하나둘씩 아트바젤과 프리즈를 흉내낸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발맞춰 따라 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접근은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갤러리를 선정할 때도 이어졌다. 아트페어의 퀄리티는 참가하는 갤러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해외 갤러리를 많이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비슷한 수준의 갤러리라면 국내보다 해외 갤러리를 뽑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키아프를 운영하는 한국화랑협회는 비슷한 수준이라면 회원 화랑을 우선적으로 선정하는 것 같다. 이는 프리즈 서울 출범 이후 해외 갤러리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국내 중소 화랑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방편일 수 있기에 무조건적으로 내식구 감싸기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으로 심사를 하고 있는건가.
프리즈 서울 출범 이후, 키아프에 참여하던 많은 해외갤러리가 프리즈로 옮겨가며 키아프의 해외 갤러리 참여율이 감소했다. 이로 인해 키아프의 퀄리티가 떨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심지어 빠져 나간 해외 갤러리의 자리를 회원 화랑으로 채우고 있는 키아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심지어 4회차를 준비하는 프리즈 서울조차 올해 해외갤러리의 참여가 저조하여, 그 자리를 국내 갤러리로 채우고 있으니, 프리즈 서울 조차 어려울 것이라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해외 갤러리가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전적으로 좌우하지는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외갤러리의 참여가 많다는 것이 정말로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높이는 것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지나치게 너무 사대주의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키아프를 운영하며 열심히 해외 주요아트페어를 찾아다니고, 해외 갤러리를 방문하며 참가 신청을 권유할 당시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국내에는 부족한 다양한 이즘(이론적 기반)과 탄탄한 미술사적 토대를 갖춘 작가들, 그리고 사회적 주요한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이 국내에 와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면 자연스레 한국 미술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접근이 나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프리즈 서울 같은 대규모 해외 아트페어와 많은 해외 갤러리의 유입으로 한국 미술 시장은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국내 갤러리와 작가들이 해외로 적극 진출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한국 미술 시장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무려 셀 수 없을만큼…
하지만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내부적인 체질 개선을 필요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인은 사대주의가 있다는 말로 다시 돌아가보자. 하버드대 출신의 한국학 박사 마크 피터슨에 따르면, 한국에 사대주의가 팽배해진 것은 17세기 말이라고 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병자호란을 겪으며 전 국토가 많이 훼손되었고, 17세기 말 전란 후 두 세대가 지나며 인구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아들, 딸에게 분할 상속하던 토지가 부족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를 유교 사상에서 찾았으며, 장자 상속이라고 하는 부계 위주의 유교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상속을 위해 더 이상 재산을 분할할 필요없고, 딸들에게는 재산을 주지 않는다. 이런 유교는 그 이전까지 한국에 맞게 변형되어 정착되었던 한국식 유교와 다르게 전통적인 중국식 유교였기 때문에 이런 개혁을 사대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이후의 유교는 융통성 없이 진행되어, 모든 자녀를 평등하게 순차적으로 다루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박사는 17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온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했던 한국식 유교를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미술 시장 역시 단순히 해외 갤러리와 작가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벗어나 그들이 다루는 다양한 이즘(이론적 기반)과 탄탄한 미술사적 토대를 갖춘 작가들, 그리고 사회적 주요한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체화하되 그에 대한 해답을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세계적으로 성공한 많은 사례들을 보았다. 한국이 싫어서 떠났던 미국에서 나는 많은 세계인이 BTS와 기생충,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많은 한국의 작가들도 그와 같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한국적 특수성은, 단지 독창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국적 특수성을 통해 환경, 사회, 문화의 보편적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 한국 미술 시장은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하며, 한국 미술은 세계를 향한 독립적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에 있던 내가 우물 밖에 나가 보니,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 꼴도 보기 싫었던 한국 미술 시장 안에도 한국 미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는 갤러리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작은 목소리지만, 내야할 소리를 내며 노력하고 있는 좋은 작가가 많았다.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신토불이
박준수
1922년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근검절약 및 토산품 애용 포스터
출처 : 동아일보
한국 미술 시장의 불황이 찾아오기 전부터, 지인들로부터 해외 작가의 작품을 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은 가격이 잘 안 오르고, 오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해외 작가의 작품은 가격이 잘 오를 뿐 아니라, 유명 해외 갤러리에 전속 작가가 되기라도 하면 10배, 20배씩 상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국인은 사대주의가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마치 나는 아닌 사람인 척했지만, 사실 나의 성장기에도 사대주의의 흔적이 깊이 스며있었다.
미국에 계신 외삼촌은 한국에 올때마다 폴로 셔츠, 리바이스 청바지, G.I. JOE (당시에는 G.I.유격대라고 불렀다) 같은 미제 장난감과 디즈니 만화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사다 주셨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많았고, 친구들이 집에 와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집 같다”고 말하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MARIAH CAREY와 BOYZ II MEN이 부른 ONE SWEET DAY 앨범
그때나 지금이나 즐겨찾기 목록에 항상 들어가 있다.
중학생이 되어 H.O.T와 젝스키스, 핑클과 S.E.S를 두고 친구들이 편을 갈라 다툴 때, 나는《MAX》나 《NOW》같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즐겨 들으며 머라이어 캐리나 BOYZ II MEN을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한국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척한 것이다. 나이 터울이 나는 사촌 형들 덕분에 자드나 X-JAPAN 같은 J-POP과 J-ROCK을 일찍 접했고,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모노노케 히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 지내기도 하였다. 노래방에서는 국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주제가를 부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L’Arc en Ciel의 “Driver’s High!”를 부르며, 우쭐해 하던 적도 있다. 이렇게 미국과 일본 등 해외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는 경험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아트페어 일을 할 때 나는 슬램덩크 안선생님의 아픈 손가락 재중군처럼 생각했다. 현대미술의 심장인 뉴욕의 공기를 맡는 것만으로 세계적인 아트페어를 만들 수 있을꺼야!
이런 태도는 내가 한국 미술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미술 시장에 국가대표격인 키아프를 운영하면서도, 아트바젤이나 프리즈 같은 해외 아트페어를 동경했고, 그들을 흉내 내려 애썼다. 직원들이 낸 기획안을 반대하는 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아트바젤이나 프리즈를 들먹이기도 했다. “아트바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하나둘씩 아트바젤과 프리즈를 흉내낸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발맞춰 따라 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접근은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갤러리를 선정할 때도 이어졌다. 아트페어의 퀄리티는 참가하는 갤러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해외 갤러리를 많이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비슷한 수준의 갤러리라면 국내보다 해외 갤러리를 뽑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키아프를 운영하는 한국화랑협회는 비슷한 수준이라면 회원 화랑을 우선적으로 선정하는 것 같다. 이는 프리즈 서울 출범 이후 해외 갤러리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국내 중소 화랑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방편일 수 있기에 무조건적으로 내식구 감싸기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으로 심사를 하고 있는건가.
프리즈 서울 출범 이후, 키아프에 참여하던 많은 해외갤러리가 프리즈로 옮겨가며 키아프의 해외 갤러리 참여율이 감소했다. 이로 인해 키아프의 퀄리티가 떨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심지어 빠져 나간 해외 갤러리의 자리를 회원 화랑으로 채우고 있는 키아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심지어 4회차를 준비하는 프리즈 서울조차 올해 해외갤러리의 참여가 저조하여, 그 자리를 국내 갤러리로 채우고 있으니, 프리즈 서울 조차 어려울 것이라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해외 갤러리가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전적으로 좌우하지는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외갤러리의 참여가 많다는 것이 정말로 아트페어의 퀄리티를 높이는 것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지나치게 너무 사대주의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키아프를 운영하며 열심히 해외 주요아트페어를 찾아다니고, 해외 갤러리를 방문하며 참가 신청을 권유할 당시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국내에는 부족한 다양한 이즘(이론적 기반)과 탄탄한 미술사적 토대를 갖춘 작가들, 그리고 사회적 주요한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이 국내에 와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면 자연스레 한국 미술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접근이 나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프리즈 서울 같은 대규모 해외 아트페어와 많은 해외 갤러리의 유입으로 한국 미술 시장은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국내 갤러리와 작가들이 해외로 적극 진출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한국 미술 시장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무려 셀 수 없을만큼…
하지만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내부적인 체질 개선을 필요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인은 사대주의가 있다는 말로 다시 돌아가보자. 하버드대 출신의 한국학 박사 마크 피터슨에 따르면, 한국에 사대주의가 팽배해진 것은 17세기 말이라고 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병자호란을 겪으며 전 국토가 많이 훼손되었고, 17세기 말 전란 후 두 세대가 지나며 인구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아들, 딸에게 분할 상속하던 토지가 부족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를 유교 사상에서 찾았으며, 장자 상속이라고 하는 부계 위주의 유교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상속을 위해 더 이상 재산을 분할할 필요없고, 딸들에게는 재산을 주지 않는다. 이런 유교는 그 이전까지 한국에 맞게 변형되어 정착되었던 한국식 유교와 다르게 전통적인 중국식 유교였기 때문에 이런 개혁을 사대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이후의 유교는 융통성 없이 진행되어, 모든 자녀를 평등하게 순차적으로 다루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박사는 17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온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했던 한국식 유교를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미술 시장 역시 단순히 해외 갤러리와 작가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벗어나 그들이 다루는 다양한 이즘(이론적 기반)과 탄탄한 미술사적 토대를 갖춘 작가들, 그리고 사회적 주요한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체화하되 그에 대한 해답을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세계적으로 성공한 많은 사례들을 보았다. 한국이 싫어서 떠났던 미국에서 나는 많은 세계인이 BTS와 기생충,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많은 한국의 작가들도 그와 같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한국적 특수성은, 단지 독창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국적 특수성을 통해 환경, 사회, 문화의 보편적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 한국 미술 시장은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하며, 한국 미술은 세계를 향한 독립적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에 있던 내가 우물 밖에 나가 보니,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 꼴도 보기 싫었던 한국 미술 시장 안에도 한국 미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는 갤러리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작은 목소리지만, 내야할 소리를 내며 노력하고 있는 좋은 작가가 많았다.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